어느 시인의 죽음 - 자전적 에세이, 단편소설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지음, 안정효 옮김 / 까치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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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린의 산문집을 읽은 적이 있다. 장석주의 추천사를 읽은 것이 계기였다. 수시 접수가 모두 끝나 수능을 앞둔 시기에 산문집의 첫 장을 펼쳤다. 어려운 어휘와 낯선 문장, 집결되지 않는 내용에 나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던 이국땅의 묘사를 눈앞에 그려내기 힘들었고 전혜린이라는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마치 그림을 보듯 글자를 읽어 내려가기 일쑤였고 책 자체도 지루하다고 판단해서 독서를 중지했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는데, 책의 글귀들은 물론 인터넷에서 일별한 전혜린의 흑백 사진까지 자꾸 떠오른다는 것이다. 이 기묘한 현상에 이끌려 수능을 치르고 나서 산문집을 다시 읽었다. 그렇게 하여 내가 내린 전혜린에 관한 결론은 그녀가 천재가 맞다는 것이다. 천재란 누구를 칭하는 단어인가. 아무도 풀지 못한 수학 문제를 몇 분 만에 풀어내는 사람 혹은 아인슈타인처럼 세계의 사고를 바꾸어 놓을 과학적 발견을 성취한 사람이 천재인가. 아니다. 그들은 그저 수재일 뿐이다. 천재는, 좁게 말해, 문학에서의 천재는 깨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에, 문학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깨어 있는 자가 천재인 것이다. 전혜린은 세 가지 요건 중 특히 마지막에 충실했던 자였다. 갇혀 있지 않고 외국으로, 이국으로 자꾸만 떠나는 그녀는 떠나는 이유를 떠나기 위해서라고 밝힌다. 독일 청년들의 패기, 오만한 젊음, 순수한 정신을 부러워하는 마음과 알프스에 올라 둥근 달을 보며 경탄을 표하는 감성. 그녀의 이상적인 뜨거움과 열정은 가히 아름답다. 사실 그녀의 글이 다듬어져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녀의 글이 가치 있는 이유는 이상과 감각에 솔직하기 때문이다. 가감 없이 감정을 글로 풀어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고 있기에 그녀가 더욱 멋있어 보인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산문집을 읽으며 전혜린에게서 느꼈던 것을 다시 겪게 될 줄은 몰랐다. 아니 나는 이 산문집을 읽으려는 계획조차 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내게 완전히 생소한 작품은 아니었는데, 한강 덕분이다. 한강은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기획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서재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끝에 그녀 인생의 책 몇 권을 소개했다. 도스토예프스키나 임철우 등의 저명한 작가를 꼽던 그녀는 외국인 남자의 얼굴이 크게 인쇄된 책 한 권을 들어 보이며 나직하게 이야기했다. 매력이 있는 작품이구나, 하고 넘겼던 기억뿐이다. 한강이 인상적이었던 대목으로 꼽은 장면만은 오래 남아 있었는데 이 때문에 이 책을 과제 도서로 만났을 때 꽤 기뻤다. 그리고 그 때문에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크게 실망하기도 했다. 파스테르나크의 글은 몹시 어려웠다. 번역된 지 오래 되어 글이 딱딱하기도 했고 파스테르나크가 읊조리는 이야기들이 생소한 탓도 컸다. 문장 자체는 상당히 유려하면서 생생했으나 묘사 위주의 스타일에 애를 먹었다. 나는 감정선을 따라 글을 읽어내는 데 익숙해 있기에 묘사적인 글에 취약하다. 즉 파스테르나크의 산문집은 여러모로 내게 불편했고, 이는 전혜린을 처음 접했을 때와 비슷했다. 그래도 과제를 해야 했기에, 라는 형식적인 이유로 억지로 붙들고 읽었더니 난해함이 차츰 걷히며 파스테르나크의 감각이 보이기 시작했다. 검게 죽은 피부 조직에 빨간 점의 핏기가 돌 듯 글이 내게서 살아나고 있음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느 시인의 죽음을 요약하면서 한강은 만남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만큼 이 글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파스테르나크가 만난 사람들이다. 작곡가 스크리아빈,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첫사랑의 여자, 친구 G, 그리고 마야코프스키까지. 파스테르나크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반추하며 순행적으로 자기가 겪어온 기억의 길을 밟아나간다. 한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나는 만남보다는 이별에 더 눈길을 주었다. 파스테르나크가 이별을 대하는 방식은, 그러니까, 참 아름답다. 파스테르나크가 전혜린과 비슷한 범주의 천재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가 여기 있는 것 같다. 그는 음악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었으나 스크리아빈을 통해 자신이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밤, 파스테르나크는 모스크바의 밤거리를 한참동안 걷고 또 걸으면서 음악과 작별을 고한다. 한강의 표현대로 깨끗한 마음의 움직임, 어떻게 보면 숭고함까지도 드러나는 장면이다. 스크리아빈의 조언을 듣고 그는 독일에 가 철학 공부를 시작한다. 거기서 첫사랑의 여자와 재회해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무턱대고 청혼의 말을 던지지만 작별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헤어지게 된다. 여자를 보내고 돌아오는 기차에서 그는 생각한다. 철학 또한 내 길이 아니구나. 내가 철학이라는 명목으로 하고 있는 것은 문학이구나. 그렇게 그는 첫사랑의 여자와도, 철학과도, 독일과도 이별했다. 독일을 떠나며 그가 한 말이 내 마음을 크게 울렸다. 철학이여 안녕, 젊음이여, 안녕. 독일이여, 안녕. 이처럼 파스테르나크도 이별에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다. 갇혀 있지 않고 자신을 자꾸 돌아보며 더 나은 길을 추구하는 모습. 그 과정에서 비치는 순수하고 깨끗한 감각들.


파스테르나크에게 가장 강렬했던 사람은 미래파 시인이었던 마야코프스키였다. 파스테르나크는 마야코프스키의 단어 하나하나에 감탄했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열광했다. 삶을 바치고 싶었노라 기술했을 정도로 마야코프스키를 숭배하다시피 대한 것을 보면 애정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천재는 공존할 수 없다는 법칙에 의해 두 사람은 조금씩 어긋난다. 파스테르나크가 마야코프스키에게서 이해하기 힘든 점을 몇 가지 발견하면서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두 개의 개성이 치열하게 맞붙는 동안에도 마야코프스키의 시는 그를 감격하게 했고 그런 의미에서 파스테르나크는 결코 그에게서 분리될 수 없었다. 파스테르나크가 마야코프스키를 탐닉했던 또 다른 이유는 정치성이었다. 마야코프스키는 혁명 시인으로 평가될 만큼 사회 변혁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고 파스테르나크는 그것을 두려워했다. 이는 파스테르나크가 마야코프스키를 우러러보는 이유가 되기도 했으며 그 반대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들의 관계는 마야코프스키의 권총 자살로 끝난다.


파스테르나크에게 이별은 슬픔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절망이었다. 파스테르나크는 절망에 잠식하지 않고 그것을 글로 승화했다. 시적이면서도 유려한 글은 파스테르나크의 마음이 이리저리 흐르는 듯 느껴진다. 파스테르나크에게 이러한 수식어를 붙여주고 싶다. 절망을 노래한 작가. 거창한가? 아니, 적당하다.


마지막으로, 파스테르나크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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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E-9 2015-08-28 0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왕! 소이진님이다!! 어찌나 반가운지 선댓글 후감상 하게 되네요^^ 잘 지내죠?
파스테르나크에게서 왠지 오도가도 못하는 우울한 지식인의 초상이 엿보이는 것 같네요.
(첫줄과 뒷줄의 시차는 리뷰를 읽은 시간만큼 있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아이리시스 2015-10-29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 뒤늦게 와서..알겠..저도 이 책 읽어보겠습니다! (손 번쩍!)
아.....................학교는 어때요, 잘지내는 거죠?^^

사랑이 2016-08-27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본에 이어 최근에 러시아본 번역《안전 통행증. 사람들과 상황》이 나왔다. 모르고들있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