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프라이드(Pride, 2014)'_매튜 워처스 作
우리에게 80년대는 아프고도 벅찬 승리와 역동으로 기억된다. 청년들의 죽음이 기폭제가 되어 오래 곪은 화농이 터지듯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졌다. 그들은 인간으로서 권리를 지키기 위해, 국민으로서 민주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고 피 흘렸다. 정부의 유혈 진압에 맞서 그들은 오히려 뭉치는 것을 택했다. 견고히 몸을 맞대어 쉽게 넘어지지 않게 서로를 잡아매고 붙들었다. 다른 계층의 사람들의 이해(利害)가 하나로 모여 형성되는 것, 스스로 손목에 묶인 결박을 풀기 위해 태동하는 것, 그래서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이것을 우리는 ‘연대’라고 정의한다.
사회학자 뒤르켐은 연대를 이렇게 설명한다.
"어떤 역사적 시기에 상당히 커다란 집단 충격 하에서, 사회적 상호작용들은 더욱 빈번해지고 활발해진다. 개인들은 더욱 서로를 찾으며 함께 모인다. 그 결과, 혁명적 혹은 창조적 시기의 특징인 일반적인 열광이 초래된다.1)"
연대는 곧 열광이다. 시대적 상처를 극복하고 위로받고자 사람이 사람을 갈구하게 되는, 인간적이고도 어딘가 슬픈 현상인 것이다.
우리가 외침으로 거리를 장악하던 무렵, 영국에서는 대규모 파업 사태가 일어났다. 복지 정책을 축소하고 석탄 산업을 홀대한 대처 정부에 반(反)하여 전국 광산 노조에서 일제히 파업을 실시했다. 사양 산업으로 전락하긴 했으나 여전히 석탄의 활용이 중요한 시대였음에도 정부는 경찰력을 도입해 탄광 산업 자체를 포기할 각오로2) 강경하게 대응했다. 파업에 가담한 노동자는 물론 그 가족들까지 국가적 지원을 받지 못했고, 싸움이 길어지자 곤궁은 심해졌다. 영화 < 빌리 엘리어트 > 역시 광산 노동자 파업을 다루고 있는데, 죽은 아내가 아끼던 피아노를 부수어 땔감으로 사용하는 장면에서 그 궁핍의 정도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끈질기고 집요하게 권력에 맞섰다. 영화는 이들의 실제 영상 클립을 나열하며 시작한다. 투쟁의 선언은 확고하고 의연하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자존심과 자긍심뿐이고, 그것을 간직한 채 투쟁해 나갈 것입니다.” 물질적 이점을 모두 잃어버리고도 자존과 자긍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고 말한다. 이어지는 대처의 말. 옅은 미소를 머금은 그녀의 얼굴은 냉담하게 그들을 짓밟는다. TV를 보던 마크는 그 길로 바가지를 챙겨 거리로 뛰쳐나간다.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일인 듯 경쾌하고도 강건하게.
런던에서는 그 해의 프라이드 행진(Pride Parade)이 열리고 있었다. 행진이 끝난 후, 마크는 무리를 모아 ‘LGSM’ 결성을 주도한다. Lesbians and Gays Support the Miners, 광부를 지지하는 레즈비언과 게이들. 마크는 마뜩잖아 하는 무리에게 ‘연대’를 설파한다. 끊임없는 투쟁으로 겪을 고통을 알기에, 자신들을 괴롭히던 권력과 무력이 그들에게로 옮겨간 것만 같은 죄책감에, 마크는 더욱 뜻을 굽힐 수 없었다.
얼결에 무리에 끼게 된 스무 살의 브롬리 청년 조까지 합류해 열 명 남짓한 인원으로 초기 LGSM이 성립된다. 그들은 바가지를 챙겨 모금 운동을 벌인다. 그들의 강령은 단순하다. 혼자 모금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누군가 거리에 나가면 다른 이도 뒤따라 나갈 것. 그것은 폭력적인 사회에서 퀴어(Queer)로 살아남는 법이기도 하겠지만 곧 연대의 실현이었다. 함께 하는 것의 잠재력을 그들은 믿고 따랐다.
그러나 그들은 게이였고, 레즈비언이었으며, 퀴어였다.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이단적 존재였으며 차별과 억압은 당연시되었다. 그것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존재 자체에 대한 거부였고 배척이었다. 당시 대처 정부는 동성애자 차별 정책에도 힘을 쏟았다. 에이즈의 위험성을 역설하며 동성애를 질병 창궐의 원인으로 규정하고 공론화를 금지하는 ‘섹션 28(Section 28)’을 입법하여 동성애를 규제했다. 국가 차원의 혐오 인식은 널리 확산되어 동성애자의 인권을 완전히 실추시키기에 이른다.
어떠한 광부 노조도 LGSM의 도움을 거부하고, 그들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웨일즈의 한 탄광촌에 전화를 건다. 오래 전화벨이 울리고, 전화를 받은 노파는 LGSM이 무슨 단체인지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기에 그들의 원조를 승낙한다. 그들은 서로 어깨를 부둥켜안고 연대를 외친다. 연대여, 영원하라! 연대여, 영원하라! 그렇게 시골의 광부들과 LGSM의 당찬 게이들 간의 갈등이 시작된다. 결코 좁혀지지 않을 것만 같은, 첨예하고도 냉랭한.
LGSM이 레즈비언과 게이가 조직한 단체란 것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초대하고도 반기지 못한다. 마을 강당 무대에 마크가 서서 연설을 하자 갖가지 혐오와 증오, 께름칙한 감정을 담은 눈길이 쏟아진다. 너무도 차갑고, 극도로 두려워하는 그 시선. 저주에 가까운 반응을 겪고 그들은 흔들리지만 마크만은 굳건하다. "숨지도, 도망가지도, 사과하지도 않"을 것이라며 차별과 편견의 벽에 맞선다.
꽤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사람들은 LGSM을, 레즈비언과 게이들을 점차 수용한다. 그들이 가진 연대 의식을, 같은 약자로서 뭉쳐야 한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는다. 광산촌의 이장 격인 다이는 마크에게 말한다.
"당신이 날 지지하면 나도 당신을 지지하고, 당신이 누구이든, 어디서 왔든 간에. 어깨를 맞대고, 손을 맞잡고."
마음을 열고 손을 맞잡으면서 ‘연대’는 피어난다. 이것의 잠재력은 마을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화합을 이끈다.
결국 연대란 소통이자 개방의 창구이다.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만으로 교류는 완성된다.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광산촌에 LGSM이 전파한 것은 함께 어울리는 것, 하나로 뭉치는 것, 그러니까 연대의 힘이었다. 조나단의 춤과 제프의 아이들을 향한 선물은 ‘빵과 장미’의 합창으로, 환한 웃음으로 되돌아왔다. 진심은 통한다는 것은, 어쩌면 일방적인 것일 수도 있다. 영화는 그런 단순한 법칙보다 개인적 상호 작용의 힘을, 집단적 열광의 빛을 노래한다.
너무 거대해서 도무지 이길 것 같지 않은 상대와 싸우는 것은 존재의 부정(否定)과 소멸의 위협을 감내하는 일이다. 같은 적을 둔 광부와 성소수자들은 사회적 약자로 한 뜻을 모은다. 'Victory to the miners'의 구호가 'Victory to the minors'로 바뀌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그들의 연대는 확립되고 발산된다. 소위 세상을 변화시킬 만한 힘을 갖추게 된다. 서로를 인정하고 갈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렇듯 큰 힘을 발현할 수 있다.
누군가는 사회 운동이 축제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분석한다. 탄광의 유무에 의식주 문제가 달린 광부들에게 파업은 생명 존속을 건 중대한 투쟁이었다. 성소수자들에게 퀴어 퍼레이드는 그들의 존엄을 어떻게든 붙들고자 하는 최후의 인권적 사투였다. 그러나 연대가 존재하는 한, 이들의 싸움은 혈투보다는 축제에 가깝다. '모두 하나가 되어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고, 환호하3)'는 순간은 그들을 투견이 아닌 인간으로 몸을 지탱하게 한다. 비록 승리하지 못했더라도 그 열광의 잔상이 남아 스스로 구원하여 줄 것이다.
연대를 기도한다. 서로의 손을 맞잡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우리. 함께할 때 꿈을 키울 수 있고, 함께할 때에야 꿈을 이룰 수 있기에.
1) 박선웅, 「의례와 사회운동」, 학술저널, 한국사회학회, 2007, p.6
2) 원종근, 「대처리즘과 영국의 경제개혁」, 학술저널,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학종합연구센터 EU연구소, 2000, p.14
3) 박선웅, 위의 논문, p.2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http://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31466
(아트인사이트에 게재한 글입니다.)
문화예술을 다루는 '아트인사이트'에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세 달간 퀴어 영화에 관련한 글을 올릴 예정입니다.
여전히 부족하고 또 갈수록 미진해지는 저의 글로나마 힘을 보태고자,
주어진 일에 책임을 다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칼럼의 제목은 [프레이폴(Pray for)]입니다.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담아내는 마음으로,
이 기도가 그들에게까지 들리도록 크고 진실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