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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의 조건(Handsome Devil, 2016)'_존 버틀러 作

  대부분의 명사는 그것과 명확히 상응하는 동사를 가진다. ‘믿음’은 신뢰하다, ‘희망’은 바라다, ‘사랑’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좋아한다, 로 치환이 가능하다. 이 공식을 따를 때 우정은 친하다 혹은 가깝다, 라고 읽힌다. 관계 형성에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과정은 가까워지는 것이다. 대화의 물꼬를 트고 경계를 거두어들인 후에야 여러 마음이 피어날 공간이 생긴다. 곧 우정은 감정의 선행이다.
 
  우정은 가벼이 느껴진다. 어렵지 않게 형성되고, 다른 감정들에 묻히기에 우리는 우정을 함부로 대한다. 시작이 아닌 준비 단계이자, 깊지 못한 감정으로 인식된다. 부담이 없기에 진전된 감정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때로 우정을 명목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애매하게 책정된 우정의 범주는 관계를 가로막는 족쇄가 된다. 무엇보다도 견고하면서 너무도 사소하게 깨지는 것이, 실은 단단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이 우정의 벽이다.
 
  우정이 단순히 가까움의 영역이라면 그 거리는 어떻게 지속될까. 시간에 악력에 맥없이 벌어지지 않고 붙박여 있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무의미하게 흐트러지지 않고 남아, 이제는 기초가 아닌 목적으로서의 우정을 만드는 힘. 이것을 우정의 조건으로 보자. 모든 만남에 이 벽이 쌓일 수 없는 법, 힘은 부분적으로 발현된다. 벽돌을 쌓아 올려 무너지지 않도록 다지게 하는 힘은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일까. 우정은 어떤 사람, 어떤 상황, 어떤 조건에서 깊어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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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럭비는 일종에 전투에 가깝다. 주어진 공을 수 명의 장정을 헤치고 상대방의 진영에 놓아야 한다. 득점하기 위해 혹은 막기 위해 붙잡고 넘어뜨리는 몸싸움이 허용된다. 손과 발 모두를 이용하여 상대를 저지하고 공을 지켜낸다. 이기기 위해서는 오로지 공에만 집중해야 한다. 타인에게 눈을 돌리는 순간, 그 아픔과 두려움을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붉은 천을 향하는 소처럼 그들은 오로지 저돌만을 목표로 한다.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건 상대와 공감하거나 감정을 갖는 것이다.” 이러한 폐쇄성과 공격성은 오히려 인력을 가지고 사람을 그러모은다. 사회 운동이 빚어내는 집단적 열광의 효과가 열띤 흥분으로 격렬함 뒤에 피어오른다. 우드힐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럭비는 하나의 종교와 같다. 모두 시니어 대회 우승을 손 모아 바라고, 럭비와 관련된 얘기가 아니면 관심조차 없다. 시골 외딴 기숙학교에 갇힌 남자아이들과 럭비의 속성이 만난 산물이다.
 
  그들 사회에서 럭비는 곧 정상(正常)의 조건이다. 럭비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평범하지 않으며, 심지어 일반적인 것에 대한 배반이다. 네드는 공동체 내 소수자에 속하게 된다. 그에게 주어진 별명은 호모게이, 동일 선상에 놓여 있는 사람들의 별칭이다. 멍하게 앉아 있거나 음악을 듣곤 하는 그는 일종의 이단(異端)이다. 아무도 음악을 듣지 않기에 작문 숙제로 노래 가사를 써내도 눈치 채지 못한다. 공감 받지 못하는 소외를, 어느 정도 즐기기까지 하는 수준에 이른다.

  이 비밀스러운 장난은 노래 가사를 아는 사람이 등장하면서 끝나게 된다. 음악은 네드 스스로 사회와 자신을 가르는 기준이었다. 연주도 하지 못하는 기타를 메고 다니면서 그는 위장했다. 집단에 소속되지 않고서도 버텨갈 힘을 은밀한 자의식으로 비축하곤 했다. 교사 쉐리와, 코너는 네드의 사적인 공간을 완전히 부수었다. 먼저 말을 걸고, 다그치기도 한다. 놀림과 멸시가 아닌 충고와 교감. 간단한 공감만으로 네드는 마음을 열고 우정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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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계를 거두어들이는 것에서 우정은 시작한다. 겉으로, 어울리지 못할 것으로 단정하고 가구를 꾸려 만든 ‘장벽’을 철거한다. 적막했던 방은 네드와 코너가 같이 부르는 노래로 메워진다. 친구가 필요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당장이라도 자퇴를 소망했던 네드의 마음은 그렇게 바뀐다. 길을 따라 난 우정의 벽을 통해.
 
  코너에게도 음악은 의미가 깊다. 럭비 선수로서 특출한 재능을 가진 그는 반복된 연습과 감정적 절제를 강요받는다. “로봇이라는 생각이 든”다면서 하소연해보지만 그뿐,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가 공을 찬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다 달리는 시간이 많고, 치고받으며 경기를 치르는 것에 희열을 느끼지만 “인생에는 좀 다른 게 있지”는 않을까 궁금해 한다. 닫힌 문 안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문을 열고 나가고 싶어 한다. 노래하면서, 네드와 합을 맞추면서 그는 소통에 발을 담근다. 그 순간에 그는 럭비 선수가 아닌 한 명의 소년으로 존재한다.
 
  성정체성을 전교생 앞에서 폭로당한 후에도 그는 좌절하거나 우울해하지 않는다. 다만 왜 숨어 있어야 하는지, 자기 자신을 속여야만 하는지 분노하고 슬퍼한다.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혼란스럽지 않다. 그것을 거부하지도 않는다. 너무도 떳떳하기에 그는 더는 피하고 싶지 않다. 동성애자인 교사 쉐리는 그날 밤 찾아온 코너에게 말한다. 줄곧 “너희의 인생을 살라”고 역설하던 그는 잔뜩 꼬리를 내리고 있다.
 
 
“가끔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숨겨야 할 때가 있어.
나중에 기회가 올 거야.”
 
 
"그런 날이 와요?"
그래나아질 거야.
 
 
  청소년 성소수자들의 반동성애 폭력 경험은 사회 저변에 만연하다. 동성애자에 대한 비합리적인 공포감이나 혐오감에 의한 폭력은 괴롭힘, 협박, 폭행 등 다양한 형태로 범해진다. 가족에게 학대와 굴욕을 당하기도 한다.1) 코너는 이 같은 폭력에 폭력으로 맞대응하거나 회피했다. 하지만 모든 손길을 막아낼 순 없는 법. 아무리 당찬 코너일지라도 홀몸으로 문을 열어젖히는 것은 자살 행위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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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필요한 것은 이해와 지지이다. 이기기 위한 목적론적 결집이 아닌 공감을 바탕으로 한 결속이 있어야 한다. 네드는 시니어 결승전을 앞두고 잠적한 코너를 찾아낸다. 끝내 무너진 코너에게 손을 뻗는다. 코너를 일으켜 세운 것은 ‘(Team)’이라는 단 한 글자였다. “네가 거기서 경기하면 그건 내 팀이”라는 말, 그저 너이기에 너를 응원한다는 간단한 문장. 인정과 포용. 코너는 단지 옆에 서 있어 주는 것을 원했다.
  무언가 바라는 우정은 결코 단단하지 못하다. 상대에게 제약을 두면 그 벽은 곧 깨어진다. 우정의 조건은, 어떠한 조건도 없는 것이다. 그 자체로 서로를 대하는 것, 넘어지면, 설사 자기가 넘어뜨렸더라도 얼른 부축해주는 것. 그리고 믿어주는 것.
 
  대부분의 명사는 그것과 명확히 상응하는 동사를 가진다. ‘연결’은 이어지다, ‘헌신’은 위하다, ‘행복’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만족한다, 로 치환이 가능하다. 우정은 ‘응원하다’로 읽힌다. 먼발치에서 같은 색의 옷을 입고 기도한다. 한 번의 실수로 주저앉지 않기를. 뒤따라올 성공을 바라며.

 


 
이미지 출처
Google, IMDb
 
참고문헌
1) 강병철·하경희, 「청소년 동성애자의 반동성애 폭력경험과 심리사회적 특성」,
아동권리연구, 제10권 제3호, 한국아동권리학회, 2006,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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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5 22: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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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들(Jongens, 2014)'_미샤 캄프 作


  달리는 것은, 고독한 일이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도록, 무릎을 짚고 숨을 고르는 손바닥에 땀이 맺히도록,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입 안에 비린 침이 감돌도록, 그렇게 힘차게 달리는 것은 자기만의 세계를 만드는 일이다. 온몸으로 공기를 가르고 열을 뿜어내면서 지나친 것들을 오롯이 기억에 새긴다. 우둘투둘한 트랙의 질감과 새벽의 눅눅한 냄새, 서늘하게 휘감는 찬 기운. 무심코 걸어 다닐 때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씩 피부로 감각된다. 달리기는, 따라서 내밀한 구축인 동시에 생동에 대한 예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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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메라는 달리기의 속성을 잘 알고 있다는 듯 조심히 주자의 뒤를 따라붙는다. 초점조차 제대로 맞추지 않은 채, 적당한 거리를 두어 결코 그를 앞지르지 않는다. 트랙을 달리는 소년은 응원 같은 카메라의 반주(伴走)에 발맞추어 있는 힘껏 내달린다. 영화는 이처럼 배려 깊은 시선으로, 생생한 숨결로, 쓸쓸한 잔상으로 시작된다. 밝아지지 않은 어스름 아래, 덩그러니 놓인 소년은 차근차근 성을 쌓아 간다. 젊음의 생기로 완연한 그 성은 완전한 소년만의 공간이다.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경험으로만 채워진 닫힌 곳간이다.

  빠른 발을 인정받아 소년은 계주 팀에 들어간다. 작은 실수가, 한 명의 컨디션이 전체 기록이 큰 영향을 미치는 경주. 개인적인 행위가 집단적 활동으로 치환되는 순간, 소년은 누군가 자신의 성문을 두드리는 것을 듣는다. 차분하게 문을 열어줄 것을 기다리면서 집요하게 노크 소리는 끊이지 않는다. 소년은 외시경으로 바깥을 살펴보다 문을 연다. 미처 알아채지 못할 만큼 느리고도 신중하게. 여차하면 곧바로 불청객을 쫓아낼 수 있도록 한 손에는 작은 몽둥이를 들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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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소년 시절,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감정을 놓치고 지나왔는가. 보이지 않는 사회적 제약과 성(性)적인 세뇌는 인간의 감각마저 무디게 한다. 동성에 대한 감정은 모두 우정이라는 통념, 그 선을 넘은 감정을 터부로 치부하는 의식 들은 우리의 성문을 더욱 두껍게 만든다. 동성에게 느끼는 감정과 행동이 특별하다고 느끼면서도 우정인지, 집착인지, 사랑인지 혼란스러워한다.1) 소년기, 문득 들려오는 성문 바깥의 기척을 단번에 사랑이라고 알아챌 성숙은 아직 없다. 단순한 호의로 생각하2)며 돌려보낸다. 잘못 찾아온 것 같다고, 오면 안 되는 곳이라고, 짐짓 찾아온 사람은 물론 자신마저 타이르며.

  청소년기는 성별 정체성을 확립하고 ‘자신의 성적 지향에 눈을 뜨는 시기3)이다. 단순히 이성애적 교육만 받아온 그들에게 다른 성적 지향은 낯설고, 두렵고, 피해야 할 비도덕적 산물이다. 우리의 소년, 시거는 이러한 일련의 내용을 파악하는 데 좋은 예가 된다. 그의 성문 앞에 찾아온 사람, 마크는 물수제비처럼 시거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다. 시거는 그 접근이 반가우면서 한편으로 경계가 된다. 마침내 그것이 불청객이라고 단정한 뒤 단호하게 말한다. “나 게이 아니야.

  시거는 자기의 감정을 부인한다. 동성을 향한 감정은 형의 비행(非行)보다 더 크고 어긋난 일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감추고 부정하고 싶은 그는 형의 노는 무리에 끼어 이성 친구를 만들고 억지로 입을 맞추어도 본다. 게이가 아니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해 보이는 듯, 시거는 마크를 밀어내려 애쓴다. 하지만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쉬웠다면 이끌리지도 않았을 것. 열린 문틈으로 발을 들이민 그는 이내 시거의 닫혀 있던 성을 열어젖히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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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꼿꼿이 버티고 서 있는 그를 보는 시거는 여전히 떨떠름하다. 마크를 안으로 들여 대접하면서도 그 모습을 남에게 보일 수는 없다. 이성애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남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불안하고 두려운 일인 것이다.4) 혼란한 마음은 마크에게까지 전이된다. 기대하고 찾아왔던 마크는 그 마음마저 부정당하는 것에 실망한 채 성을 나간다. 달려와 팔을 붙잡아 달라고, 가지 마라 말해달라는 듯 천천히 움직여보지만 시거는 다가갈 수 없다. 자기가 쌓아 왔던 견고한 성을 무너뜨려야 하는 일이었기에. 그의 손을 잡으면 속절없이 붕괴할 것 같았기에.

  마크와 시거의 호흡은 자꾸만 어긋난다. 계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배턴을 넘겨주고, 떨어뜨리지 않게 받는 일. 시거의 손은 허공을 휘젓는다. 손끝은 어디에도 닿질 못한다. 상심한 배턴은 땅에 떨어진다. 챙, 챙, 쇳소리가 바닥을, 시거의 공간을 울린다. 급격한 파문으로 시거의 몸을 흔든다.

  두 사람이 아직 서먹할 무렵, 시거는 달리기 기록을 재지 않는다는 마크의 말에 의아해 하며 물었다.

기록을 재야 집중이 더 잘 되지 않아?” 
아무 생각 없이 뛸 때 기록이 더 좋더라고.

마크는 가볍게 웃고 말을 잇는다.

"어떤 때는 뛰고 있단 걸 잊기도 해."

 내키는 대로, 마음에 맞는 대로 감정에 솔직하게 행동하는 마크에게 시거는 지나치게 예민하고 답답하게 느껴진다. 온전히 그 감정을 받아들일 때에야 더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시거는 모른다.

  청소년 성소수자들을 이토록 혼란으로 모는 것은 단연 죄책감이다. 도덕적 일탈을 저지르는 것만 같고,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가는 듯한 자기혐오가 발생한다. 이런 상황에서 마음 놓고 고민을 상담하거나 자신의 느낌에 대해 설명할 사람이 없을 때의 고립감5)은 그들 존재를 더 구석진 데로 파고들게 한다. 빗장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마음을 숨기게 한다. 시거가 마크에 대한 감정을 확신하게 되는 순간도 그 고립감이 해소될 가능성이 보인 때였다. 형의 비행 행위를 어느 정도 용인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그는 솔직하게 자기의 감정을 털어놓는다. 처음으로, 단호하고도 확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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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램펄린 위로 한 소년이 뛰어오른다. 카메라에서 그 소년의 모습이 사라지자 또 다른 소년이 뒤이어 모습을 보인다. 둘은 몇 번 번갈아 뛰더니 이제는 동시에 허공으로 뛰어든다. 팔을 휘저으며 짜릿한 비상을 만끽한다. 힘이 빠진 둘은 서로의 몸을 겹쳐 눕는다. 서로를 향해 고개를 튼다. 최대한 눈을 깜빡이지 않고 바라본다. 공중에 떠 있던 순간의 이름 모를 감정이 그 사이에 피어난다.

  달리는 것은, 고독한 일이다. 고독은 모종의 결핍이다. 결핍은 서로의 결핍을 향한다. 달리는 것은 곧 갈구하는 일이다. 마음을 깨닫고 그것이 이끄는 대로 발을 움직이는 일이다. 그 끝에서 문이 열리고 웅크려 있는 소년을 발견하게 될지 모른다. 소년의 손을 잡고 일어나 문밖으로 달려 나가게 될지 모른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도록 힘차게 내달릴지 모른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참고문헌

1) 송윤옥, 「청소년 성정체성 발달과정 : 사이버 동성애 상담사례 중심으로」, 학위논문(석사), 명지대학교 사회교육대학원, 2007, p. 42
2) 송윤옥, 위의 논문, p.37
3) 오근숙, 「보이지 않는 아이들-성소수자 청소년들」, 특별기고, 중등우리교육, 2005, p. 6
4) 주재홍, 「한국의 청소년 성소수자들로부터 알게 된 그들의 삶의 이야기들」, 일반논문, 교육문화연구 제23-1호, 2017, p. 15
5) 오근숙, 앞의 글, p.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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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선(The way he looks, 2014)'_다니엘 리베이로 作 


  여름이 끝나가는 오후, 창문으로 햇볕이 밀려온다. 방 안 가득 벨 앤 세바스찬의 건반 소리가 울린다. 명랑한 연주에 맞춰 몸을 일으킨다. 온몸으로 햇살을 받으며 팔을 젓고 고개를 까닥인다. 눈을 지그시 감고 음악에, 나른한 공기에 몸을 맡긴다. 가만히 앉아 손가락만 두드리다가도 문득 일어나 마주 선다. 서로 어깨를 맞잡고 쑥스러운 듯 조심스럽게 상체를 흔든다. 발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호흡을 맞춘다. 눈부시게 노란 햇빛이 사이의 공간을 메운다. 싱그러운 웃음이 따스한 기류를 타고 전달된다. 한 발, 한 발 서로에게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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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은 서서히 피어난다. 꽃잎이 벌어져 만개하는 속도만큼,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의 시간만큼 느리고 조용하게 색을 입는다. 이제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 무심코 넘어간 수많은 사건들은 켜켜이 쌓여 마음의 뼈대를 이룬다. 가령 이런 시가 있다. “너와 나와는 / 그 무심한 스침이 빚어놓은 / 순간의 꽃이기 때문이다 (복효근, ‘순간의 꽃’ 中)” 눈이 마주치는 찰나, 짧은 대화에서 전해온 목소리의 공명, 우연히 스친 옷깃에서 전해지는 옅은 비누 향. 무심히 스쳐가는 사소한 만남, 예사로운 순간들은 몰래 숨어들어 피부 아래 스민다.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무럭무럭 자라 마음을 피워낸다.

  언제부터 너를 좋아하게 되었지? 되짚어보면 명징하게 떠오르는 장면도, 뚜렷한 계기가 되었던 순간도 없다. 그저 어느 밤, 문득 깨달았을 뿐이다. 창문턱에 앉아 물끄러미 바깥을 바라보다, 침대에 누워 천장의 무늬를 눈으로 쫓다가, 친구에게 전화로 무엇인가 하소연을 늘어놓다, 그러다 발견한다. 선연한 빛으로 구석진 데 피어 있는 그 마음을. 그 순간 꽃은 머금고 있던 씨앗을 한껏 터뜨린다. 혈관을 타고 퍼져나간 씨앗은 가슴 언저리를 지나 손끝까지 자리를 잡고 움을 틔운다. 마음은 서서히 피어나지만, 무엇보다도 급격하게 몸 전체를 장악한다. 가령 이런 구절.

 
그 목소리에 처음 가슴이 두근거린 게 언제인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처음 당신을 사랑하게 된 것이 언제인지도 구별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부터 당신의 얼굴이 내 눈앞 어딘가에 어렴풋한 그림자처럼 자리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이미 모든 사물 위로 아련히 어려 있고, 놀라 눈을 감으면 어두운 눈꺼풀 위로 더욱 선명해졌습니다. 
(한강, 「파란 돌」 中)


  레오가 피어난 마음을 알아차렸을 때 이미 그것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단단히 굳어 있는 마음을 경작하고 씨앗을 심은 것은 역시 무심하고 무수한 스침이었다. 앞뒤로 앉게 된 우연과 지우개를 빌린 기회로 물꼬를 튼 관계는 시간에 빗금을 그으며 만남을 쌓았다. 시각장애인과 전학생, 달리 발붙일 데가 없던 두 사람은 절로 가까워졌다. 별이 서로에게 빛을 향해 별자리를 만들 듯, 나무가 서로에게 뿌리를 뻗어 숲을 형성하듯 둘의 결핍과 공허는 서로를 응시하는 시선, 그 위에 핀 순간의 꽃으로 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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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이 보이지 않는 레오는 맹목적인 연민과 배려를 원하지 않았다. 가시거리에 놓여 있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부모님에게 염증을 느끼고 화를 내기도 한다. 다만 원하는 것은 보호도, 자기를 완전히 지탱할 기둥도 아닌 적당한 방임과 자유의지였다. 자기를 평범하게 대해주는 것이었다. 자기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는 오랜 단짝 지오바나가 아닌 어수룩하고 낯선 가브리엘에게 마음의 터를 내어놓은 것은 어쩌면 그것이 진정 레오가 원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앉아 있는 것이 싫어 의자를 뒤로 젖혀 위태롭게 버티는 것을 좋아하는, 때로 턱에 걸려 넘어지는 위험마저도 겪어보고 싶은, 외국으로 멀리 떠나는 것이 두렵지 않은 당찬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브리엘은 넌지시 다가와 레오의 문을 두드린다. 보지 못하는 레오를 영화관에 데려가 직접 내용을 설명해주고, 레오의 권유에 못 이겨 점자를 배운다. 음악을 틀고 춤추는 법을 알려준다. 마침내는 두 사람, 새벽에 몰래 집을 빠져나와 월식을 보러간다. 야트막한 언덕에서 가브리엘은 바닥에 누워 하늘을 보고 레오는 가브리엘을 본다. 밤은 차갑고 마음은 깊다. 그러다 발견하게 된다. 자기에게도 피어 있던 군락을. 막을 수 없는 개화(開花)의 연속을.

  그러나 매화의 향기가 결코 지독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 마음도 고약하거나 답답하지 않다. 오히려 그들의 시선은 더 풋풋해진다. 늦은 밤 무턱대고 입술을 갖다 대고는 한동안 말을 붙이지 못하는 쑥스러움, 벗어 놓은 옷가지의 냄새를 맡으며 수음하는 내밀한 흥분, 보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옷을 벗을 때 고개를 돌리는 존중. 너무도 깨끗한 빛으로, 순수한 열망으로 두 꽃무리는 서로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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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아, 왜 몰랐던가 / 당신이 와서야 비로소 만개할 수 있는 것 / 주지 못해 고통스러운 그것이 바로 / 사랑이라는 것을 (이정하, ‘꽃잎의 사랑’ 中)

  사랑은 서서히 피어난다.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친 꽃이 걸어온 길에 한 아름 쌓여 있다. 더는 휘청거릴 것이 없는 때, 뒤로 걸으며 시든 잎을 주워본다. 각인처럼 남아 있는 그의 시선을 손결로 쓸어본다. 이 밤도 무심히 스쳐 보낸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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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Weekend, 2011)'_앤드류 헤이 作


Spark 1.[명사] 불꽃, 기폭제
           2.[명사] 건강하고 명랑한 남자
멋진 젊은이
           3.[동사] 구애하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나는 그 사람과 대화하면서 느끼곤 한다. 돌아보면 어렴풋이 남아 있는 첫사랑의 기억은 모두 그와 나눈 대화뿐이다. 갓 말리고 와 붕 떠 있는 머리카락을 두고 놀리듯 웃어댔던 어느 주말의 오전과 늦도록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끝내고 주황색 가로등 아래를 두런두런 하잘것없는 말로 채웠던 밤, 그 끝 그의 집 앞 자그마한 다리에서 끊어질 듯 한 시간이 넘게 이어가던 대화가 아직 귓가에 울리는 것 같다. 이제는 시간의 무게를 덧입어 애틋하게 다가오지만 당시에는 설레고 조금은 긴장도 되며, 위태롭기도 했다. 혹시 실수하지는 않을까, 내 말이 거슬리지는 않을까 염려하며 다음 말을 조심스레 골랐던 마음이 우리의 대화를, 관계를 더욱 깊게 만들었으리라.

  사랑은 어쩌면 주고받는 대화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격정적인 섹스보다는 관계가 끝나고 침대에 누워 맥없이 늘어놓는 이야기에 더 이끌릴지 모른다. 인적 없는 골목길에서 거칠게 입술을 맞부딪히는 것보다 고요를 깨뜨리며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이 더 빠르게 사랑을 피워낼지 모른다. 말은 곧 생각을 담아내고 감정을 전달하는 일종의 호소이다. 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우리는 그의 마음을 한 겹 한 겹 들여다보게 된다. 그토록 농밀하고 내밀한 감정의 교류는 다른 어떠한 것으로도 재현하지 못하고, 도달할 수도 없다. 따라서 대화는 때에 따라 시각적 포르노그래피보다 선정적일 수 있고, 서로에 대한 완전한 탐닉으로 사람을 유혹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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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명의 남자가 있다. 러셀 글렌. 늦은 밤 게이바(Gay Bar)에서 만난 둘은 짐짓 서로의 마음을 떠보다 결국 관계를 가지게 된다. 원 나잇 스탠드(One-night Stand). 당장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다른 요소를 완전히 배제하고 육체적 관계를 나누는 행위. 여기에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한 번의 만남은 한 번으로 끝낼 것. 번호를 교환하거나 먼저 연락하는 것은 구차하고 지질하게 여겨진다. 쾌락을 위해 조성된 일시적이고 인조적인 시공간, 두 사람이 거할 수밖에 없는 좁은 공간이다. 문란하고 도착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이 행위는 실은 거의 유일한 만남과 교류의 수단일 수 있다.

  하룻밤의 정사와 아침의 커피 한 잔으로 가볍게 끝날 수 있던 이들 관계는 글렌이 녹음기를 꺼내들면서 상황을 달리하게 된다. 그는 러셀에게 섹스의 대가로 어젯밤부터 지금까지의 일, 정확히는 두 사람이 처음 마주쳤을 때의 감정에서 시작해 현재의 기분까지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고 요구한다. 민망히 여겨 거절하던 러셀은 지속되는 주문에 하는 수없이 입을 연다. 클럽에서의 정황, 섹스의 세부적인 과정은 물론 자신한테서 땀 냄새가 날까봐 걱정했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까지도. 외설에 가깝도록 은밀한 이야기를 소곤거릴 뿐인데 이 장면은 에로틱하면서도 동시에 낭만적이다. 스쳐가는 감정을 포착함으로써 둘은 일시에 그쳐야 했던 관계를 영구적으로 붙들어 두었다. 그렇게 둘은 서서히 서로에 대한 탐닉으로 잠기어 갔다.

  영화는 함부로 감정을 재단하지 않겠다는 듯 배경음악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두 사람의 대화, 숨결, 주변의 소음에 집중한다. 동성애자에 대한, 넓게는 연애에 대한 어떠한 낭만이나 환상을 욱여넣지 않고 일상의 단면을 뚝 잘라내어 편집해 묶어 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인위적이거나 도식적이지 않다. 영화의 톤에 맞추어 차분하고 때론 지나치게 건조한 느낌마저 준다. 이는 영화 군데군데 놓여 있는 스케치에도 이어진다. 거리와 건물을 오래 비추는 카메라에는 한 명의 사람조차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쓸쓸하고 황량한 영상과 연출은 영화가 관조적인 시선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 영화에서 대화의 주체는 둘로 나뉜다. 글렌과 러셀, 그리고 보통의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 글렌과 러셀의 대화가 관계의 기반을 다지는 감정적 성질을 띤다면 후자의 것은 소모적이고 가볍다. 특히 그들에게 동성애자는 흔한 농담거리이자 조롱의 대상이다. “넌 항상 계집애 같아” 혹은 게이 친구를 두고 비방하는 대사들은 상당히 폭력적이다. 이들에게 만연해 있는 만성적 혐오는 글렌과 러셀, 둘의 생활을 본격적으로 침해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과 사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다. 러셀은 집 안에서는 게이인 게 행복하다고 말하면서도 밖에만 나가면 소화불량인 듯 속이 답답하다고 고백한다. 현대 사회에서 게이로 살아간다는 것은 스스로 침전하고 은닉하는 것이라는 것을 역시 ‘대화’로 풀어내고 있다.

  연장선상에서, 글렌은 부모에게 커밍아웃하는 것을 ‘게이들의 통과의례’라고 정의한다. 집에서 쫓겨나든, 스스로 집을 나오든, 드물게는 인정 받든 그것은 세상의 폭력을 가늠해보는 첫 시도이자 외침이다. 열여섯 살에 집을 나온 글렌이 고아인 러셀에게 “고아들은 꽤 섹시”하다고 언급하는 장면은 그가 가진 상처의 크기를 대변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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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난히 어딘가에 비친 모습이 많은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찾아볼 수 있다. 거울, 창문, 타일 벽 등 둘은 본래의 모습 그 자체만큼 반영으로 보일 때가 많다. 자기 존재 자체보다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더 중요한 그들, 남들의 기준에 맞추고 스스로를 감추는 사람들. 글렌은 분석하듯 이렇게 말한다.


그건 마치 네가 빈 종이가 되는 것과 같아. 그리고 네가 되고자 하는 것을 그 캔버스 위에 투영시키기 위한 기회가 주어지지.


  이렇듯 존재를 흔드는 외풍에 관해 이야기하면서도 영화는 존재 자체, 관계의 본질에 더 눈길을 준다. 주말이 지나면 글렌은 외국으로 떠나야 했고, 따라서 그들에게는 이틀이라는 시간만이 주어졌다. 이 시간 동안 그들은 세 번 만난다. 처음 돌아가는 길에는 무심했던 글렌이 두 번째 한두 번 러셀의 집을 뒤돌아본다. 만남이 거듭될수록 관계는 깊어지고 마음은 두터워진다. 그러나 전 남자친구로 인해 생긴 관계에 대한 두려움은 글렌의 마음을 자꾸만 닫으려 한다.

  키스할 듯, 팔을 뻗어 포옹할 듯 다가가지만 둘은 쉬이 가까워지지 못한다. 결코 진하게 입술을 맞추지도 몸을 껴안지도 않고 다만 나란히 창가에 선다. 같이 담배를 피우고 어깨에 손을 얹는다. 이 아슬아슬한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도 결국은 대화였다. 밤 새워 대화를 나눈다는 것, 하물며 내일이면 떠나는 사람과 마지막 대화를 주고받는다는 것. 둘은 마침내 완전히 속내를 뒤엎고 몸을 밀착시킨다. 천천히 부드럽게 서로를 애무하고, 관계를 가진다.

  서로의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이, 만난 지 이틀밖에 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그 감정이 과연 진정한 사랑일까? 이성적으로 우리는 불가하다고, 말이 되지 않는다며 단정할 수 있다. 순간의 호감을, 스치는 감정을 착각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 단순히 서로의 외로움과 욕구가 강한 자석처럼 상대를 끌어온 것일 수도 있으니까. 물론 그 관계는 영원하지 않다. 진정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완벽한 사랑을 꿈꾸며 우리에게 찾아온 주말을 이대로 흘려보내고 있지는 않을까. 순간의 감정을 무시한 채 영원도 함께 지워버리는 것은 아닐까.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http://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31709
(아트인사이트에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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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프라이드(Pride, 2014)'_매튜 워처스 作
 

  우리에게 80년대는 아프고도 벅찬 승리와 역동으로 기억된다. 청년들의 죽음이 기폭제가 되어 오래 곪은 화농이 터지듯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졌다. 그들은 인간으로서 권리를 지키기 위해, 국민으로서 민주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고 피 흘렸다. 정부의 유혈 진압에 맞서 그들은 오히려 뭉치는 것을 택했다. 견고히 몸을 맞대어 쉽게 넘어지지 않게 서로를 잡아매고 붙들었다. 다른 계층의 사람들의 이해(利害)가 하나로 모여 형성되는 것, 스스로 손목에 묶인 결박을 풀기 위해 태동하는 것, 그래서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이것을 우리는 ‘연대’라고 정의한다.

  사회학자 뒤르켐은 연대를 이렇게 설명한다.


 "어떤 역사적 시기에 상당히 커다란 집단 충격 하에서, 사회적 상호작용들은 더욱 빈번해지고 활발해진다. 개인들은 더욱 서로를 찾으며 함께 모인다. 그 결과, 혁명적 혹은 창조적 시기의 특징인 일반적인 열광이 초래된다.1)"


  연대는 곧 열광이다. 시대적 상처를 극복하고 위로받고자 사람이 사람을 갈구하게 되는, 인간적이고도 어딘가 슬픈 현상인 것이다.

  우리가 외침으로 거리를 장악하던 무렵, 영국에서는 대규모 파업 사태가 일어났다. 복지 정책을 축소하고 석탄 산업을 홀대한 대처 정부에 반(反)하여 전국 광산 노조에서 일제히 파업을 실시했다. 사양 산업으로 전락하긴 했으나 여전히 석탄의 활용이 중요한 시대였음에도 정부는 경찰력을 도입해 탄광 산업 자체를 포기할 각오로2) 강경하게 대응했다. 파업에 가담한 노동자는 물론 그 가족들까지 국가적 지원을 받지 못했고, 싸움이 길어지자 곤궁은 심해졌다. 영화 < 빌리 엘리어트 > 역시 광산 노동자 파업을 다루고 있는데, 죽은 아내가 아끼던 피아노를 부수어 땔감으로 사용하는 장면에서 그 궁핍의 정도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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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그들은 끈질기고 집요하게 권력에 맞섰다. 영화는 이들의 실제 영상 클립을 나열하며 시작한다. 투쟁의 선언은 확고하고 의연하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자존심과 자긍심뿐이고, 그것을 간직한 채 투쟁해 나갈 것입니다.” 물질적 이점을 모두 잃어버리고도 자존과 자긍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고 말한다. 이어지는 대처의 말. 옅은 미소를 머금은 그녀의 얼굴은 냉담하게 그들을 짓밟는다. TV를 보던 마크는 그 길로 바가지를 챙겨 거리로 뛰쳐나간다.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일인 듯 경쾌하고도 강건하게.

  런던에서는 그 해의 프라이드 행진(Pride Parade)이 열리고 있었다. 행진이 끝난 후, 마크는 무리를 모아 ‘LGSM’ 결성을 주도한다. Lesbians and Gays Support the Miners, 광부를 지지하는 레즈비언과 게이들. 마크는 마뜩잖아 하는 무리에게 ‘연대’를 설파한다. 끊임없는 투쟁으로 겪을 고통을 알기에, 자신들을 괴롭히던 권력과 무력이 그들에게로 옮겨간 것만 같은 죄책감에, 마크는 더욱 뜻을 굽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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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결에 무리에 끼게 된 스무 살의 브롬리 청년 조까지 합류해 열 명 남짓한 인원으로 초기 LGSM이 성립된다. 그들은 바가지를 챙겨 모금 운동을 벌인다. 그들의 강령은 단순하다. 혼자 모금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누군가 거리에 나가면 다른 이도 뒤따라 나갈 것. 그것은 폭력적인 사회에서 퀴어(Queer)로 살아남는 법이기도 하겠지만 곧 연대의 실현이었다. 함께 하는 것의 잠재력을 그들은 믿고 따랐다.

  그러나 그들은 게이였고, 레즈비언이었으며, 퀴어였다.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이단적 존재였으며 차별과 억압은 당연시되었다. 그것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존재 자체에 대한 거부였고 배척이었다. 당시 대처 정부는 동성애자 차별 정책에도 힘을 쏟았다. 에이즈의 위험성을 역설하며 동성애를 질병 창궐의 원인으로 규정하고 공론화를 금지하는 ‘섹션 28(Section 28)’을 입법하여 동성애를 규제했다. 국가 차원의 혐오 인식은 널리 확산되어 동성애자의 인권을 완전히 실추시키기에 이른다.

  어떠한 광부 노조도 LGSM의 도움을 거부하고, 그들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웨일즈의 한 탄광촌에 전화를 건다. 오래 전화벨이 울리고, 전화를 받은 노파는 LGSM이 무슨 단체인지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기에 그들의 원조를 승낙한다. 그들은 서로 어깨를 부둥켜안고 연대를 외친다. 연대여, 영원하라! 연대여, 영원하라! 그렇게 시골의 광부들과 LGSM의 당찬 게이들 간의 갈등이 시작된다. 결코 좁혀지지 않을 것만 같은, 첨예하고도 냉랭한.

  LGSM이 레즈비언과 게이가 조직한 단체란 것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초대하고도 반기지 못한다. 마을 강당 무대에 마크가 서서 연설을 하자 갖가지 혐오와 증오, 께름칙한 감정을 담은 눈길이 쏟아진다. 너무도 차갑고, 극도로 두려워하는 그 시선. 저주에 가까운 반응을 겪고 그들은 흔들리지만 마크만은 굳건하다. "숨지도, 도망가지도, 사과하지도 않"을 것이라며 차별과 편견의 벽에 맞선다.

  꽤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사람들은 LGSM을, 레즈비언과 게이들을 점차 수용한다. 그들이 가진 연대 의식을, 같은 약자로서 뭉쳐야 한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는다. 광산촌의 이장 격인 다이는 마크에게 말한다.

"당신이 날 지지하면 나도 당신을 지지하고, 당신이 누구이든, 어디서 왔든 간에. 어깨를 맞대고, 손을 맞잡고."

  마음을 열고 손을 맞잡으면서 ‘연대’는 피어난다. 이것의 잠재력은 마을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화합을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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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연대란 소통이자 개방의 창구이다.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만으로 교류는 완성된다.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광산촌에 LGSM이 전파한 것은 함께 어울리는 것, 하나로 뭉치는 것, 그러니까 연대의 힘이었다. 조나단의 춤과 제프의 아이들을 향한 선물은 ‘빵과 장미’의 합창으로, 환한 웃음으로 되돌아왔다. 진심은 통한다는 것은, 어쩌면 일방적인 것일 수도 있다. 영화는 그런 단순한 법칙보다 개인적 상호 작용의 힘을, 집단적 열광의 빛을 노래한다.

  너무 거대해서 도무지 이길 것 같지 않은 상대와 싸우는 것은 존재의 부정(否定)과 소멸의 위협을 감내하는 일이다. 같은 적을 둔 광부와 성소수자들은 사회적 약자로 한 뜻을 모은다. 'Victory to the miners'의 구호가 'Victory to the minors'로 바뀌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그들의 연대는 확립되고 발산된다. 소위 세상을 변화시킬 만한 힘을 갖추게 된다. 서로를 인정하고 갈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렇듯 큰 힘을 발현할 수 있다.

  누군가는 사회 운동이 축제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분석한다. 탄광의 유무에 의식주 문제가 달린 광부들에게 파업은 생명 존속을 건 중대한 투쟁이었다. 성소수자들에게 퀴어 퍼레이드는 그들의 존엄을 어떻게든 붙들고자 하는 최후의 인권적 사투였다. 그러나 연대가 존재하는 한, 이들의 싸움은 혈투보다는 축제에 가깝다. '모두 하나가 되어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고, 환호하3)'는 순간은 그들을 투견이 아닌 인간으로 몸을 지탱하게 한다. 비록 승리하지 못했더라도 그 열광의 잔상이 남아 스스로 구원하여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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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대를 기도한다. 서로의 손을 맞잡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우리. 함께할 때 꿈을 키울 수 있고, 함께할 때에야 꿈을 이룰 수 있기에.





1) 박선웅, 「의례와 사회운동」, 학술저널, 한국사회학회, 2007, p.6
2) 원종근, 「대처리즘과 영국의 경제개혁」, 학술저널,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학종합연구센터 EU연구소, 2000, p.14
3) 박선웅, 위의 논문, p.2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http://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31466

(아트인사이트에 게재한 글입니다.)

 

 

문화예술을 다루는 '아트인사이트'에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세 달간 퀴어 영화에 관련한 글을 올릴 예정입니다.

여전히 부족하고 또 갈수록 미진해지는 저의 글로나마 힘을 보태고자,

주어진 일에 책임을 다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칼럼의 제목은 [프레이폴(Pray for)]입니다.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담아내는 마음으로,

이 기도가 그들에게까지 들리도록 크고 진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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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10-31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이진이닷! 잘 지내니?
군바리 됐잖지? 생활은 잘하고 있는 거야?

거의 논문 수준이구나. 대단해.^^

이진 2017-11-08 18:30   좋아요 0 | URL
네 이모~ 이제 적응 다 끝내서 글도 좀 써보려구요 ㅎㅎ
논문 수준은 아닙니다 ㅠㅠ... 아직 너무 부족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