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 여성, 자연, 식민지와 세계적 규모의 자본축적 아우또노미아총서 45
마리아 미즈 지음, 최재인 옮김 / 갈무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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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이 어떤 착취의 기반에서 구성되고 운영되고 있는 지를 뜯어보면, 부끄럽고 피하고 싶지만, 미안하고 감사하게 되기도 해서, 잘 살고 싶어진다. 덜 착취하는 삶. 불편함을 나눠갖는 삶으로. 소비 뿐 아니라 사적인 관계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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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5 07: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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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반노동의 정치, 그리고 탈노동의 상상
케이시 윅스 지음, 제현주 옮김 / 동녘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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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이 아니었다면 가족을 ‘사회적 재생산의 사유화된 장치’라는 시각을 가질 수 있었을까. 현대 자본주의를 지탱시키는 노동윤리와 가족윤리의 이면을 짚었다. 정말인지, 과로하지 않는 삶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월(급)루(팡)하는 그대가 혁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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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핑거스미스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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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동적 독서였는 데 독서충동 멈추기 힘들었다! 박찬욱 감독이 왜 영화를 그렇게 끌어갔는지 너무 알겠음.. 하지만 원작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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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우.왜.오.열 ㅠ


5.

2019년의 매우 초반. 엄마는 올해를 시작하며 엄청나게 좋은 꿈을 꾸었다고 했다. 꿈 덕분에 올해는 다 잘될거야, 그러니 우리 딸 화이팅! 전화를 받는 날은 파혼을 결심하고 언제쯤 집에 말해야 할까 우물쭈물 대던 시점이었다. 이때다, 대차게 결혼을 작파한 나의 선택(!) 그것이 바로 올해의 대운었노라 선언했다. 엄마는 할말하않으로 전화를 끊으셨다. 그리고 이후의 나는 진심으로 결혼으로부터의 탈출보다 더 훌륭한 대운이 어디있나 싶어졌다고 하는데... (으응??)

그 엄청나게 좋은 꿈의 여파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나보다. 바로 내가 그 어렵다는 행복주택에 추가(!) 합격 되버린 것이었다. (당첨된 시점은 최근이지만, 신청한 시점은 2019년 이므로 대운은 확실히 작년이었던 것으로 ㅋㅋㅋ) 그게 좀 맞아 떨어지는 게.. 결혼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혼자 살 생각도 안했을 거고, 그렇다면 행복주택은 넣어볼 생각도 안했을 거다. 어쨌든 저쨌든 꿈꿔왔던 대도시의 독신여성 1인 가구 라이프를 살아보게 되었다는 말씀. 
음하하! 게다가 작년의 난 더 이상 불안정한 영세 개인사업자도 아니었다. 쥐꼬리 만한 월급으로 연명하지만 엄연히 사대보험 가입자 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대출이 된다더라. 때문에 행복주택 고고싱!! 하고 넣어봤던 거고 기대도 안했던 추가당첨이 올해와서 된 것이고 룰루❤️

여하튼 이제 곧 은행의 힘으로 한없이 느껴지던 (뭐랄까 돈을 벌어서 월세를 낼때마다 밑빠진 독에서 물이 펑펑 새는 느낌이었다) 월세살이에서 탈출한다. 너무 기쁘다. 흑흑. (대출이자야 나가겠지만 월세보다는 기분 더러움이 덜하겠지..) 이 영광을 엄마꿈에 돌립니다!

그러나 인생은 단짠단짠. 행복주택 합격 소식과 함께 회사에서는 극강의 노동환경이 펼쳐졌다. 함께 일하던 동료가 급작스럽게 퇴사한 것. 사람이 비는 것에 비례해 업무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고 그러므로 내 몫의 일은 계속 늘어만 갔고... 분위기라는 것도 있었고, 무엇보다 일하는 사람들의 심기가 안좋았으므로 회사 내 서열 꼴찌인 나는 왕쭈글쭈글 모드였다. 안 그래도 일이 많아 죽겠는 데, 대출을 알아보러 은행가는 것도 너무 눈치가 보였다. 한숨..

그래도 행복주택(!)하면서 버텼다. 오예, 빌라가 아니라 아파트다. 그곳에는 발코니가 있다. 발코니가 있다는 것은 식물을 키울 수 있다는 것. 20대 내내 애정 쏟아 돌볼 화분이 몇개 갖고 싶었던 나는 힘들때마다 키우고 싶은 식물들을 생각하며 버텼다. 대파를 키울거야. 바질을 키워서 파스타에 볶아 먹을거야. 방울 토마토도 키울꺼야. 여름 건강을 위해 풋고추도 심어야 하나. (어째 다 먹을 수 있는 화분들인 것은 언제나 먹을 것을 키우던 텃밭들이 있었던 어린 시절 환경이 큼)


6.

난 언제나 그렇듯이 낙천적인 성정으로 미래의 행복에 오늘의 불행을 물타기 하며, 뭐 이정도 눈칫밥이야 하면서 잘 버텼다. 그리고.. 그런데.. 그러나.. 코로나19가 왔다.

내가 다니는 동선마다의 확진자 소식. 회사 가까이 있는 지하철 역에 확진자 소식. 얼마 안가 옆옆 건물에 확진자.. 띠링띠링. 계속해서 긴급 재난 문자 알림이 떴다. 그리고 뭔가.. 안그래도 예민한 상태였던 회사의 분위기는 점점 더 싸늘해졌다. 모두가 기침소리에 살벌해지고 미열이 있다는 직원의 이야기에 원래부터 건강염려증이 있는 오너의 심기는 더욱더 불편해졌다. 마스크 쓰고 업무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이 시국에 감기걸리는 것도 안일한 거라나. 코로나도 다 자기관리와 연관되어 있다나. 건강관리도 경쟁력이라나. 뭐라나. 무슨 60년대 공장도 아니고, 물 많이 마시기, 담배 줄이기, 강제 영양제 챙겨 먹기 운동 비슷한 걸 시켰다.

여하튼 그분의 관점은 곧 나의 관점. 나는 직원들의 코로나를 염려^^하는 너른 배려에 감사하며, 회사가 사준 마스크도 끼고, 회사가 주는 소독제도 바르고, 오너의 뜻대로 바로 영양제를 구입해 챙겨먹으며 자기관리도 잘하는 태도를 갖추기로 하였다 ^_^ 건강! 그것은 회사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_^ **
충성! 건!강! 그래 내 몸아, 내일을 버티려면 더 건강해져야지. 근데 왜 정신은 점점 안건강해지는 느낌일까.

“(116) 포스터-테일러주의 노동과정은 무형의 노동을 하는 노동자에게 희생과 복종 이상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노동자의 창조성, 관계적ㆍ정서적 역량을 흡수하고자 하는 것이다. 높이 평가받는 것은 복종이 아니라 헌신이다. 직원들이 관리자의 권위에 그저 복종하기 보다는 관리자의 관점 자체를 받아들이기를 기대한다”

솔직히 말하면, 요 얼마간의 회사 분위기는 걍 너무 무서워서, 코로나로 죽는 것보다 먹고 사는게 더 무섭다고 악이라도 쓰고 싶었다. 게다가 일할 때 안경을 쓰는 나는 마스크 땜에 자꾸 안경에 김이 서리고, 숨을 못쉬어 답답하고, 무엇보다 귀가 너무 아팠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가 불편하므로 더욱더 맡은 바 일을 잘해내야 했다. 삐끗하면 털리는 거다. 잘하자! 잘하자! 세뇌할 수록 심리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넘 지겨워... 아, 회사가기 싫다. 너무 싫다. (이거 쓰는 지금, 내일 월요일..) 흑흑. 밤마다 회사가기 싫어서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이젠 대출에 매이게 될 몸. 대출 승인이 날때까지는 그만둘 수가 없다.
아, 행복주택이여. 대출이여. 사대보험이여. 눈물의 노동윤리여.
임금이란 무엇인가. 고용불안이란 무엇인가.
일하기 위해 건강하기까지 해야하는 우리는 누구인가.

“(115) 글로벌 경쟁의 위협 탓으로 돌려지는 일자리 축소는 노동자들을 수세에 몰아 넣는 와중에 사회복지가 축소되면서 개인들은 임금관계에 더욱 의존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너무 많은 노동자가 놓인 불안정한 자리는 베버가 말했던 청교도의 자리와 다를 바 없다. 끊임없는 불안과 불확실성 때문에 고된 노동에 언제나 붙들려 있어야 하는 처지인 것이다”


7.

포스트-포드주의의 노동자에게 확실히 사회주의적 인본주의(소외된 노동이 아닌 생산적이고 자유로운 자기 실현으로서의 노동)는 그 비판의 힘을 상실하게 되는 것 같다. 먼저는 노동자가 되는 것도 너무 어렵지만, 그리하여 얻게된 비싼(?) 노동자의 지위 일수록 더 높은 생산력과 크리에이티브~ 창조성까지 요구한다. 쉬는 것도 더 창조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무기력하게 쉬는 게 아니라 어디라도 막 떠나서 무슨 영감이라도 얻어와야 하는 거고, 그게 아니면 어학이라도 더 익혀서 글로벌한 역량을 보여줘야 한다. 요즘 대부분의 회사는 자기계발을 위해 어학공부를 하는 직원들에게 학원비를 직원 복지라며 챙겨준다. 그래서 동생은 휴일인 오늘도 열심히 영어를 공부하더라(더 나은 직장으로의 이직을 꿈꾸며). 그리고 나는 없는 아이디어를 샘솟게 하기 위해 전시회를 쫓아다닌다(젠장, 우리 회사는 돈 안줌).

“(116)포스트-포드주의는 수많은 노동자에게 유연성, 적응력, 끊임없는 재탄생까지 요구한다.”
“(147)노동자가 물리적 노력뿐 아니라 감정적 기술, 정서적 역량, 소통 능력까지 제공하기를 요구하는 일자리가 많아질 때, 다시 말해 자아의 더 많은 부분이 노동과정으로 끌려들어가고 이익 극대화의 요구에 발맞춰 관리되어야 할 때, 자기 자신으로부터, 또 타인으로부터의 소외는 분명히 점점 더 심각해진다.”


자기계발을 위한 비용까지 제공해준다니 참 아름답고 고마운 직원 복지다. 거기에 자아실현이라는 의미까지 끼얹어주면, 유후! 나를 발전시켜주는 나의 일이여! ~~ 모든 게 너무 교묘하게 섞여서 어디까지가 일이고 어디까지가 삶인지가 (애시당초 분리라는 게 가능하긴 한건지) 구분이 안되는 오늘날 노동자의 삶.



8.

그래서 확실히 요즘의 세대에게 더 직관적으로 와닿는 것은 새로운 노동윤리가 아니라 노동윤리 자체의 철폐인 것 같다. 책에 기대어 어렵게 썼지만 ‘노동의 가치, 일의 존엄성’ 등등의 언설이 머리로는 알겠는 데, 마음으로는 안와닿는 다는 이야기. 일하기 싫거덩. 적게 일하고 많이 벌고 싶거덩. 건물주가 제일 부럽거덩.

당장 나만해도 “일터로 돌려보내달라”라는 해고 노동자의 절박한 구호가 와닿지 않는다. 
일터로 왜 돌아가. 가기 싫어... 회사야, 이럴거면 차라리 해고 시켜줘. 그래야 실업급여라도 나오지..라는 생각을 할때도 정말 많다.. 잘리면 당장 월세는 걱정되겠지만, 그래도 어딜 가든 여기서 거기 일 것 같은 뭐 그런 마음. 아마 부양 가족이 있었다면, 달랐겠지만. (그래서 부양가족을 안만들었다!!!) 솔직히 내 입 하나 (더하기 반려묘 입) 책임지는 것만으로도 가끔은 벅차니까. 부양가족이 없으므로 좀 가뿐 한 것도 있고. 무려 ‘포스트-포드주의’래잖아. 집도 없는 데.. 열심히 벌어서 집을 사면 내 인생이 다 끝났는데요? 
그나마 고용도 안정적이지가 않는 데, 게다가 고용되도 계속 자기 계발해야하는 데, 바빠 죽겠는데, 무슨 결혼을 하고 애를 낳아... 결혼하고 애낳으면, 가기 싫은 일터로 ‘돌려보내달라’고 해야하잖아... 그러므로 최대한 오래오래 자주자주 실업급여... 왜냐면 일은 어차피 죽을 때 까지 해야하니까.. 쉴 수 있을 때 쉬어야지.. 쉬자... 아 쓰다보니 또 엄청난 의식의 흐름 글ㅋㅋㅋ

여하튼 사대보험의 힘은 세다.
나여, 당분간은 회사에서 존버하자.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 가.
왜냐면 대출금을 갚아야 하니까.

여하튼 여기까지 1,2 장에 대한 소감이며. 3,4장 소감 및 5장 읽기는 다음주로 미룹니다. 
대운과 함께 일복 몰아쳐서 저녁이 없는 삶을 사느라 책을 못읽고 책 제목을 살고있는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중간 리뷰.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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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03-02 04: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 보금자리 정말 축하해요.

공쟝쟝 2020-03-02 09:0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반님은 건강건강!!

다락방 2020-03-02 06: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1인 싱글 라이프 진짜 대운이네요. 존버를 선택했다면 버팁시다, 무조건!!

공쟝쟝 2020-03-02 09:03   좋아요 1 | URL
대운 입니다. 존버인 것입니다! 피할수 없으면 즐기는 노동윤리인 것입니다!!

비연 2020-03-02 0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대출금을 갚아야 하니까. 이것은 현실 바탕 현답~^^
행복주택 당첨 완전 축하드려요~ 이제 드디어 싱글라이프! 그것은.. 매우 좋습니다 ㅎㅎㅎ (유경험자曰)
 
[eBook]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게 취미 - 행복의 ㅎ을 모으는 사람
김신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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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중에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겨울이다. 이맘때보다는 좀 전이 좋다. 1월의 중순쯤? 동지가 지나고, 점점 더 추워지겠지만 조금씩 해가 길어질 것이고, 추울수록 봄을 기다리게 되는 웅크린 시간.


*


모두들 추워 바삐 집에 들어가니까, 집을 좋아하는 나도 덩달아 집에 바삐 들어가도 되서 좋다. 바깥의 기온으로 깡깡하게 언 손을 쑤욱 덥혀놓은 방바닥에 밀어넣었을 때, 사르르 간질간질 손가락이 녹는 느낌이 좋다. 얼어있는 코나 귀가 녹는 느낌도 좋고, 잠깐 창문을 열었을 때 찬 공기가 한바퀴 휭 돌고 나가는 환기의 순간도 좋다. (집안이 식으면 안되니까 잽싸게 문을 닫아야 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은 귤이고, 귤이 왜 좋냐면 역시 귤은 깎을 필요가 없고, 접시에 이쁘게 담을 필요도 없고, 설거지가 나오지도 않으며, 자기가 먹고 싶은 만큼만 알아서 제 몫을 까먹을 수 있고, 껍질도 잘 말려서 쓰레기통에 버리면 되니깐!~ 게으른 개인주의자 들에게는 정말 안성맞춤 과일 아니겠나요? 그리고 귤은 박스로 떼와서 겨울내내 실컷 먹어야 한다. 바깥에 내놓아서 차갑게 식은 귤을 담아서 까먹는 다. 냠냠. 역시 배깔고 누워서 귤 까먹으며 책 읽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


폭신폭신 무릎 담요를 덮고 반쯤 눕듯 앉아 자울자울 졸음을 조는 겨울 주말의 고즈넉함 정말 좋다. 고양이와 함께라면 금상첨화다. 고양이 찹살떡을 만지면서, 마성의 인스타나 들여다 보다가, 너무 누워만 있는 것 같으면, 제일 좋아하는 패션인 벙벙한 후드티를 뒤집어써 떡진 머리를 감추고 동네를 돌아다닌다.


겨울에는 역시 길거리 음식이 최고다. 김 모락모락 오뎅도 맛있고, 막 찍어낸 팥앙금 붕어빵도 맛있다. 계란빵도 맛있고, 닭꼬치도 맛있꼬.. .. 그리고 소주가 맛있다. 추운 날엔 소주한 잔, 국물 한 입, 쨘 하고~ 캬캬 하고~ 한잔, 두잔, 세잔 하고 나면 몸이 따뜻해진다. 그때, 속이 덥혀질 때~ 알딸딸 해질 때! (거기서 멈춰야 한다!!) 소주 앞에서만 할 수 있는 마법의 수다를 떨고, 발그레 해진 볼을 하고 술집을 나왔을 때! 눈이 내리는 거다.


펄펄~ 고요하게 혹은, 막 쌓이라도 할 것 처럼 펑펑. 그럼 욕을 하는 거지. 에씨, 내가 너랑 눈을 맞다니. 정말 싫다! (불안정 애착유형) 하지만 너 말고 눈, 눈이 좋으니까. 지금 꽤 행복해! 난 눈이 좋다. 이토록 겨울을 좋아하는 이유를 적어내렸으나, 결국 겨울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 좋아서.



*


올 겨울엔 유난히 눈이 내리지 않았다.

이것이 온난화인가.. 눈은 내리지 않는 데, 백신이 없다는 감기는 돌고, 잊을만 하면 미세먼지 공격으로 마스크는 필수였다. 제대로된 눈을 한번도 구경하지 못한 채로 이번 겨울을 지나며 정말 지구가 멸망할 때가 된건가봐절반의 아쉬움, 그리고 절반의 기대(멸망을 무서워하면서 원함..ㅋㅋㅋ)라는 오묘한 감정이 섞인 카톡을 보냈었다.




그리고, 오늘.

월요일의 밀린 업무들이 걱정이 되어, 부스스 좀비처럼 회사를 나가는 길.


드디어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리고 있다.

그것도 하얗게 펑펑펑.

천천히 고요하게.


주말에도 분주한 지하철과는 대조적인 고요한 눈날림에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찍었다.

나풀거리는 눈송이를 바라보면서, 아주 잠깐 행복했다.


혼자있는 사무실 창밖으로 여전히 흩날리는 눈을 보면서 지금 떠오르는 책은 

김신지 작가님의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게 취미> 

작가님의 구구절절한 여름사랑에 겨울주의자인 나는 겨울에 대해서 적어보마했었다

물론 눈이 안내려서 오랫동안 까먹고 있었지만.

 

*


불행한 기분이 들때 글을 쓰며 해소하는 습관이 있어서, 행복할 때는 그냥 지나쳐버리기 일쑤다. 그런데 지금 느끼고 있다. 좋아하는 것을 조근조근 쓰는 것 만으로도, 행복에 진하게 머무를 수 있구나 하고. 이 글을 쓰고 나면, 금새 잊어버리고 말겠지만, 휴일없는 휴일의 휴식 같은 글쓰기다.


어떤 계절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물었을 때 기왕이면 망설임 없이 하나를 고르는 사람이 좋다. 다 별로라거나 다 좋다고 하는 대답보다. 가장 편애하는 하나의 계절을 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구체적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일 테니까.

출근해서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일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해야 할 일의 목록이 자꾸 늘어나다 보면, 쉽게 잊게 된다. 일 바깥에도 삶이 있다는 걸. 그래서 틈틈이 일상에 여백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매번 다짐한다). 일과 일 사이, 스스로 ‘틈’을 만들지 않으면 진짜 하고 싶은 것들은 영영 못 하며 살게 되기 때문이다. 너무 열심히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를 말리고 싶어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행복의 기쁨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아무리 대단한 성취나 환희도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기 마련이므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기쁨을 한 번 느끼는 것보다 다양하고 자잘한 즐거움을 자주 느끼는 것이 행복한 삶에는 훨씬 유리하다는 것. ‘얼마나 많이’가 아니라 ‘얼마나 자주’. 그렇게 되뇌며 나는 책의 한쪽 귀퉁이를 접어두었었다.

그러니 우리가 보낼 이 겨울도, 눈이 아주 많이 오는 겨울보다 눈이 자주 오는 겨울이기를. 그럼 좀 더 자주 사진을 찍고, 좀 더 자주 나누고픈 순간을 전송하며, 좀 더 자주 창문에 붙어 서서 웃게 되겠지.

이를테면 나는, 어딘가에 마음을 쏟은 하루를 살면 그것을 기억하기 위한 또 하루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인생은 정말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기억들로 이루어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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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02-16 1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펄펄 날리는 눈 보며 휴일 없는
휴일의 휴식같은 산출물 잘 읽었습니다. 쟝쟝님은 겨울을 좋아한다 귤도 좋아한다 끄적끄적....ㅋㅋㅋ

공쟝쟝 2020-02-16 18:09   좋아요 1 | URL
이제 집가용 ㅎㅎ 휴식 해야지~!! 주말 잘 보내세용😔

반유행열반인 2020-02-16 18:56   좋아요 0 | URL
짧지만 알차게 푹 두껍게 휴식하세요 수고 많으셨어요.

비연 2020-02-16 12: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주말에 출근이라니. 그래도 혼자 있는 사무실 창밖으로 눈을 바라보는건 운치있으리라 믿어보며. 이번 겨울 마지막 눈 같죠...?

공쟝쟝 2020-02-16 18:11   좋아요 0 | URL
운치 너무 있어서 눈물이...🥺눈이 너무 안와서 섭섭했던 겨울이었어요.. 아쉽게도 지금은 그쳤어요 흑흑 ㅠ

다락방 2020-02-17 0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여름이 제일 좋고요 눈을 싫어해요. 어제도 눈 오는 거 보면서 ‘어우.. 내일은 오면 안되는데..‘ 했고 오늘 아침에 눈 오는거 보면서 ‘으으 길 미끄럽고 차 막히겠다‘ 생각하면서 싫어했어요. 아아 저란 인간은 낭만을 모르는 인간인 것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0-02-24 08:04   좋아요 0 | URL
눈이 낭만적인건 제가 눈에 안당해봐서(?)일지도 ㅋㅋㅋ 다락방님은 어쩐지 여름 파 일것 같앗어요 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0-02-22 19: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첫 문장에서부터 쟝쟝님~~~ 오호~~~ 다시 봤어요. 전 겨울 싫어하고요. 초봄도 싫고, 가을도 싫고 ㅠㅠ 저도 다락방님처럼 여름을 제일 좋아해요. 여름에 태어나서 그런걸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귤 이야기 읽으면서 제가 물개박수 쳤어요. 그걸 좀 알아주세요.
쟝쟝님 얼른 한가해져서 이렇게 재미진 글 많이 써주면 좋겠어요.

공쟝쟝 2020-02-24 08:05   좋아요 0 | URL
아니 의외의 여름파!!! 그쵸, 귤은 그렇습니다. 그리고 수박은 수박은 역시 공동체주의자의 과일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