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게 취미 - 행복의 ㅎ을 모으는 사람
김신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년 중에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겨울이다. 이맘때보다는 좀 전이 좋다. 1월의 중순쯤? 동지가 지나고, 점점 더 추워지겠지만 조금씩 해가 길어질 것이고, 추울수록 봄을 기다리게 되는 웅크린 시간.


*


모두들 추워 바삐 집에 들어가니까, 집을 좋아하는 나도 덩달아 집에 바삐 들어가도 되서 좋다. 바깥의 기온으로 깡깡하게 언 손을 쑤욱 덥혀놓은 방바닥에 밀어넣었을 때, 사르르 간질간질 손가락이 녹는 느낌이 좋다. 얼어있는 코나 귀가 녹는 느낌도 좋고, 잠깐 창문을 열었을 때 찬 공기가 한바퀴 휭 돌고 나가는 환기의 순간도 좋다. (집안이 식으면 안되니까 잽싸게 문을 닫아야 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은 귤이고, 귤이 왜 좋냐면 역시 귤은 깎을 필요가 없고, 접시에 이쁘게 담을 필요도 없고, 설거지가 나오지도 않으며, 자기가 먹고 싶은 만큼만 알아서 제 몫을 까먹을 수 있고, 껍질도 잘 말려서 쓰레기통에 버리면 되니깐!~ 게으른 개인주의자 들에게는 정말 안성맞춤 과일 아니겠나요? 그리고 귤은 박스로 떼와서 겨울내내 실컷 먹어야 한다. 바깥에 내놓아서 차갑게 식은 귤을 담아서 까먹는 다. 냠냠. 역시 배깔고 누워서 귤 까먹으며 책 읽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


폭신폭신 무릎 담요를 덮고 반쯤 눕듯 앉아 자울자울 졸음을 조는 겨울 주말의 고즈넉함 정말 좋다. 고양이와 함께라면 금상첨화다. 고양이 찹살떡을 만지면서, 마성의 인스타나 들여다 보다가, 너무 누워만 있는 것 같으면, 제일 좋아하는 패션인 벙벙한 후드티를 뒤집어써 떡진 머리를 감추고 동네를 돌아다닌다.


겨울에는 역시 길거리 음식이 최고다. 김 모락모락 오뎅도 맛있고, 막 찍어낸 팥앙금 붕어빵도 맛있다. 계란빵도 맛있고, 닭꼬치도 맛있꼬.. .. 그리고 소주가 맛있다. 추운 날엔 소주한 잔, 국물 한 입, 쨘 하고~ 캬캬 하고~ 한잔, 두잔, 세잔 하고 나면 몸이 따뜻해진다. 그때, 속이 덥혀질 때~ 알딸딸 해질 때! (거기서 멈춰야 한다!!) 소주 앞에서만 할 수 있는 마법의 수다를 떨고, 발그레 해진 볼을 하고 술집을 나왔을 때! 눈이 내리는 거다.


펄펄~ 고요하게 혹은, 막 쌓이라도 할 것 처럼 펑펑. 그럼 욕을 하는 거지. 에씨, 내가 너랑 눈을 맞다니. 정말 싫다! (불안정 애착유형) 하지만 너 말고 눈, 눈이 좋으니까. 지금 꽤 행복해! 난 눈이 좋다. 이토록 겨울을 좋아하는 이유를 적어내렸으나, 결국 겨울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 좋아서.



*


올 겨울엔 유난히 눈이 내리지 않았다.

이것이 온난화인가.. 눈은 내리지 않는 데, 백신이 없다는 감기는 돌고, 잊을만 하면 미세먼지 공격으로 마스크는 필수였다. 제대로된 눈을 한번도 구경하지 못한 채로 이번 겨울을 지나며 정말 지구가 멸망할 때가 된건가봐절반의 아쉬움, 그리고 절반의 기대(멸망을 무서워하면서 원함..ㅋㅋㅋ)라는 오묘한 감정이 섞인 카톡을 보냈었다.




그리고, 오늘.

월요일의 밀린 업무들이 걱정이 되어, 부스스 좀비처럼 회사를 나가는 길.


드디어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리고 있다.

그것도 하얗게 펑펑펑.

천천히 고요하게.


주말에도 분주한 지하철과는 대조적인 고요한 눈날림에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찍었다.

나풀거리는 눈송이를 바라보면서, 아주 잠깐 행복했다.


혼자있는 사무실 창밖으로 여전히 흩날리는 눈을 보면서 지금 떠오르는 책은 

김신지 작가님의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게 취미> 

작가님의 구구절절한 여름사랑에 겨울주의자인 나는 겨울에 대해서 적어보마했었다

물론 눈이 안내려서 오랫동안 까먹고 있었지만.

 

*


불행한 기분이 들때 글을 쓰며 해소하는 습관이 있어서, 행복할 때는 그냥 지나쳐버리기 일쑤다. 그런데 지금 느끼고 있다. 좋아하는 것을 조근조근 쓰는 것 만으로도, 행복에 진하게 머무를 수 있구나 하고. 이 글을 쓰고 나면, 금새 잊어버리고 말겠지만, 휴일없는 휴일의 휴식 같은 글쓰기다.


어떤 계절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물었을 때 기왕이면 망설임 없이 하나를 고르는 사람이 좋다. 다 별로라거나 다 좋다고 하는 대답보다. 가장 편애하는 하나의 계절을 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구체적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일 테니까.

출근해서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일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해야 할 일의 목록이 자꾸 늘어나다 보면, 쉽게 잊게 된다. 일 바깥에도 삶이 있다는 걸. 그래서 틈틈이 일상에 여백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매번 다짐한다). 일과 일 사이, 스스로 ‘틈’을 만들지 않으면 진짜 하고 싶은 것들은 영영 못 하며 살게 되기 때문이다. 너무 열심히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를 말리고 싶어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행복의 기쁨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아무리 대단한 성취나 환희도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기 마련이므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기쁨을 한 번 느끼는 것보다 다양하고 자잘한 즐거움을 자주 느끼는 것이 행복한 삶에는 훨씬 유리하다는 것. ‘얼마나 많이’가 아니라 ‘얼마나 자주’. 그렇게 되뇌며 나는 책의 한쪽 귀퉁이를 접어두었었다.

그러니 우리가 보낼 이 겨울도, 눈이 아주 많이 오는 겨울보다 눈이 자주 오는 겨울이기를. 그럼 좀 더 자주 사진을 찍고, 좀 더 자주 나누고픈 순간을 전송하며, 좀 더 자주 창문에 붙어 서서 웃게 되겠지.

이를테면 나는, 어딘가에 마음을 쏟은 하루를 살면 그것을 기억하기 위한 또 하루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인생은 정말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기억들로 이루어지는 걸까.


댓글(9)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유행열반인 2020-02-16 1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펄펄 날리는 눈 보며 휴일 없는
휴일의 휴식같은 산출물 잘 읽었습니다. 쟝쟝님은 겨울을 좋아한다 귤도 좋아한다 끄적끄적....ㅋㅋㅋ

공쟝쟝 2020-02-16 18:09   좋아요 1 | URL
이제 집가용 ㅎㅎ 휴식 해야지~!! 주말 잘 보내세용😔

반유행열반인 2020-02-16 18:56   좋아요 0 | URL
짧지만 알차게 푹 두껍게 휴식하세요 수고 많으셨어요.

비연 2020-02-16 12: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주말에 출근이라니. 그래도 혼자 있는 사무실 창밖으로 눈을 바라보는건 운치있으리라 믿어보며. 이번 겨울 마지막 눈 같죠...?

공쟝쟝 2020-02-16 18:11   좋아요 0 | URL
운치 너무 있어서 눈물이...🥺눈이 너무 안와서 섭섭했던 겨울이었어요.. 아쉽게도 지금은 그쳤어요 흑흑 ㅠ

다락방 2020-02-17 0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여름이 제일 좋고요 눈을 싫어해요. 어제도 눈 오는 거 보면서 ‘어우.. 내일은 오면 안되는데..‘ 했고 오늘 아침에 눈 오는거 보면서 ‘으으 길 미끄럽고 차 막히겠다‘ 생각하면서 싫어했어요. 아아 저란 인간은 낭만을 모르는 인간인 것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0-02-24 08:04   좋아요 0 | URL
눈이 낭만적인건 제가 눈에 안당해봐서(?)일지도 ㅋㅋㅋ 다락방님은 어쩐지 여름 파 일것 같앗어요 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0-02-22 19: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첫 문장에서부터 쟝쟝님~~~ 오호~~~ 다시 봤어요. 전 겨울 싫어하고요. 초봄도 싫고, 가을도 싫고 ㅠㅠ 저도 다락방님처럼 여름을 제일 좋아해요. 여름에 태어나서 그런걸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귤 이야기 읽으면서 제가 물개박수 쳤어요. 그걸 좀 알아주세요.
쟝쟝님 얼른 한가해져서 이렇게 재미진 글 많이 써주면 좋겠어요.

공쟝쟝 2020-02-24 08:05   좋아요 0 | URL
아니 의외의 여름파!!! 그쵸, 귤은 그렇습니다. 그리고 수박은 수박은 역시 공동체주의자의 과일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