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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중독 - 공부만이 답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엄기호.하지현 지음 / 위고 / 2015년 12월
평점 :
내가 나 자신으로 사는 것을 스스로 합리화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읽어야 하는 것입니까? 라고 투덜댄 글에 “관습을 깨는 것은 힘든 일이라 두꺼운 벽돌 책으로 여러 번 내리쳐야 한다”라는 훌륭한 댓글을 받았다.
한동안 아파서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같이 소멸해서라도 소멸시켜버리고 싶은 어떤 인간에 대한 미움이 수습되지 않았다. 그와 동조자들(그리고 공모한 어쩌면 전세계)을 한 톨도 단 한 톨도 닮고 싶지 않아서 푸코를 정.말.로 읽으려고 맘먹었을 정도다. (물론 읽는다고 알 수 있게 되는 건 아니다. 그래도 인간사에 작동하는 권력의 원리를 이해하면 권력에 도취되지 않을 수 있지 않나?) 잊을 수 있다면 잊어버리고 싶은 그들을 완벽하게 타자화 할 수가 없다는 것이 나의 비극.
몸이 화를 못 받다가 맘을 바꿔먹었더니(사실 화내는 것도 에너지라 기를 다 씀) 천천히 회복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요즘엔 거의 나아서 마음만 먹으면 좀 오래도 앉아있을 수 있다. (그러니까... 내 몸은 무리 못하게 아껴주지 않으면 이제 바로 파업과 태업과 뭐 그런 몸이다...) 계속해서 안 읽히고 집중도 안되고 그랬는 데, 맘을 비우니 뭔가 슬슬 꿰어지고 있어서 읽는 게 신이 난다. 술을 안 마셔도 일상이 좀 재밌을 정도다. 아플 때 너무 힘들었는데, 배운 게 좀 있다. 나만 나를 닦아 세운다는 거. 지치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거.
조용한 거실에서 스탠드 켜놓고 책이랑 골똘하게 대화하고 있을 때, 그 시간이 난 참 좋다. 오늘 아침엔 이제 좀 마음이 편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할 정도로 불안하지 않다. 나는 나를 좀 더 믿어도 된다고 확신했다. 내가 읽을 수 있을 만큼 읽어두려고 하고, 내가 느낀 만큼만 써두려고 한다.
바로 이전 글에 글씨가 되고 싶어 했던 사람(지하 인간)에 대해 한껏 비아냥 댔는 데, 절반은 취소다. 이런 시절에 무용하게 읽는 일은 역시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년 전의 지하 인간은 현 시대에 오면 책을 읽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다른 매체들로도 알았다는 느낌은 충분히 받을 수 있으니까. 보고 듣는 것(유튜브)만으로도 세상을 다 안 것처럼 충족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시대에 글씨로 된 벽돌책을 눈비벼 가며 읽는 건... 마치 컴퓨터 자판도 어색해 한다는(설에 들은 실화다) 포노사피엔스가 굳이 주머니 칼을 휴대하고 다니며 연필을 깎는 것처럼 낭만적… (물론 전 연필깎이가 있습니다..) 암튼 요 책을 읽고 나니 어떤 공부를 하면 안되는 지는 좀 더 명확해 졌다할까?
“엄기호 | 그런데 이런 공부 중독의 가장 심각한 폐해는 뜻밖에도 만능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사회학을 공부하고 교육 관련 일을 하다 보니 느끼는 게, 어느 시점에서 한국 사회에서 아이가 양육되고 교육되는 방식이, ‘나는 중요한 사람이고, 나는 뭐든지 다 할 수 있고, 내가 다 컨트롤하고 평정해야 하고…’ 이런 어마어마한 만능감을 심어준 것 같아요. 그런데 실상 자기 현실은 너무 비루하거든요. 할 수 있는 건 없고….
하지현 |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하는 거죠. 그래야만 정신 승리가 가능하기 때문이에요. 타석에 서지 않으면 스트라이크 아웃인지 홈런인지 아무도 알 길이 없어요. 그래서 절대 타석에 서질 않아요. 그것이 이 친구들의 솔루션이에요.
엄기호 | 그러니까 한편에는 만능감, 신처럼 되어버린 자기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너무나 아무것도 아닌,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늘 야단이나 맞는 자기가 있는 겁니다. - <공부 중독> 중에서”
왜 이것까지 알아야 해? 이렇게까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 투덜대지 않으려고 한다. 그들의 방식으로 아는 게 아니니까. 난 이제 정말 몸으로 아니까. (나의 감정은 나의 체현된 사상이며 나의 지표다 - 이것도 희진 샘 말인데 난 이게 무슨 말인지 몸으로 안다🥲) 알고 더 이해하게 되면 좀 뿌듯하니까. 나를 미워하지 않게 되니까. 이런 내가 좀 기특하니까. 내가 알고자 하는 데 까지가 나라는 인간이고, 내가 모르고 싶어 하는 데 까지가 나라는 사람이라, 그런 나 자신을 담담히 받아들이려고 한다. 더 이상 아는 게 부끄럽지도 모르는 게 쪽팔리지도 않다. 내가 열심히 읽어서 알게 된 것들은 나의 삶을 좀 더 긍정하게 만든다. 더 알고 싶으면 배움을 좀 구하러 다녀야겠지만 그건 좀 더 시간과 용기를 내야 하는 일이라. 일단은 이 정도에서.
당연한 말이지만 내 공부는 이 책에서 말하는 ‘공부중독 =교육 중독’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었다. 원체 중독에 취약한 인간이라 아. 알코올 중독 끊었더니 활자중독인가... 걱정이 되서 (내가 이렇게 메타인지력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활자중독은 아닌 듯. 글씨 어려워. 안 읽고 둔너서 텔레비전 보는 게 더 행복함 ㅋ) 읽었는데, 시점이 2010년대 중반이라 좀 지난 감이 있었지만. 뜻밖의 스스로가 흐뭇해지는 독서였다.
“공부가 재미없어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느 순간부터 공부가 삶의 문제를 푸는 도구가 아니라 삶을 식민화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부를 하면 언어를 배우게 된다. 세상을 읽고 삶을 해석하는 언어가 늘어나는 것이 공부의 과정이다. 예를 들면 ‘구조’라는 말을 알 때와 그러지 못할 때 세상을 인식하고 설명하는 방식은 획기적으로 달라진다. 공부는 사실 이렇듯이 세상을 읽고 삶을 해석하는 언어라는 좋은 도구를 획득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치명적인 부작용이 일어난다. 세상과 삶이 지나치게 단순화되고 추상화된다는 것이다. 세상의 그 어떤 언어도 삶을 그 자체로 풍부하게 재현할 수 없다. 모든 재현은 불가피하게 삶을 추상화하고 규격화한다. 이 규격화의 과정에서 자칫하면 삶이 도식적인 것으로 분해되고 내가 겪었던 경험은 형해화된다. 대신 그 자리를 개념들이 차지하면서 나의 경험은 일반화(보편화가 아니라)되는 경우가 종종 벌어진다. 구체적 삶은 왜소해지고 대신 이미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어떤 개념들이 그 구체적 삶의 자리를 분해한다. 나의 삶은 그 개념들의 지식 권력의 정당성을 확인해주는 도구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한다. - <공부 중독> 중에서”
나는 내 공부가 재밌다. 삶의 문제를 풀어준다. 내가 왜 이렇게 생겨먹었는 지, 과연 이런 사회에서 살아갈 수 없는 부적응자인 건 지, 내가 대체 뭘 잘못했는지(확실하다. 모지리라 부족했을 진 모르겠지만 잘못한 거는 없는 거 같다.), 책에서 어떤 언어들이 알려줬다. 난 구체적 삶을 개념에 내어준 적도 없고, (감히?? 언어 따위가 귀한 내 삶을ㅎㅎㅎ) 개념의 언어로 내 삶에 부딪혀 오는 존재들을 왜소하게 만든 적도 아마 없다.
호기심(읽고 싶은 책들)은 내가 지구에 오래 머무르고 싶은 이유가 되었고, 미분과 적분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다음 생애의 목표가 되었다. 내가 책을 읽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그 사실 만으로도) 밥벌이 과정에서 종종 훼손되는 존엄을 지키는 자존감으로 확실히 작용한다. 물론 거래처엔 비밀이다ㅋㅋㅋ (꼴페미 독서광은 철저히 부캐)
나 자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를 잘 몰라서, 사람이라는 존재들을 잘 몰라서, 적당한 거리 조절을 어려워해서 관계에서 실수와 실례와 실패를 거듭했다. 여전히 사람을 잘 모르겠어서 당황스러울 때가 많지만, 적어도 내가 나 자신을 알려고 하는 만큼, 내가 보호해야 할 나의 내면이 생겨나는 만큼 내게 중요한 타인들도 더 잘 보호할 수 있게 된다는 걸.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나를 없애는 사랑을 하지 않는다. 내가 없었기에 그렇게 쉽게 나를 없애려고 했던 거다. 이렇게 어렵게 만든 나를 지금의 나는 그렇게 쉽게 없앨 수가 없다.
이걸 터득하는 데 이렇게까지 읽어야 했다는 게 너무 웃기다. 이렇게 웃긴 나는 내가 좋고, 니 주제에 왜 그렇게 자존감이 높냐고 누가 의아하게 생각하면 또 난 곰곰이 생각하다가 더 잘 웃을 수 있다는 걸 이젠 안다. 앞으로 내게 보이는 세상을 드러낼 수 있을 만큼의 공부를 더 할 수 있을지, 하고 싶어 할지는 미지수이지만…. 내일 아침에 일어나고 싶은 이유는 분명히 읽다 만 남은 페이지... 때문인 건 확실함🤣🤣
암튼 공부 중독은 아닌 것 같다. 이 책에서 말하는 공부 중독도 혹시나 싶었던 다른 공부 중독도ㅋㅋㅋ 그냥 평생 안 하다가 이제 와서 책 좀 볼라니까 책을 쇼핑하는 것(뒤메질..)이 넘나 재밌었던 것으로? (걍 책 쇼핑 중독..)
지난주부터 본인의 생파 주간이라(;;;) 주 1회 친구들 만나기를 하고 있다. 우린 MZ라 이놈의 mbti이야기를 하기 싫어하면서도 않을 수가 없는데(주파일이야기를 할 수는 없쟈냐..), 내가 너무 N인 것 같아서 가끔 걱정된다고 그랬더니. 현실 세계 친구 중 가장 가방끈 긴 A가 자신은 분명 INFJ였는 데 지금은 리얼참트루 S가 되었다며.
- 언니 N병 고치게 해드려요?
(전 직장 동료이기도 한 A는 신학 대학원 석사를 마치고 속세로 돌아와 앞으로의 인생에서 절대로 다시는 논문을 쓰지 않기 위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까 고민하고 있다. 아아. 공부. 공부란 무엇인가.)
모르는 존재는 우리에게 두 가지 감정을 일으키죠. 하나는 두려움이고 하나는 호기심이에요. 공부라는 것이 끊임없이 모르는 존재를 만나는 일이잖아요? 모르는 걸 만났을 때 이 두 가지 감정이 다 일어나요. 그런데 중요한 건 ‘두려움을 어떻게 호기심으로 바꿔줄 것인가’죠. ‘낯설긴 하지만 재미있네?’ 이렇게 두려움을 호기심으로 전환시켜주는 것, 그렇게 꼬시는 것이 교육이에요. 물론 낯선 것을 만나면 기본적으로 너무 두렵죠. 그런데 그런 두려움을 호기심으로 바꿀 수 있는 기제가 지금은 딱 끊겨 있어요. 이렇게 되면 성장이라는 것이 절대 일어나지 않죠. 자기 안의 세계, 자기가 알고 있는 세계에만 안주하게 돼요. 학생들은 이런 얘기도 많이 해요. 지금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는데, 뭘 굳이 바깥으로 나가야 하고, 굳이 새로운 것을 알아야 하고, 새로운 존재를 만나야 하느냐고요.
결국은 이 공정함이라는 게 어떤 공정함인가, 누구를 위한 공정함인가, 라고 질문할 수밖에 없어요. 이 판타지는 정말 안 깨지는 것 같아요. 이게 마치 모두를 위한 공정함이라고 생각하죠. 이게 모든 사회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디에서도 다 공정하게 돼야 하고, 그게 공부였고, 공부하는 방식이고, 평가하는 방식이고 그런 식으로 가는 거죠.
그런데 한국은 정말 표준화된 라이프스타일이 너무 강력하게 작동하다 보니까 계속해서 삶을 1차 방정식으로 풀려고 노력해요. 사실은 고차 방정식으로 바뀌었는데 말이죠. 계속해서 1차 방정식으로 풀려고 했을 때 자기가 풀 수 있는 ‘해解’, 그건 공부밖에 없으니까, 공부를 통해서만 답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훨씬 더 공부에 집착하게 돼요. 학생들이 아니라 부모들이 말이죠. 모두가 훨씬 더 공부에 매달리는 거죠. 이게 아이러니인 것 같아요. 아직까지는 공부가 가장 결정적인 변수이기는 하지만 그 공부라는 것이 더 이상 유일무이한 변수는 아니라는 걸 많은 사람들이 점점 깨달아가고 있어요. 그런데 그러다 보니까 더더욱 확실한 변수, 손에 잡히는 변수인 공부에 집착하게 되면서 지금의 삶이 고차 방정식이라는 것을 애써 외면하거나 아니면 모른 척하거나 하면서 공부가 만인의 고통의 근원이 돼버리는 거죠.
이전에는 공부가 생애사적 기획을 하는 데 가장 강력한 무기였죠. 그런데 그게 잘 안되는 상황이 되고 있단 말이죠. 그렇다면 이제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이 나와야 하는데,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이 출현해야 할 그 시점에 다양한 교육이 출현해버린 거죠. 그런데 다 양한 교육이란 게 말 그대로 다양한 교육이 아니라 교육이 다양한 영역을 식민화해버린 형태예요. 이게 정말 스쿨링하는 사회인 거 죠. 어떤 의미에서는 ‘스쿨‘이 문제의 근원이 었는데 그걸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걸 굳이 학원에 가서 배워야 하는가? 굳이 학교화해야 하는가? 커리큘럼화 해야 하는가? 인성 교육도 그렇죠. 인성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정말 웃기는 말입니다.
소규모 자영업을 하거 있거나 생산직에 종사하면서 어느 정도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 어 있고 삶의 에너지는 많은 분들, 이런 분들이 온라인 동호회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활발 하게 글도 올리는 모습들을 봐요. 글의 수준이 상당해요. 그런데 온라인상의 이런 동호회는 엄밀하게 봤을 때 어디까지나 취미의 영역에 속하죠. 삶에 있어서 실존적 부분, 가치관이나 정체성의 문제로 접근을 할 때에는 약간 다른 부분이 필요할 수 있어요.
동호회라는 게 대부분 취미 활동이라 그것 이 ‘나라는 사람‘의 중심 정체성, 일을 하는 나, 사회속의 나의 1번으로 삼기에는 모자란 경우가 많아요. 낚시에 정통한 누구누구입니다, 라고 하긴 좀 그렇죠. 실제로 이분들은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건 내 영역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런면 에서는 이분들이 자기가 일하는 삶의 영역에 서도 자신감을 가지고 열심히 활동하고, 자기주장과 표현을 할 수 있는 장이 열렸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저 돈을 버는 밥벌이가 아니라 그 안에서 존재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으면 해요. 그게 대학을 나와야 하는 일이거나, 전문직이 아니라고 해도 말 입니다.
다시 프레임을 말씀드리면, 지능의 영역이란 낯선 상황에 잘 적응하기 위해 지금 이곳이 굴러가는 보이 지 않는 이치를 깨달아가는 과정이거든요. 그 이치를 잘 깨달아서 나를 변화시키거나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쌓는 것이 핵심이죠. 공부라는 것은 그 지능이 실제 내 삶에서 실행 능력을 높여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백데이터들을 모으는 것이고요. 그리고 그 것들이 모여서 인포메이션이라는 정보체가 만들어지 고 이것이 하나의 정보의 체계적 묶음, 시스템으로 만 들어지면 그걸 지식이라고 하죠. 그런데 이런 지식을 통해서 여러 영역에서 비슷한 맥락들을 공부하다 보 면 여러 군데에 다 통용되는 하나의 정수를 찾아내게 돼요. 그럼 우리는 지혜를 갖게 되었다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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