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사회학이 나에게 알려준 것들 __ 에바 일루즈
“(165)서래 : 나는 왜 그런 남자들하고 결혼할까요?
… 해준 씨 같은 *바람직한* 남자들은 나랑 결혼해 주지 않으니까.”
나는 이 장면에서 붕괴- 되었던 것 같다. <헤어질 결심>은 분명 헤테로 여성들의 환장하겠는 어떤 지점을 건드리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그걸 뭐라고 딱 잡아챌 수는 없지만… 뭐랄까 이 영화를 본 후 난 어떤 세계와 ‘헤어질 결심’을 했다가 그것이 너무 섣부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가, 정말로 정말로 포기해야할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들어서 울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내 몸의 반응이라서…. 인정하기 싫었지만, 내가 그런 것들을 원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던 것이다. 영화보고 국밥 먹으면서 우는 것으로 떠나 보내지면 좋으련만, 계속 마음이 아팠고, 무언가를 더 읽을 필요를, 그것을 더 써나갈 필요를 느꼈다. 페미니즘 책을 읽다보면 낭만적 이성애(로맨스)가 가부장제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인 건 알게 된다. 동시에(잘 만든 로맨스 영화를 보면서 좀처럼 비웃지 못하고 함께 아파하고 기뻐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얼마나 열렬히 사랑하고 사랑받는 데에 진심인지도 알게 된다.
먹고사니즘이 팍팍해질 수록 어쩌면 더 사랑(이라는 환상)에 진심이 되겠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다수가 원할 수록 그 값이 올라간다. 사랑의 가격도 올랐다. 부동산, 적당한 능력과 자존감, 경제 · 문화 · 외모적 자본… 그것들은 제도가 안내하는 사랑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그것을 갖춘 사람들에겐 사랑이 좀 더 수월하겠지. 다행스럽게도 난 그 수월함을 배 아파하던 시기는 지나간 것 다.
*바람직한.* 그것을 못 갖춘 사람들에게 사랑은 신포도다. 대다수의 한국 청년들에게는 신포도다. 제도가 유포한 사랑이 더는 가능해지지 않은 자리에 ‘혐오’(여혐남혐)만 남아있다고 떠들 수는 있겠으나… 그것은 절반의 절반도 안되는 진술이다.
제도에 이르는 길이 혹독해졌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제도 자체를 사유하게 한다. 사유하기 시작하자 난 사랑이 어려웠다. 이루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다. 쉬워보였다는 것이 환상이었다. 그것이 제일 어려운 것이라고 알려주었다면 이렇게까지 괴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에게 온갖 여혐을 버무려 머리어깨무릎발무릎발눈코입귀모공에게까지 처발랐던 2000년대를 끝으로 사라진 마지막 구원 담론 이성애 로맨스의 횡포는… 말 그대로 횡포라서… 그것이 휩쓸고 지나간 내게 남혐 이상의 것을 남겼다.내가 믿었던 사랑이 사랑이 아니었다고도 할수는 없지만 사랑이었다고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보였다. 제도가 안내하는 사랑으로 진입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는 것(신포도) + 제도가 안내하는 것이기에 사랑(그것은 진짜 사랑인가?)이기 쉽지 않다는 것 + 제도(이성애-가부장제) 자체에 치명적인 허점(대체로 여성의 보이지 않는 노동)이 있다는 것 + 그러나(어쩌면 이것이 포인트인데) 사랑이 끝나기 전까지는 제도도 점도 나의 지난한 노동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것(내가 이해하려는 노동을 멈추자 관계는 끝났다). 나를 다 내어주고라도 유지하고 싶은 관계와 정서적 신체적 친밀함이 있었다는 것.
…
그리하여 나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도 없지만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는 그것들을 끊어 보기로 했었다.
(헤어질 결심?)가벼운 연애… (사랑 말고) 정도는 해볼 수도 있었겠지만… 아무튼.그런데. 영화. 를 보고난 후. 마음이 너무 아팠기 때문에…난 여전히. 어떤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관계를 원하고 갈망한다는 것을 알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해야지. 사랑하고 싶네. 사랑받고 싶네. 포기했다고 생각했는 데, 포기 못했네. 그런데 그거 원하면 내 팔자 내가 다시 꼬는 건데… 너는 그러고 싶니? 아니. 그러고 싶지 않은데? 아니. 그러고 싶은데? 아니? 아니, 아니! 하지만… 완전히 아니다!라고 할 수 없는 애매한 나 자신…을… 결국 인정…하고 난 뒤에는 뭐가 남나. 그냥 그런 내가 남는다. 그런 것을 겪는 내가 남는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걸 겪은 나를 수습하는 내가 남는 것인 데… 그건 약간의 비참함이 따라온다.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다. 무튼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 사람이라 이렇게 살지만, 이렇게 살지 않아도 되는 사람에게 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게 아는 것은 그렇게 몸으로 아는 것이다. 아, 그렇구나, 글로 잘 배웠습니다~ 오, 간단하네, 명쾌하네~! 그런 방식으로 알아지는 게 아니다. 나는 그렇다. 나는 그렇다. 나는 그런데…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x)<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 이 책에서 일루즈는 현대사회에서 지극히 ‘탈계급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로맨스라는 현상에 사회학의 전통적이고 날카로운 개념인 ‘계급’을 다시 들이대고, 사랑의 기쁨과 고통의 커니즘을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에서 찾는다. 일루즈가 볼 때 낭만적 사랑은 이 자본주의 문화의 모순들을 결합하고 응축하고 있는 장場이다.
(xii) 하지만 심리학과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려는 사회학이 사랑의 고통과 같은 ‘심적 고통’을 소홀히 다루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루즈는 후기 근대성의 조건하에서 감정적 고통에 대한 면밀한 사회학적 분석은 사회학의 기본적이고 아주 적절한 사명으로 여전히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현대의 심적 고통은 자아의 취약함을 반영하는 것이며, 그러한 취약성 또하나 감정적인 것인 동시에 ‘제도적인’ 것이기도 하기 떄문이다. 일루즈는 그중에서도 특히 로맨스의 고통은, 더욱 심각한 것으로 고려되는 다른 고통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그냥 지나가는 김에 언급하는 정도로 다룰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
이런 글씨들을 읽어 내서 내가 느끼는 것들을 속속들이 구조적/사회학적으로 분석한다고 한들, 내 몸의 감정, 감각, 느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소설과 영화는 나를 좀 더 심각하게 만들고… 내 몸에 반응을 일으켜 나 자신이 좀 더 취약해지는 것 처럼 만든다…
그렇다고 굳건해지기 위해 심리학에 기댄다 한들 (일루즈의 지적답게) “(xv)정신분석학, 임상심리학, 치료요법은 사랑과 그것의 실패를 개인의 심리발달 역사에 의해 설명되어야 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그리하여 사랑과 에로틱한 것의 영역을 개인의 사적 책임에 귀속시키고, 개인을 낭만적 비참의 불가피한 담지자로 만들었다. 그 결과 이러한 관점에서는 사랑의 고통은 자기 자신, 자신의 사적 역사, 그리고 자신을 틀짓는 능력과만 관련되는 문제가 된다.” 결론적으로는 공허할 뿐 이다. 그러니 글씨는 글씨다. 나는 글씨로 삶을 좀 똑똑하게 살아볼까 싶지만 언제나 가장 멍청한 방법이지 않나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도 내가 도모한 방법 중 이게 그나마 가장 나았다. (기록이 남으니까...)
인간을 만나기 싫어 내가 도피한 방편이기도 한 책은 이렇게 생겨먹은 나 자신(그것에 대한 인정을 대체 어디까지?)이 살아있으므로 계속해서 나를 침범하는 이 구조(그것을 바라보 위한 노력은 어떤 긍정적 정서를 제공하지만 본질적인 무력감은 완화되지 않는다. 되려 더 강화되기도.)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는다. 아니다. 당장 알려주지 않는 것일 게다. 그러니까 읽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삶을 살아야 한다. 돌이켜보면 부단한 반복 끝에 내가 나를 토닥이는 기술은 확실히 늘었다. (그 기술에서 담배와 술의 함량을 덜어내고 있는 것은 개인적으로 장한 일이다.) 그러나 천천히 차근차근 괜찮아지다가도 어느 날은 그런 노력들이 모두가 부질없게 느껴지는 날이 온다. 회복 탄력성, 리질리언스, 나는 그런 말들을 생각한다. 그래, 어떻게든 회복은 되겠지. 그런데 회복 중일 때…의 기분은. 그 무망함은. … 더 적기 싫다. 어쨌든. 책 답답해서 덮어 놓고 오랜만에 연애에 또(ㅋㅋ) 실패한 메일바디 친구랑 술 마셨다.- 그래서 네가 원하는 관계가 구체적으로 뭔데.
- 안정적인 친밀함. 합리적인 토론을 통한 문제의 해결 방안 모색.
- 미안한 데, 여자는 그거 안돼. 그 합리적 주체 자체가 분열되어 있다니까. <제2의 성>이 그 내용에 대한 1000페이지 각주야. 페미니즘 읽는다고 해결될까? 아니, 더 복잡해져. 내가 어느정도 수준까지는 자명하다고 여겼던 시선 자체를 흔들어야해. 그런데 매번 계속 흔들면서 어떻게 살아. 그러니 쉬었다가 조금 파먹고 또 쉬었다가 조금 파먹고. 나같은 훌륭한 인간도 그런데, 그런 훈련이 안된 여성이 그게 잘도 되겠다. 그냥 *친밀함* 하나만 해. 안정? 안돼. 합리? 안돼. 토론ㅋㅋㅋ?ㅋㅋㅋㅋ 그것에 임하는 주체가 분열되어 있다니까? 해결? 풉. 넌 니가 추구하는 연애와 헤어질 결심이나 해.
“(893) 여자는 애인의 눈을 통해서 보려고 한다. 그가 읽는 책을 읽고, 그가 좋아하는 그림과 음악을 좋아하며, 그와 함께 보는 경치와 그에게서 오는 사상에만 관심을 둔다. 그의 우정과 적의, 그의 의견을 자기 것으로 한다. 그녀는 자신에게 질문할 때도 그의 대답을 들으려고 노력한다. 그녀는 자기 폐에 그가 이미 들이마신 공기를 담고자 원한다. 그녀에게 그의 손을 통해 받지 않은 과일과 꽃은 향기도 맛도 없다. 그녀의 장소 감각까지도 전복된다. 세계의 중심은 이제 그녀가 서 있는 곳이 아니라 애인이 있는 곳이다. 모든 길이 그의 집에서 출발해 그곳에 이른다. 그녀는 그의 말을 사용하고 그의 동작을 다시 하며, 그의 편집증과 버릇까지도 닮는다. “나는 히스클리프이다”라고 『폭풍의 언덕』의 캐서린은 말하고 있다. 그것은 사랑에 빠진 모든 여자의 외침이다. 그녀는 애인의 또 하나의 화신이고, 그의 반영이며, 그의분신이다. 즉, 그녀는 그다. 자기 자신의 세계를 우연성 속에서 붕괴하게 내버려둔다. 그녀는 그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사랑에 빠진 여자의 최고의 행복은 사랑하는 남자에게 그 자신의 일부분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그가 “우리”라고 말할 때 그녀는 그와 결합해 일심동체가 되며, 그의 위엄을 공유하고 그와 함께 세계의 나머지 부분에 군림한다. (...) 진정한 사랑은 상대의 우연성, 즉 상대의 부족함, 한계 그리고 그의 근원적 무상성을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구원임을 자처하지 않고, 상호 인간적 관계를 희망할 것이다.”
과거의 나를 돌이켜보면 나는 내게 주어진 성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사랑(로맨스)을 해왔다. 그렇게 해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서로가 주어진 젠더 롤에 충실했을 때 사랑에 가까운 상태라고 느꼈었다. 꼭 사랑 뿐만이 아니다. 대다수의 남사친과의 관계도 그랬다. 장난을 치고 놀려도 그들의 에고를 다치게 하는 일은 눈치껏 피했다. 내가 그들이 기대하는 어떤 역할(우쭈쭈, 부둥부둥, 그래도 넌 다르지!라는 말을 듣고 싶어 했었다)을 멈추자, 그토록 많던 남자 사람 친구들과는 대부분 멀어지게 되었다. 특히 너 좀 변했다는 말은 수도 없이 들었는 데, 그래도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대상에게 “왜 이렇게 이기적여졌냐”는 소릴 들었을 때는… 정말인지 참을 수가 없어서… 아주 표독하게 영원히 아디오스 할 대사들을 씹어 뿌려주고… 그래도 우리 우정이… 이렇게…?!! 그게 아쉬워서 다음 날 미안하다고 싹싹 빌었다. 하지만…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을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대상에서 들었다는 사실은 그보다는 나에게 입힌 내상이 더 컸던 것 같다. 고심 끝에 그 친구의 연락처를 아주 지워버리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었다.그건 당연하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옹호받고 싶을 것이고 칭찬받고 싶을 것이고 인정받고 싶을 것이며 관계에서 조금도 다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것을 해주었기에 그들은 나를 좋아했던 것이다. 내가 그것을 그들에게 하지 않자 그들은 나를 이용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칭찬했던가? 인정했던가? 조금도 다치지 않게 했던가? … 그들이 원하는 것이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있을 때에만 그렇게 했었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 그건 무슨 관계 였을까. 그들은 사회 생활 하느라 손상된 에고가 좀 올라갔을 테지만… 정작 나는 그 관계에서 어떤 충족감을 느꼈나. 난 그들을 보살피고 돌보면서 기뻤구나. 그들이 자존감을 찾는 것이 좋았어. 그런데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왜 나를 돌보지는 못했던 걸까? 그러한 것들을 톺았었다. …인정을 원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원하니까. 다만 나는 관계 유지를 위해 자아를 조절하는 것을 멈추었을 뿐이다. 내가 그렇게 지내기 시작했을 때, 여자 친구 목록에는 주목할만 한 변화는 없었다. (비슷한 수준의 정서적 노동을 했던 몇몇의 여자 선배들과는 의식적으로 이별했다.) 하지만 남사친 목록은… 결론만 말하면 나와의 관계 유지를 위해 자신들의 자아를 조절하는 노동을 하는 남사친은 고작 두 명이었다. 허탈할 정도로 적은 숫자였지만 있는 게 다행였다. (아니었으면 완전한 남성 혐오자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원하는 것이 있을 때만 자아를 조절하는 그남들의 특성을 ‘한남성’이라고 작은 따옴표 쳐 묶어 두었다.
“(128) ‘사랑’이 있고 ‘사랑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 사이에는 연옥도 없다. 천국과 불지옥뿐이다. 좋은 관계도 지속되려면 상호 노력이 필수다. 그런데 다른 인간사보다 인간 ‘관계’는 사적인 문제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의지를 지니고 만들어가려는 실천 없이도 저절로 유지된다고 생각한다. 괴로운 술자리, 형식적인 문자조차도 인간관계를 잇는 장치다. 사랑은 말할 것도 없이 인생에서 가장 복잡하고 치열한 일이다. 그런데 이를 선언하거나 주장만 해놓고 상대방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혹은 절대로 ‘안 이루어진다’고 좌절하는 경우도 모두 혼자만의 생각이다.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므로’ 자신이 피해자라고 단정하기 쉽다*.”
벌써 작년의 일이다. 샘, 저는 저를 사랑하는 것이 왜 그렇게까지 힘들었을까요…? 그 말을 꾸역꾸역 하면서 다시 찾은 상담실에서 엄청나게 울었다.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나를 떠나 보내는 것은 아주아주 많은 애도를 필요로 하는 거라 울고 울고 또 울어도 가끔 또 울게 된다. 슬픔은 울어야 빠져나간다. … 그렇게 나를 겪는다….
(낭만적 이성애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추어서…)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하자, 사랑 받을 수 없게 된 것은 역설적이다. 지금 이 세계는 나를 제대로 사랑하려면 사랑 받는 것을 포기하라고 알려준다.
그것은 어렵고, 외롭고, 또 견딜만 하다가도 어느 날은 한 없이 쓸쓸해 지는 그런 일이다.
글로 이렇게 쓰지만… 글씨로 이렇게 쓰는 것으로…
…
표현될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지. 50살의 나여. 너는 이토록 쓸쓸했도다. 가을 바람 쌀쌀. 너는 쓸쓸.
지금이 니 인생에서 제일 젊은데…ㅋㅋㅋㅋㅋㅋㅋㅋ 아쉽네. 하지만 니가 더 젊을 때 한 그것은 함량 미달의 사랑였단다. 길게 보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 게 맞았어.
나는 나를 사랑하는 방법에 조차 아직 가닿지 못했다.
나는 내가 나를 미워하는 짓들 만을 가까스로 멈추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지!)
그러나 나는 사랑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인간의 믿음은 이상한 것이라서 믿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보여준다고 한다.
내가 믿는 사랑은 내가 발명해야하는 종류의 것이다.
“(125) 사랑은 상대(대상)와의 관계가 아니다.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나의’ 사건이다. 흔히 말하는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는 행위. 자기 자신과의 관계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 결혼, 이성애주의, 로맨스 문화, 헌신, 희생 따위를 포함하는 제도와 문화적 각본(cultural script, 이데올로기)이 있다. *인간은 사람이든 절대자든 물화된 대상이든 무언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살지 못하는 존재다*. 인간의 조건은 사회적 삶과 생명체로서 유한성 두 가지 인데, 생명체로서 생로병사의 고통을 견디기 위해 우리는 사는 의미를 찾아야 하고 사랑은 가장 절실한 방도다. 사랑이 없다면 삶도 없다. 사랑 자체가 소중해서가 아니라 사는 의미와 관련되기 떄문이다. 특정한 개인/파트너와의 애정을 추구하는 이들이나 사회적 권력, 돈, 명예를 성취하려는 노력 역시 모두 사랑받기 위한 몸부림이다.”
나 하나 사랑하는 방법을 제대로 알고 가는 것 만으로도 괜찮은 인생일지도 모르겠어,라고 생각한다.
이래저래 아픈 나를 겪는 것은 나를 내 삶을 사랑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는 아프기 싫긴 하지만 아픔으로써만 나를 인식한다. 어떤 의미에서 아프지 않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나는 내 삶을 사랑하고 있다.
내 사랑을 발명하는 일은 현재 진행형이다.
삶을 끝내지 않고서는 완료되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그래도 *나는 소중하므로* 가장 좋은 사랑을 발명 할 것이다.
아, 물론 그건 다만 내게 좋은 것 일 따름이다. ㅋㅋㅋ
서재 산책하다 좋은 글을 발견해서 트랙백 *사랑의 사회학이 내게 알려준 것들* (https://blog.aladin.co.kr/731250183/13954024) 걸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