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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카페의 노래
카슨 매컬러스 지음, 장영희 옮김 / 열림원 / 2014년 3월
평점 :
사랑의 실체는 조금 지독한 ‘투사’인게 아닐까. 나도 안다. 굉장히 유아론적인 생각인 거. 하지만 이별의 징후를 인식할 때는 어김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보고 싶은 것을 그에게서 보았구나. 그때 나에겐 그것이 필요했구나. 내가 나에게 줄 수 없는 것을 그들에게 기대했으니, 언제나 빈번히 사랑은 실패했을 것이다. 그런데 결국은 내가 알고 있는 것 만큼을 본, 내가 보고 싶은 것을 짜깁기해서 본 그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맹렬했으니 그것들이 사랑이 아니었다라고 하지는 못하겠다. 그러니까 내가 본 것은 내가 보고 싶어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때, 나만은 볼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은 그건 사랑에 가까운 무엇이었다. 그러나 그건 그냥 내가 본 것일 뿐, 정말은 그가 아니라는 생각. 생각이 거기에 가닿으면 그에게 미안해진다.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노력을 하는 순간에도 나는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먼저보고 싶어했었다. 너는 있는 그대로 사랑받고 싶지 않았을까. 마치 나 처럼. 그런데 나의 투사를 걷어내고 나면 우리의 사랑은 애초에 가능했을까.
지금 막 나는 너를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너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는가. 다시 말해, 나는 너를 통해서 나의 어떤 부분을 보고 있는가? 우리의 외모와 나이와 성별과 각자가 가진 기구함은 여기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보지 못하는 그것을 내가 볼 수 있다는 것 그 자체. 미스 어밀리어가 꼽추에게서 본 것. 라이먼이 마빈에게서 본것. 어쩌면 나는 너에게서 내게 없는 부분을 본다. 네가 더 없이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부분, 그것은 내게 없는 것이기에 그토록 강렬한가.
나의 유아론적 추론대로 사랑의 시작이 강렬한 투사의 감정에 불과하더라도 그것이 사랑으로 이름 붙여지기 위해서는 겪음이라는 과정이 필요하다. 존재를 곁에 두고, 무언가를 함께하며, 주고 받는다. 때로는 침식되고 부식되고 결국 보고 싶지 않던 것들이 드러나며 나 자신도 몰랐던 내 안의 것들이 헤집어진다. 사랑이 기이한 것은, 기꺼이 헤집혀지기를 취약해지기를 망가지기를 서슴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이 질문은 의미가 없는 것 같다.
다른 질문.
그런데 그건 나고. 너는?
나는 네가 나를 통해 본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앞으로도 영원히 알 수 없겠지. 알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어쨌든 사랑이라는 진실은 사실 없고 그냥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사랑이라고 착각한 어떤 인간과 다른 인간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나 자신을 위해 방어선을 최대로 친 그저 그런 사후적 해석에 불과할 뿐. 그 경험들을 가치없는 것이라 말하면서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사랑이 그의 존재로 인해 촉발된 내 안에서 불러일으켜진 어떤 지독한 투사의 감정에 불과할 뿐일 지라도 분명히 그것은 나의 어떤 부분을 변화 시켰다.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안다. 다시 겪을래? 물으면 아니오. 원래 없을래? 그건 더 아니오. 나는 더 나빠졌을지도 모르지만, 켜켜이 문을 잠그고 아무도 들이지 않겠어 하는 사람이 되었지만, 어쨌든 나는 변했으니까. 나는 너로 인해 아팠지만, 네가 남기고 간 모든 흔적이 상처인건 아니니까.
관계가 시작되고 주고 받음 속에서 만들어질 필연적일 수 밖에 없는 상처와 오해는 흔해 빠진 진부한 현상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내 상처가 가진 고유한 형태는 다른 누구도 아닌 너로 인해서. 네가 아니면 영원히 볼 수 없었을 지도 모르는 내 안의 어떤 변화로 인해서.
미스 에밀리어의 사랑은 상처를 감당할 만큼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지만, (아름답지 않더라도) 고립을 자처하던 그녀가 느닷없이 사랑이라는 결단을 내린 까닭은 그가 라이먼을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었던 어떤 무엇(일반적인 매력은 결코 아니다) 때문이었을 거다. 그것이 무엇인지 마을 사람들 모두는 알 수 없고, 독자 역시 알 수 없지만. 그들의 이야기에 빗대어. 내게서 일어났던,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보아도 그나마 일어났다면 그(들)여서 다행인. 그러니까, 나는 별로 꺼내보고 싶지 않았던 그걸 그냥 간신히 사랑이라고 불러보고 싶어졌다. 나에게도 그런게 있었지. 있었다고 해두고 싶어졌다.
당신은 나에게서 당신이 원하는 것을 본다.
나는 당신에게서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본다.
각자의 안에 있는 것을 기꺼이 꺼내보일 수 있을 만큼의 용기. 그것이 성립되고 나면 상처의 유무와 강약은 중요하지 않아진다. 해피엔딩이었으면 좋았겠지만 나는 이제 어른이고 그래서 해피엔딩에 집착하지 않는다.
글의 시작에서 말한 사랑에 대한 주절주절 정의를 바꾸고 싶다. 지금의 나에게 사랑의 정의는 조금은 지독한 투사로 부터 시작되어 곁을 내어주는 용기인 것 같다.
에밀리어는 스스로를 유폐시킨 그 집에서 언제쯤 나올 수 있었을까.
우선 사랑이란 두 사람의 공동 경험이다. 그러나 여기서 공동 경험이라 함은 두 사람이 같은 경험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랑을 주는 사람과 사랑을 받는 사람이 있지만, 두 사람은 완전히 별개의 세계에 속한다. 사랑을 받는 사람은 사랑을 주는 사람의 마음속에 오랜 시간 걸쳐 조용히 쌓여온 사랑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사랑을 주는 사람들은 모두 본능적으로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사랑이 고독한 것임을 영혼 깊숙이 느낀다. 이 새롭고 이상한 외로움을 알게 된 그는 그래서 괴로워한다. 이런 이유로 사랑을 주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딱 한 가지가 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사랑을 자기 내면에만 머무르게 해야 한다. 자기 속에 완전히 새로운 세상, 강렬하면서 이상야릇하고, 그러면서도 완벽한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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