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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양장) ㅣ 헤르만 헤세 컬렉션 (그책)
헤르만 헤세 지음, 배수아 옮김 / 그책 / 2018년 4월
평점 :
품절
어떤 이에게는 이상한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나는 단 한 번도 방랑하고 싶었던 적이 없다. 사주를 보면 꼭 그런 말을 들었다. 관운 때문에 꽉 짜여진 일을 하는 게 적성에 맞을 거라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생각했다. 나, 시대를 잘못 태어났구나. 과거의 인류—세상이 더 넓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로(전제) 한 가지 일만 하는 삶, 그렇게 매일 매월 매년을 반복하는 삶—를 질투한다. 선택지와 가능성이 소거된 충실한 삶을 살아보고 싶다. 고르는 게 싫다. 살기도 빠듯한 데 고르느라 시간 쓰는 거 싫다. 인생은 어차피 한 번이기 때문에 가장 다양한 삶도 가장 단순한 삶도 결국 한 번의 삶이고 같은 무게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결국 나는 가장 단순하고 싶다. 그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매진하고 싶다.
어릴 때부터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무엇이 되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소명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걸 하고 싶다고. 무언가 한 가지에 꾸준히 열심인 삶, 그것의 반복의 반복의 반복. 그런 것을 담은 이야기에 곧잘 매료되곤 했었다. (그러나 현재의 나는 할 수 있는 돈 주는 일이라면 일단 받고 보는 생계형 엔잡러….)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는 <패터슨>. 패터슨을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그의 하루가 똑같기 때문이다. 방랑하고 싶지 않다. 변수의 세상을 맞닥 뜨리는 것은 즐겁기보다는 피곤한 일이다. 혼자 훌쩍 계획하지 않은 여행을 떠나 본 적이 없다. 여행지에서는 늘 생각한다. 아, 집에 가고 싶다. 누워서 책이나 읽고 싶다. 새로운 것들을 접하는 기나긴 하루는 여행이 가져다주는 장점임에는 틀림없지만 익숙한 것들에도 충분히 애정을 느낀다.
나는 언제나 떠나보내는 것을 어려워했고 헤어지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늘 정착하고 싶었다. 뿌리내리고 싶었다. 언젠가 아빠가 가장 못난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했다. 아빠 본인은 자신을 가리키는 자조 섞인 말이었을 테지만, 나는 못난 소나무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 과거를 곱씹고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 한 발짝 떨어져서 이해하고 분석하기를 즐기는 사람. 경험이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하지는 않는 사람. 무엇을 느끼기보다는 누군가가 무엇을 느꼈다는 이야기를 듣거나 읽는 것이 더 생생한 사람.
그리하여, 모든 감각을 다 느끼고 살 수 있는 삶을 다 살아낼 것처럼 휘몰아치는 골드문트의 방랑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그것은 나르치스와 같은 이유에서 일 것이다. 다만 나는 나르치스처럼 생겨먹은 쪽에 더 가깝고, 그런 나 자신에게 불만 또한 별로 없다. 시대를 잘못 만나 안전히 뿌리내릴 공간을 위해 끊임없이 삶을 변용하는 주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 고단할 따름이다.
덧, 자신을 골드문트라고 주장하는 알라딘의 서재의 퐐모님이 계신다. 로맨티스트 (…난봉꾼) 골드문트가 장미 가지를 물고(…) 여자한테 연애 수작 거는 장면이 나온다. 아아. 그 순간 떠오른 것은 퐐님의 프사. 그 인자한 미소와 입에 문 한 떨기 장미…가 떠올려지며… 항마력이 딸렸다. 내 상상 속이었지만 안 본 눈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