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파란여우 > 눈물이라니, 실존은 어금니를 깨물어야 한다구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살
공선옥 지음 / 삼신각 / 1995년 11월
평점 :
품절


오래된, 소멸의 지나간 고단했던 풍경을 바라보면서 현재 진행형의 나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심정을 갖는다. 첫째는, 아픈만큼 성숙해졌다. 둘째, 지긋지긋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악몽이다. 그리고 또 하나, 소멸은 되었지만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에, 내가 아닌 제3자의 자세거나, 타자적 위치에서 이러한 고단했던 소멸의 풍경을 한꺼풀 걸러서 바라본다면 사람들은 무어라고 감탄적 형용사를 내뱉을 텐가. 아, 대단하다. 라고 말할 것인가. 그러나 이것은 배부른 식탁을 앞에 두고 포만감에 젖어있으면서 경계를 넘어 자신을 대신해서 고통을 겪은 사람을 향한 값싼 동경의 대상일 뿐인 요설이다. 최근에 그녀의 신작을 두고 세간에서는 상당한 호평을 계속 보여준다. 독자들은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대리경험을 하는 것이지만, 대리경험한 것만을 두고 저자의 뼈에 붙은 살점같은 체험을 두고 '대단하다'는 한마디로 호들갑을 떨 뿐이다. 그러므로 독자의 간접체험은 완벽하지 못하고 저자는 독자가 완벽한 체험에 근접하도록 최대한 심혈을 기울이는 법이다. 그러나 공선옥이라는 작가는 풍만한 호들갑을 떠는 간접체험자로서의 독자를 최대한 자신의 세계로 이끌고 가는 특별한 비법이 있다. 왜 그런가. 그녀에게는 도대체 무엇이 있어 가벼운 혀놀림을 연발 쏟아내는 얼치기 독자의 가슴에 멍 자국을 만드는 듯한 징 소리의 미어짐으로 탄식하게 만드는 것인가.

"그 해 여름 나는 시골 직행버스 안내원이었다."로 시작하는 1984년 여름. 광주 이야기를 풀어 나가면서 공선옥의 계간지와의 만남은 이렇게 출발한다. 그리고 그녀의 출신성분과 자전적 이야기인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 살>을 읽으며 시대의 흐름이란 기록하는 자의 것이라는 명언에 추호의 의심도 없이 동의하게 만드는  공선옥의 소설에서는 하층민, 그리고 상처받은 여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녀의 신산한 조각난 지난 세월의 흔적을 작가의 글에서 만나는데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공선옥의 여주인공들은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지만 끝내 자신을 표류속에서 난파되게끔 방치하지 않는다. 흔히 1980년대를 배경으로 씌여진 소설들이 그 후로 어떤 틀을 이어나가지 못한 것은 1980년대의 민주화로 명명되어진 '항쟁'을 다룬 이야기들이 화염병 몇 개를 던지는 현장에 있었거나, 주변의 친구들이 그런 투쟁을 하는 것을 목격했다거나 하는 자신의 시대적 체험을 부풀리기 방식으로 덧칠하는 진실의 과장이나, 포장 내지는 트릭을 쓰는 대체방식의 글쓰기를 눈요기로 보여 주었다는 일회성이라는 유한성때문이었다. 현장감을 상실한 글은 탄력성을 잃는다. 유동적인 흐름을 끌고 가지 못한 운동권 소설들은 지금, 어느 출판사의 지하 창고에서 썩고 있는지 모르겠다. 한 때는 이러한 글쓰기의 유형을 유행사조처럼 여기던 때가 분명히 우리에게는 있었다. 일회성 감각과 다작적인 양적 추구의 글쓰기의 사치스런 허영기는 단연코 공선옥의 절절한 체험 앞에서는 등을 보이고 사라져야 했을지도 모른다. 육체적 체험과 정신적 교감이 일치가 되는 글쓰기가 얼치기 독자에게 오래 애정을 받는 것은 이러한 정직성을 바탕으로 하는 투명한 글쓰기의 기본자세다. 그런고로 공선옥의 여주인공들은 비록 부평초처럼 지리멸렬한 한 순간을 휘청거리곤 하지만 반드시 어떠한 귀결점에 이르고 만다는 특성이 있다. 이 소설에서 공선옥은 두 여자를 상반된 위치로 설정했지만 사실은 한 남자로 인한 상처의 영혼을 소유한 인물로 그린다. 그리고 그녀들의 지긋지긋한 번민과 갈등, 아픔과 상처를 티끌 하나 남김없이 고스란히 독자에게 보여 줌으로써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당신이 은이라면?" "채옥이였다면?" 이런식의 신경세포를 부르르 떨게 만드는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는 방식이 공선옥이 잔뜩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는 독자의 손목을 휘어잡고 끌어 당기는 소설 방식이다.

이 책을 읽다가 정말 화가 치밀어 한 대 갈겨주고 싶은 대목,
상훈이 현장활동으로 공장에 위장취업해서 들어갔다가 은이를 만난 후, 은이에게 결혼을 하자는 이상한 프로포즈 장면은 전통적인 지주계급의 우월성과 일방적인 자세를 볼 수 있다. "내가 뒤집어 쓰고 있던 이 질긴 지주 자본가 자식의 껍질을 나는 은이 너로 인해서 온전히 벗을 수 있게 되었다. 은이야, 나한테 오는 것을 주저하지 마라. 너는 내게 당당히 걸어와라."-(96쪽) 상훈은 에로스 없는 사상의결혼을 자신의 집 중농출신의 딸인 은이에게 제안한다. 에로스 없는 결혼이라니, 이게 무슨 신파조인가. 돈에 팔려가는 몸도 아니거늘 사상에 일방적인 녹아듬으로 결혼을 하라니. 그리고 스스로 당당해지라는 건방진 조언까지 서슴치 않고 해대는 꼴은 이미 이 결혼의 불길한 종말을 암시한다. 얼마 후 이 어처구니 없는 사상의 사생아같은 상훈은 무책임한 말로 또 한 번 자신을 합리화하는데 최선을 다한다. 물론, 이번에도 사상을 골자로 핑계되는 상훈의 요설은 가히 볼 만하다. "난 널 사랑할 자신이 없어. 결국 나란 놈은 한계가 있었어. 내가 은이 너를 사랑한다고? 내가 너와 결혼함으로써 나는 내아버지가 착취해왔던 네 아버지 진산에 대한 죄갚음이 되리라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우스운 얘기다. 어차피 나란 놈의 가죽을 벗겨 보면 거기에는 더러운 지주의 피가 흐르고 있다. 끈끈하고 냄새나는 악질 지주의 피. 자본가의 피"-(99쪽) 스스로 자본가의 피를 더럽고 악질적인 피라고 규정하며 은이에게 제안했던 에로스 없는 결혼의 도망갈 구멍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는 자학적인 사상의 쇼를 읽다보면 상훈이라는 인물의 책임감 없고 먹물의 허무맹랑한 이념의 헛구역질을 만나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의 은이는 자신의 정직함과 투명한 삶의 자세에 관한 성찰적인 꼿꼿한 모습을 잃지 않는다. 세탁기가 없어 밤마다 늦게 돌아오는 남편의 최루탄에 절은 옷을 손으로 빨며 그녀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녀는 그 때 흘린 눈물의 성분이 최루탄때문이었는지, 세상으로 향하는 열정의 억눌림이었는지 도대체 그 무엇이었는지 모른다고 했다. 정말 몰랐을까. 그녀의 눈물은 자신을 향하는 단단한 다짐이었다. "니가 나를 택했던 시기의 섣부른 선택을 시행착오였다고 순순히 인정하고 너는 네 갈길로 가면 되는 거야"-(99쪽)두 아이를 데리고 그 후 작가 공선옥은 소설보다 더한 구질구질맞은 삶을 살았지만 끝내 상훈의 무책임함과 도덕적인 기만성에 끌려가지 않는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아, 통쾌하다. 그녀가 스스로의 삶에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앞 부분에서도 나타나 있다. "적어도 나는 너보다 어른스럽다. 비록 환경은 너보다 형편없지만 너는 니 아버지가 주는 학비로 다른 사람이 해 주는 밥을 먹으며 학교에 다니고 있지만, 나는 내 스스로 살림을 하고 내 스스로 학비를 마련하고 내 스스로 밥을 지어 먹으며 학교를 다닌다. 나는 너처럼 감상에 젖을 한가할 틈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너보다 우월하고 나는 너보다 잘날 여지가 있다. 내 삶이 너보다 곤궁한 만큼 나는 너보다 튼튼한 의식을 지녔으므로."-(18쪽)을 읽으면서 이십여년전에 안락하다 못해 삶이 나른하다고 푸념을 하던 내친구 K에게 던진 비수같은 나의 날카로운 말이 갑자기 한번에 다시 과거의 시점으로부터 날아와 확 꽂히는 것이다. 체험의 기억은 오랫동안 몸안에서 머물고, 먼 곳으로 달아나지도 않는다. 소멸과 생성의 법칙앞에서 이러한 주체적 의식의 발의는 지금도 가끔 욱신거리며 아퍼오고 공선옥의 저 핏발서린 서늘한 말은 몸서리 쳐질만큼 뜨거운 문장이다. 그리고 십년이 흐른 후 공선옥은 비참하리만치 처절한 여자로 그린 채옥과 오지리를 다시 찾고 떠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그러나 은이가 자아성을 완벽하리만치 간직하고 있는 여성상으로 그린것에 비하여 채옥은 타자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받고 그것에 뒤틀리고 자아를 상실하는 불행한 여인으로 전락시키고 마는 공선옥. 그녀는 왜 그렇게 두 여성의 도식적인 그림을 상반된 위치에 그려넣었던 것일까.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 살의 기억을 여전히 글로 표현하는 작가에게 채옥의 세상으로부터의 기구한 치임은 작가 자신이 어쩌면 휘둘림을 당한 내면의 치유하기 어려운 깊은 상처의 또 다른 모습은 아닐까 싶은 얼치기 독자의 애매모호한 섣부른 추측일 뿐, 지금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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