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등을 밀며

-손택수-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이미 일러준 대로
다섯 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 번은 입속에 준비해 둔 다섯살 대신
일곱 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 나서 물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 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

아버지,
나이를 먹고 철이 들수록
아버지란 단어는 이 세상 가장 외로운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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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07-18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읽은 장영희 교수님의 책에서... 아버지의 고독과 죽음을 말하는 문학 작품으로... ..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을 이야기했었거든요... 어제까지 붙잡고 있었던 책이어선지...기억이 나요 ^^

stella.K 2005-07-18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네요. 잉크님도, 이카루님도.^^

진주 2005-07-18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가운 분들이 다 모였네요^^(주제랑 상관없는 얘기)

잉크냄새 2005-07-19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카루님 / 님의 서재에서 장영희 교수님 책 리뷰를 보고 왔어요. 좋은 책 읽고 계시네요.
스텔라님 / 반겨주시니 감사합니다.
진주님 / 저도 반가워요.

비로그인 2005-07-19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가 참..아릿하네요. 돌아가신 아부지 휜 등도 생각나고.. 글고 저두 '반가운 분'들 속에 낑궈 주세요. 같이 놀아요!

파란여우 2005-07-19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늙은 아부지의 꾸부정한 뒷모습이 잊혀지지 않아요..
아, 이거 반갑다는 인사 모드인가요? 그럼, 방가방가...^^

Laika 2005-07-19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아부지!!
아부지한테 문자 한번 날려야겠네요...

내가없는 이 안 2005-07-20 0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님 뵈어요. ^^ 휴가 잘 보내시라고 제 서재에 답글 달았지만... 덕담은 여러 번 해도 입 닳지 않으니깐... 좋은 휴가시간 보내시라구요... ^^
그런데 이 시를 적으실 때 뭔가 쓸쓸한 일이 있으셨던 건 아닌지...

잉크냄새 2005-07-20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이님 / 그런 기억이 떠올랐군요. 글고 님도 반가운 분에 낑궈드렸으니 판 벌리고 놉시다.
여우님 / 님 서재의 아버지에 관한 페이퍼 내용이 잠시 생각납니다.
라이카님 / 아, 그러고보니 님 아버님의 문자 메세지 페이퍼 본지가 꽤나 된것 같네요.
이안님 / 오랫만이죠. 덕담은 아무리 들어도 귀도 닳지 않는답니다. ^^ 뭔가 쓸쓸한 일은 아니고... 일요일날 통화한 아버님의 목소리가 한동안 가슴에 남아있었던 모양입니다.
 



바닷가 우체국

-안도현-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 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었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 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 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다고 생각하거나
편지를 받아먹는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의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을 때쯤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은 끝나리라
부치지 못한 편지를
가슴속 주머니에 넣어 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 서러워진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 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지는 저물녘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마땅해할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 냄새 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였고
그리고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하였다고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바닷가 우체국이 보이는 여관방 창문에서 나는
느리게 느리게 굴러가다가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우체부의 자전거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바다를 건너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 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

부치지 못한 편지를 가슴속 주머니에 넣어 두고 안타깝던 날이 있었다. 
우체국, 구태여 유치환의 시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마냥 그리운 시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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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ka 2005-07-07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도현의 '바닷가 우체국' 시집 좋아하는데요. 새삼 이렇게 읽으니 더 좋습니다. ^^

파란여우 2005-07-07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윤도현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를 좋아해요^^

Laika 2005-07-07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5-07-08 0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05-07-08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카님 / 안도현의 시집중 그런 시집이 있었군요. 바닷가 우체국...왠지 낭만적인 냄새가 풀풀 풍겨지는군요.
여우님 / 도현을 활용한 언어유희...멋지구리합니다.
라이카님 / 너무 멋진 사진입니다. 지중해 어느 해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순간 드네요. 이 사진 페이퍼에 삽입할께요. 멋진 합작품입니다.
속삭이신님 / 이제 사막으로 갈 일만 남았군요. ^^ 저도 사막은 특별한 이유없이 한번 정도 다녀오고 싶은 곳입니다.

Laika 2005-07-08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 "네덜란드"의 "볼렌담" 갔을때 찍은 사진입니다. 맘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미네르바 2005-07-08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체국에서 편지 한 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우체국에서 편지를 써 보았던 저는 왜 여지껏 인생을 모를까요? ^^

잉크냄새 2005-07-08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이카님 / 아, 어쩐지 눈에 익는다 싶었거든요. 작년 님의 서재에서 보았기에 기억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었나 봅니다.
미네르바님 / 전 유치환의 시를 읽고 우체국에서 편지도 쓰고 싶었고, 우체국 창문 너머로 하늘과 행인들을 바라보기도 했죠. 별다른 이유는 없었어요. 그냥이죠.^^

비로그인 2005-07-11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만 혼자 잘났다고 폼 재며 살 세상, 아닌 거 같습니다. 이 시 뜨는 거 보자마자 카메라 들고 동네 우체통 찍으러 갔습니다. '바닷가는 아니지만 잉크냄새님, 우체통 통째로 받으세요, 헷..선물이에요."라고 수줍게 올리려는 순간, 더헙! 라이카님이 오리지날 '바닷가 우체국' 사진을!! 눈에서 초강력 레이저빔 발사되면서 슬슬 꽈배기 먹은 사람처럼 심사가 뒤틀리더니 오늘은 그래도 질투심이 쪼까 진압 되는 바람에 글 남깁니다. ㅡㅡa
헤헤..라이카님! 사진 정말 죽여요!!

비로그인 2005-07-15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글은 안 달아주셨지만 분명히 몰래 들어와 읽으셨을 거야.. 수상해..어디선가, 먹물 냄새가 난다구..아닌가, 저녁에 쩝쩝거렸던 먹물 오징어튀김 냄샌가..킁킁..

잉크냄새 2005-07-15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님 / 복돌님의 동네 우체통이 무지 궁금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중 하나가 빨간 우체통이라고요. 그리고 아마도 잉크냄새가 아니라 먹물 오징어 튀김 냄새가 맞는것 같아요. 이 기회에 먹물냄새로 아이디 바꿔볼까요? ^^

비로그인 2005-07-19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 동네 우체통은 아무리봐두 넘 지저분해요. 동네 조무래기들이 다닥다닥 껌을 붙여놔서 술 취한 저녁에 보면 외계인이 서 있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라구요. 글고 오징어 먹물냄새 비릿하니 안 좋았거덩요. 긍께로 기냥 지금의 닉을 사수하시쪙!

icaru 2005-07-22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먹물냄새~ 하니까 붓글씨 쓸 때 묵향이...맡아져서...고즈넉했는데... 딱 그앞에 오징어를 들이대니까는... 푸히히... 그래도 오징어는 술 안주로 심심풀이로... 짱이에요 짱!!

잉크냄새 2005-07-22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님 / 그래도 그런 우체통이 더 정겨운 법이지요. 그리고 닉은 사수합니다. 다만 잉크와 냄새를 따로 떼어 뒤의 것으로만 부르지 마세요
이카루님 / 아, 묵향...머릿속에 아련히 떠오르네요. 지금도 애들 붓글씨 쓰는지 모르겠네요. 전 붓보다는 펜글씨를 즐겨썼지만 왠지 나이들면 자신을 다스리는 것에 붓글씨만한 것도 없는것 같아요.

montreal florist 2009-09-19 0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멋진 시군여, 파란색 하는 배경에 빨간색 우체통도 예뿌구여
 

연려실기술 제 17권

 

선조조 고사본말 (宣朝朝故事本末)

통제사 이순신이 잡혀 가고 전라 수사 원균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처음에 전라 좌수사 이순신이 본진이 궁벽된 곳에 있어서 방어하기 어렵고, 한산도는 거제 납쪽 30리에 있는데, 산세가 둘러져서 배를 감추기에 편리하고 왜적의 배가 호남을 침범하려고 하면 반드시 이 길을 경유하게 되니 진영을 한산도로 옮기도록 청하엮으므로 조정에서 그대로 따랐다.

순신은 육지에서 군용을 공급하기는 곤란하다고 여겨 체부 (體府) 에 청하기를 , "다만 일면의 바다와 포구를 부속시켜 주면 양식과 기계를 자족하게 할 것이조." 하였다 .  이에 바다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어 팔아서, 곡식 수만 섬을 쌓게 되고 군영 막사와 기구가 완비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백성을 모집하여 살게 되니 하나의 커다란 진이 되었다.

이보다 먼저 청정등은 우리 나라 수군을 두려워하였는데 더욱 순시을 두려워하여 반간 (反間 ) 의 계책을 써서 순신을 쫒아 버리려고 했다. 행장이 요시라를 시켜 김응서의 진에 왕래하게 하여 정성을 바치고 정의를 통하여 조선 사람이 되기를 원하니 응서가 믿고 특별히 잘 대접하고 원수부에 보고하여 넉넉히 포상 했다. 그 뒤로 우리의 의관을 입고 적진의 소식을 일일이 보고 했다.

갑오년 9월에 행장과 의지등이 요시라를 응서에게 보내 함안에서 강화할것을 요청해 응서가 원수부에 보고하니 권율이 조정에 알렸다. 조저에서는 이에 응서를 시켜 적군의 정세를 탐지하게 했다.

응서가 군사 백여 명을 거느리고 먼저 도차하니 현소. 죽계. 조신등이 왜군 백여 명을 거느리고 오고, 조금 뒤 행장과 의지가 왜군 3천여 명을 거느리고 대포 세 방을 쏘면서 왔다. 차고 있던 칼을 풀고 걸어 들어와 응서와 마주 앉아 명나라 조정의 봉공에 대한 일을 의논하였다. 행장은 강화의 일이 성사되지 않은 허물을 청정에게 돌리고 날이 저물자 자리를 피하고 돌아 갔다   [응서의 일명은 경서이다 . 뒤에 전라병사로 있다가 이 일에 연좌되어 파직당했다. 을묘년에 은명을 입어 북병사에 임명되었는데 무오년 심하전투에서 항복하였다가 죽었다]

이때에 이르러 행장이 요시라를 시켜 응서에게 비밀히 말하길 [응서는 이 때 전라병사였다.]

"이 번에 강화가 성사되지 못한 것은 청정 때문이니 나는 청정을 매우 미워한다. 아무날에 청정이 바다를 건너 올 것인데, 조선에서는 수전을 잘하니 바다 가운데서 마주치면 가히 승리 할 것이요."

하므로 응서가 급히 장계를 올렸다.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물으니,  윤 근수는,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되오." 했으나 , 황신은 , "두 적이 비록 사이가 나쁘다고는 하지만 신은 예로 부터 기이한 모략과 비밀의 계책이 적국 사람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소." 했다.   임금이 영상 유성룡을 돌아 보면서 , "이 말이 옳다고 생각되는데 경의 의향은 어떤가."했다.  이에 황신을 위유사 (慰諭使)에 임명하고 비밀히 순신에게 알렸다. 순신은 , "바닷길이 험난하므로 적군은 반드시 복병을 많이 놓아 두고서 기다릴 터이니 배를 많이 거느리고 가면 적이 모를 리가 없고 적게 거느리고 가면 도리어 습격을 받을  것이다." 하고 나가지 않았다.  요시라 가 또 와서 응서에게  "청정이 지금육지에 내렸는데 어찌하여 막아 기다리지 않았던가." 하며 거짓으로 매우 애석하다는 듯한 뜻을 보였다.

이 일이 위에 알려지자 조정의 의논은 순신을 허물하고 대간은 국문할 것을 청하였다. 전 현감 박성도 소를 올려 순신을 목베어야 된다고 극단적으로 말하였으나 이원익이 그렇지 않음을 밝혔다.

임금이 남이신을 한산으로 보내어 사실을 염탐하게 하였더니 돌아와 아뢰길  "청정이 7일을 머물렀으니 우리 군사가 갔더라면 체포하여 왔을 것인데 순신이 머뭇거리다가 기회를 놓쳤나이다."했다.

이 때 조정에서는 순신이 허황되게 큰 소리만 치면서 군부를 속인다고 의심하던 터여서 이에 잡아와 의금부에 가두고  그  죄를 논할 것을 명했다.  판중추부사 정탁이 아뢰길 , "순신은 명장이니 죽여서는 안 되며 ,군사 기밀의 이롭고 해로움은 멀리서는 측량하기 어려우니 그가 진격하지 않은 것은 필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청컨대 너그러이 용서하시어 후일의 공을 세우도록 요구하십시오." 하였다.

고문을 한 차례하고 사형을 감해서 종군하게 했다. 남쪽 백성들이 한산을 보루로 삼고 순신을 간성(干城 ) 으로 삼고 있었는 지라 순신이 잡혀가는 길에 남녀노소가 모두 길을 막고 목놓아 울었으며

파직당하였다는 소문을 듣고서는 사람들이 모두 안정된 뜻이 없었다.

순신은 유성룡이 천거한 사람이다. 성룡과 사이가 좋지 않은 자들 [곧 북당 (北黨)이다]이 떠들썩하게 순신이 군사의 기회를 잃었다는 것으로 죄를 만들었으니, 그 뜻은 성룡에게 누를 끼치려는데 있었다. 그 때 의논이 준엄하여 사람들이 모두 목을 움츠리고 있었는데 정탁만이 차자를 올려 순신의 무죄를 극력으로 말하여 죽지 않게 되었다. <국포쇄언 >

이때 조정에 있던 신하들의 의논이 나뉘어지고 갈라짐이 더욱 삼하였으니, 서인은 원균을 두둔하고 동인은 순신을 두둔하여 서로 공격하면서 국사는 마음에 두지도 않았다. <조야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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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하옥시키다

 

이순신이 원균을 구원해 준 후로 둘 사이는 아주 좋았다.

그러나 얼마 후 공을 따지게 되면서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성품이 음흉하고 간사한 원균은 여러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이순신을 모함했다.

 "처음에 이순신은 궁둰을 오지 않으려 했소. 그러나 내가 여러 번 요청하자 할 수 없이 온 거요.그러니 공으로 치자면 내가 가장 클것이오."

 조정의 의견 또한 둘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순신을 추천한 것이 나였기 때문에 나와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들은 원균을 지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우상 이원익은 잘못된 것을 밝히고 나섰다.

 "이순신과 원균이 담당한 지역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처음에 구원하지 않았다 해서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그 무렵 적장 고시니 유기나와는 수하 병사인 요시라를 경상우병사 김응서의 진에 출입시키며 친하게 지냈다. 그 때 가토 기요마사가 다시 공격해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요시라는 몰래 김응서를 찾았다.

 "장수께서 말씀하시길,  '이번에 강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가토 때문이다.  나 또한 그를 제거하고 싶다.'   고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그가 바다를 건너올 예정이라하니 수전에 뛰어난 조선 군사가 나선다면 반드시 이를 격퇴시킬 수 있을 것이니. 놓치지 마십시오."

 김응서는 이 내용을 조정에 알렸다. 조정에서도 이 내용을 믿었는데, 특히 해평군 윤 근수는 기회가 왔다면서 계속 임금께 보고드리고 이순신에게도 빨리 전진할 것을 재촉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적의 계략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 고민하면서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자 요시라가 다시 찾아왔다.

 "가토가 이미 상륙했소. 왜 그를 치지 않는 것입니까?." 하면서 안타깝고 애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모두 이순신의 잘못을 지적했다 .  대간은 그를 잡아 국문할 것을 요청했으며 현풍에 사는 박성은 이순신을 목 베어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리기까지 했다. 결국 조정은 의금부 도사를 보내 이순신을 잡아오게 하고 원균을 통제사에 임명했다.

 그러나 임금은 이 내용이 진실인지 의문을 품으시고 성균관 사성 남이신을 한삼도에 파견, 조사해 오게 했다. 그가 전라도땅에 닿자 병사와 백성들이 모두 나와 길을 막고 이순신이 무고하게 잡혀갔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남이신은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다.

 "가토가 섬에 7익이나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때 우리 군사가 공격했다면 반드시 적장을 잡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순신이 머뭇거리는 바람에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순신은  옥에 갇히게 되고 대신들이 그의 죄를 의논하기 시작했다. 그때 판중추부사 정탁이 홀로 일어서 간했다.

 "그는 명장이오니 죽여선는 안 되옵니다. 군사상 문제는 다른 사람이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 또한 짐작하는 바가 있어 나가 싸우지 않은 것이라 생각됩니다. 바라건대 너그러이 옹서해 후에 대비토록 하십시오."

 조정에서는 한 차례 고문을 한 다은 사형을 감형하고 살탈관직만 시켰다. 이순신의 노모는 아산에 살았는데 그가 옥에 갇혔다는 말을 듣자 고통스러워하다 목숨을 잃고 말았다. 옥에서 나온 이순신은 아산을 지나는 길에 상복을 입고는 권율 휘하에 들어가 백의 종군하게 되었는데,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안타깝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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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집 유서

 

정유년 정월에는 적추 청정(淸正)이 재차 바다를 건너왔는데, 조정에서 공이 그를 맞아 공격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조사를 받게 하고 원균을 대신 상장(上將)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공이 서울로 압송되는 길에 남녀 노유(男女老幼)가 모두 길을 가로막고 부르짖어 통곡하였다.공이 조사를 받음에 미쳐서는 상이 공을 용서하고 백의(白衣)로 강등시켜 원수(元帥)의 진중(陣中)으로 보내서 공으로 하여금 죄를 반성하고 스스로 진력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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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잡록

 

2월 이순신이 아뢰기를, ꡒ신이 힘을 다하여 바다를 건너는 적을 막고자 하였으나 마침내 군기(軍機)를 놓쳐서 적으로 하여금 상륙하게 하였으니 신은 죽어도 남는 죄가 있습니다. 다만 각 고을 수령 등이 수군의 일에 전혀 마음을 쓰지 않는데, 그 중에서도 남원ㆍ광주가 더욱 태만하였으니, 청컨대 명령을 내려 목을 베어 군중에 보여서 하나를 징계함으로써 백을 북돋우소서. 운운.” 하였다. 비변사에 계하(啓下)하기를, ꡒ부체찰사로 하여금 두 고을 원을 문초하라.” 하였다. 그 뒤에 부체찰사가 순천에서 두 원을 잡아다가 치죄하였다.

○ 요시라(要時羅)가 우리 나라에 말을 전하기를, ꡒ청정이 한 척의 큰 배로 건너오다가 바다 가운데서 바람을 만나 작은 섬에 며칠 동안 정박하였는데, 내가 급히 통제사 이순신에게 통지하여도 통제사가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오지 않아서 일을 그르쳤소. 운운.” 하였다. 조정에서는 바야흐로 이순신이 헛되게 큰소리 쳐서 임금을 속였다고 허물하여 금부도사를 보내어 잡아다 문초하고, 전라 병사 원균(元均)으로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게 하고, 나주 목사 이복남(李福男)으로 전라 병사를 삼았다. 남도 백성들이 한산도를 보장(保障)으로 삼고, 이순신을 간성(干城)으로 믿었다가, 그가 파면되었음을 듣고는 사람들이 기댈 데가 없어서 짐을 꾸렸다. 요적(要賊)이 전후에 행한 바가 모두 우리를 속이는 일인데도 우리 나라는 알지 못하였으니 통탄할만한 일이다.

○ 임금이 이순신(李舜臣)의 공과 허물이 서로 똑같다고 하여 놓아주어 죄를 다스리지 아니하고 원수부(元帥府)에 종군(從軍)하게 하였다.

 

출처 : <불멸의 이순신>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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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5-07-05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흑... 이순신의 백의종군 장면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어요...흑흑...

사마천 2005-07-05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의인을 당대에 알아보기 힘들죠. 수해 나도 열심히 골프치러 나가는 이해찬 같은 인간들과 비해서 민족의 화합을 위해 일하다 감옥가는 임동원의 값어치가 후일 훨씬 더 평가될 것입니다. 오늘날 어리석은 임금 선조가 누구인지는 짐작 가시겠죠.

비로그인 2005-07-05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 겨우 다 읽었어요! 읽는 도중에 궁둥이를 몇 번 찔룩거리긴 했지만..특히 어려운 글에는 심한 난독과 발작 증상을 보이는 제 자신을 생각하면 그저 대견하기만 합니다. 근데 '난중잡록'.. 꼭 '난중잡놈'하는 거 같아 시니컬하게 웃어줬습니다, 쿄쿄^^b
제 비유가 좀 쩨쩨하다는 건 알겠는데 '백의종군'이란 것이 월급 없이 평생을 꽁짜로 일해주는 것보다 더 억울한 거겠죠..ㅠ,,ㅠ

파란여우 2005-07-05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두..헥헥..담번엔 한 편씩 올리심 안될까요?...정말 너무해요 잉크님.
그리고 복돌!! 정말이지 요새 아예 붓을 내던졌남? 아님, 자기 서재 잃어버렸남
통 글은 안 올리고....궁시렁궁시렁...

비로그인 2005-07-05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마낫! 여우성한테 딱 걸려부렀네요, 깽! =3 =3

잉크냄새 2005-07-06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 저도요. 담담한 모습이 오히려 가슴저리더군요. 선조, 윤두수, 원균...어리석은 군상들이죠.
사마천님 / 그래서 훗날 역사가 평가한다 라는 말이 나오는 모양입니다. 당대에 의인을 알아보는 안목, 그것을 가진 사람 또한 의인이리라 생각합니다.
복돌이님/ 가끔 불멸의 이순신에서 나오는 유명한 장면이나 조금 의구심가는 장면이 있으면 이리저리 뒤지고 다닙니다. 길어도 한번 읽어볼만하죠.^^ 백의 종군은 제가 보기에도 무상노동보다 더 억울한것 같네요.
여우님 / 전 여우님이 올리시는 더 긴 글도 읽는다고요. 글고 복돌님, 이제 그만 펜을 잡으시죠.^^
 
 전출처 : stella.K > 꿈꾸는 나무들

비 맞는 나무

우산도 없이 맨몸으로
비 맞는 나무는 비맞는 나무다.
온종일 줄줄 흘러내리는
천상의 눈물을 온 몸으로 감수하는
비 맞는 나무는 인내하는 나무다.
모든 것 다 용서하신 어머니같이
비 맞는 나무는 다 받아들이는 나무다.
온통 빗속을 뚫고 다녀도
날개에 물방울 하나 안 묻히는 바람처럼
젖어도 나무는 젖지 않는다.
세속의 번뇌 온몸으로 씻어내려
묵묵히 경행하는 수행자처럼
맨발로 젖은 땅 디디고 서 있는
비 맞는 나무는 비 안 맞는 나무다.

                 -김재진 

 

나무

사람들은 모두 그 나무를 썩은 나무라고 그랬다. 그러나 나는
그 나무가 썩은 나무는 아니라고 그랬다. 그 밤 나는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꿈속에서 무럭무럭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가지를 펴며 자라가는 그 나무를 보았다.

나는 또다시 사람을 모아 그 나무가 썩은 나무는 아니라고 그랬다.

그 나무는 썩은 나무가 아니다.

                   -천상병

 

 나무 타령

긴털잘라 댕강나무 불싸질러 검은재 나무
춤이라도 추자나무 반말찍찍 야자나무
대낮에도 밤나무 삐까 번쩍 광나무
입었어도 벚나무 죽어서도 살구나무
칼로베어 피나무 괴롭구나 고로쇠나무
와들 와들 떨기나무 부들부들 사시나무
망했구나 작살나무  조졌구나 개피나무
다갔는데 오구나무  오자마자 가래나무
화가 나도 참나무  미안하다 사과나무
두손싹싹 비자나무  그렇다고 치자나무
사귑시다 아가시나무  입맞추자 쪽나무
한푼두푼 돈나무  목돈 되네 은행나무
젖먹어라 수유나무  육지에도 배나무
어릴적도 대나무  논에심어도 전나무
말매놔도 소나무  방구 뀌어 뽕나무
칠안해도 도장나무  크긴크다 말좆나무

나무처럼 외로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

바라보면 지상에서 나무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
늘 하늘빛에 젖어서
허공에 팔을 들고촛불인 듯
지상을 밝혀 준다땅속 깊이
발을 묻고 하늘 구석을 쓸고 있다
머리엔 바람을 이고
별을 이고악기가 되어 온다.
내가 저 나무를 바라보듯
나무도 나를 바라보고 아름다워할까
나이 먹을수록 가슴에
깊은 영혼의 강물이 빛나
머리 숙여질까
나무처럼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
나무처럼 외로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
혼자 있어도 놀이 찾아와 빛내 주고
새들이 품속을 드나들며 집을 짓고
영원의 길을 놓는다
바람이 와서 별이 와서 함께 밤을 지샌다

                            - 이성선

자작나무

꼿꼿하고 검푸른 나무들 사이로 자작나무가
이리저리 휘어져 있는 모습을 보면
나는 어떤 소년이 그것을 흔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아무리 흔들어도
눈보라처럼
나무를 영영 휘어져 있게는 하지 못한다.
비 온 뒤의 겨울 아침
나뭇가지에 얼음이 쌓여 있는 것을 보았는가?
바람이 불면 얼음이 흔들려 딸랑거리고
얼음 껍질이 갈라져 금이 가면서
오색빛으로 영롱하게 빛난다.
어느새 따뜻한 햇볕이 얼음을 녹여
언 눈 위에 수정처럼 떨어져 내리게 만든다.
부서진 수정 더미를 쓸어 버리면
그대는 하늘 천정이 무너져 버렸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얼음 무게를 못이긴 나무들은
말라붙은 고사리에 닿도록 휘어지지만,
그러나 부러지지는 않는다, 비록
한 번 휘어버린 채 오래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뒤
금방 머리 감은 아가씨가
무릎 꿇은 채 엎드려 머리를 풀어 털듯이
잎을 땅에 끌며 허리를 굽힌
나무를 만날 수 있으리라.
얼음이 나무를 휘게 했다고 나는 말했지만,
그래도 나는 소를 끌고 나온 소년이
나무를 휘게 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촌구석에 살아 야구도 못 배우고
자기 스스로 만든 장난질이나 치며
여름도 겨울도 혼자 노는 소년
아버지가 가꾸는 나무를 하나씩 타고 오르며
가지가 다 휘고
나무들이 모두 축 늘어질 때까지
거듭 오르내리며 나무를 정복하는 소년
그 소년은 마침내 배웠으리라,
성급히 나무에 오르지 않아야 한다는 법을,
나무를 뿌리째 뽑지 않아야 한다는 법을.
소년은 늘 나무 위로 기어오를 자세를 잡고
우리가 물 넘치는 잔을 다루듯
조심스레 나무를 탄다.
소년은 발이 가장 먼저 땅에 닿도록 몸을 날려
바람을 가르며 땅으로 뛰어 내린다.
나도 한때 그렇게 자작나무를 타는 소년이었다.
지금 나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근심이 많아지고
인생이 길 없는 숲 같아서
얼굴에 거미줄이 걸린 듯 얼얼하고 간지러울 때
작은 가지가 눈을 때려
한쪽 눈에서 눈물이 날 때
나는 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내가 사는 세상을 잠시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새롭게 살고 싶어진다.
운명의 신이 억지를 부려
내 희망을 절반만 들어 주어
나를 데려간 뒤 다시는 이 세상에 돌아오지 못하게 하지는 않겠지.
세상은 사랑하기 좋은 곳
내가 사는 세상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그저 자작나무 타듯 살고 싶을 뿐이다.
하늘을 향해 흰 눈빛 같은 줄기를 타고 검은 가지까지 올라
나무가 더 견디지 못할 정도로 높이 올라갔다가
가지를 늘어뜨리며 맨 땅 위에 내려오듯 살고 싶다.
가는 것도 돌아오는 것도 좋으리라.
자작나무를 흔드는 사람보다 훨씬 못하게 살 수도 있을 테니까.

                                          -로버트 프로스트 

나무는

나무는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 걸까
그러나 굳이 바람이 불지 않아도
그 가지와 뿌리는 은밀히 만나고
눈을 감지 않아도
그 머리는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있다

나무는
서로의 앞에서 흔들리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 걸까
그러나 굳이 누가 와서 흔들지 않아도
그 그리움은 저의 잎을 흔들고
몸이 아프지 않아도
그 생각은 서로에게 향해 있다

나무는 저 혼자 서 있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 걸까
세상의 모든 새들이 날아와 나무에 앉을
그 빛과
그 어둠으로
저 혼자 깊어지기 위해 나무는
얼마나 애를 쓰는 걸까                            

              -류시화

나무에 대하여

나는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가 더 아름답다
곧은 나무의 그림자보다
굽은 나무의 그림자가 더 사랑스럽다
함박눈도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에 더 많이 쌓인다
그늘도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에 더 그늘져
잠들고 싶은 사람들이 찾아와 잠이 든다
새들도 곧은 나뭇가지보다
굽은 나뭇가지에 더 많이 날아와 앉는다
곧은 나무는 자기의 그림자가
구부러지는 것을 싫어하나
고통의 무게를 견딜 줄 아는
굽은 나무는 자기의 그림자가
구부러지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정호승

기다림의 나무

이정하

내가 한 그루 나무였을 때
나를 흔들고 지나가는 그대는 바람이었네.
세월은 덧없이 흘러
그대얼굴이 잊혀 갈 때쯤 그대 떠나간 자리에
나는 한그루 나무가 되어 그대를 기다리리.
눈이 내리면 늘
빈약한 가슴으로 다가오는 그대.

잊혀진 추억들이 눈발 속에
흩날려도 아직은 황량한 그곳에
홀로 서서 잠 못 들던 숱한
밤의 노래를 부르리라.
기다리지 않아도 찾아오는 어둠 속에
서글펐던 지난날의 노래를 부르리라.

내가 한그루 나무였을 때
나를 흔들고 지나간
그대는 바람이었네.

 

늙은 나무

쩌-억 쩌-억
나무가 운다

늙은 나무가
마른 가지를 틀며
남자의 울음보다 더 진하게
가슴을 긋는다

바람을 타는 수면 위로
낙엽 하나 떨치고

호숫가
늙은 나무는
일렁이는 달빛을 가른다

쩌 - 어 - 억

   -김채빈

출처:보물 없는 보물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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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05 2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05-07-06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님 / 쩌억 쩌억 나무가 울고 갈만한 시입니다요.

미네르바 2005-07-08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나무들이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요. 시도 너무 좋아요. 퍼가도 되지요? 두고 두고 보고 싶네요. 시랑, 그림이랑...

잉크냄새 2005-07-08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네르바님 / 님의 ...길...에 딱 어울리는 나무 사진들이라 여겨집니다. 물론 퍼가도 되지요. 저도 퍼온걸요.
 

무슨 생각이 들어서 그랬는지는 지금도 알수 없다.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아니면 가슴속에 절로 생겨난 의문인지는 몰라도 바닷가에서 바라본 먼 산속의 무지개의 끝이 그리도 궁금했었다. 산맥을 배경으로 펼쳐진 무지개의 한쪽 끝은 지평선을 넘어버려 너무 먼 환상의 세계처럼 느껴졌고 다른 한쪽 끝은 한달음에 달려갈수 있을것만 같은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그 날의 환상과 꿈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얼마후 무지개가 또 다시 아치를 그리며 떠올랐을때 동네애들 몇 명이랑 급조한 도시락을 달랑 들고 비가 막 그친 산속으로 떠났다. 원래 꿈과 환상이랑 다가간만큼, 아니 그 배로 멀어지는지라 느린 꼬마들의 걸음에 무지개의 끝은 점점 멀어지고 잠시후 환상이 그러하듯 사라졌다. 걸어온 길이 아쉬운듯 길게 목을 빼고 뒤를 돌아본후 지도상에 점을 찍듯 절벽처럼 펼쳐진 산맥의 한군데를 무지개의 끝으로 정했다. 그곳이 아직도 " 대머리산 "이라 불리는 녹색 잔디를 한삽 퍼낸것처럼 흙빛을 띠던 산이었다. 그곳은 최소한 무지개처럼 달아나지는 않았으나 꼬마들이 도달하기에는 아득한 거리였다. 어둑어둑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산길을 달음질쳐 달아나온 것이 그 첫번째 길이었다.

중학교 국어책에 실린 큰바위 얼굴의 주인공을 나와 동일시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가 산기슭의 작은 집 앞에 앉아 책을 읽다 바라보는 석양에 대한 묘사가 꽤나 공감이 갔던 모양이다. 어느날 지평선으로 붉게 물드는 노을 속에 흡사 그가 앉아 있을것만 같은 곳을 보았다. " 대머리산 ",  아직도 뭉텅 퍼낸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듯 흙빛이 유독 눈에 띄었으나 묘하게도 석양과는 조화를 이루는 장소였다. 무지개의 끝이 그곳이리라는 어떤 연관성이 떠오른것은 아니었던것 같다. 다만 그곳에는 적어도 그가 앉아있을 의자가 있을것 같았고 그곳에서 같은 풍경을 볼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자전거에 올라 힘차게 페달을 밟은 것은 매미 소리가 유난히 시끄럽던 여름날이었다. 자전거로 갈수 있는 최대 고지까지 달린후 걸어간 그곳은 또한 발길이 닿지 않는 거리였다. 조금더 산속에 남아 있을 용기가 있었던 것은 머리가 큰 이유도 있을테고 자전거라는 교통수단에 의지한 탓도 있을 것이다. 버꾸기 소리를 뒤로 모골이 송연해진채 달빛이 비추기 시작한 산길을 미친듯이 달려나온 것이 그 두번째 길이다.

소나기가 막 그친 여름 하늘은 청명했다. 아직도 "대머리산" 은 주변 풍경에 동화되지 못하고 흙빛으로 남아있었다. 소나기가 내리던 횟집 평상에 올라앉아 있을때에도 그곳으로 떠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구태여 떠난 이유를 들자면 소나기와 빗줄기에 씻기운 하늘과 유난히 시끄럽던 매미소리였다. 물탱크를 단 친구의 트럭을 끌고 둘이서 떠난 길은 강산도 변한다는 십년이 무색하리만치 변해있었다. 꾸불꾸불 울퉁불퉁하던 흙길이 시멘트 길로 변하여 있었고 발길이 미치지 못하던 길까지 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그 시멘트 길 뒤로 남은 흙길을 더 달리고 한참을 걸어서 도착한 곳은 밤나무와 잣나무 몇그루만이 횡하니 서있는 곳이었다. 나무나 식물이 살기에 부적잘한 토양임을 한눈에 알수 있을 정도로 황폐한 느낌이 절로 드는 곳이었다. 그 어떤 흥분이나 감흥도 없었다. 적어도 그곳에는 무지개의 끝이 담긴 연못이 있고 소설속의 주인공이 앉아있던 나무 의자는 있어야 했다. 그런 환상 하나쯤 품고 지낼수도 있었을텐데. 아직도 여름날의 햇빛이 쨍쨍 내리쬐던 산길을 트럭에 실려나온 것이 그 세번째 길이었다. 그 길과 환상은 유독 시끄럽던 매미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만나지 말아야 할 인연이 있듯 떠나지 말아야 할 길이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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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6-28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큰바위 얼굴 하니까, 제 아는 동생에게 붙여준 별명이 생각난다는^^
인연의 깨우침을 일찍 아셨군요. 조숙하셔라...점점 더 신기한 잉크님!!^^

내가없는 이 안 2005-06-28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결과를 안다 해도 떠나게 될 것 같은데요. 끝을 보고 싶은 욕망을 뿌리칠 수 없는 사람이 있잖아요. 끝이 기대와 다르다는 걸 안다 해도 보고 싶은. ^^ 게다가 떠나고 싶게 글을 쓰셨잖아요. 가는 길을 느끼고 싶게. ^^

Laika 2005-06-28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떠나지 말아야 할 길"에 대해 글을 쓰셨는데, 정말 잉크님의 글을 읽으면 무모하게 떠나고 싶어지네요... 잠시 잉크님의 추억 속으로 다녀온 아련한 이 느낌...

잉크냄새 2005-06-29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 / 큰바위 얼굴이란 별명은 좋은거죠? 인연이나 길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것 같습니다.
이안님 / 맞아요. 끝을 보고 싶은 욕망, 그것을 쉽사리 뿌리칠수는 없을것 같아요. 그것이 또한 사람이 사는 세상이고 삶이겠죠.
라이카님 / 전 님의 페이퍼에서 무모하게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던걸요. 티벳, 이번 여름휴가때 한번 다녀올까말까 목하 고민중입니다.

미네르바 2005-07-08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나지 말아야 할 인연이 있고, 떠나지 말아야 할 길이 있지만, 그것을 인간은 알 수가 없지요. 또 안다면 재미도 없을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것을 운명이라고 하나 봐요.

잉크냄새 2005-07-08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네르바님/인생은 그 의외성과 우연성에 맛이 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운명...참 오래도록 품고 살아갈 단어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