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 청춘의 어두컴컴한 한 시기에 (뭐 청춘이 다 어두컴컴한 것은 절대 아니지만 암울했던 한 시기는 누구나 있으리라 생각한다.) 무인도나 인적이 드문 벽지에 틀어박혀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프라이데이를 끌어들인 로빈슨, 배구공과 끈끈한 정을 나눈 케스트 어웨이의 톰 행크스, 옷을 뒤집어쓰고 쓰리고를 친 승원(?)에게서 보여지는 고립무원의 적막감보다는 고립이라는 단어 자체에서 풍기는 묘한 매력에 잠시 이끌린듯 싶다.

 

영동고속도로가 새단장을 하기 전 대관령을 넘어가는 길은 꼬불꼬불한 2차선 도로였다. , , 안개가 워낙 순식간에 쓸고 지나가는 곳이다. 밤의 대관령 길의 운치는 대관령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강릉이라는 도시이다. 별들을 뿌려놓은 도시 라는 말이 이곳처럼 어울리는 곳도 없을 것이다. 지금은 신규 고속도로가 뚫려 구도로로 다니는 차량이 거의 없지만, 객지 생활이 익숙치 않던 학창시절의 대관령 정상에서 느껴지던 비릿한 바다내음과 함께 차창 밖으로 뿌려지는 별들의 향연은 또 하나의 그리움이었다. 동서울에서 주문진으로 향하던 버스는 나에게 있어 택시나 마찬가지였다. 학생 시절, 밤에 올라타는 직행버스의 승객은 나 혼자 유일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기사 양반은 노래 부르며 운전하고 승객은 뒷자리 창문을 열고 담배 피고 맥주 먹고 자고, 그래서 곧잘 버스를 택시라고 부르곤 했다.

 

아마 그때도 폭설이 내리고 있었고 승객은 물론 나 혼자였다. 대관령을 지나던 버스는 투덜거리던 엔진음을 마지막으로 멈추어 버렸다. 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재미삼아 던지던 눈싸움도 지루해질 무렵부터는 하나 둘 대관령을 따라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난 워낙 천하태평인 성격인지라 덮고 잘 신문지나 준비하고 여차하면 차에서 자버릴 생각이었기에 좌석에 누워 밤하늘과 어둠을 묻어버리는 눈발을 보고 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잔설은 외로움이고 폭설은 아픔이다. 잠시 이런 저런 상념에 빠져들다 눈을 뜨니 기사 양반 혼자 콧노래를 부르며 거의 도착한 상태였다.

 

짧은 고립이었지만 첫경험에서 느껴지던 묘한 매력은 아직도 두 손에 잡힐 듯 남아있다. 자유, 해방감….뭐 이런 정형화된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형체가 전혀 없어면서도 다른 무엇보다 또렷이 형상이 느껴지는 듯한 그런 매력, 전라도 지방의 폭설로 고립된 차들을 보다가 문득 그 짧았던 고립의 묘한 매력이 다시금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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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05-12-22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은 고립에서조차 잉크냄새가 설핏 남아 있어요.
(그런데 말예요. 알라딘 밖에서 너무 오래 고립되어 계시면 위험하다는 거 아시죠? 자주 뵙자구요.)

진주 2005-12-23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잉?

아무도 댓글을 안 다시고 추천만 누르지....
나만 고립....ㅠㅠ

내가없는 이 안 2005-12-23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짧은 고립에서 자유를 느낀다는 표현, 이해할 듯도 합니다. 진짜배기 고립을 원하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짧은' 고립은 달콤하겠죠? 버스가 택시화되는 경험, 저도 많아요. 종점 가까운 집에서 살면서 밤늦게 다니는 사람은 늘 막판에 택시가 된 버스를 탄다죠. ^^

Laika 2005-12-24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님의 짧았던 고립의 순간을 읽고 또 읽으며 "별들을 뿌려놓은 도시"를 한없이 그리워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또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바라보던 모습 ...
가끔 별빛과 혼동되어 보이던 오징어잡이 배들의 빛 ...
그 밤의 풍경은 아니지만..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진을 두고 갑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미네르바 2005-12-24 0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득 문정희 시인의 <한계령을 위한 연가>가 생각났어요. 짧은 고립의 매력... 저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었나 생각해 보는데... 기억이 나질 않네요^^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에요.
아기 예수의 탄생이 님에게도 기쁨이 되는 날이 되길 바래요^^

비로그인 2005-12-25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미..눈 속에서의 고립!! 짜릿하기도 하지만 좀 무서울 거 같습니다. 전 고장난 엘리베이터 안에 고립되어 있었는데, 자이로드롭처럼 쏜살같이 내려가던 미친 속도를 생각하면 지금도 쭈뼛!+__+;

잉크냄새 2005-12-26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주님 / 고립에 묻어나는 잉크냄새는 뭘까요? 궁금하네요.^^
이안님 / 어쩌면 단내나는 고립을 경험한 것일수도 있죠. 고립, 결코 낭만적이지 않은, 그러나 한번쯤 가슴을 휩쓸고 지나가는 바람이죠.
라이카님 / 대낮의 대관령이군요. 한밤중에 바라보면 님 말씀처럼 저 멀리 바다에는 오징어배 불빛도 보이고, 공항 활주로의 불빛이 왠지 기착지를 찾는 영혼에게 안도감도 주는듯 하죠.
미네르바님 / 한계령을 위한 연가... 대관령을 위한 연가와 비슷할것도 같네요.
복돌이님 / 무서운 감정이 없더군요. 엘리베이터의 고립, 폐쇄 공포증까지 더해지니 얼마나 겁날까요. 고립이 아닌 공포죠.^^

2005-12-28 1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06-01-16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 이크냄새라뇨... 저도 요즘은 짧막한 댓글 하나 쓰기도 쉽지 않네요. 그래도 가끔 소식 전해주시니 반가울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