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많은 길을 다녀보았다.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부터 시골의 흙먼지 이는 작은 길까지 시간이 허락하는 한 되도록 많은 길을 다니고 싶었다. 예전에는 사진으로 보는 외국의 길들을 동경했는데 직접 차를 끌고 국도를 누비면서 만나는 소중한 풍경에 매료되어 우리나라의 국도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국도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야생화 같다고나 할까. 자세히 보아주고 오래 보아주어야 그 소중한 모습을 부끄러운듯 살포시 드러낸다.
1. 그 시절 무엇을 던지듯 버렸던가
20대 초반의 2년간은 세상이 암흑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충분히 버리고 돌아설수 있음을, 또 그런 나를 충분히 다독여줄수도 있는 일들을 왜 그리 어려워했던지. 세상이 서글프고 힘들다고 느껴질때는 어김없이 춘천행 통일호에 몸을 실었다. 지친 몸과 마음을 받아줄 친구들이 다니던 강원대에 가기 위해서였다. 우연이겠지만 그 날은 꼭 비가 왔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 당시 춘천행 기차의 맨 뒤칸은 막혀있지 않았다. 비가 내리는 그곳에서 멀어져가는 기찻길 위로 던져버린 담배위로 난 또 무엇을 던지듯 버렸던가. 서로 만나지 못하는 기찻길이 아득히 만나는 그 곳으로 무심하게 던져버린 시선위로 난 또 무엇을 던지듯 버렸던가. 언젠가 세월이 더 흐르면 그때 던진 무엇을 생각하며 한번 가보고 싶은 길이다.
2. 그때 꼬맹이들은 어느 세상에 살고 있을까
청량리 11:00시발 강릉 7:30분착 기차는 참 많은 꿈을 싣고 달리던 기차이다. 방학때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이 기차를 타곤 했다. 청량리에서 영주를 거쳐 다시 북상하여 탄광촌을 지나 옥계의 아침해를 맞이하던 기차는 아름다운 풍경 그 자체였다. 책을 읽다 자다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덧 서서히 밝아오는 동해의 아침을 맞이한다. 거치는 간이역마다 밤을 싣고 새벽을 싣고 올라탄 세상풍파에 지친 이들의 꿈을 싣고 달리던 기차는 밤을 헤치고 내리는 이들의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언젠가 태백에서 폭설로 기차가 연착된 적이 있다. 한참후 다시 출발을 하려는 순간 유리창위로 부딪히는 눈덩이들, 한밤중 눈만큼이나 하얀 가슴을 안고 있을 탄광촌의 꼬맹이들이 기차를 따라 달리며 눈을 던지고 있었다. 그날 밤 온통 하얀 꿈을 꾸었을 그 꼬맹이들은 지금은 어느 세상에서 또 하얀 꿈을 꾸며 살아가고 있을까
3. 지금이라면 그대로 풍경이 되었을까
구례의 시골장이 끝나고 시골 할머니들의 다라를 들어주며 같이 올라탄 구례에서 하동으로 가던 시골버스는 정이 듬뿍 담겨있다. 오늘 장사 이야기, 자식들 이야기, 얼마전 죽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얼핏 들으며 바라보는 섬진강의 초록빛 물결. 갓 풀리기 시작한 섬진강 위로 땟목이 떠가고 막 길을 나서기 시작한 어느 시골부부의 다정한 모습이 지나가고 다시 날개짓을 시작한 새들이 날아들던 그곳에서 이대로 살아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 한번의 발걸음으로 그곳에 풍경이 되고 싶었다. 섬진강변의 아름다움과 시골버스의 이런 정겨움이 김용택 시인의 발걸음을 붙잡은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면 그대로 풍경이 되었을까. 아직은 아니다. 아직 가야할 길이 있기에 시선 한번 던지고 다시 길을 나설것이다.
4. 저마다의 풍경을 만들어가는거다
동해안을 따라 태백산맥처럼 길게 늘어진 7번 국도는 어느 길보다 아름답다. 차를 때릴듯 달려드는 파도, 산속을 달리다 갑자기 맞이하는 드넓은 바다는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그냥 막혔던 가슴이 확 트인다고할까. 절로 와~ 하고 탄성이 나온다. 수많은 솔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로운 바람과 파도가 던져주는 짤짜름한 바람의 어울림. 그것이 7번 국도의 생명인지도 모른다. 작년과 올해 여름휴가는 모두 7번 국도를 달렸다. 확장공사의 진행 사항을 보니 내년에는 길의 모습이 바뀔것 같다. 그러나 서글퍼하지 말자. 어차피 길도 사람과 같아서 또 저마다의 풍경을 만들어가는거다.
5. 가보지 못한 길
너무 가보고 싶었으나 가보지 못한 길이 있다. 송도와 수원을 연결하던 협궤열차이다. 95년 12월 31일 영원히 사라졌으니 앞으로도 가보지 못할 길이 되고 말았다.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학교 시화전마다 빠지지 않는 소재로 등장하던 풍경이 소래포구의 두량짜리 협궤열차였다. 갯내음과 추억을 싣고 달린다던 협궤열차. 얼마전 소래포구의 철길을 보러갔지만 너무 많은 인파속에서 두량짜리의 협궤열차 풍경을 상상하기란 힘들었다.
길을 사랑하려면 길 위에 군림해서는 안된다. 길 위에서 만나는 수줍은 야생화와 작은 짐승과 돌멩이처럼 그냥 우리도 선 자세로 굳어버려 풍경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길 위에서 똑똑 노크를 해볼 일이다. 그러면 수줍은 듯이 열리는 그들의 세상을 만날수 있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