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2.0 - 트럼프의 귀환, 놓쳐서는 안 될 정책 변화와 산업 트렌드
김광석 외 지음 / 이든하우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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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런식으로 판매하면 안됩니다. 책제목만 트럼프 당선된 뒤 확정하고 책 원고는 트럼프가 될지 해리스가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미 마감된 내용이네요. 시류에 편승하기만 하려는 듯한 제목으로 독자를 현혹해서는 안됩니다. 누가될지 모를 상황의 내용이란건 명확히 밝히고 출간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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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당쟁사 1 - 사림정치와 당쟁 : 선조조~현종조
이성무 지음 / 동방미디어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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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타 역사서에 비해 크게 다른점은 없다. 다만, 이 책의 특징이라면, 본격적인 조선의 당쟁의 역사에 대해 서술하기 전, "조선의 당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주제로, 일제시대 사학자, 한말 사학자 등의 견해를 상당페이지를 할애하여 소개해 놓고 있는 것이다.

그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당쟁을 접하기보다는, 또 혹시나 그릇되게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자신의 견해를 한번 쯤 확고히 해 둘 수 있게 조선의 당쟁이라는 사안에 대한 관점들을 서술해 놓은 것이 인상적이고, 또 마땅히 그런 다양한 의식을 살펴본 뒤, 역사를 훑어야 올바른 가치관이 서리라 확신한다. 물론, 다양한 견해는 소개해 놓되, 조선의 당쟁이라는 것은 부정적으로만 볼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향하는 저자의 관점도 감추지 않는다.

또, 당쟁대신 붕당정치라고 쓰자는 주장에, 아무리 일제사학자에 의해 당쟁이라는, 우리조선역사를 비하하는 듯한 단어가 파생되었다 할지라도, 분명 조선의 그 역사는 부정적인 면이 있었고, 또, 역사란 자신을 미화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반성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에서, 당쟁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낄필요가 없다는 대목은 기억에 남는다.

이 책의 다른 특징이라면, 조선 당쟁의 역사라고 하여, 당쟁부분만 독립적인 사건형식으로 다루는것이 아닌, 그 당쟁이 일어나게 된 시대상황이라던지, 그 때의 주류흐름등을 같이 소개해 놓은 것이다. 이런 구성은 다소 분량이 늘어나는 단점을 가지기도 하지만, 자칫 파편적으로 머릿속에서 쉬이 잊혀질법한 것도 그 흐름덕분에 조금은 더 끈적하게 머무는 효과를 볼 수 있을 터다.

하지만, 서술이 대체적으로 조금은 건조하다는 맛이 인다. 역사란 분야는 사건 그자체가 가감없이 세월의 흐름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윤색한다던지, 흥미를 위해 저자의 임의로 바꾼다던지 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된다. 그러기에 약간은 지루해 질 법도 하다. 하지만, 사건을 다룸에 있어 저자의 문체는 그 사건을 보다 생동감 있게 만들수 있고, 보다 현실감있게 다가오게 만들 수 있다. 그런 점에서라면, 저자 이성무씨는 이덕일씨의 문체에 비해 건조하다.

다만, 어차피 역사자체에 흥미를 가지고 본다면, 이런 문체의 문제는 기호일 것이다. 오히려 건조한 맛이 역사를 더욱 역사답게 와닿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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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4-09-18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사에 관한 책을 좋아하시는군요!^^

_ 2004-09-18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에는 관심만 있다가, 요즘은 역사공부를 따로이 하고 있다보니,
전에는 보이지 않던 부분도 보이곤하는 재미에 맛들였지요 ^^

바람구두 2004-09-18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동방미디어닷... 흐흐.... 이곳에서 나오는 책들 가운데 특히 역사서들이 대략 건조한 서술체가 많지요. 그럼에도 나름대로 의미있는 출판물들이 꽤 됩니다. 예를 들어 최근에 나온 "한국사연표"가 그렇지요. 제 경우엔 역사 분야든, 아니든 연표와 함께 읽어보려는 노력을 하는 편이거든요. 그게 당시를 이해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더군요. "곁에두는 세계사" 연표와 "한국사연표" 이 두 권이 괜찮더이다.

_ 2004-09-18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동방미디어쪽이 약간 그런면이 있었군요. ^^
아, 근데 한국사연표는 바람님 말씀듣고 검색해 봤는데, 알라딘에서는 아무런 정보가 입력되어 있지 않네요..^^;; 전표라, 전 이제까지 다소 무식하게 그냥 연도를 통째로 외워서 나름의 연표식으로 기억하고 있었던거 같은데, 그게 나중에는 조끔씩 꼬인다는 ^^;;

김 하 늘 2009-10-19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르 ㅍㅣ 아 우 리 언 니 가 해 더 고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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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음이 몰려오는 점심시간 후의 5교시, 고등학교 국사가 나를 재우는 어느 교실. 꾸벅꾸벅. 천고마비 : 하늘이 높기만 하니 나의 머리가 마비된다는 진지한 사자성어를 실천하고 있는 한 학생에게 어김없이 분필하나가 날아든다. 딱! 부스스, "어, 시방 여긴 어디여?" 

"야, 박지원." 이에, 갑자기 눈이 번쩍, 머리가 쭈삣.

"박지원. 호는 연암으로, 조선후기 이용후생학파의 일원인 그는, 과농소초로 농업생산력의 증대를 주장하였고, 열하일기로 수레와 선박의 이용 등을 주장하였으나, 그 역시 당시 집권자들에게 반영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기억되는 연암 박지원은 저런 것이 아닐까? 우리에게 남아 있는 박지원은 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텍스트로서, 기억에 고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두뇌에 억지로 쑤셔넣어 가끔씩 뒤통수에 딱!하고 내리꽂히는 분필의 아픔과도 같은 그런 것이었다. 그렇게 텍스트로만 우리에게 주입되어 있는 그에게서는 도저히 생명력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밥먹고 일어나면 책보고, 또 책보고, 또 책보고, 또 또 또.. 그 노력과 광기의 괴로운 시공간을 뚫고나온 것들이 그의 저작 아니겠는가?

이런 때없는 고민을 하고 있을 차, 그녀, 고미숙이 저기 먼데서 부터 눈썹이 휘날리며 달려오고 있다. 100미터, 50미터, 30미터, 20미터. 뭐야, 그녀의 달리기 솜씨가 장난이 아닌데? 아니, 그런데 그녀의 얼굴은 왜 저런거야?

얼씨구나 들어간다. 나오구나, 나오구나. 웃음이 떼구르르르르르르, 얼굴은 삐죽삐죽 빼죽빼죽, 이리저리 우당탕탕 그거보소 가히 가관이로세, 이봐라, 들쑥 날쑥, 요리갔다 저리갔다, 오도방정 지랄방정 무얼 그렇게 방정이더냐. 가만히 있지 못할까? 어허, 휑하니 지나가니 눈깜짝할 새가 눈깜짝도 못할 시간이오. 동네사람 저좀 보소. 저좀 보소.

그렇게 헐레벌떡 뛰어온 그녀는 우리가 못내 안타깝다는 듯 만나자마자 있는 힘을 모아 손을 맞잡아 쥐어버린다.  아니, 내가 그렇게 반가운가. 왜? 내일 지구가 파업이라도 한답디까? 숨을 헐떡이던 그녀가 겨우 숨을 고르며 한마디 지른다. 심봤다!! 아니, 연암봤다!!

거대한 몸집에 매의 눈초리. 귀신도 쫓는다는 양기를 지닌 태양인. '주자 만세 불신 벼락'인 그 경직의 조선시대에 저런 풍체를 지닌 박지원. 무슨 생각을 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그에게서 전형적인 양반타입이라는 단어 하나를 낚아 올린다. 그 큰 월척을 건진 우리일진데, 그에게서 또 무엇을 발견해야 한단 말인가? 각자의 생의 특이성은 있겠다만, 그들 양반이라는 자들이 또 대개 비슷하지 않은가? 도대체가 이젠 지겹단 말이지. 그 점잖들이. 하지만, 손사레를 치며 그녀가 들러주는 박지원의 일화하나를 살펴보자.

"말이 강 복판에 이르자, 갑자기 그 몸이 왼쪽으로 쏠린다. 대체 물이 말의 배에 닿으면 네 발굽이 저절로 떠서 누워 건너는 모양이다. 내 몸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오른편으로 기울어지면서, 하마터면 물에 빠질 뻔 하였다. 마침 앞에 말꼬리가 물 위에 떠 있는 것을 보고, 재빠르게 그것을 붙들고 몸을 가누어 고쳐 앉아서, 겨우 떨어지기를 면하였다. 나 역시 내 자신이 이토록 재빠를 줄은 상상도 못했다."

뭐냐고? 대체 물에 빠질뻔 하다가 말꼬리 겨우 붙잡는게 뭐가 재밌냐고? 잠깐,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집고 넘어가야 한다. 박지원 그는 누구인가? 거대한 몸집에 매의 눈초리를 한 전형적인 양반아니던가. 비가 와도 '어흠~' 한번 질러주고 비를 벗삼아 걸어가야 하는 양반이거늘, 대체 박지원은 그런 체통따위는 잊은지 오래다. '물에 빠질뻔 한것을 다행히 그러지 아니하였다'고 점잖게 자기의 부끄러움을 감추는게 아니라, "마침 말꼬리가 물 위에 떠 있는 것"을 보고 옳거니하며 붙잡고, 또 그렇게 자기의 몸을 겨누고는 "나 역시 이토록 재빠를 줄은 상상도 못했다"면서 그렇게 좋아라하다니, 이거 참 양반체면 말이 아니다. 또 하나,

기상재설(欺霜賽雪)사건. 그는 중국의 한 점포 문설주에 붙어 있는 이 기상재설을 이렇게 풀이했다.

'장사치들이 자기네들의 애초에 지닌 마음씨가 깨끗하기는 가을 서릿발 같고, 또한 흰 눈빛보다도 더 밝음을 스스로 나타내기 위함이 아닐까?'

그는 그런 생각으로 한 전당포에서 자신의 필치도 자랑할겸 일필휘지, 액자로 달 현판에 기상재설을 갈긴다. 아, 물론 그 찰나같은 순간에 매의 눈초리를 지닌 박지원의 레이다망을 피하지는 못한다. 처음 두자를 쓸 땐 환호하다가 막상 다 쓰고 나니 사람들의 반응이 영 신통치 않다. '"이런 궁벽한 곳의 장사치가 어찌 전날 심양 사람들만 할까. 제깐 놈이 글이 잘되고 못된 것을 어찌 안된말야" 투덜투덜.

그러다 마침 자신의 글씨를 알아보는 한 주인을 만나니, 연암은 옳다구나, 또 다시 현판에 기상재설을 휙휙 갈긴다. 어, 근데 이 주인이라는 작자라는 자가 왈, "저의 집은 부인네들 장식품을 파는 곳이지 국숫집은 아니옵니다." 아!뿔!싸! 기상재설은 심지가 밝고 깨끗함이 아니라, 국숫가루가 서릿발처럼 가늘고 눈보다 희다는 뜻이었던 것이다. 이에 그는 한마디 한다. "어흠, 나도 모르는 바 아니로되 애오라지 심심풀이로 써보았을 뿐이오." 크, 이 부끄러움.

연암, 그는 양반답지 않았던 것만이 아니라, 덩치에 맞지 않게 귀엽기까지 하다. 아니, 이렇게 홱 톨아졌다가, 금새 칭찬해주니, 좋다구나 자랑하다가, 결국은 저 망신. 근데 자신은 그게 재밌다고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는가? 어쩜 그 어르신 이렇게 귀엽기까지 하신가.

이렇게 웃음을 묘미를 날려주는 그는 그저 양반의 체통에서만 벗어난 그저그런 웃기기만 한 양반이냐하면 또 그렇지 않다.

"드 넓은 요동벌판을 맞이한 그는 내 오늘에 처음으로, 인생이란 본시 아무런 의탁함이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돌아다니는 존재임을 알았다. 아, 참 좋은 울음터로다. 가히 한번 울 만하구나."

아니, 이양반 그저 웃긴줄로만 알았더니, 사실 저렇게 철학적이지까지 한게 아닌가?

이렇게 심오한 그이면서도 유머를 갖춘 그이기에 그의 모든 행동과 말은 진지하면서도 아주 흥미롭다. 보통 인생을 아우르는 철학을 내뱉을 때는 다들 무게한번 잡아주고, 평상시에는 죽어라 쓰지도 않는 온갖 출처미상의 단어들을 갈기면서 기어코 상대방의 눈물샘과 하품을 자극하지만, 그는 그런 상황에서도 꼭 상대방의 눈물샘을 자극면서 하품대신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다. 심오하면서도 그 속에 갖춘 유머. 아, 이보다 더한 콤비가 어디에 있으리오, 이보다 명랑한 인물에 조선 그 어디에 있으리오.

이렇게 흥분한 어조로 들려주는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 있다보면, 머릿속 어딘가 퀘퀘하게 반쯤 처박혀 있던 '연암 박지원'이라는 단어에 서서히 생명력이 갖추어 지기 시작한다. 그녀의 말마따나, 나는 천재는 싫어하지만, 이렇게 유머를 갖춘 천재라면 미워할래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명랑한 연암 박지원. 이렇게 열하일기의 밖으로 스르륵 뛰쳐 나온 그는 이시대의 인물이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이렇게 다른 시대를 산 연암은 그의 시대에 일었던 문체반정, 주자학의 무게감이 없이 웃음과 가벼움으로 문체를 어지럽히는 그 무리의 괴수로 지목된다. 반성문하나 쓰면 잘 봐주겠다는 정조의 꾐에도 이리저리 내빼는 연암. 그의 내뺌은 사실 그의 유머와 역설이 그저 재미와 흥미만을 위한것이 아니라 시대를 뒤틀어 보는 것이라는 것을 암시해준다. 경직된 조선사회와 그 폐쇄성. 주자 아니면 죽음으로만 아는 그 답답함. 이 모든게 연암에게는 한심해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저렇게 마구마구 비틀어버렸던 것이고, 양반체면 불구, 호기심과 유머를 내치지 않고 꼭하니 감싸 안았던 것이다.

여기 이 책은 열하일기의 여러 작품들을 소개한 것이 아니라, 저렇게 연암이 가지고 있던 에피소드, 사상, 삶들만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의 실제작품은 간간히 인용구로 소개될 뿐이다. 그리고 개인적이기까지한 그녀, 고미숙씨의 시선이 책 전체의 조명으로 반짝반짝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연암 박지원, 그의 에피소드에 웃고, 그의 유머에 웃고, 그에 흥분한 고미숙씨의 언변에 웃고 울다보면, 어느새 이 얇지만은 않은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은 끝이 나고 말아버린다.

이 책을 보고 난 뒤, 연암의 문제작 <열하일기>가 새삼 궁금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터고, 연암 박지원, 그 한사람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새삼 다시 묻는다. "연암 박지원, 그는 누구인가?"

"이런, 매력덩어리."

사족 : 이 책의 뒤에는 조선 양반, 그 자체의 정수 다산 정약용과 천방지축 철학자 박지원의 비교가 나온다. 하지만 나는 이미 시선이 연암에게로 기운지 오래다. 세상 그렇게 무게 잡지 말란말이지. 웃음이 대중적이고 그래서 한차원 낮은 것이라고? 그를 보라, 연암을 보란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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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미숙, 몸과 우주의 유쾌한 시공간 '동의보감'을 만나다
    from 그린비출판사 2011-10-20 17:01 
    리라이팅 클래식 15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출간!!! 병처럼 낯설고 병처럼 친숙한 존재가 있을까. 병이 없는 일상은 생각하기 어렵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나 역시 살아오면서 수많은 병들을 앓았다. 봄가을로 찾아오는 심한 몸살, 알레르기 비염, 복숭아 알러지로 인한 토사곽란, 임파선 결핵 등등. 하지만 한번도 병에 대해 궁금한 적이 없었다. 다만 얼른 떠나보내기에만 급급해했을 뿐. 마치 어느 먼 곳에서 실수로 들이닥친 불...
 
 
panda78 2004-09-15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사놓고 안 읽고 있었는데, 당장 펴 들어야겠습니다. ^^추천!

에레혼 2004-09-16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 때문에라도 발길을 어지간히 잡아끄는 글이군요!

덕분에 연암의 향기, 잠시 맡았습니다. 추천 하나 들어갑니다.

_ 2004-09-16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옴마나, 판다님, 라일락와인님 감사해요~ ^^

갈대 2004-09-16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보다 리뷰가 더 재밌네요. 고미숙의 글쓰기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도 많았지만, 저로서는 참신한 시도가 무척 마음에 들었습니다.

_ 2004-09-16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고미숙씨 글쓰기에 대해 말이 있나보죠? 남이야 뭐라든 전 즐거웠기때문에, 괜찮은거 같더군요. ^^

바람구두 2004-09-18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암을 너무 희화화했다는 지적이 있었지요. 이러고저러고간에 저는 아무 이유없이 손이 안 가던 책이더군요. 왜 그럴까? 혹시 너무 베스트셀러라... 흐흐.

_ 2004-09-18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듣고 보니, 그런면도 있는거 같군요.
저도 이 책은 사둔지가 꽤 되었는데 이제서야 보는거랍니다. 박지원이란 인물자체에 관심이 없다면,또는 그가 궁금치 않다면, 꼭 읽어야 하리라는 생각은 안들어요. 기대한 것과는 많이 다른 내용이었거든요. 그래도 기대하지 않은 재미가 있었기에, 별을 많이 매겼죠 ^^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지음 / 석필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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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화를 현대판으로 옮기면 뭐가 될까? 민주당에서 대통령이나오고, 3김정치가 청산되고, 우리당의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는 것쯤 될까? 아, 특히나 저번의 한나라당 탄핵사건은 정말 여기에 꼭 끼워넣어야 하겠다. 현대판 예송논쟁 아니던가.

이런 정치판의 돌림싸움을, 특히나 우리나라의 당쟁을 한심하게 보고 덧없음으로 보는것이 일제 식민주의 사관의 영향이라고 한다. 뭐, 나야 일제시대에 산 사람이 아니지만, 그 이래로 내려온 그 일제주의적 시각에는 영향을 받았다는 소리정도는 되겠다.

사실, 가장 큰 문제는 당쟁과 같은 정치판 놀음에 조선은 망했다는 시각이라 하는데, 다른나라 역시 그런 일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어쩌면 이런 싸움이 더 나은세계로 향한 발돋움이라고까지하는 말도 들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조선이 어떻게 망해버렸든 간에, 그리고 설령 더 나은 세계로 향한 몸부림이었든간에 한심한건 사실이다. 예전의 한나라당과 우리당의 싸움이 우리나라 진보를 위한 싸움이라고 외치고 있을때, 그 결과야 어찌되었던 내 눈에는 너무 한심해 보였다. 자기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뺏으려고 아둥바둥거리는 저들이 과연 누구를 위한 이들인가하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이 자리에 앉은 지금, 권력욕에 서서히 변질되어가는 모습을 보면, 후.

마찬가지로, 제 아무리 '예학'에 생명을 거는 시대였다고는 하지만, 3년 복인가, 1년복인가. 1년인가 9개월인가하는 싸움에는 한심함이 일지 않을 수 없다. 그건 잘못보는 거라고? 예학은 지금 우리가 보는것과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을 만큼 하늘과 같은 이치였다고? 뭐라든 그 속에 조선의 백성들이 빠진것은 사실이다. 정치판이야 원래 그런거라 어쩔수 없다면 정치판이야 어쩔수 없이 한심한거다. 그래서 언제나 백성이 빠지는, 너와 내가 빠지는 역사는 씁슬할 수 밖에 없다.

이런 한심함을 내뱉어내는 그네들의 정치판이었지만, 그래도 흥미로운건 사실이다. 비록 지금의 내가 잘먹고 잘지냄에 따라 그때 백성들의 고통은 철저히 외면하는 시각이 되겠지만, 어차피 오늘의 역사도 지금의 한씨네 우씨네만이 남을뿐, 너와 나는 깨끗이 없어지고 말게 아닌가. 그런 역사가 쥐려는 큰 덩어리를 감안한다면, 이 책은 재미있기까지 하다. 어쩜 저렇게도 권력욕이 사람을 돌아버리게 만들까하는 의문이 들기때문이다. 유럽의 어떤 큰 난을 아이들 장난감에 비유한 적도 보았던거 같은데, 그와 마찬가지로 어쩜 유치하기까지 하다.

어차피 유치하고 한심한 그네들이었다면, 왜 그렇게 싸우는지 그네들의 시각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사화만을 모아서 보여주는 책이 이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이다. 가장 폐해가 심했다는 당쟁보다는 나을지 모르지만, 이 사화도 기존세력 - 훈구파와 신진세력 - 사림파간의 피비린내나는 기록이다. 후세의 평가야 어찌되었든 상소한번에 인정사정없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장면은 좋아뵈지 않는다.

역사야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해석하고 풀어내는 능력에 따라 같은 사실을 두고도 재미있을 수 있고, 흥미가 떨어질 수도 있겠지만 이미 역사쪽의 서술로서는 상당히 흥미를 이끌어 내는 재주가 있다고 평이나 있는 이덕일씨의 책이니, 부담없이 술술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보통 책에서는 잘 다루지 않던 그네들의 시도 간간히 실어 주는데, 이 시들이 조금씩 무거워지는 머리를 식히는 휴식처가 되어준다.

특별하기까지 한 것은 없지만, 어차피 사화라는 한정된 역사사실을 기준으로 본다면 특별한 무엇이 있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할지 모른다. 분명 이 책을 읽을 이는 사화에, 또는 조선의 역사에 흥미가 있어 읽을 터, 그렇다면 전혀 부담없이 재미있게 읽힐 책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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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질투
프리돌린 쉴라이 외 지음, 조현천 옮김 / 열대림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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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이런말을 합니다. "여자와 남자는 친구가 될 수 없다."

동의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터지만 저는 후자쪽이었습니다. 고등학교때부터 절친하게 지내온 친구가 한 명 있기 때문이지요. 그 친구를 한 번도 여자로 생각해 본적이 없거니와, 그녀와의 우정에 참으로 뿌듯해 했습니다. 그런데도 친구란 있을 수 없다고 단정지어버리는 저 문구가 얼마나 가당찮았던지요.

얼마전입니다. 간간히 연락을 주고 받던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생긴걸 알았습니다. 직접 들은게 아니라 조금 섭섭한 마음이 고개를 치켜 드는걸 과감히 뒤통수 한대 쥐어박고 기절을 시켰지요. 왜 저에게는 말을 하지 않았는지, 저에겐 굳이 자랑하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어떤건지는 모르겠지만 - 하긴 그런 자랑을 하는 사이는 아니였군요. 그래도 처음에는 놀랬습니다. 쉽사리 남자친구가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았던 친구였거든요.

아, 이렇게 주위에 모두 자기의 짝들이 하나하나 생긴다는 소식들에, 새삼 기뻐하기도 했지만, 이제 이렇게 나도 늙어간다는 데에 약간은 우울해지기도 했습니다. 이번에도 놀라움 다음에는 어김없이 우울감이 찾아오더군요. 커피하나 빼들고, 혼자 난간에 서 있는 시간이 부쩍 늘기 시작했고, 책보다가 멍하니 다른 생각을 하는 저를 보고 놀래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횟수도 늘어났습니다. 

하루가 흘러가고, 나는 그자리에 있고, 이틀이 가고, 여전히 나는 그곳에.. 

우울감에 찌들어 갈수록 저는 정체되어 갔지만, 세월은 아랑곳하지 않고, 잘도 가더군요. 세월은 화살같다고 하다지만, 좀 같이 가면 좋으련만. 아,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달랐습니다. 제가 서있는 곳과 현실은 벌써 일주일이나 차이가 나버린 것이었지요. 뭔가가 꼬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만났습니다. 이 핑계, 저 핑계. 그저 그냥 만나지 못해서 어떤 목적을 하나 두고서 만났습니다.  그녀의 컴퓨터가 말을 듣지 않는다군요. 그래서 대충 손을 봐주겠다는 명목으로 그렇게 가깝다고는 할 수 없는 그녀의 집으로 가기로 한 것이지요. 뭐가 어찌 되든 그냥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녀의 집으로 가서 컴퓨터를 고쳐주고, 밖에서 밥을 얻어 먹었습니다. 그리고는 차시간이 늦어서, 얼른 주차장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타는 버스가 끊어져 시내버스를 타고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야만 했습니다. 혼자 우왕자왕 하고 있을 때, 시내버스를 잘 타지 못하는 저를 위해 제가 타야 할 버스를 지적해 주는 그녀를 보지 못하고 있다가,

"뭐해? 저 버스야!"

 뒤늦게서야 보고 급하게 버스에 뛰어 올랐습니다.

"간다"

그렇게 한마디를 툭 남겨둔채 버스는 출발했습니다. 그동안 참 할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랜만에 만나는 것인데도 어떤 목적을 가졌다는데에서 후회가 치밀어 올랐지요. 그렇게 말이 안나와서 괴로웠던 적은 또 없었던 적 같군요. 시내버스로 지나치는 풍경들이, 어둠에 묻혀가는 풍경들이 저하고는 딴세상처럼 느껴졌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길.

오늘따라 좌석은 만원입니다. 저들은 어디를 그렇게 다녀 오는 것일까요? 제 옆자리에는 술에 만취한 한 아저씨가 온 몸을 휘저으며 괴로워 하고 있었습니다. 신음을 내뱉는 그가 그다지 보기에 유쾌하지 않아  눈을 감아 버렸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알았지요. 제가 왜 그렇게 우울했던지, 왜 갑자기 말문이 그렇게도 막혔던지. 눈을 감고도 계속 들려오는 신음소리는 옆에서 괴로워 하는 아저씨의 찌푸린 상이 아니라 제 마음이 신음하는 소리임을 알았습니다. 돌아오는 내내 이어폰을 크게 틀어놓았습니다. 아무 생각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버스를 내리니 빗방울이 한방울씩 떨어집니다......


김연수는 이런말을 했었다.

"질투란 숙주가 필요한 바이러스와 비슷하다. 질투란 독립적인 감정이 아니라 사랑에 딸린 감정이다. 주전선수가 아니라 후보선수라 사랑이 갈 때까지 가서 숨을 헐떡거리면 질투가 교체선수로 투입된다. 질투가 없다면 경기는 거기서 끝나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13세기 사람 앙드레 르 샤플랭은 "질투하지 않는 자는 사랑할 수 없다."는 주장까지 했다." <사랑이라니, 선영아. 130p>

아, 누가 대체 남자는 질투를 하지 않는다고 하는가? 남자도 인간이다. 오죽하면 질투하지 않는 자는 사랑할 수 없다는 말이 다 나오랴. 나 역시 이렇다 할 사랑은 해 본적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투란 감정은 쉽사리도 느끼면서 살아왔다. 가만히 보면 질투는 사랑이라는 숙주를 필요로 하는게 아니라 그저 마음이 존재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스며들수 있는 지독한 바이러스인지도 모른다.

뜻하지 않은 나의 질투를 발견해버린 나는 참 괴로웠다. 어디에도 털어놓을 수 없고, 마음 속 꾹꾹 눌러담아 놓을 수 밖에 없는 그 감정이 요즘들어 나에게 너무 친근하게 구는 것이 너무도 불편했다.

그래서 집어든 소설이 <그 남자의 질투>다. 사실 <사랑이라니, 선영아>를 본 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책이기도 한데, 그 당시에만 해도 그저 관심만 있었다 뿐이지, 크게 나를 끄집어 당기지 못한게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나의 입장은 조금 다르다. 나의 이 질투의 괴로움을, 나의 이 질투의 부끄러움을 나 말고도 누군가도 하고 있다는 위로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 남자의 질투>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소설이다. 한가지 있다면 모두 질투를 하고 있는 남자들이 있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그냥 그들의 질투 이야기고, 그 이야기가 끝이다. 무슨 문학적 장치라던지, 사람을 놀래키는 반전이라든지, 인생의 동아줄이 되는 교훈도 없다. 그저 여기도 질투, 저기도 질투. 질투를 양껏 하고 있는 남정네들뿐이다.

그래서 이 책은 조금은 위험하다.

도대체 이 따위 이야기를 왜 적어 놓고 뭐하러 보는데? 사랑의 아름다움, 아픔을 말하고자 하는건가? 너무 밋밋한데?

라는 지적이 쉽사리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의 존재의의는 그런 목적의식을 지니고 이것을 보는 사람에 있지 않다. 그저 '즐기기'위한 사람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이 책의 의의다.

누구나 사랑의 아픔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터고, 또 질투의 기억도 가지고 있을터다. 그것을 추억으로 가지느냐 치욕으로 가지느냐는 순전히 개인적 문제다. 사랑하는 이가 다른 남정네와 웃고 있는 모습을 질투하는 모습은 피식웃음지어지는 추억이기도 하고, 저때의 기억은 나에게는 아픔으로만 남을 것이다. 하지만, 추억이든, 치욕이든, 아픔이든 그 질투를 미처 쫓아내버리지 못하고, 간간히 자신과 어떤 만남을 가지는 사람이 있다. 그 부류중의 한 사람이 나고, 이 소설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한 소설이었고, 또 나를 위한 소설이기도 했다. 질투의 아기자기함을 즐기든, 질투의 덧없음을 즐기든, 질투의 파괴성을 즐기든, 질투의 유치함을 즐기든, 그런 질투에 대한 기억의 파편을 마음속 어딘가에 놓아 두고, 그저 질투를 기꺼이 만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즐길 수 있는 소설이다.

내가 봤을 때는 이책의 문체는 특별히 아름답지도 않았고(상당히 마음에 드는 단편이 있긴하다.) 이야기 자체가 특별하다거나, 따로 사람의 주목을 끌만한 소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질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질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제도 내일도 질투를 하지만 살아 숨쉬고 있었다. 그리고 나역시 이렇게 살아 숨쉬고 있다. 그런 그들이 민망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그들에게서는 결국 웃음을 찾아 볼 수는 없었다. 나에게도 웃음이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질투는 역겨운 것이 아니고, 지금 나는 그녀의 진정한 행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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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4-09-13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책보다 님의 스토리가 더 얘기가 될것만 같은....차라리 님이 한번 써보셔도...^^;;;

_ 2004-09-13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 저도 적다보니 애초에 짧게 적으려 했던 글이 무진장 길어져 그만둘까했는데, 아까워서 그냥 올렸습니다. 해서 카테고리도 '지극히 개인적인 리뷰'로 바꾸었지요. 어차피 서평이 아닌 리뷰야, 책에 대한 소개의 목적도 있지만, 되돌아보면서 자기자신도 아우르는것도 있기에, 그냥 그대로 썼습니다. ㅎㅎ;; (그래도 좀 길죠? >_<)

잉크냄새 2004-09-13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투는 특별한 감정이 아니라 인간이 오감으로 느끼는 감각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태일것 같아요. 단지 그것이 표출되는 방식이 사람에 따라 다른것 같습니다.
그래서 님의 글 [ 질투는 사랑이라는 숙주를 필요로 하는게 아니라 그저 마음이 존재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스며들수 있는 지독한 바이러스인지도 모른다 ] 는 말이 동감이 가나 봅니다.

_ 2004-09-13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튼 바이러스는 괴롭죠ㅠ_ㅠ
저 글. 차분한 마음에 적어야 하는데, 이어폰으로는 데쓰메탈을 끼고 정신없이 적었더니
하, 어지럽군요. 위에 부분만 따로 떼어 페이퍼로 옮길까 생각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