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 ] 현재 내가 외우고 있는 국민 교육 헌장은 여기까지이다. 중간은 생각나지 않고 마지막 부분인 [ 새역사를 창조하자 ] 가 떠오른다.

내가 아직도 국민교육헌장을 그나마 외우는 것은 국민학교 시절 글씨쓰기 대회가 열릴때마다 단골 메뉴로 등장하던 것이 애국가, 국기에 대한 맹세와 더불어 국민 교육 헌장이기 때문이다. 슬며시 잊혀졌던 이 구절을 다시 떠올린것은 박민규의 <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 이라는 소설속의 구절에 머리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던 때였다.

소위 경필대회라 불리던 글씨쓰기 대회에 처음 나간 것은 국민학교 2학년때이다. 그 기회는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당시 축구와 놀이에 정신없던 나에게 담임 선생님이 출전 의사를 물어볼 것도 없이 딱 한마디를 던졌다. " 야, 니 몇시까지 연필이랑 지우개 가지고 어느 학교로 가 "  흙투성이가 되어 가방을 던져놓고 연필과 지우개를 들고 학교에 도착하니 자리를 배정해주었다.

대회 시작, 국민교육헌장 쓰기였다. 한참을 써내려가다 그만 연필을 떨구었다. 똑~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연필심이 부러졌다. 한참을 망설이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까지 나는 경필대회가 열리는 곳의 풍경을 보지 못했다. 모든 아이들 옆에 엄마가 같이 앉아 연필을 깍아주며 잘못쓴 글씨를 지목해주는 광경이었다. 괜히 먹먹해오는 기분으로 한참을 바라보다 칼을 빌릴 엄두도 내지 못하고 이빨로 연필을 물어뜯어 다시 글을 써내려갔다. 국민 교육 헌장 위로 떨어지던 몇방울의 눈물, 아마 어린 나이에 꽤나 서글펐던 모양이다. 소위 똥종이로 불리던 갱지는 금새 얼룩졌고 지우개질 한번에 찌익 찢어지고 말았다. 대충 얼버무려 재출하였다. 결과는 장려상이었다.

경필대회가 끝나고 돌아오는 언덕위에서 동네 오징어 덕장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여동생을 들쳐업은 어머니가 정신없이 고단한 몸을 움직이시는 모습을 보고 그냥 말없이 돌아섰다. <앵무새 죽이기>의 스카웃 핀치가 부 래들리를 그의 집에 데려다주고 오면서 자신이 부쩍 성장한것 같다는 생각을 하듯이 나도 그때 부쩍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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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magic 2004-12-02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가 같이 앉아 연필을 깍아주며 잘못쓴 글씨를 지목해주는 광경 속의 그 아이가 아마 저 일듯 합니다. 어머니의 과보호 덕분에....전 아직 미성숙 그 자체 입니다. 남들은 너무나 당연히 그리고 쉽게 하는 홀로서기, 제겐 너무나 힘든 일이었습니다. 지금두요.... .엄마의 그 사랑 .....지금은 조금 알지만.... 언젠가 엄마와 나눈 대화에서 엄마도 그러시더군요. 그때는 그게 최선인줄 알았다.... 전 연필을 물어뜯는 님의 모습, 너무 멋있기만 합니다. ^^ ....

파란여우 2004-12-02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늙은 내 엄마가 다시 생각나는 페이펍니다. 그래서 오늘은 어제 얻어온(시식용) 포도주 한 잔 마시고 자야겠군요. 핑계김에 한 잔 한다고 하시겠지만 님의 글을 읽으니 생전에 제 불효가 또 맨정신으로 자게 내버려 두질 않아요. 이럴때는 와인이 참 요긴하죠. 그나저나 위에 계신 저 이쁜 미녀분하고는 와인 나발 불기로 했는데...잉크님의 글은 국민교육헌장이 아니라 엄마 얘기였다구요. 아시죠?^^

잉크냄새 2004-12-03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직님 / 님의 당당한 글과 모습, 너무 멋있기만 합니다.

파란여우님 / 님은 이제 국민교육헌장을 보면 포도주가 생각나겠군요. 와인 나발 불기 창단식에 저도 참여할랍니다.

진주 2004-12-03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등학교 입학식에만 엄마하고 같이 간, 즉 초등학교 졸업, 중고대의 입학졸업을 몽땅 혼자 한 사람도 있으니......너무 빨리 어른되는 연습을 한 사람에게 도리어 위로 좀 해 주세요....

2004-12-05 2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04-12-09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찬미님 / 그래요.^^
 

  

얼마전 나의 주민등록증에 나온 사진을 우연히 보게 된 분과 통화를 한 적이 있다. 그분과의 통화가 끝난후 나조차도 주민등록증상의 모습이 궁금하여 살펴보니 99년도의 사진이다. 플라스틱으로의 주민등록증 갱신이 있었던 그해 관청에서 찍은 사진이다. 한손에 주민등록증을 들고 겨울앞에 서니 5년이란 세월의 주름이 느껴졌다. 사진과 거울을 번갈아보며 한참을 피식거리며 웃었다.

사실 자신의 주민등록증을 볼일은 별로 없는것 같다. 경찰에게 신분증 제출을 요구받기 전에야 지갑속에서 묵묵히 눌러앉아 있어야 할 운명인게다. 나조차도 잊고 살았던 그해의 나의 모습에서 현재의 나를 언뜻 떠올렸을 그분을 생각했다.  멀리 떨어져 있건만 거짓말을 한 기분이었다. 아마도 눈가에 슬슬 자리잡기한 잔주름과  탱탱함을 잃어버린 피부를 추가해야할것 같다.

처음 주민등록증을 만든 것은 고등학교 때이다. 처음이라는 기대감과 왠지 모를 두려움에 안절부절하면서도 사진사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미소를 짓는 학생의 사진이었다. 두번째로 갱신한것은 군대제대 이후이다. 주민등록증 뒷면에 병역필을 찍기 위해 재발급받을 당시의 사진은 반공방첩(?)으로 중무장한 스포츠머리의 아직 군기가 시들지 않은 청년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99년, 그냥 무덤덤한 표정의 사내가 덩그러니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다. 

히딩크는 오대영의 오명에서 벗어나서 대한민국 국민의 엔돌핀을 극대화한 공로로 기쁠 희씨의 원조가 되는데 1년의 시간이 걸렸다.  무덤덤한 표정이후의 5년, 나에게 도대체 무슨일이 일어난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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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ika 2004-11-18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님 글 읽고 제 주민등록증을 꺼내 봅니다.

2000년에 만들었는데, 사진은 97년 사진을 썼답니다.

짝짝이 눈에, 넘치는 살, 네모난 얼굴... 저 사진 찍을때 상황이 참 암울했는데....

그나저나 주소변경도 한번 안하고, 참 오랫동안 이집에 살았군요..

stella.K 2004-11-18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사진 정말 재밌네요. 제 주민등록증 사진도 만만치 않습니다. ㅋㅋ. 전 처음 주민등록증 만들라고 했을 때 만감이 교차가 되던데...좋기도 했지만 이제 더 이상 어린 아이로만 살 수 없다는 뭔가를 건넌 느낌. 어렸을 땐 어른이 되지 못해 안달냈지만, 확실히 어른이 된다는 건 거추장스러운 게 더 많은 것 같아요.

파란여우 2004-11-18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님하고 비슷한 소재의 페이퍼를 올렸군요....아이, 좋아라^^. 전 그래도 제임스 딘 보다는 님이 훨씬 잘 생겼을것 같아요^^

잉크냄새 2004-11-18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서재지인들 다들 모여서 민증 한번 까봤으면 하는 생각이 드네요.^^ 아, 그리고 제임스 딘 하니까 생각나는데 학교다닐때 학생증 코팅 밑으로 칼집내서 그 당시 잘나가던 주윤발, 유덕화, 장국영, 제임스 딘 등등의 사진을 넣고 다니던 시절이 떠오르네요.^^

hanicare 2004-11-19 0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은 거짓말도 잘하지만 냉혹하도록 정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건, 일년이상이 지난 사진을 볼 때입니다.

진주 2004-11-19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에 라이카님과 저는 정반대로 제 주소란은 그득 넘치려고 하는군요^^

주소란이 모자라면 다시 갱신하게 되는 건가요?

다시 갱신할 때는 예쁘게 나온 사진을 올려야겠어요.

지금 사진은 아플때 찍어서 유령같아 보여요. 눈밑이 거무스레하고 창백한......

잉크냄새 2004-11-19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니케어님 반갑습니다. 일년이상이 지난 사진을 한번더 보아야할것 같군요. 찬미님, 전 딱 한번 주소지가 바뀐걸로 적혀있네요. 예쁘게 나온 사진도 좋지만 젊을때의 사진이 더 좋지 않나요.^^

stella.K 2004-11-19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파란 여우님 뭡니까? 제임스 딘 보다는 님이 훨씬 잘 생겼을것 같다더니, 잉크님 사진 봤다는 거 다 뻥이지 않습니까? 미워욧! >.<;;

ceylontea 2004-11-19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저도 제 주민증을 봤어요... 사진이 뭉개져 있더군요... ㅠ.ㅜ

그 주민증 만들 때보다 더 예전 사진을 사용해서... 젊었던 나의 모습... 그 시절이 그리워요... 머.. 지금도 좋아요.. 그 시절이 그리운건.. 날씬했던(?) 나의 몸과 건강이랍니다.. ^^

잉크냄새 2004-11-19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 그거 보세요.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

실론티님 / 저도 그 시절이 그리운건 빵빵했던(?) 몸과 건강이랍니다.^^

미네르바 2004-11-19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강렬하게... 심하게^^ 잉크냄새님의 주민등록증 사진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특히 반공방첩으로 중무장한 스포츠 머리의 새파란 청년의 사진을...^^ 그리고 제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도 봐야겠어요. 그런데, 하니케어님 글처럼 정말 사진은 냉혹하도록 거짓말을 못하더군요. 특히나 증명사진은... 그래서 증명사진 같은 것은 찍기 싫지요.

잉크냄새 2004-11-20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 그때 사진 보시면 경찰서에 신고하실겁니다. ^^

stella.K 2004-11-20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싫어욧. 그래도 사진 보여주세요. 제임스 딘이 더 잘 생겼는지, 님이 더 잘 생겼는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어욧!!!!!!!
 

[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 얼마전부터 송혜교가 어린 꼬마 두명이랑 부르는 광고 노래이다. 화면에는 나오지 않지만 아마도 그들의 앞에는 퇴근후 막 현관문을 여는 약간은 지친 아빠의 모습이 있을것 같다. 두팔 벌려 꼬마들을 안아주는 모습도 있을것이다. 꼬마들이 꽤나 따라할것 같다.

얼마전 회사에서 약간 떨어진 연못에서 변사체가 발견되었다. 실종 8일만이다. 얼마전 페이퍼에 한번 언급한 부도난 회사의 직원이었는데 자살인지 타살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아는 직원이 장례식에 갔다와서 하는 말을 듣고 괜히 한동안 서글픈 생각들이 들었다. 그에게는 아직 철도 들지 않은 두명의 딸이 있다고 한다. 장례식장의 아버지 사진 앞에서 [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 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참느라고 혼났다고 한다. 말로만 들어도 괜히 먹먹해지는 기분이었다.

죽음을 슬퍼하는 감정은 언제부터 생기는 것일까. 5살때, 할머니의 관이 언덕에서 내려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관을 덮은 흰천이 바람에 날려 나에게 날아들어 온통 흰세상처럼 먹먹해진 기분이었다. 난 그래서 죽음은 흰색인줄 알았었다. 그러다 죽음이 검정이라는 생각이 든것이 고등학교때 친구의 죽음이었다. 그의 마지막 이름을 부르는 교정을 빠져나오는 버스안에서 난 울다 기절했고 온통 암흑만이 존재했다.  아마 나이를 먹어가면서 죽음에 대한 감정이 서서히 가슴속에 쌓이나보다.

스코트 니어링은 죽음을 수평선에 비유했다. 죽음은 이쪽 세상에서의 마지막이지만 수평선 저쪽 세상에서는 새로운 출발이라고 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모든 유기체가 작별을 고할 시간을 주기 위해 금식을 하고 죽음을 맞았다. 난 남아있는 자의 슬픔을 생각했지만 적어도 니어링 부부에게는 죽음은 또 다른 삶의 연장이었다. 홀로 남겨진 헬렌의 감정은 무차별한 슬픔은 아니었던것 같다.

언젠가 그 꼬마들도 철이 들고 죽음을 인식하고 아빠의 죽음과 남겨진 엄마의 슬픔을 알아차릴 것이다. 부디 더 이상 상처받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홀로 남겨진 엄마에게 [ 엄마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 를 눈물겹도록 불러줄수 있는 딸들로 자라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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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12 16: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여우 2004-11-12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님이 접하신 이 죽음은 또 시간의 수평선 너머로 사라질 것입니다. 시간의 냉정함이라고 말하고 싶어지는군요. 그리고 전 개인적으로 송혜교나 김희애가 부르는 힘내라는 광고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못가진 자의 가진자를 바라보는 삐딱한 시선이라고 욕해도 할 수 없습니다. 잘못 만들어진 대표적인 광고라고 여기거든요. 이상 포도밭에서 여우의 헛소리였습니다.

icaru 2004-11-12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부양할 가족들이 있다는 것~! 그것은 어떨 땐 가슴 뿌듯할 일이지만...이렇게 생계에 곤란이 닥쳐올 때는...음... 잉크 님 ~ 말씀처럼..고인의 딸들이 엄마에게 힘이 되게 씩씩하게 커가길~ 합니다....



죽음에...색깔을...붙인다~ 저의 경험 속에 타인의 죽음은 회색이었던 거 같네요....




물만두 2004-11-12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가끔 모르는 사람의 죽음을 생각합니다. 그냥 떠오릅니다. 인간시대의 작가였던 박명성씨 그분 가끔 생각합니다. 그냥 사람은 다 죽는거라는 생각이 들때요. 주제에 동떨어진 말이었습니다.

잉크냄새 2004-11-12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의 냉정함이라...맞는 말인듯 합니다. 오늘 여우님의 [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관조하며 살고 있다. ] 라는 글을 보고 이 페이퍼를 쓴 것이니 저도 그런 기분이 들었었나봅니다. 어차피 망각도 삶의 일부분일테지요. 암튼 저 어린 소녀들이 밝고 올바르게 성장하길 바랍니다.

미네르바 2004-11-14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게 죽음의 색깔은 여전히 흰색입니다. 눈이 부시도록 희디 흰색. 광채가 나도록 흰 푸른빛이 감도는 흰색...

잉크냄새 2004-11-14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저도 예전엔 그랬는데 지금은 검정이랍니다.

ceylontea 2004-11-17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의 색깔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지금 문득 무색이란 생각이 들어요... 아무런 색이 없는.... 無色...

잉크냄새 2004-11-18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로 의미를 둘 색은 아닙니다. 그냥 글을 쓰다가 주저리주저리 흘러나온 것이죠.
 

미스코리아 대회가 지상파 방송을 타지 않은 것은 2002년의 일이다. 2001년 모 방송사가 미스코리아 대회를 방송하였다가 된통 당하고나서 부터이다. 또 다시 슬슬 슈퍼모델이라는 이름으로 방송을 시작하고 있지만 이제 미스코리아는 왠지 한물간 느낌이다.

나의 기억속에 남아있는 미스코리아는 가수로 전업한 옛날의 김성희, 모래시계로 상종가를 친후 재벌가의 며느리가 된 고현정, 아나운서로서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떠난 장윤정, 한참 잘나가다 섹스비디오 파문으로 매장당한 오현경 정도이다.

스물세살의 오월, 옥상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나에게 상황병의 특명이 떨어진 것은 하늘은 푸르고 아이들은 자라고 바다바람은 시원하고 햇살은 눈부신 날이었다. 안테나 있는데로 기어올라가 방향을 잡으라는 것이었다. 낮이었던걸로 미루어 아마 그해의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재방송중이었던 모양이다. 열약한 군부대 실정상 제대로 된 TV 시청은 힘들었고 수영복에 눈이 동그래진 병장들의 성화에 상황병이 취한 특단의 방법이었다.

한손에는 총을 한손에는 안테나를 붙잡고 이리저리 자리를 잡다 최종 결정이 난 곳은 보기에도 위태위태한 건물 난간의 끝이었다. 위풍당당하게 남대문을 지키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과 비견할 정도로 왼손에는 좌경계총 자세를, 오른손에는 너덜너덜한 안테나를 자유의 여신상의 햇불마냥 들고 있었다. 그때 바라보았던 오월의 바다처럼 고요한 바다는 없었다. 그런 어정쩡한 자세는 떠나갈듯한 환호성과 런닝과 팬티만 걸친 몇몇 병장들의 웃기지도 않은 워킹 흉내가 끝날때까지 계속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 해의 첫 매미 울음을 들은것 같다. 하늘은 푸르지 아이들은 자라지 바다바람은 시원하지 햇살은 눈부시지. 좀 이르지만 매미가 안 울고 배길 날씨가 아니다. 스물 세살의 오월은 눈부신 햇살속으로 환청처럼 쏟아지던 매미울음과 함께 지나가고 있었다.

< 올 해의 첫 매미 울음 / 인생은 / 쓰라려, 쓰라려, 쓰라려 > - 이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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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ika 2004-11-08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손에는 홍...한손에는 안테나 붙잡고 잉크님도 얼마나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보고 싶었을까...^^

잉크님은 고향도 바닷가이신데, 군 생활도 바닷가에서 하셨군요...정말 바다와 깊은 인연이시네요...

sweetmagic 2004-11-09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

stella.K 2004-11-09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잉크님의 이런 글이 좋아요. ㅋㅋ. 재밌거든요...^^

잉크냄새 2004-11-09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물 세살, 특별한 이유없이 눈에 밟히는 나이인가 봅니다. 기쁘건 슬프건 재미있건 황당하건 처절하건간에 모든 추억이 스물세살을 기점으로 펼쳐지고 있네요.^^
 

누구나 가슴속에 잊혀지지 않는 노래가 있다. 무의식 저편에 가만히 웅크리고 있다 어느 순간 조금씩 새어나오는 그런 노래가 있다. 내게는 김건모의 1집에 실린 [ 잠못드는 밤 비는 내리고 ] 가 그 중의 하나이다. 특별히 김건모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비와 관련된 노래도 금과 은의 [ 빗속을 둘이서 ] 를 더 좋아한다. 아마 그때의 특별한 경험이 없었다면 김건모의 그저 그런 노래정도로 잊혀졌을 것이다.

훈련소를 입소하던 스물세살의 초봄, 나의 손에는 한장의 X-RAY 사진이 들려있었다. 나의 평발 사진. 국민학교시절 축구선수로서의 꿈을 접게 만든 평발 사진이었다. 군지정 병원에서 촬영한 것으로 군의관한테 보이고 재검을 받으면 분명 면제일 것이라는 의사의 말에 들고간 것이다.

훈련소대 배정이 있기전 재검받을 사람을 지정했는데 아마도 열명정도였던것 같다. 키가 크거나 작은 사람, 몸무게가 적거나 많은 사람, 디스크, 관절염, 시력, 평발....기타 등등. 말그대로 초라한 패잔병처럼 우린 따로 마련된 버스를 타고 군병원으로 갔다. 재검후 허리디스크 판정을 받은 한명을 제외하고는 전원 복귀였다. 그때 인솔했던 상병이 " 죽을 각오하고 들어가라 " 고 측은한 표정으로 살벌한 말을 했었다.

복귀하던 버스 창밖으로 바라보이던 어두컴컴한 풍경속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멀리 훈련장이 폐허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 라디오에서 김건모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 이렇게 비가 오는 밤이면/ 내 지친 그리움으로 널 만나고/ 이 비가 그치고 나면/ 난 너를 찾아 떠나 갈꺼야 ] 이 구절이 나올 즈음에 버스는 쥐죽은듯이 고요했다. 모두들 비내리는 창밖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비겁자라는 딱지를 이마에 붙이고 다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느낌이었다. 개 끌려가듯 한다는 말이 있다. 네발로 버티는 개의 목에 메인 목걸이에 목덜미가 밀려 온통 얼굴을 일그러뜨릴 정도로 처절한 모습, 그때가 바로 그런 심정이었다.

훈련소 복귀, 몸서리쳐지던 첫날밤의 얼차례는 상상에 맡기고 싶다. 무엇보다 비겁자라는 말을 외치는 것이 가장 비참했다. 하여간 초죽음이 되어 잠자리에 들었을때 밤이 깊을수록 더욱 맑아오는 정신속에 내무반 밖의 빗소리에 맞추어 김건모의 노래가 환청처럼 들려오고 있었다. 누군가 끊임없이 REPEAT 버튼을 누리고 있는듯 했다. 이 비가 그치고나도 난 누군가를 찾아 떠나지 못하겠지~ 하는 한숨속에 스물세살의 초봄은 저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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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2004-11-05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훈련소로 끌려가는 그 심정, 그것도 비까지 주룩주룩 내리는 우중충한 날에, 기억에 깊게 각인되고도 남겠네요. 저는 장나라의 '고백'을 들으면, 고요한 어둠을 가르는 한 줄기 빛, 그리고 그 공간에 울려퍼지던 팬플룻 소리가 떠오릅니다. 음악과 얽힌 가장 강렬한 기억이죠^^

sweetmagic 2004-11-05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많지만 특히 김건모 노래는 아름다운 이별이요 ...첫사랑이랑 헤어지려 할 때 마술처럼 라디오에서 나온 음악이예요 ....첫 시작 부분 피아노 반주 부터 애를 끓이더니...아...눈물나데요 ...첫 사랑은 학원에서 아르바이트 하는 선생님(당시 대학생) 이었데요~~ 저 고딩때 이야기 지요 ㅎㅎ.... " 눈물이 흘러 이별인 줄 알았어 힘없이 돌아서는 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 만큼 너도 힘들다는 걸 알아 ~~ 불라불라 " 그랬다니깐요... " 그때 군대 간다고 헤어졌던 첫 사랑 나중에 다시 같은 대학 같은과에서 만났지요 우헤헤 ~~

미네르바 2004-11-05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비오는 밤이에요. 잉크냄새님 잠못 들려나? ^^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일 것 같네요. 스물세 살의 초봄은 슬프고, 아프고, 괴로운 시간들이었군요.^^

저에게도 정말 잊혀지지 않는 노래가 있는데...

호밀밭 2004-11-05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픈 기억이 있는 노래네요. 노래는 그런 것 같아요. 마음이 우울할 때 들었던 노래들이 더 잘 기억에 남으니까요. 그런데 남의 추억담에 얽힌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된 노래들은 그 사람을 떠오르게 하거든요. 앞으로 이 노래를 들으면 잉크냄새님이 떠오를 것 같네요.

파란여우 2004-11-05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억에 맞는 음악들이 한 두개정도는 있죠. 금과 은의 <빗속을 둘이서>는 우리 세대 노래인데...아하, 잉크님의정신연령을 깜빡했지 뭐여요^^..어머나, 그리고 호밀밭님도 오랜만이어요.반가워요..호호호^^

잉크냄새 2004-11-06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월이 흐르고 나니 그다지 아픈 기억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네요. 단지 지금도 그 노래를 들으면 그때 버스안이 떠오르죠. 갈대님은 역시 팬플룻이 빠지지 않는군요. 매직님은 순정소설같은 느낌이네요. 미네르바님의 노래도 궁금하네요. 호밀밭님 정말 오랫만에 보네요. 반가워요. 여우님 저의 정신연령으로는 개구락지송 정도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