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 ] 현재 내가 외우고 있는 국민 교육 헌장은 여기까지이다. 중간은 생각나지 않고 마지막 부분인 [ 새역사를 창조하자 ] 가 떠오른다.

내가 아직도 국민교육헌장을 그나마 외우는 것은 국민학교 시절 글씨쓰기 대회가 열릴때마다 단골 메뉴로 등장하던 것이 애국가, 국기에 대한 맹세와 더불어 국민 교육 헌장이기 때문이다. 슬며시 잊혀졌던 이 구절을 다시 떠올린것은 박민규의 <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 이라는 소설속의 구절에 머리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던 때였다.

소위 경필대회라 불리던 글씨쓰기 대회에 처음 나간 것은 국민학교 2학년때이다. 그 기회는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당시 축구와 놀이에 정신없던 나에게 담임 선생님이 출전 의사를 물어볼 것도 없이 딱 한마디를 던졌다. " 야, 니 몇시까지 연필이랑 지우개 가지고 어느 학교로 가 "  흙투성이가 되어 가방을 던져놓고 연필과 지우개를 들고 학교에 도착하니 자리를 배정해주었다.

대회 시작, 국민교육헌장 쓰기였다. 한참을 써내려가다 그만 연필을 떨구었다. 똑~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연필심이 부러졌다. 한참을 망설이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까지 나는 경필대회가 열리는 곳의 풍경을 보지 못했다. 모든 아이들 옆에 엄마가 같이 앉아 연필을 깍아주며 잘못쓴 글씨를 지목해주는 광경이었다. 괜히 먹먹해오는 기분으로 한참을 바라보다 칼을 빌릴 엄두도 내지 못하고 이빨로 연필을 물어뜯어 다시 글을 써내려갔다. 국민 교육 헌장 위로 떨어지던 몇방울의 눈물, 아마 어린 나이에 꽤나 서글펐던 모양이다. 소위 똥종이로 불리던 갱지는 금새 얼룩졌고 지우개질 한번에 찌익 찢어지고 말았다. 대충 얼버무려 재출하였다. 결과는 장려상이었다.

경필대회가 끝나고 돌아오는 언덕위에서 동네 오징어 덕장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여동생을 들쳐업은 어머니가 정신없이 고단한 몸을 움직이시는 모습을 보고 그냥 말없이 돌아섰다. <앵무새 죽이기>의 스카웃 핀치가 부 래들리를 그의 집에 데려다주고 오면서 자신이 부쩍 성장한것 같다는 생각을 하듯이 나도 그때 부쩍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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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magic 2004-12-02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가 같이 앉아 연필을 깍아주며 잘못쓴 글씨를 지목해주는 광경 속의 그 아이가 아마 저 일듯 합니다. 어머니의 과보호 덕분에....전 아직 미성숙 그 자체 입니다. 남들은 너무나 당연히 그리고 쉽게 하는 홀로서기, 제겐 너무나 힘든 일이었습니다. 지금두요.... .엄마의 그 사랑 .....지금은 조금 알지만.... 언젠가 엄마와 나눈 대화에서 엄마도 그러시더군요. 그때는 그게 최선인줄 알았다.... 전 연필을 물어뜯는 님의 모습, 너무 멋있기만 합니다. ^^ ....

파란여우 2004-12-02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늙은 내 엄마가 다시 생각나는 페이펍니다. 그래서 오늘은 어제 얻어온(시식용) 포도주 한 잔 마시고 자야겠군요. 핑계김에 한 잔 한다고 하시겠지만 님의 글을 읽으니 생전에 제 불효가 또 맨정신으로 자게 내버려 두질 않아요. 이럴때는 와인이 참 요긴하죠. 그나저나 위에 계신 저 이쁜 미녀분하고는 와인 나발 불기로 했는데...잉크님의 글은 국민교육헌장이 아니라 엄마 얘기였다구요. 아시죠?^^

잉크냄새 2004-12-03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직님 / 님의 당당한 글과 모습, 너무 멋있기만 합니다.

파란여우님 / 님은 이제 국민교육헌장을 보면 포도주가 생각나겠군요. 와인 나발 불기 창단식에 저도 참여할랍니다.

진주 2004-12-03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등학교 입학식에만 엄마하고 같이 간, 즉 초등학교 졸업, 중고대의 입학졸업을 몽땅 혼자 한 사람도 있으니......너무 빨리 어른되는 연습을 한 사람에게 도리어 위로 좀 해 주세요....

2004-12-05 2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04-12-09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찬미님 /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