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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공간 -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의 사건적 사유
이진경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1월
평점 :
역사에 대한 관심은 있지만, 나의 관심은 주로 한국사, 그것도 중세사에 집중되어 있기에 근현대사에 대한 논의는 낯설다. 게다가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의 사건적 사유'라는 딱딱한 부제까지 달려 있는 이 두꺼운 책을 받아들고 나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게다가 어쩐지 중간중간 이모티콘이 등장하지만 그래도 딱딱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서문을 읽으며 '대체 이걸 어떻게 읽어야 한단 말인가', '그래도 약속이니까 읽어야지' 등 오만가지 생각을 하다가 결국 목차를 참고해 관심가는 주제라도 읽어보자고 마음을 추스렸다.
2장 '소수적인 역사는 어떻게 가능한가?'에서 저자는 소수자란 ‘결여와 고통으로 시달리는 불쌍한 존재, 혹은 말하지 못하는 존재’가 아니라 ‘고통을 피할 순 없었지만, 오히려 그 고통으로 인해 그게 없었다면 볼 수 없었을 것을 보고 들을 수 없었을 것을 듣는 존재, 그 고통으로 인해 자신의 고통만이 아니라 타자들의 고통에 마음을 열고 이해하려는 존재, 또한 그 기쁨도 이해할 수 있게 된 존재, 자신 아닌 수많은 타자들을 향해 손을 내밀 수 있게 된 존재, 자신과 다른 타자들에게 새로운 삶을 촉발할 수 있게 된 존재’라고 말한다. 이런 관점을 전태일의 분신이나 자이니치, 사파티스타 등을 예로 들어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보여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 또한 그동안 역사를 다수(혹은 승자)의 역사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 글을 읽으며 새삼 결국 역사의 큰 흐름은 소수자에 의해 촉발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폭풍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소수자의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 그리고 저항이 역사의 큰 줄기를 만든 것 같다.
5장인 ‘근대적 시간은 어떻게 선험적 시간이 되었나’도 재미있었는데, 그동안에는 태음력을 사용했던 조선이 개항과 더불어 태양력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알고 있지만 과연 그것이 어떻게 당시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고, 어떻게 자리매김을 하는지는 몰랐기에 흥미로웠다. 근대적 시간 형식이 도입됨에 따라 이전에는 아무 관련 없었던 이질적인 사건, 예를 들어, 한국에 새로 파견할 일본 공사가 새로 선임된 사실과 제대로 파수를 서지 않은 자들이 문책을 받았다는 것, 삼청동 모씨의 집에서 잡박계를 한다는 소문 등이 <독립신문>의 동일한 페이지에 실리게 된다. 또한 오늘과 어제 등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언표 형식이 되기 시작했고, 결국 사람들의 생활방식까지 바꾼다. 너무나 익숙한 개념이기에 ‘시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리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것인지 잊고 있었는데, <독립신문>을 통해 근대적 시간 개념이 어떻게 사람들의 인식을 바꿨는지를 통해 새삼 개화란 듣도 보도 못했던 신식 문물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같은 개념이 삶의 모습을 바꾸는 것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2장과 5장 외에도 근대와 관련된 챕터들은 사료를 예시로 많이 소개하고 있어서 그런지 비교적 읽기 수월했다. 인문학에 대해 목말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문학이 어렵고 딱딱해서 거리감을 느끼는 것도 이 책처럼 나의 부족함을 느끼게 하는 책들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 대중을 위해 쉽게 풀어쓴 인문학 책이었다면 더 쉽게 읽을 수 있었겠지만, 이 책을 쉽게 읽기엔 나의 인문학 근육은 너무나 약했다. 중간중간 관심 있는 부분만 골라가며 읽었는데도 새삼 정말 기본기부터 다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량도, 내용도 만만치는 않지만 좀더 인문학 기본기를 다진 다음에 다시 읽는다면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