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세상에는 여러 가지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도 있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나와 같은 대다수 남자들은 하루하루의 일이 너무 바빠서, 다른 일에는 손댈 엄두도 못 내고 있는 게 현재의 실정이 아닐까 싶다. (...)
그래도 나는 앞으로 다시 일본에 자리를 잡으면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가까이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자원 봉사나 사회 활동같은 걸 하면 대단하고, 안하면 그렇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바꿔 말하면, 자기의 의문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압축시킬 수 있는지가 될 것이다.
미국에 와서 많은 사람(특히 나와 같은 세대의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그런 일에 대해서 꽤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상당히 오랫동안 '세대 따위는 상관없다, 개인이 전부다'라고 생각하며 나름대로 그 주관을 지켜 왔지만, 우리 세대에는 역시 우리 세대 나름의 독자적인 특징과 경험이 있으니까, 그런 측면을 재검토하고 나서,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다시 한 번 고려해 봐야 하는 시기에 이르렀다는 느낌이 든다. -69-70 쪽
'아무튼 실제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겠지. 만일 마음속으로부터 절실하게 무엇인가를 쓰고 싶다고, 누군가에게 뭔가를 전하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비록 지금은 잘 쓸 수 없다 하더라도, '무엇인가를 쓸 수 있는' 시기는 반드시 온다고 생각해. 그때까지는 현실의 경험을 벽돌을 쌓아 올리듯 하나하나 소중하게 쌓아 가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213쪽
프리스턴 대학에는 일본 관청이나 회사의 사람들이 꽤 많이 파견되어 공부하고 있다. 체류 기간은 대개 1년으로 회사나 관처이 그동안의 경비나 월급을 지불하는데, 당연한 말이지만, 이건 엘리트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인 모양이다. (...) 그런데 더 알 수 없는 건 자기 소개 대신, 1차 시험 점수 얘기를 꺼내는 사람의 심리 상태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이런 사람들이 일본에서 엘리트 관료로서 세력을 떨치며 잘난 척하는 걸 생각하니(미국까지 와서도 꽤 잘난 척하고 있다), 그건 좀 곤란한 일이구나 싶었다. (...)
내 생각에는 그런 사람들은 미국의 엘리트 대학 같은 곳에 파견하지 말고, 1년 정도 그들이 근무하는 빌딩의 청소라도 시키는 게 괜찮을 것 같다. 아니면 벽지에서 자원 봉사 활동을 시키는 것도 괜찮겠다. 그렇게 하는 편이 기업을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좋다. -240쪽
그런 다양한 언어를 공부할 때는 꽤 재미있었고, 그 당시에는 나 자신도 스스로 어학에 소질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되돌아보면 그것은 아무래도 나의 착각이었던 것 같다. 나는 경향적, 성격적으로 외국어 습득에 별로 소질이 없고, 특히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그 소질 없음이 내 안에서 점점 뚜렷해지는 느낌이 든다. 요즘에는 ‘이젠 안 되겠는데. 더 이상 어학 공부를 할 수 없겠어’라고 새삼스레 생각하게 되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내 안에서 외국어 습득이라는 항목의 우선 순위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낮아지고 있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역시 어학에 투자하는 시간이 아까워진 데 있다. 젊었을 때는 시간이 얼마든지 있었고, 미지의 언어를 습득한다는 정열 같은 것도 있었다.
-167쪽
나는 미국에서 벌써 2년 이상 살고 있고, 10년 간 줄곧 영어 소설을 번역해 왔기 때문에, 물론 어느 정도의 영어 회화는 할 수 있다. 그러나 영어로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건 솔직히 말해서 상당히 고역스럽다. 나는 일본어로도 얘기를 그다지 잘하는 편이 아니어서 지껄이면 지껄일수록, 하면 할수록 마음이 무거워지기 일쑤인데, 영어로 말한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영어를 써가며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일어나지 않고 있으니, 말할 것도 없이 영어 회화 실력이 나아질 리가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자기의 생각을 모국어로 거침없이 표현할 수 없는 사람은, 외국어를 아무리 열심히 공부한다 해도, 역시 언어로 능숙하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168쪽
내 경험에 비춰 보면, 외국인에게 외국어로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비결은 이런 것이라고 생각된다.
(1)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먼저 자신이 확실하게 파악할 것. 그리고 그 요점을 되도록 빠른 기회에 우선 짧은 말로 명확하게 할 것. (2) 자기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쉬운 단어로 이야기할 것. 어려운 말, 멋들어진 말, 상대의 마음을 끌려고 하는 말은 필요하지 않다. (3) 중요한 부분은 되도록 한번 말하고 또 바꿔 말할 것. 천천히 말할 것. 가능하면 간단하게 비유를 하며 말한다.
이상과 같은 세 가지 점에 유의하면, 그다지 유창하지 않더라도, 당신의 마음을 상대방에게 비교적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런데 이 주의 사항은 그대로 '문장 쓰는 법'이기도 한데 어떨까.
-171쪽
자네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고 양파를 서는 비결이 뭔지 아나? 나는 학생들에게 그렇게 묻곤 한다. 학생들은 "아뇨"라고 대답한다. "눈물이 나오기 전에 재빨리 썰어 버리는 거야." (...)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될까, 내게는 어떤 가능성이 있는 걸까에 대한 불안일 텐데, 그들의 불안을 이해할 수 있다.
-209쪽
"나는 지금까지 벌써 몇 권이고 몇 권이고 소설을 쓸 만큼 재미있는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가끔 만나곤 한다. 생각해보니, 꽤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던 것 같다. 특히 미국에 살게 되면서부터 그렇다. 그렇다고 그 말을 미국인들이 하는 건 아니고, 미국에 살고 이는 일본인들이 곧잘 그렇게 말한다. 아마도 그건 맞는 말일 거라고 생각한다. 어찌 되었든 모국을 떠나서 남의 나라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그 나름대로 꽤나 힘든 일일테고, 그러다 보니 틀림없이 여러 가지 흥미로운 경험을 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장차 실제로 소설을 쓰게 될는지, 물론 나로써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곰곰이 생각게 되는 건데, 나 자신은 이제까지 꽤 많은 여러 편의 소설을 써왔지만, 현실의 내 삶 속에서는 엄청나게 재미있는 일 같은 건 거의 경험한 적이 없다. -203쪽
(...) 현실은 소설보다 기이하다고 하지만 정말 그렇다. 그러나 그렇게 재미있는 경험을 한 사람들이, 그 기가막힌 경험에 필적할 만한 소설을 쓸 수 있느냐, 하면 반드시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의견에 지나지 않지만, 일단 어떤 압도적인 경험을 하고 나면, 사람들은 그 경험이 압도적일수록 그것을 구체적인 문장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알 수 없는 심한 무력감에 사로잡히는 게 아닐까 한다. (...) ‘나는 이러이러한 것을 이런 식으로 쓰고 싶다’라는 마음이 강하면 막상 책상 앞에 앉아도 좀처럼 글이 써지지 않는 법이다. 그것은 아주 선명하고, 현실감 있는 꿈을 기억하면서, 남에게 설명할 때의 초조함과 비슷하다. 그와는 반대로 특별히 내세울 만한 경험을 한 적은 없지만, 작은 기쁨이나 슬픔 같은 걸 남다른 관점에서 느끼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런 체험들을 뭔가 다른 형태로 바꿔서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이 좀더 소설가 쪽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204쪽
스물아홉 살 때, 갑자기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소설을 쓰게 된 이유를 학생들에게 이렇게 설명한다. 어느 봄날 오후, 진구 야구장에 야쿠르트 대 히로시마 팀의 대항전을 보러 갔었다. 외야석에 눕다시피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힐튼이 2루타를 쳤고, 그때 갑자기 '맞아, 소설을 쓰는 거야' 하고 생각했다고 말이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 대체로 학생들은 모두 멍한 표정을 짓고 이렇게 묻는다.
'저...... 그럼 그 야구 시합에 뭔가 특별한 요소가 있었던 건가요?'
나는 학생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그런 게 아니라 그것은 계기에 불과했지. 태양의 빛이라든지 맥주 맛, 2루타 공이 날아가는 모양, 그런 여러 가지 요소가 딱 맞아 떨어져 내 안에 있는 뭔가를 자극했겠지. 말하자면 내게 필요했던 것은 자기라는 실체를 확립하기 위한 시간과 경험이었던 거야. 그것은 뭐 특별하고 유별난 경험일 필요는 없어. 그저 아주 평범한 경험이어도 상관없지. 그 대신 자기 몸에 충분히 배어 드는 경험이어야만 해. 나는 학생 때 뭔가를 쓰고 싶었지만, 무엇을 쓰면 좋을지 몰랐던 거야. 무엇을 써야 하는지를 발견하기 위해서, 나에게는 7년이라는 세월과 고된 일이 필요했던 거겠지. 아마도.' -209~2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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