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으로의 긴 여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9
유진 오닐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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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먼드 : 전 안개 속에 있고 싶어요. 정원을 반만 내려가도 이 집은 보이지 않죠. 여기에 집이 있는지조차 모르게 되는 거죠. 이 동네 다른 집들도요. 지척을 구분할 수가 없어요. 아무도 만나지 않았죠.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보이고 들렸어요. 그대로인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바로 제가 원하던 거였죠. 진실은 진실이 아니고 인생은 스스로에게서 숨을 수 있는, 그런 다른 세상에 저 홀로 있는 거요. 저 항구 너머, 해변을 따라 길이 이어지는 곳에서는 땅 위에 있는 느낌조차도 없어졌어요. 안개와 바다가 마치 하나인 것 같았죠. 그래서 바다 밑을 걷고 있는 기분이었어요. 오래전에 익사한 것처럼. 전 안개의 일부가 된 유령이고 안개는 바다의 유령인 것처럼. 유령 속의 유령이 되어 있으니 끝내주게 마음이 편안하더라고요.
미친놈 보듯이 그렇게 보지 마세요. 맞는 말이니까. 세상에 인생을 있는 그대로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인생은 고르곤(주,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들로 세 자매이며 머리카락이 뱀으로 이루어져 있는 등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형상을 하고 있다. 메두사가 그중 하나이다. 셋을 하나로 합쳐놓은 것과 같아요. 얼굴을 보면 돌로 변해 버린다는 그 괴물들 말예요. 아니면 판이거나. 판을 보면 죽게 되고- 영혼이 말예요. - 유령처럼 살아가게 되죠.


-160 쪽


에드먼드 : (시몬즈가 번역한 보들레르의 산문시 <취하라>를 신랄하고 풍자적으로 멋지게 낭송한다.) 늘 취해 있어라. 다른 건 상관없다. 그것만이 문제이다. 그대의 어깨를 눌러 땅바닥에 짓이기는 시간의 끔찍한 짐을 느끼지 않으려거든 쉼 없이 취하라.
무엇에 취하느냐고? 술에든, 시에든, 미덕에든, 그대 마음대로 그저 취해 있어라.
그러다 이따금 궁전의 계단에서나 도랑가 풀밭에서나, 그대 방의 적막한 고독 속에서 깨어나 취기나 반쯤 혹은 싹 가셨거든 바람에게나 물결에게나. 별에게나, 새에게나, 시계에게나, 그 무엇이든 날아가거나, 탄식하거나, 흔들리거나, 노래하거나, 말하는 것에는 물어보라. 지금 무엇을 할 시간인지 그러면 바람은, 물결은, 별은, 새는, 시계는 대답하리라. ‘취할 시간이다! 취하라. 시간의 고통받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거든 쉼 없이 취하라! 술에든, 시에든, 미덕에든, 그대 원하는 것에.
-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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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31 1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05-07-31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히 ^^ 아직 정확히는 몰라도~ 아마...히히 ^^

2005-07-31 17: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05-07-31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역쉬...프랑스통!!
전요...사실은... 베를레느(랭보랑 얼레리꼴레리 좋아지냈던 그...사람..ㅋㅋ)와 보들레르가 항상 헷갈려서리...

비로그인 2005-08-01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이 깊어지면 지금 비워진 시골집이 있는 제 고향도 아주 숨이 막힐 정도로 자욱해져요. 강가를 끼고 있는 곳이라면 안개는 더 짙어지더라구요(바다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전, 이 알라딘 마을도 유진 오닐이 표현한 안개마을 같다는 생각을 종종하곤 해요. 뭐, 그런 거 있쟎아요. 그의 말대로 '진실은 진실이 아니고 인생은 스스로에게서 숨 쉴 수 있는, 다른 세상..' 표현 쥑여요!

icaru 2005-08-01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익산 가고 싶네요 ^^ 강을 끼고 있는 님의 고향 동네~
익산은 변산반도 간다고 버스 타고 내려 갈 때,.... 지나간 기억이 나는데? 제 기억 맞아유? 안개는 참...문학적으로 좋은 소재인 거 같아요...아슴프레한 게...

비로그인 2005-08-01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익산 지나고 김제 지나고 그 담이 부안이죠. 캬..익산이 목뒷덜미살 굵직한 오야붕들 때문에 폭력의 도시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데 알고보면 사실 매우 아담하고 조용한 동네거든요. 언제든 함 오세요! 우리, 보신탕 한 그럭 때리게요!

비로그인 2005-08-05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 1학년 여름 방학 때 웃기지도 않게 가출한 적이 있어요. 그때 가장 먼저 간 곳이 이리(지금은 익산이겠지만)였어요. 원광대 공대 건물 뒤에 벤치에 앉아 하룻밤을 노숙했죠. 크흐흐. 근데, 여보야 말쓈 들어보니께 제가 큰일날 뻔 했구먼요. 목뒷덜미살 굵직한 오야붕덜 안 만났으니 다행이지만.

2005-08-11 1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선기자 정문태 전쟁취재 16년의 기록
정문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4년 10월
절판


나는 그 처녀들 죽음 앞에서 흔들렸다. 냉정함은 사치였다. 그 국경 산악이 얼마나 거친지, 그 혁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같은 국경 하늘 아래서 그이들과 함께 배웠던 탓이다.

나는 전선에서 사라져 가는 그 숱한 죽음들을 바라보면서 비로소 '평화'라든지 '비폭력'이라는 말들이 지닌 속뜻을 깨달았다. 평화는 힘센 놈들이 만들어 낸 거짓말이었다. 비폭력은 그놈들이 뱉어낸 거짓말에 쳐준 맞장구였다. 그 둘이 함께 먹고사는 공생관계 속에서 세상은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져 왔다. '평화주의' 무저항, 비폭력주의' 같은 말들이 얼마나 위험하고도 반시민적인 것들인지를 나는 버마전선에서 체험했다.

국경을 알지 못하는 랑군 정치가들은 비폭력과 평화의 본질도 결코 알 수가 없다. 내 아들 딸들에게 가만히 앉아서 총 맞아 죽으라고 강요하는 것이 랑군의 평화주의였고, 학살군사독재자들 앞에 무릎꿇고 강요하는 것이 랑군의 평화주의였고, 학살군사독재자들 앞에 무릎꿇고 돌아오라는 게 랑군의 비폭력 무저항주의였다.
-83~84쪽

'기자가 중립을 지켜야 한다.' 나는 그런 식의 말들을 믿지도 않을 뿐더러 관심도 없다. 그 '중립'이란 말은 백인, 기독교, 자본주의, 서양중심주의로 무장한 국제 주류언론들이 떠받드는 신줏단지였다. 그이들은 그 단지 밑에 숨어 자본을 증식해 왔을 뿐이다. 그런 국제 주류언론들 입장에서 벗어나면 지금까지 어김없이 '중립성' 논란이 일었고 그 당사자는 몰매를 맞았다.
(...)
전선기자로서 내가 따를 '중립'은 내 발에 차이는 '사실'뿐이다.
-172~173쪽

난민들에게도 마땅히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야 한다는 게 내 믿음이다. 난민들 먹고 입는 걸 보며 배아파할일도 없고, 화장지나 온수 따위로 질투할 일도 없다. 문제는 '왜 코소보 난민에게만?"이라는 의문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곳곳에 넘쳐나는 난민들은 왜 코소보 난민과 같은 대접을 받지 못하느냐는 말이다. 평소에 코소보가 유엔에 세금을 많이 낸 적도 없다. 인류를 위해 아시아나 아프리카 시민들보다 각별히 이바지했던 일도 없다.
전쟁을 피해 온 난민에게도 인종과 계급과 신분이 존재하고, 그에 따라 급수가 다른 구호품을 제공하는 이 세상이 참으로 살맛 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
'왜 아시아, 아프리카 난민은 굶주린 채 뒷갓을 찾아 헤매고 다녀야 하는가?' 이 의문에서부터 인도주의도, 인권도, 그 흔해빠진 국제 정치학도 출발하자는 뜻이다. -288쪽

내 경험에 비춰보면, 지금까지 어린이든 여성이든 상관없이 아체에서 정부군 총에 맞아 죽은 이들은 모조리 '반군'이 되었다. 말하자면, 반군이기 때문에 총 맞아 죽은 게 아니라 총 맞아 죽었기 때문에 반군이 되는 식이었다.
-227쪽

'아프가니스탄통'으로 불리는 파키스탄 가지 라히물라 유숩자이 말마따나, 미국은 어떤 종류의 '불편함'도 국제전략으로 선택한 적이 없다. 미국은 그 '불편함'을 제거하는 것으로 국제사회를 주물러 왔다. 그리고 미국은 그걸 국제평화라 고집했다.

-3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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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07-30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좀 무력해지네요,,,

세상의 한쪽은 아직도 여전히 저렇게 비열하고...잔혹한 전쟁을 계속하고 있고...
나는 또 이 구석에서 시계추처럼 왔다가 고만고만한 고민에 복닦이며...살고 있고..


2005-07-30 2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7-30 2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5-07-31 0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생각 없이 이 책을 읽고 있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었지요. 내가 지금 무슨 생각으로 이 책을 읽고 있나, 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저 멍하니 읽고 있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때는.. 리뷰 쓴다는 것이 책과 사람에게 미안했지요.

2005-07-31 0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05-07-31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그러게요...그럴 거 같은 예감이 들어서...기왕이면 안전빵으로 갈려고 발악중인 겁니다~ ㅋㅋ 휴우~ 전사의 휴식이로군요...단잠 주무셨기를... 그나저나 (소곤소곤인데요...님 옆지기님도 잠이 많으신가요~ 아니 왜냐면요..제가 잠귀신 붙은 사람하고 같이 살아서...혹시 님도 그런가..ㅋ)
ㅎㅎ 임신 중에 읽으심 안 됩니다.. 맞아요! 맞아!
저 기자가 대단해 뵈는 것은 저 모두(아시아 내의 전쟁들)가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큰 전쟁이 아니라 국가 내에 세력 분쟁이다보니, 미국과 같은 강한 나라가 내지르는 보도나 언론에 편승하여 보도하기 십상이겠더라고요.. 저이는 그런 기자를 따로, '종군기자'라고 표현을 하더라구요... 군대에 딸린 기자라는 의미로 주류의 대변인이라는 뜻이죠... 하지만 이이는 강하게 자신은 전선기자라고 말하죠.... 언론의 독립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감시기능을 다하는 기자라는 의미로다가...

비숍 님...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게다가... 이 책은 아시아의 지명과 인명 같은 숱한 고유 명사들이 압박을 해오던 통에,.... 하지만.. .한 꼭지 한 꼭지 피를 말리는 전선을 생각하며 썼을 글쓴이를 생각하면 또 허투로 읽지 말아야지 하다가도...

비로그인 2005-08-01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뒷전에 밀려 있었던 책인데 먼저 읽으셨군요. 음..저도 대충 목차와 내용을 훑으면서 생각했던 것인데 사람이 하도 기가 차면 말이 안 나온다, 라는 말이 있쟎습니까. 그 어떤 정의로운 단어와 문장일지라도 너무나 비극적이고 끔찍한 사실 앞에서는 그저 얍삽하고 통속적인 그 무엇으로 추락하고 만다는 생각들. 덜덜~ 떨립니다.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양억관 옮김 / 한길사 / 2002년 9월
품절


어떤 차별용어나 금기어를 강제로 금할 수는 있겠지만, 생각하는 것만큼은 금할 수 없다. 물론 이 세상에는 감수성이 무딘 사람이 많으므로 그들의 속내를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게 막아 주는 효용은 있다. 그러나 그런 금기를 전혀 가지지 않는 사람들의 솔직한 의견 교환까지 저해하는 폐단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
나는 결점이 많은 여자이긴 하지만 인종차별만큼은 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이탈리아 놈하고 결혼하지도 않았을 테고, 내 사랑하는 아들도 이탈리아 놈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차별을 없애는 유일한 길은 금기어나 차별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 보다는 당당하게 정면에서 사용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고 긴장하거나, 생각은 그렇게 하지만 잘 될지 모르겠다고 걱정하고 있다보면 어느새 그런 심리가 드러나고 만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그냥 말해버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어차피 우리는 서로 바보가 아니다. 입에 담지 않더라도 가슴 속에 품고 있으면 누구든 눈치로 알 수 있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상태를 나쁘게 만든다.

-1쪽

나는 더스틴 호프만, 잭 니콜슨과 로버트 드니로가 미국 영화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고 생각한다. 이 세 사람의 작품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피곤해진다. 그 이유는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원숙한 그들의 연기 자체에 있다. 그들이 징그러울 정도로 뛰어난 표현력으로 묘사하는 인간과 세상의 현실에 그만 질려버리고 만다. 마치 현실에 대한 어떤 편향된 인식을 강요당하는 느낌마저 드는 것이다. (...)

한번이라도 창작에 손을 대본 사람이라면 동의해주리라 믿지만, 원래 창작이라는 행위는 약간의 과장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왜냐 하면 과장이라는 방법을 통해서만 어떤 현실을 부각시킬 수 있고, 인상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옛날 사람들은 이런 사정을 진실과 거짓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로 표현했을 것이다. (...)
아카데미상을 노리는 것은 좋지만, 마약중독자나 휠체어를 탄 장애인, 창부나 강간당하는 여자를 연기하지 않으면 그 상을 손에 넣을 수 없는 현실이라니. ...
"인생은 성냥갑과 비슷하다. 너무 조심스럽게 다룰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다루다가는 화상을 입고 만다"고 했다.(...)
인간은 누구나 어떤 불행을 끌어안고 살아간다. 그리고 때로 그런 불행을 인생의 소중한 자산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또한 자신의 인생을 다른 사람에게도 적용되는 큰 문제로 생각하고 싶어한다. 더스틴 호프먼이나 잭 니콜슨 그리고 로버트 드 니로에게 박수 갈채를 보내는사람이 많은 이유도 일종의 그런 강압적 보편주의 경향에 의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은근한 아이러니의 멋도 모르면서 목소리 높여 자신을 주장하는 데 부끄러움을 느끼는 정신과는 인연이 없는 사람들의 대변자로서.

-2쪽

그녀가 <죽은 시인의 사회> 영화 챕터에서 한 말이다....

우리집을 찾아오는 일본의 젊은이들을 관찰해보면, 자유로운 교육을 받은 사람들보다 왠지 전통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 쪽이 장래성이 있는 듯이 보였다. 그 이유는 알 수없지만, 구속이 인간의 성장에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3쪽

그녀가 마피아 영화 <표범>에서 한 말이다......

인간은 두 종류가 있다. 바로 어떤 종류의 일을 태연하게 저지를 수 있는 인간과, 죽어도 할 수 없는 인간이다. 이 차이는 계급이나 교육 정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연령의 차이도 아니고 남녀의 차이도 아니다. 그렇다면 스타일 즉, 품격의 차이가 아닐까. -4쪽

작가로서의 스티븐 킹은 별로였지만, 영화 속에서 그가 그리는 작가상은 참으로 재미있다. 왜냐 하면 그의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은 늘 작가인데다가 제3자가 묘사하는 작가가 아니라 작가가 그리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샤이닝 쪽은 잘 안팔리는 작가가 글도 잘 안 써질 때, 작가의 상상력이 나쁜 방향으로 작용하여 많은 환상과 유령을 보게 되고, 그 결과 아내와 부인까지 함께 자멸하는 길이었다면, 미저리 쪽은 그 반대로 잘 팔리는 작가가 글도 잘 쓸때의 소설가의 공포를 그린 것.
궁지의 상황에서 미저리의 주인공 작가는 제정신을 잃지 않는다. 스스로 작가인 킹은 쓸 수만 있다면 어떤 상황에 직면해서도 올바른 의식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샤이닝> 속의 소설가는 제정신을 잃어가지만, 다만 글을 쓸 수 있는 작가는 때로, '제정신을 잃어버린 애독자'라는, 쓰지 못하는 작가라면 걱정도 하지 않을 그런 위험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스티븐은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쓸 수 있느냐 없느냐가 작가의 심리 상태를 좌우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 영화들이 단순한 공포물로만 보이지 않는다.
-5쪽

수재가 아닌 입장에서 수재를 바라볼 때 느끼는 걱정거리가 있다. 그것은, 그들이나 그녀들에게는 인간적 통찰력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그마한 벌레에도 혼이 있다는 말이 있다. 인간은 아무리 자질이 떨어진다 해도, 자신이 남에게 이해받는다는 확신을 가지면 올바른 길을 찾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6쪽

내가 역사상의 인물 가운데서도 특히 제1급의 인물을 사랑하는 것은, 내가 그냥 유명인이라면 무조건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며, 위인이나 영웅이 아니면 존경할 수 없다는 속물주의에 빠졌기 때문도 아니다. 일류들은 한결같이 아무리 사소한 존재에도 혼이 있다는 것을 깊이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에게서 피가 통하는 인간의 모습을 본다. 인간성에 대한 진정한 태도를 본다. 그리고 진실로 상냥한 인물에게 더 많은 사람이 따르는 것도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한다.

-7쪽

천재란 늘 자신감에 차 있고 밝고 느긋한가 하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자부심이 저 혼자 잘나서 앞으로 돌격하면, 그건 더 이상 자부심이 아니라 유아독존이 되어 버린다. 창작하는 사람이라면, 유아독존만큼 제 무덤을 파는 일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래서 진정한 창작자는 한결같이 자신의 자실에 대한 회의랄까 두려움이랄까, 그런 것을 자부심과 함께 늘 지니고 있다.
이해와 칭찬이 창작하는 자에게 늘 필요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물론, 회의나 두려움이나 걱정은 창작 도중에 늘 머릴를 든다. 그래서 이해와 칭찬이 더없이 좋은 약이 된다. 그런 이해와 칭찬은 진정한 창작자로 하여금 유아독존에 빠지게 하는 법이 없으므로, 얼마든지 많이 주어도 상관없다. -8쪽

품위 있는 행동이라든지, 유머 감각이라든지, 절묘한 균형 감각을 가지고 모든 일에 대처하는 능력은 시험으로 측정할 수 없는 자질이다. 시험으로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은 노력과 의지와는 관계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9쪽

시오노 나나미가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한 것 중 멋진 말.....

"유효하게 쓴 하루의 마지막에 기분 좋은 잠이 찾아오듯이, 유효하게 쓴 일생의 끝에는 기분 좋은 죽음이 찾아온다. "

"나는 낙천적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어리석음에도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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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27 17: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05-07-27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하...
저도 박애적인 저 말이 주는 따뜻함에 울구 싶었어요~

잉크냄새 2005-07-27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을 당시 알라딘 서재가 있었더라면 몇 구절 옮겼을 수도 있겠구만 싶은 구절이 있네요. 하지만 대부분은 기억나지 않아요. " 나는 낙천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인간의 망각에도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이말 위안으로 삼아야겠어요.

icaru 2005-07-27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17:08에 속삭이신 님... 잉크냄새 님과 통하셨네요~ 17:08 님의 눈엔 확인 되시죠?
잉크냄새 님... 제 책을 빌려 드리고 싶네요~~~~ ^^ .. 다시 밑줄 그으실 수 있게...


icaru 2005-07-27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그리고 저 것도... 교정 좀 봐 주시지 흐...

2005-07-27 18: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05-07-27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읽은 거~ 나머지도 리뷰로 올릴 생각인데... 매우 곱하기 2 성실한거죠오~

2005-07-27 19: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05-07-27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 님~ 머리는 안 돌아가죠... 감흥은 남기고 싶죠...
그래, 저 수밖에 없었답니다.
좀 미련스러워 보이긴 하지만... 저렇게 미끄러매 두면...아주 잊어먹지 않을테니까~
어떻습니까아?... 간혹 무릎을 치게 하는 구절이 보이지 않나요?

panda78 2005-07-28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순이 언니님 리뷰랑 밑줄 때문에 이 책 무지 사고 싶어졌어요. ^^
잘 지내고 계시지요? 복순이는 잘 있나요? ^ㅂ^

icaru 2005-07-28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판다 님...복순이 잘 있지요~
음...이 책요~ 전 꽉찬 별 다섯인디^^;;;
 
문학의 숲을 거닐다 - 장영희 문학 에세이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05년 3월
구판절판


그러니 릴케에 의하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도 자격이 필요해서, 먼저 나 스스로의 성숙한 세계를 이루어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삶의 안일주의에 빠져 어려운 것을 피하고 나의 '고유함'을 잃은 지 오래고, 남을 위해 하나의 '세계'가 되기는커녕 여전히 옹졸한 마음으로 길을 잃고 헤매며 살아가는 나는 어쩌면 사랑할 자격조차 갖추지 못했는지 모른다.
-21쪽

간혹 이제 내 삶이 다하고 지금 내가 하는 말이 내 생애 마지막 말, 즉 나의 유언이 된다면 어떤 말을 할까 생각해 본다..... 말을 통한 자기 표현을 업으로 하는 작가들의 유언은 무얼까. 문득 궁금해져서 찾아본 적이 있다. 의식적으로 준비해 두었다 한 말인지 아니면 어쩌다가 마지막 말이 되었는지, 게다가 정말 그것이 마지막 말이었는지, 여러 가지 의구심이 생기지만 그래도 통설로 알려진 바로 몇 개의 유명한 유언이 있다. 예컨대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헤리엇 스토 부인은 자신을 돌봐주는 간호사들에게 "사랑합니다." 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빨간 무공훈장을 쓴 스티븐 크레인은 자기 죽음의 순간을 마치 중계방송하듯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넘게 마련인 경계선에 도달했을 때, 생각만큼 끔찍하지 않다. 좀 졸리고, 그리고 모든 게 무관심해진다. 그냥 내가 지금 삶과 죽음 중 어느 세계에 있는가에 대한 몽롱한 의구심과 걱정, 그것뿐이다."
19세기 미국 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지금 들어가야 게다.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다. " 말했고, 마찬가지로 19세기 미국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임종시 이모가 "죽기 전에 하느님과 화해해라"라고 말하자 "내가 하느님과 언제 싸웠는데?" 하고 반문했다. 작가들의 유언 중 가장 유명한 말은 괴테의 "좀더 빛을"이라는 말일 것이다.
-82~83쪽

"이자벨, 삶이 더 좋은 거야. 왜냐하면 삶에는 사랑이 있기 때문에. 죽음은 좋은 거지만 사랑이 없어. 고통은 결국 사라져. 그러나 사랑은 남지. 그걸 모르고 왜 우리가 그렇게 고통스럽게 살아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삶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 있고, 그리고 너는 아직 젊어."
-85쪽

사전을 찾아 보면 '유머 감각'이란 '우습거나 재미있는 것을 감지하고 즐기고 표현하는 능력'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그러나 유머 감각은 그보다 좀더 넓은 관점에서도 볼 수 있다. 누군가 무슨 일을 할 때 상황의 정곡을 찔러 유머 감각을 발휘하여 대처한다는 것은 그의 날카로운 상황 판단력과 자신의 의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전제로 한다. 이는 또한 근시안적 판단을 유보하고 한 발자국 물러서서 좀더 객관적으로 상황을 관찰할 수 있는 여유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신의 믿음에 관한 확신, 그리고 그 누구 앞에서도 떳떳하고 당당할 수 있는 정직함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122쪽

펄 벅은 한국의 고아를 포함, 국적이 다른 아홉 명의 고아들을 입양했지만, 그녀의 친자는 중증의 정신지체와 자폐증이 겹친 딸 하나뿐이었다. 그녀가 ‘가장 어렵게 쓴 책’이라고 고백한 <자라지 않는 아이>는 최고의 명예를 누리는 작가로서가 아니라 장애 자녀를 낳아 길러 본 어머니로서의 체험을 마음으로 토로한 책이다.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의 행복감, 그러나 정신지체아로 일생 동안 자라지 않는 아이로 남게 되리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의 정말을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차라리 죽음이 더 편할지 모릅니다. 죽음은 그것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내 딸아이가 지금 죽어 준다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의 기대와 실망, 끝없는 고통, 그러나 결국 그 딸에게서 배운 점을 담담하게 그러나 그녀의 고백대로 "마음속으로 피를 흘리며" 서술하고 있다.
"나는 그 누구에게든 존경과 경의를 표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내 딸이 없었다면 나는 분명 나보다 못한 사람을 얕보는 오만한 태도를 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능만으로 훌륭한 인간이 될 수 없음도 배웠습니다."


-129쪽

그러면서 얼룩빼기 말 홀스또메르의 대사를 생각했다.
"늙은 것에 대해 대가를 치르라면 그렇게 하겠다. 그러나 나는 이제껏 누구에게도 악행을 저지른 적이 없다. 늙고 병들고 불구자가 된 것이 내 허물은 아니잖나?"

-165쪽

따지고 보면 동화 속에서 '착한 일'이 보상 받는 길도 매우 '육체적'이다. 미운 오리새끼는 아름다운 백조가 되고, 징그러운 두꺼비는 잘생긴 왕자님이 되고, 괴물같이 생긴 짐승은 멋진 왕이 되고, (...)
신체장애는 단지 의학적 케이스일 뿐, 악이든 선이든 모종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다. 또한 인간 치유의 역할을 가진 문학이 한 집단에게 부정적인 역할을 한다면 그것은 문학의 위기와도 무관하지 않다. (...)
어차피 인생은 장애물 경기이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작은 드라마의 연속이고, 장애물 하나 뛰어 남고 이젠 됐다고 안도의 한숨을 몰아쉴 때면 생각지도 않았던 또 다른 장애물이 나타난다. 그 장애가 신체 장애이든, 인간 관계 장애이든, 돈이 없는 장애이든, 돈이 너무 만은 장애이든- 아무리 권력 있고 부를 누리는 사람이라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인데, 왜 유독 신체 장애에만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가.
-224~227쪽

시인 박노해는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노래했다. 맞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답지 못할 때는 사람만이 절망이기도 하다.
-2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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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5-07-17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 빨리 사야지

icaru 2005-07-17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그러세요... 전 후배 꺼 빌려 읽었는데.. 저것 보세요...베껴놓느라구 손노동을 적잖이 했잖겠어요 ^^

잉크냄새 2005-07-18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영희 교수님의 체험이 녹아들어있는 부분을 발췌하신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님은 벌써 문학의 숲으로 난 오솔길을 걸으셨군요. 저도 이책 가지고 있는데 제가 보는 오솔길의 풍경은 어떨까 사뭇 기대됩니다. ^^

icaru 2005-07-18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리뷰로는 어떻게 써야 할지... 도통...
그래서... 밑줄 그었던 부분만 부랴부랴 옮겨 놨어요~
님 이 책 갖고 계시다고요~ 아하...좋은 책 갖고 계시네요 ^^

2005-07-18 1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5-07-19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잔잔해요. 어려운 책, 요즘 손에 잘 안 잡히는데 휴가철에 읽어야겠어요. 멋져요!

2005-07-19 17: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여우 2005-07-19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너무 잔잔해서 심심한 책이었는데 님은 좋으셨나봐요.
역쉬 우린 안맞는게여...그런거였으..흐흑..
아니, 저도 좋았지요 뭐. 심심한 거 빼고는..
그나저나 잉크님은 이 책 왜 읽지 않고 계십니까!!!!!

2005-07-19 17: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05-07-19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벌써 주문했어요~ 죄송해요 ^^v

icaru 2005-07-19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 님... 소금이 필요하신 게지라~ 흐흐

2005-07-20 14: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설처럼 - 우리시대의 지성 5-016 (구) 문지 스펙트럼 16
다니엘 페낙 지음, 이정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4월
구판절판


우린 정말로 아이가 걱정스러웠다.
어찌나 걱정스러운지 시도 때도 없이 내 아이를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 시시콜콜 비교하곤 했다.
뿐만 아니라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둔 친구 아무에게나...가 아닌, 학교 성적이 뛰어나며 죽어라고 책만 읽는다는 아이를 둔 친구에게 자문을 구해보기도 했다.
귀가 잘 안 들리나? 독서 장애가 아닐까? 아예 학교를 안 가겠다고 하는 거나 아닐까? 저러다가 영락없는 학습 지진아가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별의별 검사를 다 해보았다. ...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런데 왜?
둔해서일까?
단지 둔해서일 뿐이라고
아니다. 아이는 그저 자신의 리듬을 따라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 리듬은 다른 아이들과 반드시 같아야 한다는 법도, 평생을 한결같이 언제나 일정해야 한다는 법도 없다. 아이에게는 저마다 책읽기를 체득해나가는 자신만의 리듬이 있다. 때론 그 리듬에 엄청난 가속이 붙기도 하고, 느닷없이 퇴보하기도 한다. 아이가 책을 읽고 싶어 안달을 하는 시기가 있는가 하면, 포식 뒤의 식곤증처럼 오랜 휴지기가 이어지도 한다. 거기에 아이 나름대로의 좀더 잘 하고 싶다는 갈망, 해도 안 될 것만 같은 두려움까지 감안한다면....
교육자를 자처하지만, 실은 우리는 아이에게 성마르게 빚 독촉을 해대는 고리대금업자와 다를 바가 없다. 말하자면 얄팍한 지식을 밑천 삼아, 서푼어치의 '지식'을 꿔주고 이자를 요구하는 격이다.
되돌려 주어야만 한다. 아무런 조건 없이, 될 수록 빨리! 그렇지 않으면, 누구보다 바로 우리 자신부터 의심해보아야 할 것이다.

-60쪽~61쪽쪽

학생 여러분, 우리가 처음 문학에 끌리기 시작하는 건 한낱 단어 나부랭이나 문장 때문만은 아닙니다. 문학이 어떻게 우리의 삶 속에 스며들기 시작했는가를 생각해보십시오. 이야기의 시대는 그 옛날 기억마저 아스라한 시절, 갓난아이를 어르고 재우는 자장가를 그만둘 즈음부터 벌써 시작됩니다. 아이는 젖을 빨 듯 이야기를 빨아들입니다. 그러곤 그 경이로운 이야기들의 세계가 끝없이 되풀이되며 이어지기를 요구합니다. 아이는 냉철하기 그지없는 훌륭한 독자입니다. 나 또한 그 하고많은 마법사며 괴물, 요정 따위를 끊임없이 지어내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을 바쳐야 했는지 모릅니다.
-68쪽쪽

아이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읽기 시작한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엿가락처럼 늘어난다. '책' 속의 낱말들이 워크맨의 이어폰 사이에서 춤을 춘다. 아무런 감흥도 없다. 한 자 한 자가 납덩이처럼 무겁기만 하다. 낱말들이 안락사를 당하는 말처럼 차례로 쓰러져간다. 전열을 가다듬는 드럼 연주로도 죽어가는 낱말들을 소생시키기엔 역부족이다(설령 드럼연주자가 그 유명한 켄들일지라도!). 낱말들은 의미를 반납하고 평이한 글자들의 세계로 돌아갔다. 낱말들이 눈앞에서 무참히 쓰러져가건만 아이는 겁날 게 없다. 오직 앞으로의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읽는 것만이 자신에게 유일하게 주어진 당면과 제이자 의무이므로.
-p.81~82쪽

살아가려면 책을 읽어야 한다. 우리를 짐승이나, 야만인, 일자무식의 무뢰한 광포한 광신도ㅡ 자기 도취에 빠진 독재자. 탐욕스러운 배금주의자들과 구별짖는 것이 책을 읽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독서의 절대적 필요성이다. 그러니 책을 읽어야 한다. 기필코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배우기 위해서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
·지식을 쌓기 위해서
·우리 인간이 어디서 왔는지 알기 위해서
·우리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알기 위해서
·타인들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 인간이 어디로 가는지 알기 위해서
·과거의 기억을 간직하기 위해서
·현재의 우리를 직시하기 위해서
·지난 시대의 경험을 활용하기 위해서
·선조들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자신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우리의 문명을 이루고 있는 근원을 파악하기 위해서
·끝없는 호기심을 일깨우기 위해서
·기분 전환을 위해서
·교양을 쌓기 위해서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기 위해서
·비판 정신을 기르기 위해서
-p.92쪽

책 읽을 시간이 고민이라면 그만큼 책을 읽을 마음이 없다는 말이다. 따지고 보면 책 읽을 시간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책 읽는 시간은 언제나 훔친 시간이다(글을 쓰는 시간이나 연애하는 시간처럼 말이다).

대체 어디에서 훔쳐낸단 말인가?

굳이 말하자면, 살아가기 위해 치러야 하는 의무의 시간들에서이다.

(...)

책을 읽는 시간은 사랑하는 시간이 그렇듯, 삶의 시간을 확장시킨다.

만약 사랑도 하루 계획표대로 해야 하는 것이라면, 사랑에 빠질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누군들 사랑할 시간이 나겠는가? 그런데도 사랑에 빠진 사람이 사랑할 시간을 내지 못하는 경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

독서란 효율적인 시간 운용이라는 사회적 차원과는 거리가 멀다. 독서도 사랑이 그렇듯 그저 존재하는 방식인 것이다.

문제는 내가 책 읽을 시간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그렇다고 아무도 시간을 가져다주지는 않을진대), 독서의 즐거움을 누리려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p.159~161쪽

입사 시험에서든 학교 시험에서든, '이해한다'란 말의 의미는 시험관이 수험자에게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이해한다는 뜻이다. '제대로 이해한' 답안이란 그러므로 요령껏 타협을 본 답안이다.

(...)

그러므로 '열등생'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지극히 정상적인 보통의 아이일 경우가 허다하다. 단지 전술적인 대처 능력이 결여되어 있을 뿐이다.


-p.175~176쪽

책을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
.....
한권의 소설책을 끝까지 읽어내지 못하고 던져버릴 만한 무려 36000가지의 이유들이 있다.
이를 테면 전에 어디선가 읽어본 듯한 느낌이 들어서, 그다지 주의를 끌 만한 이야기가 아니라서, 작가가 주장하는 바에 전혀 동조할 수가 없어서, 혹은 닭살이 돋을 만큼 문체가 역겹다거나 반대로 더 이상 읽어나갈 이유를 찾지 못할 만큼 문체가 진부해서라는 둥. 이유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책이 우리의 손에서 떨어져나간다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어쨌거나 제아무리 몽테스키외라한들, 마음에도 없는 책을 억지로 1시간씩 읽어가며 마음의 위안을 삼을 수는 없는 노릇일테니 말이다.
하지만 읽기를 포기하는 숱한 이유 가운데 한 가지만은 좀더 시간을 들여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어렴풋이나마 패배한 느낌을 받아 책을 다 읽지 못하는 경우이다. 책을 펼쳐 들고 읽기 시작한 지 얼마되지도 않아 나 자신보다 완강하게 느껴지는 무언가에 의해 점점 밑으로 가라앉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 위대한 소설이 쉽게 읽혀지지 않는다고 하여 그 소설이 반드시 다른 소설보다 어려운 것은 아니다. 단지 그 책과 -제아무리 위대한 소설이라 할지라도- '이해'할 수 있는 지적 소양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자부하는 우리들 사이에 모종의 화학적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을 뿐이다.

-p.203~ 205쪽

소설은 그냥 소설로, 소설처럼 읽어라.
아이들은 다들 무엇이 되고 싶어 하는, 혹은 무엇이 되어가는 과정들이다. 아니 어른인 우리도 언제나 나 아닌 다른 무엇이 되는 꿈을 꾸며 살아간다. 책은 그런 우리의 꿈을 은밀히 부추기고 공모하는 동반자의 역할을 해 줄 따름이다. 그러니 어떻게 그것을 우격다짐으로 강요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읽다’는 ‘사랑하다’나 ‘꿈꾸다’처럼 명령문이 먹혀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책과 담을 쌓은 아이들을 위해서 구체적인 방안 하나를 우리에게 던져 준다.
-역자후기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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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05-01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이 너무너무 좋아요 ^^

icaru 2005-05-01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미스 하이드 님도요?? 찌찌뽕^^
근데 이거 타이핑 하느라고 죽는줄 알았슝...ㅠ^ㅠ

비로그인 2005-05-01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흘흘..애쓰셨구만요. 전 독서의 의미를 따져본 적은 별루 없는데 기냥 '심심풀이 땅콩'의 의미가 더 강한 거 같아요. 아, 근데..소설은 지적 소양관 관계없이 화학적 반응이 잘 일어나던데 사회과학은 물리적 반응이 더 잘 일어나곤 하더라구요. 책 내던지고 바닥에 발랑 누워서 '도저히 못 읽겠어! 당췌 몬 소리냐구!' 라면서 버둥대며 앙탈..

icaru 2005-05-01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한 방으로 저의 노고를 치하해 주신...복돌언냐!!
'도저히 못 읽겠어! 당췌 몬 소리냐구!' 라면서 버둥대며 앙탈.. 후후... 작가가 화학적 반응을 언급하니, 복돌언냐는 물리적 반응의 예로 응수를 해 주시누만요 ...역쉬 ..누가 응용의 귀재 아니랄까베...
암턴...뭔반응이건 설령 역반응이건...간에... 무반응보담은 나아요 글쵸??

2005-05-01 2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진주 2005-05-02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걱~ 놀랫시요....첫 수업 항상 제가 묻는 질문에 애들이 하는 답들이 여거 있어서..책을 왜 읽느냐? 배우기 위해..우짜고저짜고......
근데 저 많은 걸 워드로 쳤다구요? @@굉장히 맘에 들었나봐요.

하루살이 2005-05-02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도 사랑이 그렇듯 그저 존재하는 방식인 것이다.
맞습니다, 맞고요... 근데 왜 둘 다는 힘들죠???

잉크냄새 2005-05-02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읽다가 포기하는 것은 좀 그래요. 왠지 오기가 발동해서 끝까지 물고 늘어집니다. 오기로 읽고 나면 남는것은 악 밖에 없는 것을...이것을 오기의 법칙이라 합니다.
그리고 전 책 읽는 의미는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에 가장 큰 비중을 두는것 같아요.^^

icaru 2005-05-02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저는 이 책을 빌려봤거든요... 근데... 사 두어야겠다는 생각했답니다..... 저 많은 글자들을 타이핑하면서 말이죠...
진주 님...하핫 정곡을 찌르셨어요..! 예에~ 굉장히 맘에 들었거든요... 님께 단연 추천해드리고 싶은 책이어요... 읽으면서... 진주 님이 읽으시면 딱이겠다 그럼서 봤는데...님은 아이들에게 책읽기 지도를 하는 선생님이시니까요~
하루살이 님... 독서도 사랑도...훔치는 시간으로 한다 하니... 참..훔치는 요령은요~ 이 책에 나와 있습니다.^^ 어허..이 책 님께도 추천도서요!!
잉크냄새 님... 오기...님께 그런 오기가 있을 법하다는 생각... 체게바라의 평전 리뷰 보면서 들었다지요... 헉...전 정말 오기로 읽었어요...중간까지만요... 문제는 중간까지 이어오는데도.... 당최 뭘 읽었는지 모르겠다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