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 읽은 날짜 : 2012년 7월 25일 수요일

 

 

 

 13쪽

 

 시인에게 바람을 맞던 날, 나는 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나는 시인이 나를 편안하고 유쾌하게 만날 수 있을 때 나오기를 원한다. 나는 시인이 약속 때문에 억지로 나와서 내 앞에 앉아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건 껍데기와 앉아 있는 것이니가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제로 시인과의 만남은 이루어졌다. 물론 그날의 만남은 아주 행복했다. 시인은 정말 나와 만나고 싶을 때 나왔기 때문이다.

 

 

 

 30쪽

 

 유아는 자신에게 쾌락을 제공하는 젖꼭지가 이제는 금지되었다고 느끼게 된다. 이 경우 젖꼭지는 아이의 쾌락을 충족시켜주는 단순한 대상을 넘어선다. 한때 쾌락을 주었던 젖꼭지가 금지되자마자, 이것은 유아에게 욕망 대상이 된다. 당연히 이 순간 유아는 욕망주체로 탄생한다. (중략) 우리는 금지된 것만을 욕망한다. (중략) 현재 작동하는 우리의 욕망은 모두 과거 금지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라캉이 인간에 대해 내린 결론이다.

 

 

 40쪽

 

 그렇지만 여기서 우리는 인문학의 정신과 그 힘이 어디에 있는지 직감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솔직함과 정직함이다. 자신의 상처나 약점을 솔직하게 토로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고칠 수가 없다. 상처를 냉정하게 진단하지 않는다면, 치료의 전망도 없을 것이다.

 

 

 41쪽

 

 진정한 인문학자는 일체의 허영과 가식을 걷어내고 인간과 사회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아이와 같은 눈을 가지고 잇기 때문이다.

 

 

 55쪽

 

 어떻게 해야 이 네모난 얼음이 둥근 그릇과 소통할 수 있겠는가? 이 얼음이 네모남이란 고착된 자의식을 버려야만, 그래서 그릇의 둥긂을 수용할 수 있을 대에만 소통은 가능할 것이다. (중략) '얼음'과 '물'의 비유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얼음'과 '물'이 상이한 두 가지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실체substance가 가지는 두 양태mode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중략) 결국 치열한 자기 수양에 의해 우리는 성인도 될 수 있고, 아니면 평범한 사람으로 남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67~68쪽

 

 혜능은 시를 통해서 신수가 강박관념에 빠져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혜능에 따르면 신수는 왜 마음을 닦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저 이전의 부처들과 선배 스님들이 마음을 닦았기 때문에 자신도 닦을 뿐이라는 식이다. 다시 말해 신수의 생각에는 도대체 마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숙고가 빠져 있다는 것이다.

 

 

 76쪽

 

 만들어진 습관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변화가 지나가버린 것이라면, 습관은 그것을 낳은 변화를 넘어서 존속하는 것이다. 게다가 습관은 그것이 습관인 한에서 그리고 그 본질 자체에 의해 그것을 낳는 변화에만 관계될 뿐이라고 했을 대, 그것은 더 이상 그런 변화가 존재하지 않아도 존속하는 것이다. (중략) 바로 이것에 의해 습관이냐 아니냐가 가려진다. 습관은 따라서 단지 어떤 상태일 뿐만 아니라 어떤 경향이자 어떤 능력이기도 하다. -『습관에 대하여』

 

 

 83쪽

 

 [우리는] 가까이 '손안에 있는' 존재자를 '배려함'에서 사용 불가능한 것으로, [다시 말해]특정한 용도로 사용하기에는 부적절한 것으로 만나게 될 수 있다. 이 경우 작업 도구는 파손된 것으로 판명되고 재료는 부적합한 것으로 드러난다. 도구는 여기에서도 어쨌거나 손안에 있기는 하다. (중략) 이런 사용 불가능성의 발견에서 도구는 마침내 우리 '눈에 띄게' 되는 것이다. - 『존재와 시간』

 

 

 84~85쪽

 

 결국 하이데거에게 있어 '배려함'이 '특별하게 의식하지 않고 어떤 것과 관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눈에 띔'은 '어떤 것과의 친숙했던 관계가 좌절되어 어떤 것을 의식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중략) 하이데거는 오직 '손안에 있지 않은' 예외적인 경우, 즉 특이한 사건이 발생한 경우에만 우리의 생각, 즉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눈에 띔'의 작용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중략) 바로 낯섦이 찾아오는 바로 그 순간이 우리의 생각이 깨어나 활동하기 시작하는 시점이라는 것이다.

 

 

 96쪽

 

 광학은 무엇보다도 빛, 그리고 그것을 느끼는 눈에 대한 사유라고 할 수 있다. 광학이 흥미로운 이유는 이 학문이 우리의 일상적 경험을 근본적으로 낯설게 만들면서 출현했기 때문이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붉은 장미꽃을 보고, 이 꽃은 붉은색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마치 그 장미꽃이 붉은색을 성분으로 가지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광학은 전혀 다른 사실을 알려준다. 꽃이 붉게 보이는 이유는 그 꽃이 태양빛 중 붉은색을 띠는 파장대의 빛만을 반사하고, 그 빛을 우리 눈이 감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 꽃은 붉은색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붉은색을 튕겨내는 셈이다.

 

 

 104쪽

 

 욕쟁이 할머니의 식당에서 느끼기 쉬운 불쾌감이나 거부감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자신과 대화하는 사람이 어떤 삶의 문맥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는지 섬세하게 읽어내야 한다. 자신의 문맥에 따라 상대방의 이야기를 재단하는 순간, 오해와 갈등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112쪽

 

 가장 두려운 악인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 모두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산 사람에게 아직 죽음이 오지 않았고, 죽은 사람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121쪽

 

 이처럼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자유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자유가 없다면 책임도 있을 수 없다.

 

 

 123쪽

 

 어떤 행위가 사회적 통념에 맞느냐 그르냐가 쟁점이 아니라, 행위자가 자율적인 선택을 했느냐 타율적 선택을 했느냐가 쟁점이기 때문이다.

 

 

 127쪽

 

 정확히 말해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긍정했다가는 살아남기도 힘든 사회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중략) 한마디로 남자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남성들은 여성을 타자로 경험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거나 숨기고 있는 여성에게서 어떻게 낯섦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내 생각과 욕망에 상대방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때에만 그는 나에게 타자로 드러날 수 있다.

 

 

 131쪽

 

 어머니나 아이에게 남은 유일한 관계는 책임이란 관계다. 이 관계를 통해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를 타자로 긍정하면서 그에 부단히 반응할 수 있고, 아이도 자신의 어머니를 타자로 긍정하면서 그에 반응할 수 있다. 완벽한 일치도 아니고 완벽한 분리도 아닌 관계. 이것이 바로 레비나스가 생각했던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다.

 

 

 142쪽

 

 자공이 물었다. "평생 동안 실천할 만한 한 마디 말이 있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바로 서다! 자기가 바라지 않는 일은 남에게 행하지 말아야 한다." -『논어』「위령공」

 

 

 149쪽

 

 맹자와 주희의 윤리적 감수성이 인간의 본성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정약용의 그것은 바로 위기에 빠진 어린아이에 가 있었던 셈이다. 다시 말해 우리 마음에 '측은지심'이 생겼을 때 주희는 그것을 발생시킨 '본성'이라는 내적 원인으로 자신의 사유를 진행시켰던 반면, 정약용은 그 어린아이를 구해야 한다는 '실천'이라는 외적 방향으로 자신의 사유를 진행시킨 것이다.

 

 

 154쪽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였다. (중략) 이처럼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56쪽

 

 "지금 당신은 근면과 성실이란 미명 아래 사유의 의무를 방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금 당신이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하고 있는가?"

 

 

 171쪽

 

 유한자인 우리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파괴해야만 한다.

 

 

 184쪽

 

 다시 말해 이리가라이에 따르면 남녀평등 이념 속에서 평등이란 잣대는 여전히 남성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성이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요구하는 기준에 맞추어 자신을 만들어가게 되면,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고 남성적 정체성을 내면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91쪽

 

 너는 들어보지 못했느냐? 옛날 바다새가 노나라 서울 밖에 날아와 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이 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와 술을 권하고, 아름다운 궁궐의 음악을 연주해주고, 소와 돼지, 양을 잡아 대접하였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하고 슬퍼하기만 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결국 죽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자기와 같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 아니다. -『장자』「지락」

 

 

 231쪽

 

 상업자본은 공간의 차이, 다시 말해서 가격의 차이가 나는 서로 다른 두 공간에서 이윤을 획득한다. (중략) 그러니까 상업자본이 이용한다는 공간적 차이는 단순한 공간적 차이라기보다 가격 차이가 나는 공간적 차이인 셈이다. 반면 산업자본은 상업자본과는 달리 시간의 차이를 이용해서 이윤을 남기려고 한다. (중략) 상업자본이 이미 존재하는 공간적 차이를 이용할 수 있을 뿐이지만, 산업자본은 스스로 유행을 만들어서 시간적 차이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233쪽

 

 자본주의는 노동자가 자신이 벌어들인 돈으로 자신이 만든 상품을 활기차게 구매할 경우에만 유지되는 체제이다.

 

 

 237쪽

 

 "오히려 나는 우리나라에 사치가 더 많았으면 좋겠다. (중략) 왜냐하면 부자들의 사치는 많은 수공업자와 가난한 사람을 먹여 살리기 때문이다." -『사치와 자본주의』

 

 

 247쪽

 

 자본주의는 상품을 가진 사람보다는 자본을 가진 사람에게 우월함을 보장하는 체제다. (중략) 그렇지만 월급을 받아 소비자가 되는 짧은 한순간, 상황은 180도 달라진다. 순간적이나마 노동자는 상품을 구매할 돈을 가지고 있고 자본가는 팔아야 할 상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순간 노동자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중략)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자본가가 월급을 준 이유는 노동자가 자신이 만든 상품을 자신이 받은 돈으로 사게 하기 위해서이다.

 

 

 250쪽

 

 결국 대중매체가 제공하는 이미지들에 길들여짐에 따라 스펙터클 사회의 거주민들은 점점 현실에 대한 방관자, 혹은 구경꾼으로 변하게 된다. (중략) 아니 정확히 말해 온몸으로 겪어야만 했던 현실 세계는 사라지고 시각적으로 특화된 이미지의 세계만 남게 된 것이다. (중략) 권력의 입장에서는 좋을 것이다. 현실에 치열하게 참여하는 실천가가 줄어들고 거리를 두고 냉소적으로 구경하는 방관자가 늘어나게 되니까 말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대중매체의 볼거리들이 기본적으로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서 주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볼거라기 선정적이고 자극적일수록, 우리는 대중매체에 쉽게 빠져들게 된다. 자본은 이를 이용해 우리의 내면에 신상품의 유행과 이미지를 각인시킨다. 결국 우리는 여가시간마저 자본의 지배를 받고 있는 셈이다.

 

 

 269쪽

 

 빼앗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주어야만 한다. 이것을 '은미한 밝음'이라고 말한다. 유연하고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법이다. 물고기는 연못을 벗어나게 해서는 안 되고, 국가의 이로운 도구는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 -『도덕경』36장

 

 

 307쪽

 

 자신의 적성이나 혹은 아이의 적성을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훈계나 명령을 내리지 않고, 자신이나 아이가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즐거워하는지, 혹은 어떤 일을 할 때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하는지 관찰하기만 하면 된다.

 

 

 312쪽

 

 민주주의에서 시간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다양한 개인들을 엄연한 권리의 주체로서 긍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랑시에르에게 고마워할 일이다. 그는 합의라는 절차 속에 내재하는 억압과 불평등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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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쪽

 

 '인간은 생각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하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중략) 개인도 마찬가지다. 자기 이야기가 풍요로워야 행복한 존재다. 할 이야기가 많아야 불안하지 않다. 한국 남자들의 존재 불안은 할 이야기가 전혀 없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23쪽

 

선택의 자유는 인간 존재의 근거다. 내 삶의 의미는 내가 선택했는가, 아닌가에 의해 결정된다.

 

 

 

 

31쪽

 

 어떤 이에게도 위로 받지 못하는 이 존재론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현대인들은 관심과 배려를 돈 주고 산다. 흥미로운 사실은 남자들은 1차 배려경제, 즉 감각적이고 원초적인 배려경제에 많은 지출을 한다. 반면 여자들은 2차 배려경제, 즉 마음의 위로와 배려에 더 많이 지출한다는 것이다.

 

 

49쪽

 

 그리움을 아는 자만이 자신의 삶에 감사할 줄 안다. 그래서 가끔은 외로워야 한다. 가슴 저린 그리움이 있어야 내가 이제까지 살아온 삶에 대한 기쁨, 내 가족에 대한 사랑, 내가 소유한 모든 것들에 대한 감사가 생기는 까닭이다. (중략) 삶에 아무런 기쁨이 없을 때는 처절하게 고독해보는 것도 아주 훌륭한 대처 방법이다. (중략) 고독해야 누군가를 그리워하게 되고, 누군가를 그리워해야 내면이 풍요로워진다.

 

 

56쪽

 

 문제는 손해배상이나 청구하고 그 처자의 신상을 뒤져서 익명으로 욕설이나 내뱉는 유치한 반응 이외에는 별다른 저항의 수단이 없다는 사실이다. 자업자득이다. 자신을 둘러싼 이 땅의 온갖 역사, 문화적 변동에 아무 성찰 없이 투덜댄 결과다. (중략) 이제까지 남자들의 눈길에 맞춰 가슴에 소금물 주머니를 삽입하고, 엄지발가락이 휘어지도록 높은 하이힐을 신어 엉덩이를 치켜세워야 했던 여인들이 지금까지 참고 있었던 이야기를 아주 조금씩 내놓고 하기 시작했을 뿐이다.

 

 

73쪽

 

 왜 성공한 사람은 재미라고는 전혀 없는 성직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가? 왜 재미있고 즐거워서 성공했다고 이야기하는 경우는 전혀 없을까? 왜 꼭 실패와 역경을 딛고 성공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일까? '여유' '재미' '나눔'과 같은 풍요로운 이야기는 왜 한국식 내러티브에는 전혀 포함되지 않는 걸까?

 

 

92쪽

 

 어른이 된다는 것은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차이에 관대해지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뜻한다. 미국 텍사스 주립대학 심리학과의 제임스 페네베이커 교수 등은 8세부터 85세까지 3280명의 일기 같은 기록과 유명작가 열 명의 작품들을 분석했다. (중략) 동사의 과거형은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고, 중년은 현재형을, 노년으로 갈수록 미래형을 더 많이 사용한다는 것이다.

 

 

289쪽

 

 더욱 흥미로운 것은 한국이 중심에 있는 태평양을 중심으로 한 지도를 보면서, 우리 스스로도 한국이 속한 지역을 극동아시아라고 불렀다는 사실이다. 유럽 중심주의는 이렇게 구체적이고 철저하게 우리를 세뇌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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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편의점에 탐닉한다 작은 탐닉 시리즈 17
채다인 지음 / 갤리온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 다 읽은 날짜 : 7월 5일 목요일 오늘!

 

 

 

 오늘 읽은 책 독후감을 '오늘' 써 보기는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부담갖지 않아도 되는 책이라 만화책 보듯 책장을 넘겨서일까. 앉은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다. 손에 꼭 맞는 적당한 크기와 가벼운 무게만으로 이 책을 금세 다 읽을 거라 예상했다. 블로그에 한 번도 들어가보지 않은 나 같은 일반인도 알 정도로 유명한, 편의점 리뷰를 쓰는 이의 책이어서 호기심이 생긴 것도 한 이유였다. 편의점 리뷰가 기발하긴 하지만 이렇게 출판될 정도라고는 생각지 않았기에 어떤 내용일지 기대가 됐다.

 

 

 생동감 넘치는 컬러 페이지들

 

 밋밋한 흰색, 또는 미색 바탕에 글자는 검은색, 엷은 파랑색, 회색, 고동색 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책들만 보다가 눈이 휘둥그레해질 정도로 컬러 페이지로 그득한 책을 보니 반가웠다. 흑백 TV를 보다 컬러 TV를 보게 된 느낌? 확실히 보여줄 게 많은 책들은 잉크를 아끼면 안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가 잘 드러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하루에 1~2번은 가는 낯익은 장소여도, 이미 숱하게 봐서 눈에 익은 군것질거리여도 사진으로 보면 느낌이 색다른 법! 이 책에서 처음 보는 해외 편의점 사진들은 컬러여서 더 고마웠다.

 

 편의점 음식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자세

 

 사실 편의점 리뷰를 쓴다는 것이 썩 유쾌한 건 아닐 수도 있다. 그만큼 끼니를 제대로 챙겨먹지 못해 편의점 음식으로 때우고 있다는 의미니까. 나도 편의점 삼각김밥과 라면을 꽤나 먹어봤는데 딱히 낭만적인 추억은 기억나지 않는다. 때때로 특정 음식이 몹시 먹고 싶어서 자진해서 발걸음한 적도 있지만 식사 목적으로 편의점에 들를 때에는 거의 다 이유가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비자발적인 이유들(음식에 한정). 시간이 부족하거나, 제대로 밥 먹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멀리 나가기 귀찮아서 등등. 편의점 리뷰를 '자발적'으로 하고 블로그까지 꾸리는 저자가 느끼는 편의점과 내가 연상하는 편의점의 이미지는 확연히 다를 것 같다. 또, 아주 입맛에 맞는 음식을 발견하지도 못해서 못마땅할 적도 많았다. 시험 기간에 열려 있는 곳이 없어 컵라면으로 배를 채웠는데 소화가 잘 안 됐었고, 삼각김밥 밥알이 제대로 익지 않은 느낌을 받은 적도 있으며, 새로 도전한 메뉴가 별로여서 기분을 망친 적도 있다.

 

 필자는 친절하게도 자신이 먹어 본 편의점 음식들을 잘 분류해서 설명한다. 샌드위치, 라면, 삼각김밥, 돈까스부터 시작해서 안주나 레토르트 식품 등 가지수도 다양하다. 전반적인 평가도 호의적이다. 경악한다거나 비추천하는 메뉴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와 반대로 나는 만족스러웠던 걸 찾기가 훨씬 힘들다. 그나마 가장 괜찮은 게 전주비빔과 새우마요고 돈까스나 샌드위치류는 잘 먹지 않는다. 특히 돈까스의 경우 흔히 말하는 '싼 맛'이 날 가능성이 농후하기에 아예 도전도 안 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의 편의점 맛 탐험기가 거슬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편의점 음식에만 유독 예민한 내가 맛보지 않은 여러 음식들을 프리뷰해주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문제는 책이 쓰여질 당시에 있었던 음식들을 지금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는 데 있다. 일본식 라면이나 군고구마, 초밥 같은 걸 정말 국내 편의점에서 팔았다니 믿기지 않는다. 편의점 음식을 두루두루 훑었는데도 그런 것들은 눈에 띄지 않았는데. 왜 편의점 음식은 시간이 흘렀는데 더 종류가 줄어드는 건지 의문이다.

 

 뭘 해도 될 사람

 

 남들은 그냥 넘길 수도 있는 편의점 음식들을 꼬박꼬박 리뷰해서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성실함을 요하는 일이다. 나도 블로그를 해 봐서 아는데(ㅋㅋ) 같잖아 보이는 포스팅도 알고 보면 상당한 정성과 고민이 들어가게 된다. 사진도 찍고 기억을 더듬어 맛도 기억해내서 묘사하고, 심지어 '꾸준히' 하다니 뭘 해도 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마지막 페이지를 보니 특기를 살려 세븐일레븐에 입사했단다! 집중과 몰입으로 자신의 블로그를 활자한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여겼는데 일자리까지 구했다! 역시 좋아서 하는 일의 힘은 이렇게도 크고 세다. 갑자기 서형욱 해설위원이 생각났다. 해외 축구를 보는 걸 좋아해서 PC통신 시절 관련 자료를 열심히 퍼나르고 번역도 하고 그러면서 경기 보는 눈을 키웠다는 서 위원 또한, 취미로 시작한 일을 직업으로 삼게 된 비슷한 케이스다. 나도 좋아서 하는 일을 쭉~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일단 좋아하는 일부터 분명히 알아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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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오늘 예수가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는 가장 주요한 원인은 교회가 인간 예수의 삶을 교리 속에 묻어 버렸기 때문인데, 반말하는 예수는 교회의 그런 의도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24쪽

 

 길릴래아에서 온 메시아. 그는 메시아이되 영광의 왕으로서의 메시아가 아니라 인민들의 고통스런 삶을 함께하는 메시아로서 예고된 것이다.

 

 

 

32쪽

 

 예수는 그런 하느님상을 뒤집는다. 앞으로 거듭 언급하겠지만, 예수에게 하느님은 권위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다정한 엄마와 같은 존재다. 예수는 '하느님은 우리에게 명령하고 누르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이해하며 우리와 대화하려 하는 분'이라고 가르친다. 예수의 가르침에서 하느님은 행여 진노할가 두려워 눈치를 살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마주 보며 대화하고 위로받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였다. 예수의 가르침에서 하느님은 비로소 율법의 굴레에서 천천히 걸어나와 인민들과 만났다.

 

 

40쪽

 

예수가 병자를 고치는 일은 단지 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이 아니라 그의 잃어버린 인권을 회복시키고 죽음 같던 삶을 회복시키는 일이다.

 

 

47쪽

 

 오늘날 '바리사이인'은 기독교나 성서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서조차 '위선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즉 바리사이인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히려 이스라엘 사회를 통틀어 가장 양식 잇는 사람들이었다. (중략) 바리사이인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전통이 완전히 결딴나려는 그런 상황 속에서 분연히 일어난 사람들이다. '바리사이'라는 말은 '분리하다'라는 뜻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모든 이방 문화로부터 이스라엘을 분리시켜 그 정체성

 

 

 

49쪽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죄인'은 누구인가? (중략) 그것은 바로 '경제적 경쟁력'이다. 경제적 경쟁력을 갖지 못한 사람은 곧 죄인이다. 그들은 2,000년 전 팔레스타인의 죄인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으로서 품위와 존경을 유지할 수 없으며 인생과 미래에 대한 꿈도 가질 수 없다. 2,000년 전 죄인들이 '율법을 지켜야만 제대로 된 사람'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듯, 그들 또한 '경쟁력이 있어야 제대로 된 사람'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런 현실에 체념한다.

 

 

53쪽

 

 예수는 그 가운데에서도 여성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드러낸다. 여성들은 토라를 공부하는 게 금지되어 있었으며 토라를 모르는 그들은 온전한 인격체로 여겨지지 않았다.

 

 

56쪽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생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생기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것은 안식일 논쟁을 넘어 율법 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반박이다. 예수는 말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사람을 괴롭히고 옥죄기 위해 율법을 준 게 아니라 사람을 더 사람답게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해 율법을 준 것이다. 사람을 괴롭히고 옥죄는 율법은 더 이상 하느님의 율법이 아니다.'

 

 

59쪽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무리 천하고 막돼 먹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품위 있게 살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루에도 몇 번씩 악다구니를 쓰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품위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중략) 사람은 품위 있는 사람과 품위 없는 사람으로 나뉘는 게 아니라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과 유지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나뉘는 것이다.

 

 

61쪽

 

 물론 운동이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려면 그런 외형적 성장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운동의 외형적 성장은 두 가지 위험을 수반한다. 하나는 외형적 성장과 운동의 정체성의 훼손이 비례하는 경향이다. 또 하나는 운동의 외형적 성장은 기존의 사회체제에 포섭되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66쪽

 

 평화란 '온 세상이 잃어버린 조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억압과 착취와 불평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유지되는 조용하고 온순한 상태는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악랄한 형태의 폭력이다. (중략) 그래서 때론 평화를 위한 노력이야말로 때론 가장 소란스럽고 가장 사나울 수 있다.

 

 

73쪽

 

 예수는 늘 비유로 가르친다. 당시 팔레스타인 인민들이 대부분 문맹이거나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에서 비유는 매우 좋은 강의법이었다. (중략) 예수의 비유는 인민들의 일상 가운데서도 여성의 일상에 더욱 닿아 있다. 예수의 비유는 유식한 사람과 무식한 사람, '제대로 된 인간'(남성)과 '모자라는 인간'(여성)이라는 사회적 위계를 전복한다.

 

 

80쪽

 

 변화는 오히려 비현실적인 꿈을 꾼다며 비웃음과 조롱을 받는 사람들,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끈기 있는 노력에 의해 일어난다. 도무지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던, 변화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비현실적이라 느껴지던 세상이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변화한다. 그리고 그 변화로 일어난 혜택은 시나퍼의 그늘처럼 모든 사람, 그들을 비웃고 조롱한 사람들은 물론 그들을 적대하고 탄압한 사람들에게까지 고루 나누어진다. 역사에서 보듯 세상의 변화는 늘 그래 왔고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 같은 지금 쉬지 않고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97쪽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대다수의 인민들이 자신의 삶이나 계급적 가치에 걸맞은 정당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은 당장 뒤집히고 말 것이다. 그래서 지배체제는 언제나 제 가치관과 세계관을 인민들에게 주입한다. 그런 주입에도 역사의 한순간에 혁명의 불길이 타오르기도 하지만, 그 짧은 순간을 빼면 인민들은 거의 언제나 지배체제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물들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편에 서는 사람들에게 종종, 아니 기본적으로 적대적이다. 20세기에 횡행한 '레드 콤플렉스'를 가까운 예로 들 수 있다.

 

 

110쪽

 

 나눔은 '불쌍한 사람'과 그 불쌍한 사람을 돕는 '훌륭한 사람'으로 역할을 나누어서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쇼가 아니라, 누구든 제 능력과 개성에 맞추어 정직하게 일하는 것만으로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품위와 자존심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 가려는 노력이다.

 

 

117쪽

 

 사회적 비판은 그 사회에서 가장 악한 세력이 아니라 '그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주요한 세력'에 집중되어야 한다. 그 세력은 두 가지 요건을 갖는다. 가장 악한 세력과 갈등하거나 짐짓 적대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인민들에게 존경심과 설득력을 가질 것, 그러나 그 갈등과 적대의 수준은 지배체제 자체를 뒤흔들 만큼 심각하지 않을 것. 그 두 가지 요건의 절묘한 조화가 바로 사회 변화를 가로막는 것이다. 바리사이인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119쪽

 

 그러나 그 노력은 대개 현실의 근본적 변화가 아니라 현실의 외피를 덜 추악하게 만드는 일에 머문다. 그들은 오히려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를 좇는 모든 노력들을 '비현실적'이라고 냉소한다. 그들은 'NGO', '시민운동', '개혁 운동', 그리고 '실현 가능한 진보', '최소한의 상식의 회복' 따위 간판과 표어를 걸고 활동한다. 

 

 

128쪽

 

 "사람들은 대략 4,000명"이라고 적혔는데 「마태오복음」의 병행 구절에는 "여자들과 어린이들 외에 장정만도 4,000명"(마태 15:38)이라고 적혀 잇다. 정리하면 '사람'은 곧 남자를 말하며 여자와 아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당시 일반적이었다. 이스라엘 남자들의 기도엔 '여자로 태어나지 않게 해 주심'에 대한 감사가 들어 있었으며, 여성들은 스스로 남자보다 열등하며 남자를 보조하기 위한 존재라 생각했다. 아이는 아직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160쪽

 

 부르주아들의 이념과 정체성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개신교과 가톨릭과 비교하여 가장 주요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역시 '돈'이다. 중세 교회는 실제로는 매우 타락했지만 공식적으로는 돈과 물질적인 부를 영혼을 더럽히는 것이라 여겨 경계하고 죄악시했다. 그러나 개신교는 그런 종래의 관점을 완전히 뒤집어 '돈과 물질도 하느님의 축복'이라 주장했다. 루터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종교개혁가라 일컬어지는 칼뱅은 아예 최초의 자본가 정신을 설파한다. "사업으로 얻는 소득이 토지 소유로 얻는소득보다 많아서는 안 되는 이유가 뭔가? 사업가의 이윤이 그 자신의 근면과 성실에서 오는 게 아니라면 대체 어디에서 온단 말인가?" (중략) 아무리 능력 잇고 성실해도 아버지가 천한 신분이면 천하게 살 수밖에 없는 세상에 대항하여 신분이 아니라 능력과 노력이 사람의 삶을 결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건 얼마나 정당한가.

 

 

165쪽

 

 예수가 부자 청년에게 자발적 가난을 권유하는 건 그것이 옳고 훌륭한 길이기 때문에 고통스러워도 감수하라는 게 아니라, 또 부를 죄악시하며 가난이라는 새로운 계율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가진 돈과 재산 때문에 사라져 가는 진정한 자유를, 인생의 참 즐거움과 행복을 늦기 전에 되찾길 권유하는 것이다.

 

 

181쪽

 

 '박정희 군사 파시즘에 신음하던 인민들.' 그러나 그 시절 대개의 인민들은 '신음'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이 다 그런 거지', '사람이 하는 일인데 완벽할 수야 있나' 하며 제 식구들 챙기며 오순도순 살았을뿐이다. 불의한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더 근본적인 힘은 바로 인민들의 비굴과 무기력이다. 사실 제아무리 포악하고 강한 사회체제라고 해도 대다수 인민들이 한꺼번에 거부의사를 표시하면 당장이라도 맥없이 무너지게 되어 있다.

 

 

186쪽

 

 20세기 말 이른바 현실 사회주의 패망 이후 우리는 불가능해 보이는 것에 대해 꿈꾸기를 중단하게 되엇다. 이제 누구도 새로운 세상에 대해 말하려 하지 않으며, 행여 그런 말을 하는 사람에겐 너나없이 '비현실적인 몽상가'라는 딱지를 붙인다. 물론 지나친 이상주의는 현실적 조응력을 잃고 소수 지식인들의 관념놀이가 되어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보다 심각한 것은 이상주의가 사라지는 것이다.

 

 

196쪽

 

 말하자면 정교분리 원칙은 교회가 무작정 정치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교회가 지배세력의 일부가 되거나 야합하지 않는다는 뜻을 가진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정교분리 원칙이라는 말이 본뜻과는 정반대로 불의한 지배에 대한 저항을 반대하는 데 사용되어 왔다. (중략) 군사 파시즘 기간의 한국의 보수 개신교 교회는 그 대표적인 예다.

 

 

223쪽~224쪽

 

 앞서 말했듯 예수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단위로 사고하지 않고 인권을 박탈당한 인민들을 기반으로 사고했다. 바리사이인들의 개혁 운동은 인민들에겐 또 다른 억압의 체제였으며, 민족 해방운동 세력이 이룰 세상 또한 인민들의 처지에선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었다.

 

 

263쪽

 

 엄청난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보다 힘차게 살아 있는 듯 보이나, 그들을 둘러싼 모든 호의와 관계들은 대개 그들이 가진 돈과 권력을 향한 것이다. 그들이 살아 잇는 게 아니라 돈과 권력이 그들의 시체를 쓰고 살아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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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3 - 신들의 마음을 여는 12가지 열쇠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3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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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은 날짜 : 6월 27일 수요일

 

 

 역자의 말은 안 읽고 있다가 그것까지 다 보니 6월 27일이었다. 어릴 적부터 흔히 들어 온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어보자는 마음으로 읽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된 책이었다. 만화책이나 한 권짜리로 읽었던 그리스 로마 신화가 얼마나 많은 분량을 압축한 결과물인지 깨달은 것도 큰 수확이었다. 문제는 거기서 읽었던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대부분 잊어버렸다는 거다. 가끔 인간의, 아니 내 뇌는 너무 제 기능을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뚜렷하게 밝힐 수 있는 건 어린이용으로 편집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던 초등학생 '나'와, 지금 이 책을 읽는 '나'의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그때에는 내가 인간이면서도 인간이란 존재를 하찮게 여겼다. 감히 신의 영역이나 아성에 도전하는 미련하고 비루한 인간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굳이 신의 노여움을 사는 발언이나 행동을 해서 화를 자초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신만이 할 수 있는 부분을 건드릴 적에는 분에 넘치는 짓을 한다고 비웃었다.

 

 어릴 적에도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정말 있다고 믿진 않았다. 당연히 간절한 신앙 같은 것도 없었고. 하지만 왠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는 '그럴듯한' 인물들이었기에,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 숨쉬며 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있음직하게' 만든 인간의 말재주와 이야기 만들어내는 재주에 더 탄복하게 된다. 어쩜 이렇게 체계적으로 캐릭터를 부여했을까, 어떻게 이렇게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풀어낼까. 때로는 어마어마한 분량의 신화를 볼 때마다,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게 아니라면 이 정도로 자세할 수 없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신과 인간을 굳이 구분 짓고, 신은 위대하고 인간은 열등하다는 이분법적 사고와는 깨끗이 이별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가 가진 매력에 탄복하지만, 내용의 주를 이루고 있는 '신에게는 도전하지 말 것'이라는 메시지는 단호히 거부하겠다는 의미다. 그래서일까. 자신을 희생하며 인간에게 유용한 불을 선물한 프로메테우스에 연민을 느꼈다. 발전과 진보가 있기 위해서는 어김없이 피를 흘려야 하는 걸까..! 프로메테우스는 죽지 않기에 온종일 간을 쪼아먹혀도 다음날 다시 간이 자라는 저주를 받았다. 그 피말리는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인간 생활의 진보를 앞당겨주다니. 나같은 범인은 그런 결정을 내리지 못했을 거다.

 

 인간이 불을 쓰게 된 게 꼭 프로메테우스의 은혜라고 볼 수는 없다. 과학적으로 입증되지도 않았고 역사적 서술과도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에게 불을 전해 준 사람으로 흔히 프로메테우스를 예로 드는 정도라면, 그리스 로마 신화가 우리 생활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다. 3권뿐 아니라 전권을 꼭 다 읽어 보아야겠다. 신화 속의 열두 신이 가진 특징을 제법 잘 파악하고 있다는 알량한 우월감은, 이 책을 읽으면서 와장창 깨졌다. 티끌만큼 알고 있으면서 전체를 다 훑은 척 했었던 것 같아 낯이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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