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픽션」을 보게 된 이유 중 8할은 잘 빠진 예고편 때문이었다. 능글맞고 재미있는 캐릭터로 분할 하정우와, 왠지 영화 속 패션 아이템을 완판시켜 버릴 것 같은 세련된 공효진의 조합이 어떨지 궁금했다. 나 역시 적당한 재미와 능글맞은 웃음을 버무려 놓은 로맨틱 코미디를 기대했던 보통의 관객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그 유명한 '하정우의 겨드랑이 털 만남'도, '공효진이 찍은 하정우의 웃긴 사진들'도, '알라스카 뮤직비디오'도 아니었다.

 

 

소설 진도가 안 나가 골몰하는 구주월

 

 

 작가 구주월에게 느낀 동병상련

 

 주인공 구주월은 만년 작가 지망생이다. 유명한 예술가들 곁에는 늘 뮤즈가 있었듯, 그 역시 자신에게 영감을 줄 뮤즈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일까. 무려 2년이나 끌어 온 『팜므파탈』이라는 소설은 지지부진한 채 앞으로 나아가질 못한다. 원하는 바를 써 내지 못하는 것, 아니 애초부터 이야기를 어떻게 끌어나가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주월의 난감함은 주월이 쓰는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려 나타난다. "사랑 한 번 제대로 못해 본 작가들이 꼭 그렇게 어렵게 꼬아놓더라", "혼자 자위하는 거면 어때. 문단에서 소설로 인정받으려고 하니까 문제지", "음.. 딱하네", "아, 병신이야~"

 

 스스로의 문제점과 한계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아마추어 구주월의 자기고백은 어쩐지 애처롭기까지 했다. 차라리 솔직하게 내 만족을 위해 쓴다고 시인하면 될걸, 문단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칠 만한 훌륭한 작품을 쓰며 잠시 방황하는 것처럼 합리화한다는 거다. 그런 모습에 가장 질릴 사람은 아마 본인이겠지. 창작의 고통이란 말은 예술가의 히스테리에 빗대어 희화화되기도 하지만, 경험해 본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심각한 문제다.

 

 나 역시 기자를 가장 간절한 꿈으로 간직한 지 이제 10년이 다 되어 간다. 신문시장이 죽어간다, 앞으로 기자는 필요없다 해도 여전히 취업문은 비좁아서, '뭐가 되었든 글밥 먹는 직업을 갖겠다'까지 타협을 봤다. 그렇다고 마음의 소리까지 저버리진 않았다. 그 동안 살면서 스스로가 가장 자랑스럽고 뿌듯했던 순간과 정말 재미있어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했던 일의 공통분모인 글쓰기만은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것도 쓸 수 없는 때가 꼭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럴 때 느끼는 자괴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자신만만하게 글쟁이가 되겠다고 뻗대놓고는, 쓸 말이 없다고 꼬리를 내릴 때에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지경이다. 나아가 이 길이 내 길이 맞는가 하는 불안을 내포한 질문으로 이어지고, 역시 난 재능이 없구나, 지금까지 헛짓했구나 하는 데까지 다다른다. 쉬이 끊어지지 않는 자책을 이미 수없이 되풀이해 본 나로서는, 글이 써지지 않을 적마다 꽃병을 내던진 주월이 십분 이해가 갔다.

 

 

 

새 연재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출판사 사장과 주월

 

 

 

 찌라시에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랜 시간 붙잡고만 있는 소설로 고민하던 주월은 어느 날 출판사 사장을 만나러 간다. 출판 경기가 언제 호시절 있었냐며 근근이 먹고 산다던 사장은 급기야 <소문과 실토>라는 타블로이드 신문을 만들고 있었다. 자신의 눈엔 한심하기만 한 찌라시를 보며 주월은 "반성 그만하시게요?"라며 출판사 모토 '문명에 대한 반성'을 들먹이며 비꼰다. 사장은 무안해하며 "어떻게 반성만 하고 사니.."라고 말꼬리를 흐릴 뿐이다.

 

 이것도 기사냐, 발로 써도 이보단 잘 쓰겠다 하며 인터넷 매체 기자들을 욕하면서도, 결국 그런 글을 가장 많이 클릭하는 독자들 덕분일까. 이름도 웃긴 <소문과 실토>는 조금씩 성장해 지면까지 더 늘리게 됐다. 낚시터에서 출판사 사장은 주월에게 글 연재를 제안한다. 지금 쓰는 소설이 안 되니 너무 생각 많이 하지 말고 가볍게 쓸 수 있는 작품을 써 보라는 것. 하지만 주월은 냉정하리만치 거절한다. 황색 저널에 글을 쓰게 되면 앞으로 문학지에서 내 글 실어주겠냐, 그런 찌라시에 글 쓰는 거 작가에게는 막장 아니냐 등등 신랄한 비난을 쏟아내며.

 

 주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가 무섭게 울분에 찬 사장의 일갈이 이어졌다. "너 그런 작가들만큼만 성실하게 살아봐! 매일매일 꼬박꼬박 영혼을 울리진 못해도 사람들이 찾을 만한 소설 쓰는 거 그거 쉬운 줄 아니? 이자식이 작가라면 직업적 사명감이 있어야지!" 혼란스러웠다. 이쪽 말도 저쪽 말도 맞았으니. 문단에서 고급과 저급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로맨스 소설을 쓰는 작가들을 일반 소설가들보다 낮게 본다든가 하는 것을 한 예로 들 수 있겠다. 로맨스 소설이 독자들의 사랑에 힘입어 드라마화되었을 때, 드라마 각색을 맡은 작가들이 원작자의 창작품을 최대한 수정하려고 해 팬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했던 적이 있다. 물론 일부 각색은 꼭 필요한 작업이었겠지만, 원작을 부정하려 하거나 지나치게 수정하는 것은 드라마화한 의미를 지워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처럼 문단에서는 어떤 곳에 글을 싣는지, 혹은 어떤 장르의 글을 쓰는지가 그 사람이나 그 사람이 쓰는 글의 품격을 결정한다. 주월은 다만 문단의 생리를 너무도 잘 알아서 제안을 매몰차게 거절했을 테다. 자신을 믿고 계약금까지 준 출판사 사장에게 억하심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적어도 밥벌이를 위해 찌라시에는 글을 쓰지 않겠다는 소신을 지킨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는 알까. 사장도 한때는 그런 찌라시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는 것을. 그 누구도 찌라시를 만들거나, 찌라시에 글을 쓰고 싶어하진 않는다는 것을.

 

 

 

<소문과 실토>에 연재 소설을 싣게 된 주월

 

 

 

게으른 글쟁이 지망생, 돌직구를 맞다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주월은 결국 찌라시에 글을 쓴다. 자신의 뮤즈 희진을 발견해서 그 이야기를 재빨리 풀어내고 싶었는지, 작품을 쓰며 너무 많이 고뇌하고 싶지 않았는지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제안을 수용했다고 해서 그가 <소문과 실토>나 <액모부인>이라는 자신의 소설을 받아들이는 자세까지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희진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소설 쓰기가 어려워지자 다시 꼿꼿한 작가 지망생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대표님이 좋아하는 설정 아닌가? 그래야 신문 1부라도 더 팔 것 아니냐. 그리고 뭐 이런 소설에 작품성까지 생각하냐' 뜬금없이 너무 무리한 설정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사장의 말을 듣고 퉁명스럽게 내뱉은 주월의 답이다.

 

 가벼운 킬링타임용 영화로 생각했던 내게 「러브픽션」은 돌직구를 날렸다. 마치 나에게만 창작의 고통이 찾아온다는 양 유난 떨었던 건 아닌지. 좋은 매체에 좋은 글이 실리는 건지, 좋은 글이 많이 실리다 보니 좋은 매체가 된 건지. 조금 통속적인 글을 쓴다고 해서 하루하루 부지런히 창작에 임하고 있는 수많은 이름 모를 이들을 깔보며 무시한 건 아닌지. 글쓰기에 대한 많은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무엇보다 하루에 몇 글자도 쓰지 않은 채, 장밋빛 미래만 그리고 있던 건 아닌지 되돌아 보게 됐다.

 

예전에는 적어도 잠들기 전 일기라도 꼬박꼬박 썼다. 20대 미디어 고함에 있을 적에는 못해도 1주 1기사는 지켰고. 졸업 준비해야 한다는 핑계로 가장 정성을 쏟아야 할 글쓰기는 모른 척하고 시간만 보낸 것 같다. 누군가에게 "너 하루에 몇 글자나 써? 대가리에 허영만 가득 들어차가지고! 지가 무슨 황석영쯤 되는 줄 알아."라는 말을 듣더라도, 떳떳할 수 있도록 글쓰기를 쉬지 말아야겠다. 아마도 오마이뉴스 기사 작성은 그 첫 걸음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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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tetic 2012-06-30 0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을 읽으며 한가지 궁금한 점은, "찌라시에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셨는데 그 '찌라시'에 일명 '조중동'이 포함된 것인지 궁금하네요...

스트레이트 기사만 생산해내는 월급쟁이 '기자'가 될 것이냐, 아니면 나의 취재가 '데스크'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짤리지 않을 보도 시스템을 갖춘 언론사의 기자가 될 것이냐.... 이런 고민의 흔적이었겠죠? 아마도....

존 스튜어트 밀의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말을 되새기며 살기엔, 배고픔이 생존의 문제로 직면하게 될 즈음이면 과연 또 어떤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지... 글쓴이의 많은 고민이 느껴지는 글이네요.

들꽃 2012-06-30 23:24   좋아요 0 | URL
음ㅋㅋ 사실 영화 리뷰를 쓸 적에는 말 그대로 소문, 진상, 가십에 매달리는 그런 일간지나 인터넷 매체만을 겨냥해서 찌라시라고 한 거였어요. 조중동을 그 안에 넣은 건 아니고요. 다만 데스크에서 정치적 이유로 짤리지 않을 보도시스템을 갖춘(그나마도 완벽하게 갖춘 언론사를 찾기는 힘들겠죠ㅠㅠ) 곳들은 수가 매우 적고, 영세한 언론사라는 점이 마음에 걸리긴 합니다ㅠㅠ

갈수록 자꾸만 타협하는 건 사실입니다. 그래도 저는 말, 마음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고 일단 그 매체들과 어긋나는 부분이 많아서 다른 쪽의 길을 텄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꾸준히 관심 가져주시고 댓글 달아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