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쪽
그런 점에서 우리 시대의 대학은 놀라울 정도로 균질적이다. 일류건 이류건, 서울이건 지방이건, 인문학이건, 자연과학이건, 모든 대학, 모든 학문이 동일한 욕망과 비슷한 능력의 주체들을 생산해낸다. 이들은 전통적인 인텔리들과는 전혀 다른 집단이다. 기존의 인텔리들이 자본과 권력에 '봉사'해왔다면, 이들 신종 지식인들은 '자본, 권력, 지식'의 혼연일체를 구현한다.
33쪽
즉, 노동과 여가, 정치 활동과 가정생활 등 삶의 모든 것이 공부가 되는 것을 포기하도록 만들고, 나아가 "그것에 필요한 관습이나 지식을 가르쳐주는 것을 모조리 학교에 맡겨" 버린다. 결정적으로, 그럼으로써 공부에 대한 모든 생각을 '학교식으로' 재편한다.
39쪽
또 하나는 취미나 레저로서의 공부가 있다. 이건 적당한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이라 패션이나 인테리어와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싫증이 나면 금방 걷어치우게 마련이고, 또 실제로 소일거리 이상의 큰 의미도 없다. 결국 자격증을 따기 위해 돌진하거나 아니면 하릴없이 지적 유행에 영합하거나ㅡ우리 시대의 평생교육이란 이 두 개의 잘못된 욕망을 교묘하게 부추김으로써 돈을 긁어모으는 제도적 장치인 셈이다.
49쪽
서로 다른 연령대의 에너지와 지혜를 주고받을 때 비로소 집합적 기운의 분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어울릴 수 있는 건 단연코 공부밖에 없다.
55쪽
학교식 공부법은 애초부터 독서는 그저 개인적 취미나 교양의 영역이고, 공부는 그것과 달리 구체적이고 실용적 지식을 배우는 것이라는 이분법을 유포시켜왓다.
58쪽
그들에게 지식이란 책을 통해 탐구하는 대상이 아니라 인터넷에 떠다니는 검색 다발일 뿐이다. (중략) 실제로 지금 대학생들은 도무지 질문을 할 줄 모른다. (중략) 질문을 하려면 아주 낯설고 이질적인 세계와 마주쳐야 하는 바, 독서를 하지 않고는 그런 마주침 자체가 불가능하다. 질문이 없으니 책을 읽지 않고, 책을 읽지 않으니 질문이 없고.
67쪽
코뮌이란 기성의 권력과 습속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구성하고자 하는 이들의 자유롭고 창발적인 집합체 혹은 네트워크를 말한다.
100쪽
책이나 영화, 기타 다른 자료를 접한 다음, 그걸 재현해보라고 하면, 그 학생의 지적 수준이 그대로 드러난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거꾸로, 말하기를 훈련하면 보는 것과 아는 것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지식이란 근원적으로 서사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중략)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요즘 학생들은 어떤 대상의 맥락을 짚는 능력이 현저히 부족하다. 대개 즉흥적이고 파편적인 단어와 구절을 나열하는 수준에 그치고 만다.
102쪽
요컨대, 삶에 대한 통찰 혹은 애정이 있어야만 이야기를 엮는 능력이 생기고, 거꾸로 이야기의 맛을 즐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람과 인생에 대한 깊은 시야를 확보하게 된다. (중략) 즉, 책을 읽은 다음 독후감이나 감상문을 쓰게 하는 것보다 먼저 그것을 자기식 어법으로 재현해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113쪽
독서 없는 연애는 앙고 없는 찐빵, 오아시스 없는 사막이다. (중략) 사랑은 인간의 활동 가운데 가장 활발한 생명 작용에 해당한다. 그리고 생명은 안과 밖의 소통 속에서 이루어진다. 즉, 삶과 세계에 대한 통찰력이 내 몸의 내공을 결정짓는다. 따라서 사랑의 패턴은 삶의 패턴과 나란히 함께 간다. 사는 건 엉망인데, 사랑은 멋지게 되는 경우는 없다. 절대! 따라서 삶에 대한 통찰력이 없이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사랑을 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이상형을 만나도 소용없다. 왜? 사랑은 내 존재의 깊은 곳이 울릴 때라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니 외부에서 주입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35쪽
돌이켜 보면, 내가 그 '살벌한 무림'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무엇보다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기에 나는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이 무조건 배우고 또 배웠다. (중략) 중요한 건 지식의 양이 아니다. 자신을 진정 비울 수 있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배움에 있어 가장 불리한 조건은 겸손을 가장한 자기 비하, 혹은 이미 획득한 지식에 갇혀 새로운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직성이다. 그러므로 지식의 양이 많건 적건 '비움'은 배움의 필수적 조건이다. 끊임없이 비울 수 있어야 더 큰 앎이 흘러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139쪽
생각의 지도를 변경하고 삶의 행로를 바꿀 수 있는 글, 그것이 내가 꿈꾸는 글쓰기의 지평이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선 글을 쓰는 나 자신이 끊임없이 바뀌어야 한다. 참으로 놀랍게도 문체는 그 사람과 닮아 있다. 아니, 문체는 얼굴이요 몸이다. (중략) 그러므로 만약 지금과는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면, 운명의 궤적을 변경하고 싶다면, 문체를 바꾸면 된다. 거꾸로, 문체를 바꾸고 싶으면 모름지기 표정을, 몸을, 삶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145쪽
학생들에게 장래 포부가 뭐냐고 물으면 기껏해야 의사, 변호사, 연예인 등 직업을 나열한다. 어떤 수준의 품성을 갖고 싶다거나, 삶의 어떤 의미를 깨우치겠다거나, 혹은 생사의 비밀을 알아내고야 말겠다고 하는 식의 발상은 전혀 없다. (중략) 적어도 공부라고 하면 존재 자체가 특별한 단계에 도달하는 과정이어야 하지 않을까.
153쪽
어떤 이유도, 최소한의 합리성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퍼부어대는 악성댓글을 볼 때마다 나는 늘 궁금했다. 저건 일종의 자해가 아닌가. 저주에 가까운 욕설을 내뱉을 때 그 몸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을 것인가. 누군가를 비난하고 있지만, 그건 사실 고스란히 자기에게 되돌아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말이다. 게다가 저런 식의 댓글을 달려면 최소한 하루의 반은 투자해야 할 텐데, 어떻게 그런 식으로 자기의 일상을 낭비할 수 있을까도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의외로 간단한 건지도 모른다. 그들은 고립되어 있는 것이다. 누군가와 교신하고 싶은데, 세상에 자신을 알리고 싶은데, 그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고립감은 절망을 낳고, 절망은 외부에 대한 적개심을 낳는다. 이 적개심은 한 번 발동하기 시작하면, 끊임없이 자신을 증식해간다. 이보다 더 심각한 자폐 증세가 있을까?
166쪽
에피쿠로스는 쾌락의 철학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쾌락은 "몸의 고통이나 마음의 혼란으로부터의 자유"이다.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에게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잘 사는 것과 잘 죽는 것의 연습은 동일하다"고.
177쪽
공부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부모들이 앞장서서 공부를 해야 하지 않을까? 자신들은 공부를 접었으면서 자식들한테만 공부를 강조하는 건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자식들이 정말 공부를 통해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부모도 자식과 함께 공부를 해야 한다. 오직 학벌을 위해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하게 되면, 그 지식은 결코 지식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 하지만 부모가 공부를 좋아하면, 자식들은 그걸 닮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런 열정이 일단 자식에게 전달되기만 하면, 설령 당장 성적이 처지고 대학에 못 가게 되더라도 언젠가는 스스로 공부의 길을 찾아가게 마련이다.
193쪽
공부하면 이 다음에 훌륭한 사람이 되고, 뭔가를 얻게 될 거라고 말해선 안 된다. 공부하는 그 순간, 공부와 공부 사이에 있다는 것 그것이 공부의 목적이자 이유여야 한다. 고로 공부는 존재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ㅡ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195쪽
요컨대, 공부란 특정한 시공간에 고착되지 않고 끊임없이 다른 존재로 변이되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의 변이를 통해 세상의 질서와 배치를 바꾸는 것, 거기가 바로 공부가 혁명과 조우하는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