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는 지금 나의 춤을 추고 있잖아 - 어느 TV 중독자가 보내는 서툰 위로
이승한 지음, 들개이빨 그림 / 한겨레출판 / 2017년 11월
평점 :
하필 바로 이 책을 다 읽기 하루 전날인 어제, 좋아하고 존경하는 선배와 같이 밥을 먹게 되었다. 선배는 대뜸 올해 미디어업계 뉴스를 꼽는다면 1위는 무엇인 것 같냐고 물었다. 그 다음은? 5위는? 그제야 깨달았다. 아, 정말 나는 잘 모르는구나. 나름대로 관심 있고 공을 들여왔다는 분야에 대해서도 즉답을 하지 못할 만큼.
선배는 이른바 '선진국'의 대단함이 '적재적소의 기록'에서 나온다고 말해주셨다. 최근 100년간 가장 위대한 인물 몇 명, 중요한 사건 몇 가지. 오랫동안 기억하고 함께 숙지해야 할 일과 사람을 성실하게 기록하는 풍토가 '선진국'과 우리나라가 갈리는 지점이었다.
"우리나라가 칭찬에 유독 인색한 탓도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욕하기는 쉽잖아요. 그런데 무언가의 좋은 점을 말하려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죠. 그래서 그런 것 아닐까요? 저도 뭐가 좋다고 쓰는 게 더 어렵더라고요." 선배의 물음에 제대로 답하지 못한 부족함을 애써 희석시키기 위해 꺼낸 말이긴 했지만, 내용만은 진심이었다.
길었지만 쓸데없는 앞머리는 아니었다, 고 생각한다. 이승한 님의 [나는 지금 나의 춤을 추고 있잖아]는 내게 제때, 기억해야 할 만한 것을, 성실하게 담고 있는 책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표지에서도, 머리말에서도 저자는 자신이 위로에 영 서툰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대중문화에 대한 글을 써 온 사람으로서 이 책은 누군가를 이해하고자 했던 자신의 가난한 시도들이 모였다고도 했다. 300쪽이 조금 못 되는 책을 다 읽고 나서, 나는 저자가 얼마나 자기자신의 '공감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렸다.
수많은 조각들로 이루어진 한 인물 혹은 사건을 매번 이 정도로 깊이 있게 바라보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타인에게 대체로 무신경한 여느 사람들로서는 끝내 찾아낼 수 없거나 보고도 깨닫지 못했던 숨은 1cm가 모든 글에 빠짐 없이 등장한다.
엽기 콘셉트와 개그 이미지로 유명하지만 사실은 만만치 않은 실력을 지닌 밴드 노라조가 이미 '제대로 된 곡'을 발표했었다는 것과 윤상은 단순히 아이돌 누구의 프로듀서만으로 호명되기 아까울 정도로 '소리 깎는 장인'이라는 것을 짚는다. 아직 대중에게 '덜' 알려진 이민지에게는 가능성 가득한 말간 얼굴과 박미선에게 부드러운 교통정리와 훅 들어오는 재치라는 무기를 발견한다.
오랜 시간 섬세한 눈으로 바라보지 못했다면 이야기되지 못했을 것들. 마감에 쫓겨 누군가를 들여다보는 데 짧은 시간만 투자했을 뿐이라면, 더더욱 감탄하게 된다. 덜 드러나 있었던 진면목을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파악하는 능력에.
인물이 걸어온 핵심적인 발자취는 놓치지 않고, 참신한 시각으로 어떤 인물이나 사건을 낯설고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간편하고 게으른 '꼬리표 붙이기' 식 글이 넘쳐나는 와중에, 독자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할 만큼의 설득력과 스스로 가꾼 독창적 관점 두 가지를 모두 갖춘 글은 퍽 반갑다.
[나는 지금 나의 춤을 추고 있잖아]에는 애정 어린 시선만 있지는 않다. 부조리와 부당한 차별에는 예리한 문제의식을 던진다. 사람다운 사람으로서의 감수성의 의미를 알게 된 지 이제 10년밖에 되지 않아, 아직도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생각과 언행을 보이는 나는 이 책이 어떤 길잡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흔히 빠지게 되는 착각에서 구해주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보여주는.
김유정의 짝다리에 쏟아진 과도한 비난을 지적한 '불편하디? 젊은 여자라서?', 오로지 피해자성만을 강조해 온 교육과 그로 인한 사회 분위기 탓에 애써 피하고 있는 한국(인)의 인종차별을 꼬집은 '언제까지 무릎만 칠 건가', 혐오자들이 동원하는 전략의 '비논리'를 질타하는 '어차피 너도 나와 다를 바 없잖아?', 타인의 아픔에 공감해 줄 '나'에 도취돼 멋대로 무결함을 판단하는 행태를 비판한 '기대만큼 아파 보이지 않아 실망하셨나요'에서는 약이 되는 쓴소리를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충분히 조명되지 못한 '여성'들에 대한 글이 원고의 절반을 차지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든 없든, 저자의 글을 읽고 나면 미처 보지 못했던 그들의 얼굴이 보였다.
'~주의자'로서의 신념보다 간절함을 원동력으로 삼은 배역을 맡아온 염정아, 스스로의 기준에 도달하지 않으면 거침없이 그건 '잘한 것이 아니'라고 규정하는 매서운 프로 이소라, 모두가 고개 숙이라 하는 상황에서도 정면을 응시하고 제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김부선까지.
TV드라마, 예능, 영화, 대중음악. 한 가지만으로도 책 한 권을 쓸 수 있을 것 같은 방대한 분야를 넘나드는 폭넓은 문화적 배경과 취향에는 또 한 번 혀를 내두르게 된다.
아무리 반짝이는 것이라도 누군가의 눈에 들지 않으면 세상에 그 존재를 드러내보이기도 전에 묻히고 만다. 저자는 특유의 밝은 눈으로, 누군가가 꼭 알아줬으면 하는 나아가 본인조차도 모르고 지나쳤을 그만의 어떤 '매력'과 '의미'를 부지런히 찾아냈다. 그 기록의 총체가 바로 이 책이다.
'한겨레'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로 이미 본 원고가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다시 맞닥뜨릴 때마다 느낌이 달랐다. 아주 조금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빛바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저 '촘촘히 엮인 문장이 빚어낸 단단한 글'만을 느꼈을 뿐이다.
이름을 걸고 글을 쓰는 직업을 스스로 택해 5년을 넘겼음에도 감이 안 되는데 설치는 게 아닌가 하는 괴로움에 시달리는 나는, 이 책에 나온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어 온 사람들의 묵묵함'이 특히 더 마음에 들어왔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게 아마도 [나는 지금 나의 춤을 추고 있잖아]라는 제목이 아닐까.
저마다의 가치를 지닌 사람과 작품을 둘러보게 만들고는, 결국 '지금 나의 춤을 추고 있는 나'를 돌아보게 하는 신기하고 고마운 위로. 나는 나만의 속도가 있기에 그간 걸어온 궤도를 폄하하거나 부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아마 앞으로도 감기처럼 찾아올 불안함과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내진 못하겠지만, 이제는 왠지 조금 덜 흔들리고 덜 주눅 들어도 괜찮을 것만 같다. '나는 지금 나의 춤을 추고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