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 싸우고 살아남다 - 글쓰기로 한계를 극복한 여성 25명의 삶과 철학
장영은 지음 / 민음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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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세게 글써 온 여성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역사가 주목하지 않았던 훌륭한 여성들을 알게 되고, 그들이 멈추지 않고 쓰는 모습을 보면서 상당히 고양되는 기분을 느꼈다. 지금 비록 보잘것없을지라도, 주저하지 말고 쭉 쓰라고 이야기해주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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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나의 춤을 추고 있잖아 - 어느 TV 중독자가 보내는 서툰 위로
이승한 지음, 들개이빨 그림 / 한겨레출판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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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바로 이 책을 다 읽기 하루 전날인 어제, 좋아하고 존경하는 선배와 같이 밥을 먹게 되었다. 선배는 대뜸 올해 미디어업계 뉴스를 꼽는다면 1위는 무엇인 것 같냐고 물었다. 그 다음은? 5위는? 그제야 깨달았다. 아, 정말 나는 잘 모르는구나. 나름대로 관심 있고 공을 들여왔다는 분야에 대해서도 즉답을 하지 못할 만큼.

 

선배는 이른바 '선진국'의 대단함이 '적재적소의 기록'에서 나온다고 말해주셨다. 최근 100년간 가장 위대한 인물 몇 명, 중요한 사건 몇 가지. 오랫동안 기억하고 함께 숙지해야 할 일과 사람을 성실하게 기록하는 풍토가 '선진국'과 우리나라가 갈리는 지점이었다.

 

"우리나라가 칭찬에 유독 인색한 탓도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욕하기는 쉽잖아요. 그런데 무언가의 좋은 점을 말하려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죠. 그래서 그런 것 아닐까요? 저도 뭐가 좋다고 쓰는 게 더 어렵더라고요." 선배의 물음에 제대로 답하지 못한 부족함을 애써 희석시키기 위해 꺼낸 말이긴 했지만, 내용만은 진심이었다.

 

길었지만 쓸데없는 앞머리는 아니었다, 고 생각한다. 이승한 님의 [나는 지금 나의 춤을 추고 있잖아]는 내게 제때, 기억해야 할 만한 것을, 성실하게 담고 있는 책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표지에서도, 머리말에서도 저자는 자신이 위로에 영 서툰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대중문화에 대한 글을 써 온 사람으로서 이 책은 누군가를 이해하고자 했던 자신의 가난한 시도들이 모였다고도 했다. 300쪽이 조금 못 되는 책을 다 읽고 나서, 나는 저자가 얼마나 자기자신의 '공감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렸다.

 

수많은 조각들로 이루어진 한 인물 혹은 사건을 매번 이 정도로 깊이 있게 바라보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타인에게 대체로 무신경한 여느 사람들로서는 끝내 찾아낼 수 없거나 보고도 깨닫지 못했던 숨은 1cm가 모든 글에 빠짐 없이 등장한다.

 

엽기 콘셉트와 개그 이미지로 유명하지만 사실은 만만치 않은 실력을 지닌 밴드 노라조가 이미 '제대로 된 곡'을 발표했었다는 것과 윤상은 단순히 아이돌 누구의 프로듀서만으로 호명되기 아까울 정도로 '소리 깎는 장인'이라는 것을 짚는다. 아직 대중에게 '덜' 알려진 이민지에게는 가능성 가득한 말간 얼굴과 박미선에게 부드러운 교통정리와 훅 들어오는 재치라는 무기를 발견한다.

 

오랜 시간 섬세한 눈으로 바라보지 못했다면 이야기되지 못했을 것들. 마감에 쫓겨 누군가를 들여다보는 데 짧은 시간만 투자했을 뿐이라면, 더더욱 감탄하게 된다. 덜 드러나 있었던 진면목을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파악하는 능력에.

 

인물이 걸어온 핵심적인 발자취는 놓치지 않고, 참신한 시각으로 어떤 인물이나 사건을 낯설고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간편하고 게으른 '꼬리표 붙이기' 식 글이 넘쳐나는 와중에, 독자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할 만큼의 설득력과 스스로 가꾼 독창적 관점 두 가지를 모두 갖춘 글은 퍽 반갑다.

 

[나는 지금 나의 춤을 추고 있잖아]에는 애정 어린 시선만 있지는 않다. 부조리와 부당한 차별에는 예리한 문제의식을 던진다. 사람다운 사람으로서의 감수성의 의미를 알게 된 지 이제 10년밖에 되지 않아, 아직도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생각과 언행을 보이는 나는 이 책이 어떤 길잡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흔히 빠지게 되는 착각에서 구해주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보여주는.

 

김유정의 짝다리에 쏟아진 과도한 비난을 지적한 '불편하디? 젊은 여자라서?', 오로지 피해자성만을 강조해 온 교육과 그로 인한 사회 분위기 탓에 애써 피하고 있는 한국(인)의 인종차별을 꼬집은 '언제까지 무릎만 칠 건가', 혐오자들이 동원하는 전략의 '비논리'를 질타하는 '어차피 너도 나와 다를 바 없잖아?', 타인의 아픔에 공감해 줄 '나'에 도취돼 멋대로 무결함을 판단하는 행태를 비판한 '기대만큼 아파 보이지 않아 실망하셨나요'에서는 약이 되는 쓴소리를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충분히 조명되지 못한 '여성'들에 대한 글이 원고의 절반을 차지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든 없든, 저자의 글을 읽고 나면 미처 보지 못했던 그들의 얼굴이 보였다.

 

'~주의자'로서의 신념보다 간절함을 원동력으로 삼은 배역을 맡아온 염정아, 스스로의 기준에 도달하지 않으면 거침없이 그건 '잘한 것이 아니'라고 규정하는 매서운 프로 이소라, 모두가 고개 숙이라 하는 상황에서도 정면을 응시하고 제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김부선까지.

 

TV드라마, 예능, 영화, 대중음악. 한 가지만으로도 책 한 권을 쓸 수 있을 것 같은 방대한 분야를 넘나드는 폭넓은 문화적 배경과 취향에는 또 한 번 혀를 내두르게 된다.

 

아무리 반짝이는 것이라도 누군가의 눈에 들지 않으면 세상에 그 존재를 드러내보이기도 전에 묻히고 만다. 저자는 특유의 밝은 눈으로, 누군가가 꼭 알아줬으면 하는 나아가 본인조차도 모르고 지나쳤을 그만의 어떤 '매력'과 '의미'를 부지런히 찾아냈다. 그 기록의 총체가 바로 이 책이다.

 

'한겨레'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로 이미 본 원고가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다시 맞닥뜨릴 때마다 느낌이 달랐다. 아주 조금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빛바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저 '촘촘히 엮인 문장이 빚어낸 단단한 글'만을 느꼈을 뿐이다.

 

이름을 걸고 글을 쓰는 직업을 스스로 택해 5년을 넘겼음에도 감이 안 되는데 설치는 게 아닌가 하는 괴로움에 시달리는 나는, 이 책에 나온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어 온 사람들의 묵묵함'이 특히 더 마음에 들어왔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게 아마도 [나는 지금 나의 춤을 추고 있잖아]라는 제목이 아닐까.

 

저마다의 가치를 지닌 사람과 작품을 둘러보게 만들고는, 결국 '지금 나의 춤을 추고 있는 나'를 돌아보게 하는 신기하고 고마운 위로. 나는 나만의 속도가 있기에 그간 걸어온 궤도를 폄하하거나 부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아마 앞으로도 감기처럼 찾아올 불안함과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내진 못하겠지만, 이제는 왠지 조금 덜 흔들리고 덜 주눅 들어도 괜찮을 것만 같다. '나는 지금 나의 춤을 추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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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경영의 원칙 서울대학교 관악초청강연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안철수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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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년 전만 하더라도 안철수 원장(그 위원회의 이름은 너무 길어 잘 기억이 안 난다, 무슨 융합..이었던 것 같은데 편하게 그냥 원장이라 부르겠다)이 이렇게 정치권에서 뜨거운 감자가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박원순 현 시장에게 서울시장직을 양보한 것도 뜻밖의 일이었는데, 그게 바로 '차기 대권 준비하는 것 아니냐'하는 전망으로 나아가게 될 줄이야.

 

 2011년에 나온 이 책은 안철수 원장의 강연, 패널 질문과 토론, 청중과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보면서 만약 1년 뒤인 지금 안철수 원장이 강연을 한다면 사뭇 분위기가 달랐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패널들도 흔히 전문가(그들이 뭐에 전문적인지는 아무도 모를..지도)라 불리는 사람들로 채워졌을 거고, 패널 질문들은 거의 다 대권 도전 여부나 대통령 안철수의 자질을 검증하는 것들만 나왔을 것이다. 강연 내용은 본인이 하는 거니 제처두고라도 말이다. 다행히(?) 이때는 안 원장의 개인사와 그의 가치관, 이룬 일 등을 파고들었기에 신문 정치면을 달아오르게 할 내용이 크게 많지는 않았다. 아, 지금이라면 핫 아이콘인 안철수의 A to Z가 모두 중요하므로 동문 강연회에서 나왔던 발언 하나조차도 대단한 의미가 생길지 모르겠다.

 

 책은 담백하고 재미있었다. 간신히 백 쪽을 넘긴 얇은 책이라 안철수란 사람을 알아차리기에는 너무 빈약한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평소 가치관과 됨됨이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풍성하기에 그런 오해는 접어둬도 좋다. 무릎팍도사에 나왔던 내용들이 조금 더 구체적이고 조금 더 담담하게 소개되어 있었다. 정해진 시간에 시청자의 이목을 끌어야 하는 TV 프로그램의 특성상 더 눈길이 가는 내용만 선택돼서 나온 방송보다는 솔직히 덜 재미있었다. 그러나 결코 지루하지는 않았다. 안철수가 살아온 삶이 곧 신선하다 못해 파격적인 콘텐츠였기 때문이다.

 

 병의 원인이나 치료 방법을 밝히는 데 관심이 있었던 그는 강연에서 대학시절에서부터 하루에 3시간만 자고 바이러스 백신을 만들었던 시간들, 경영자로서 첫 발을 내딛고 안랩을 키워간 시절을 두루두루 훑었다. 의사, 프로그래머, 경영자, 교수 입장에서 그가 경험했던 것과 거기서 얻은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했다. 평범한 사람이다 못해 게으르고 의지 박약인 나로서는 신세계와도 같은 얘기가 펼쳐져 있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지 안될지를 먼저 생각하는 자세도 인상적이었다. 사회에 좋은 영향을 주고 싶다는 생각은 나도 늘 하고 있지만 여전히 어렴풋한 상태인데,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여주는 걸 보고 감명받았다.

 

 책임감이 강한 자기 성격을 살려서 어느 정도 강제성을 부여해 공부도 하고, 사람들이 모르던 것들을 알려주는 역할도 자처하고. 예전 같았으면 스스로를 책임감 많은 사람으로 정의했겠지만, 이제 나 자신을 너무나 잘 알아서일까 쉽게 그렇게 말 못하겠다. 욕심만 많고 실천으로 옮기지 않아서 이상 속의 나와 현실의 나를 계속 저울질하며 괴로워만 했을 거다. 안철수에 비판적인 이들은 듣기 좋은 소리를 다 옮겨 놓은 것에 불과하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마음 먹었던 것을 행동으로 보여줬다는 것만으로 안철수가 대단하게 느껴진다. 물론 그 때문에 성인(聖人) 컴플렉스가 그를 뒤따라다니는지도 모른다.

 

 진로 고민, 특히 앞으로 어떤 일을 어떻게 하며 살지 궁리할 때에 이 책을 봐서 그런지 마음에 콕콕 박히는 구절이 많았다. 무언가 하려고 결정을 내릴 때 적용하는 안철수의 3원칙은 제때에 딱 도움이 됐다. 과거는 잊자, 주위 사람들의 평가에 연연하지 말자, 미래의 결과에 미리 욕심내지 말자. 두 번째 원칙이 내게 꼭 필요한 말이었다. 남들 시선을 의식하다 못해 거의 자유롭지 못한 비겁한 나에게 적절한 조언이었다. 결국 내가 하고 싶고, 내가 뭘 원하는지 '마음의 소리'에 집중하라는 것. 어제 아주 중대한 결정을 할 일이 있었는데 그때 두 번째 원칙을 생각했다. 아직 시작도 안 해봐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잘한 것 같다. 당당하게 나 이 일이 좋아서 하고 싶어요, 라고 밝힐 수 있어서 좋았다.

 

 좋은 답을 구하기보다 좋은 질문을 하는 사람이 현대의 인재라고 하는 점도 항상 걱정하던 부분을 들킨 것 같아서 뜨끔했다. 기자를 꿈꾸는 내게 '좋은 질문을 못하는 점'은 항상 스트레스였다. 좋은 질문, 아니 아예 질문을 할 시도도 안 하는 게 불만스러워서 왜 그럴까 생각해 보았다. 1) 아는 것이 없다=전문성 부족 2) 평소 의문을 잘 가지지 않고 주로 수용하는 입장이기 때문 = 무딘 시각. 안철수 역시 좋은 질문을 하기 위한 답으로 한 분야에 전문성이 있어야 하고, 다른 분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상식과 포용력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난 두 가지 다 안 돼 있군. 이런 사람이 기자가 되는 건 재앙이겠지. 습관적으로라도 질문을 해 버릇해야겠다. 사람을 당황시키거나 피해를 주는 것만 아니라면 사소한 것도 질문거리가 될 수 있을 테니.

 

 무릎팍도사에서든, 안철수의 생각에서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든, 안철수란 사람이 신선했던 것은 '상식적인 생각, 보다 사람을 위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자기 생각을 또렷이 말했기 때문이 아닐까. 어떻게 보면 너무 교과서적이어서 심심할 수도 있을 만큼 그의 말과 생각과 행동은 바르고 곧았다. 안철수가 가진 기업관도 마음에 들었다.

 

 

 왜 무리를 지어 일하는가?  사람이 모여서 일을 하는 이유는 한 사람이 할 수 없는 크고 의미 있는 일을 이루기 위해서 여럿이 모여서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 기업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존재다. 기업의 목적은 수익을 내는 것인가? 수익이라는 것은 기업 활동을 열심히 한 결과다.

 

 반기업 정서를 가진 내게 우리나라에도 이런 기업인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책이라 좋았다. 묻었던 희망을 다시 품게 해 주었다. 아무도 이런 기업관을 내세우지 않았기에 '무슨 헛소리를 하냐'며 안 좋은 소리 들을 수도 있지만, 점차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늘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시작점이 된다고 본다. 모든 혁신은 처음엔 비웃음당하지 않았던가. 지금은 기업가가 아닌 유력 대선 후보로, 교수로 남아 있는 사람이지만 앞으로 기업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자극을 선사했다는 것만으로도 유의미하다. 요즘 우리 사회에 제일 부족한 게 희망인 것 같은데, 어떤 방식으로든 희망을 갖게 해 주는 사람이라 신경이 쓰인다. 기대하고 있는 이들을 실망시키지 않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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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을 반납한다 - 위로받는 청춘을 거부한다
안치용.최유정 엮고 씀 / 인물과사상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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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읽은 날짜 : 7월 어느 날

 

 

 하루만에 다 읽었다. 시원하고 조용한 1층 열람실에서 뭐에 홀린 사람마냥 죽죽 훑어내려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야기꾼의 이야기가 그냥 '~다'로 끝나는 서술형 문체보다 좋은 이유는 그만큼 쏙쏙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 책 역시 인터뷰집을 엮은 거여서 95% 정도가 구어체였고, 그래서 더더욱 빨리 흡수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이 책의 가장 반대편에 있는 책은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아닐까. 도발적인 책이다. 실은 그다지 도발적이거나 발칙하지 않은데, 사회에서 말하는 나약하고 지쳐 있는 청춘의 범위에서 벗어났다는 것만으로 저항적인 이미지를 풍긴다. 서문에서 저자가 오디션에 나오는 출연자들이 너무나 착하기만 하다고 딴죽을 거는 것만 봐도, 이 책이 앞으로 어떻게 나갈지 예상할 수 있다. 한 번 읽어내린 의도는 첫 인터뷰이의 이야기 제목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안철수의 위로는 필요 없어'라고. 주제의식이 명확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매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구성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20대의 이야기여서 좀 더 친근하게 느꼈던 것도 있고.

 

 10명의 20대들을 보면서 느꼈던 건 모두 다 진하고 선명한 '자기 자신의 색'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표현력이 부족해 색色이라고 표현했을 뿐이지 낡은 색깔론에 나오는 그런 색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사람들이 보통 결핍된 것을 욕망하듯, 나 역시 아직 뚜렷한 내 정체성을 가지지 못한 것 같아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앞으로 어떻게 살 지에 대해 어느 정도 갈피를 잡은 것 같아서, 거기까지 다다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지 생각하니 대단해 보였다. 나는 그저 일개 독자로서 결과(실은 대부분 20대이기에 지금 이룬 성과들이 인생에서 만든 결과 전부인 것도 아니다)만 보고 판단할 뿐이지만, 스스로 원하는 길을 찾기까지 얼마나 헤맸을까. 나도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이리 저리 휘젓고 다니고 안팎의 문제로 흔들리기도 했다. 그런데도 나를 찾는 일이 이다지도 멀어 보인다는 건, 내 방황이 그다지 유익하지 못했기 때문일 테다.

 

 책에 나온 사람들은 개성 강한 청춘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물론 각자가 가진 개성이 서로 매우 달라 캐릭터를 비교하며 볼 수 있었다. 자립을 꿈꾸는 10대 시위꾼 공기, 종북 세력의 스타 드러머 권용만, 나는야 잡초 오지라퍼 김도원, 장애인을 배제하는 세상에 멘션을 날리는 박현진, 꼰대성을 극복하는 방랑 좌파 조병훈, 딜도 파는 모태 페미니스트 랭, 게으른 전복을 꿈꾸는 자유주의자 피코테라, 국보법이 낳은 젊은 투사 박정근, 직업 유랑기 거친 고졸 청년 김슷캇, 움직이고 실천하는 강남 좌파 프리스티까지. 이름 앞에 붙은 수식어만 봐도 보통 사람들은 아니란 느낌이 딱 왔다.

 

 첫 인터뷰이는 10대 시위꾼 공기였다. 학교를 그만두고 일제고사 반대모임 NO에서 활동하고, 공부모임을 꾸려 자발적으로 세미나를 여는 적극적인 소녀였다(93년생이니 올해 성인이 됐다). 우습지만 나는 그동안 스스로를 나이에 비해 조숙한 편이라고 믿었었다. 10대 청소년 시기에 더더욱. 그때만 해도 남들 다 관심 가지는 외모나 남자친구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드물게 신문 보는 집안이어서 다른 친구들보다 사회 문제에 더 밝고, 책을 많이 읽어 아는 것도 많다고 생각했다. '너희와 나는 달라' 이런 생각으로 우월감에 빠졌었던 것 같다. 그때 충격을 주었던 책이 『너, 행복하니』였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입시 공부에만 매달리지 않고 진짜 하고 싶은 걸 하는 또래 얘기를 담고 있었다. 그때 망치로 머리를 두들겨 맞은 듯 정신이 퍼뜩 들었다. 결국 나도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모범생의 길로 의심없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까닭이다. 공기는 그때의 충격을 다시 느끼게끔 해 주었다. 단순히 세상에 불만만 토로하는 게 아니라, 부족한 점을 메우기 위해 공부도 하고 남들은 넘기는 문제를 재고하는 똑똑한 소녀였다. 청춘들의 아픔을 어루만졌던 청춘콘서트에서 희망 서포터스를 무급으로 '착취'했다는 점을 비판할 때는 괜히 아픈 곳을 찔린 기분이었다. 나 역시 '좋은 경험'을 할 수 있다면 무보수 노동력을 제공하려 했던 시절이 있었으므로.

 

 비마이너라는 장애인 시위 전문 매체를 만들어 기사를 썼던 박현진 씨의 이야기도 한 글자 한 글자 놓칠세라 열심히 읽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쓰는 '병신'이란 말이 장애인에게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지는지 단 1초도 고민 안했다니 낯이 뜨거웠다. 글쓴이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을 지라도' 결과적으로 누군가 그 발언에 피해입고 상처받는다면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새삼스레 지나치게 격정적인 내 언어생활을 반성하게 됐다. 다른 장애인들에 비해서는 장애가 약한 편이라고는 했지만, 없는 것을 만들고 장애학을 공부하며 발로 뛰며 기사도 쓰는 모습에 반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의지와 실행력의 차이였다. 아, 나는 그동안 얼마나 무수한 핑계를 대며 해야 할 일을 무시해 왔을까. 기자를 준비하는 내게 특히 귀감이 됐던 인터뷰다.

 

 한때 트위터를 난리나게 만들었던 투사 박정근의 이야기가 여기 실린 건 당연한 거였을까. 트위터를 안해서 몰랐는데 비로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았다. 김정일 만세라는 노래는 버젓이 불리는데, 비판과 조롱의 의미로 트위터에 북한과 김정일을 언급하는 건 왜 안 되느냐는 물음에 누구 속 시원히 대답할 사람이 있을까. 국보법을 아예 없애야 하는지는 아직 판단이 서지 않았지만, 현재의 국보법이 무고한 피해자를 양산한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겠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법이 있어선 안 되지 않을까. 국보법은 구시대의 유물 치고도 한참 유물인 듯하다.

 

 한양대에서 16년이나 살아남았던 엿 같은 강좌 폐강운동을 벌인 랭의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보면서 가장 열 받았던 편이 랭의 '성의 이해 폐강 운동'이었는데, 어째서 그런 과학적이지도 않고 비뚤어진 성 관념을 키울 수 있는 위험한 강좌를 그대로 두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여성 수강생은 생각도 안 하고 더러운 성 농담을 입에 담으며 낄낄거리는 거야 지금도 횡행하는 일이지만, '에이즈는 많이 해서 걸리는 거다', '성폭력은 남자의 고유한 본능이다' 따위의 헛소리를 하는 작자를 그냥 놔뒀다니... '교양'을 배우는 자리에서 무슨 망발인지. 불의을 참지 않고 직접 행동에 나선 랭은 진정한 투사였다. 나라면 과연 어떻게 대응했을까. 한숨만 나온다.

 

 대필작가는 고용 형태가 불안정해서 유령노동자로 취급받아 제대로 된 대우를 받거나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는 사실은 김슷캇이 들려줬다. 문득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라는 책 제목이 떠올랐다. 대필작가가 있다는 것쯤은 알았지만, 그게 아르바이트 자리로 나올 만큼 수요가 많은지-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는 자리인 줄은 몰랐다. 글은 단순히 글자의 조합이 아니라 한 사람의 정체성과 생각이 담긴 고유한 저작물이라고 생각해서인지, 돈으로 글을 사려는 이들이 한심해 보이기까지 했다. 현실은 때로 드라마보다 드라마틱하다더니, 그 말이 꼭 맞다. 상식적이지 않다고 생각되는 일들이 너무도 빈번히 일어난다. 나 또한 이 책을 안 읽었다면 몰랐을 테지.

 

 예전에 '작은 책'이라는 잡지에 너무 어둡고 우중충하고 미래가 안 보이는 얘기만 실려 있어서, 조금 밝은 이야기도 봤으면 좋겠다고 독자 의견을 보낸 적이 있다. 이제는 조금 알겠다. 현실이 실제로 너무 팍팍해서 좋은 면만 편집해서 보여주기 어렵다는 걸. 불편하고 얼굴이 찌푸려지더라도 현실을 자주 마주할 이유는 이걸로 충분하다. 이상적인 동화 속 세상에만 노출돼 있다가는, 놓치는 게 가득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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