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쪽

 

 오늘 예수가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는 가장 주요한 원인은 교회가 인간 예수의 삶을 교리 속에 묻어 버렸기 때문인데, 반말하는 예수는 교회의 그런 의도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24쪽

 

 길릴래아에서 온 메시아. 그는 메시아이되 영광의 왕으로서의 메시아가 아니라 인민들의 고통스런 삶을 함께하는 메시아로서 예고된 것이다.

 

 

 

32쪽

 

 예수는 그런 하느님상을 뒤집는다. 앞으로 거듭 언급하겠지만, 예수에게 하느님은 권위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다정한 엄마와 같은 존재다. 예수는 '하느님은 우리에게 명령하고 누르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이해하며 우리와 대화하려 하는 분'이라고 가르친다. 예수의 가르침에서 하느님은 행여 진노할가 두려워 눈치를 살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마주 보며 대화하고 위로받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였다. 예수의 가르침에서 하느님은 비로소 율법의 굴레에서 천천히 걸어나와 인민들과 만났다.

 

 

40쪽

 

예수가 병자를 고치는 일은 단지 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이 아니라 그의 잃어버린 인권을 회복시키고 죽음 같던 삶을 회복시키는 일이다.

 

 

47쪽

 

 오늘날 '바리사이인'은 기독교나 성서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서조차 '위선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즉 바리사이인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히려 이스라엘 사회를 통틀어 가장 양식 잇는 사람들이었다. (중략) 바리사이인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전통이 완전히 결딴나려는 그런 상황 속에서 분연히 일어난 사람들이다. '바리사이'라는 말은 '분리하다'라는 뜻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모든 이방 문화로부터 이스라엘을 분리시켜 그 정체성

 

 

 

49쪽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죄인'은 누구인가? (중략) 그것은 바로 '경제적 경쟁력'이다. 경제적 경쟁력을 갖지 못한 사람은 곧 죄인이다. 그들은 2,000년 전 팔레스타인의 죄인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으로서 품위와 존경을 유지할 수 없으며 인생과 미래에 대한 꿈도 가질 수 없다. 2,000년 전 죄인들이 '율법을 지켜야만 제대로 된 사람'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듯, 그들 또한 '경쟁력이 있어야 제대로 된 사람'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런 현실에 체념한다.

 

 

53쪽

 

 예수는 그 가운데에서도 여성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드러낸다. 여성들은 토라를 공부하는 게 금지되어 있었으며 토라를 모르는 그들은 온전한 인격체로 여겨지지 않았다.

 

 

56쪽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생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생기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것은 안식일 논쟁을 넘어 율법 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반박이다. 예수는 말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사람을 괴롭히고 옥죄기 위해 율법을 준 게 아니라 사람을 더 사람답게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해 율법을 준 것이다. 사람을 괴롭히고 옥죄는 율법은 더 이상 하느님의 율법이 아니다.'

 

 

59쪽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무리 천하고 막돼 먹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품위 있게 살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루에도 몇 번씩 악다구니를 쓰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품위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중략) 사람은 품위 있는 사람과 품위 없는 사람으로 나뉘는 게 아니라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과 유지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나뉘는 것이다.

 

 

61쪽

 

 물론 운동이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려면 그런 외형적 성장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운동의 외형적 성장은 두 가지 위험을 수반한다. 하나는 외형적 성장과 운동의 정체성의 훼손이 비례하는 경향이다. 또 하나는 운동의 외형적 성장은 기존의 사회체제에 포섭되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66쪽

 

 평화란 '온 세상이 잃어버린 조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억압과 착취와 불평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유지되는 조용하고 온순한 상태는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악랄한 형태의 폭력이다. (중략) 그래서 때론 평화를 위한 노력이야말로 때론 가장 소란스럽고 가장 사나울 수 있다.

 

 

73쪽

 

 예수는 늘 비유로 가르친다. 당시 팔레스타인 인민들이 대부분 문맹이거나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에서 비유는 매우 좋은 강의법이었다. (중략) 예수의 비유는 인민들의 일상 가운데서도 여성의 일상에 더욱 닿아 있다. 예수의 비유는 유식한 사람과 무식한 사람, '제대로 된 인간'(남성)과 '모자라는 인간'(여성)이라는 사회적 위계를 전복한다.

 

 

80쪽

 

 변화는 오히려 비현실적인 꿈을 꾼다며 비웃음과 조롱을 받는 사람들,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끈기 있는 노력에 의해 일어난다. 도무지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던, 변화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비현실적이라 느껴지던 세상이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변화한다. 그리고 그 변화로 일어난 혜택은 시나퍼의 그늘처럼 모든 사람, 그들을 비웃고 조롱한 사람들은 물론 그들을 적대하고 탄압한 사람들에게까지 고루 나누어진다. 역사에서 보듯 세상의 변화는 늘 그래 왔고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 같은 지금 쉬지 않고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97쪽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대다수의 인민들이 자신의 삶이나 계급적 가치에 걸맞은 정당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은 당장 뒤집히고 말 것이다. 그래서 지배체제는 언제나 제 가치관과 세계관을 인민들에게 주입한다. 그런 주입에도 역사의 한순간에 혁명의 불길이 타오르기도 하지만, 그 짧은 순간을 빼면 인민들은 거의 언제나 지배체제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물들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편에 서는 사람들에게 종종, 아니 기본적으로 적대적이다. 20세기에 횡행한 '레드 콤플렉스'를 가까운 예로 들 수 있다.

 

 

110쪽

 

 나눔은 '불쌍한 사람'과 그 불쌍한 사람을 돕는 '훌륭한 사람'으로 역할을 나누어서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쇼가 아니라, 누구든 제 능력과 개성에 맞추어 정직하게 일하는 것만으로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품위와 자존심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 가려는 노력이다.

 

 

117쪽

 

 사회적 비판은 그 사회에서 가장 악한 세력이 아니라 '그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주요한 세력'에 집중되어야 한다. 그 세력은 두 가지 요건을 갖는다. 가장 악한 세력과 갈등하거나 짐짓 적대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인민들에게 존경심과 설득력을 가질 것, 그러나 그 갈등과 적대의 수준은 지배체제 자체를 뒤흔들 만큼 심각하지 않을 것. 그 두 가지 요건의 절묘한 조화가 바로 사회 변화를 가로막는 것이다. 바리사이인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119쪽

 

 그러나 그 노력은 대개 현실의 근본적 변화가 아니라 현실의 외피를 덜 추악하게 만드는 일에 머문다. 그들은 오히려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를 좇는 모든 노력들을 '비현실적'이라고 냉소한다. 그들은 'NGO', '시민운동', '개혁 운동', 그리고 '실현 가능한 진보', '최소한의 상식의 회복' 따위 간판과 표어를 걸고 활동한다. 

 

 

128쪽

 

 "사람들은 대략 4,000명"이라고 적혔는데 「마태오복음」의 병행 구절에는 "여자들과 어린이들 외에 장정만도 4,000명"(마태 15:38)이라고 적혀 잇다. 정리하면 '사람'은 곧 남자를 말하며 여자와 아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당시 일반적이었다. 이스라엘 남자들의 기도엔 '여자로 태어나지 않게 해 주심'에 대한 감사가 들어 있었으며, 여성들은 스스로 남자보다 열등하며 남자를 보조하기 위한 존재라 생각했다. 아이는 아직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160쪽

 

 부르주아들의 이념과 정체성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개신교과 가톨릭과 비교하여 가장 주요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역시 '돈'이다. 중세 교회는 실제로는 매우 타락했지만 공식적으로는 돈과 물질적인 부를 영혼을 더럽히는 것이라 여겨 경계하고 죄악시했다. 그러나 개신교는 그런 종래의 관점을 완전히 뒤집어 '돈과 물질도 하느님의 축복'이라 주장했다. 루터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종교개혁가라 일컬어지는 칼뱅은 아예 최초의 자본가 정신을 설파한다. "사업으로 얻는 소득이 토지 소유로 얻는소득보다 많아서는 안 되는 이유가 뭔가? 사업가의 이윤이 그 자신의 근면과 성실에서 오는 게 아니라면 대체 어디에서 온단 말인가?" (중략) 아무리 능력 잇고 성실해도 아버지가 천한 신분이면 천하게 살 수밖에 없는 세상에 대항하여 신분이 아니라 능력과 노력이 사람의 삶을 결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건 얼마나 정당한가.

 

 

165쪽

 

 예수가 부자 청년에게 자발적 가난을 권유하는 건 그것이 옳고 훌륭한 길이기 때문에 고통스러워도 감수하라는 게 아니라, 또 부를 죄악시하며 가난이라는 새로운 계율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가진 돈과 재산 때문에 사라져 가는 진정한 자유를, 인생의 참 즐거움과 행복을 늦기 전에 되찾길 권유하는 것이다.

 

 

181쪽

 

 '박정희 군사 파시즘에 신음하던 인민들.' 그러나 그 시절 대개의 인민들은 '신음'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이 다 그런 거지', '사람이 하는 일인데 완벽할 수야 있나' 하며 제 식구들 챙기며 오순도순 살았을뿐이다. 불의한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더 근본적인 힘은 바로 인민들의 비굴과 무기력이다. 사실 제아무리 포악하고 강한 사회체제라고 해도 대다수 인민들이 한꺼번에 거부의사를 표시하면 당장이라도 맥없이 무너지게 되어 있다.

 

 

186쪽

 

 20세기 말 이른바 현실 사회주의 패망 이후 우리는 불가능해 보이는 것에 대해 꿈꾸기를 중단하게 되엇다. 이제 누구도 새로운 세상에 대해 말하려 하지 않으며, 행여 그런 말을 하는 사람에겐 너나없이 '비현실적인 몽상가'라는 딱지를 붙인다. 물론 지나친 이상주의는 현실적 조응력을 잃고 소수 지식인들의 관념놀이가 되어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보다 심각한 것은 이상주의가 사라지는 것이다.

 

 

196쪽

 

 말하자면 정교분리 원칙은 교회가 무작정 정치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교회가 지배세력의 일부가 되거나 야합하지 않는다는 뜻을 가진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정교분리 원칙이라는 말이 본뜻과는 정반대로 불의한 지배에 대한 저항을 반대하는 데 사용되어 왔다. (중략) 군사 파시즘 기간의 한국의 보수 개신교 교회는 그 대표적인 예다.

 

 

223쪽~224쪽

 

 앞서 말했듯 예수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단위로 사고하지 않고 인권을 박탈당한 인민들을 기반으로 사고했다. 바리사이인들의 개혁 운동은 인민들에겐 또 다른 억압의 체제였으며, 민족 해방운동 세력이 이룰 세상 또한 인민들의 처지에선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었다.

 

 

263쪽

 

 엄청난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보다 힘차게 살아 있는 듯 보이나, 그들을 둘러싼 모든 호의와 관계들은 대개 그들이 가진 돈과 권력을 향한 것이다. 그들이 살아 잇는 게 아니라 돈과 권력이 그들의 시체를 쓰고 살아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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