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 읽은 날짜 : 2012년 7월 25일 수요일
13쪽
시인에게 바람을 맞던 날, 나는 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나는 시인이 나를 편안하고 유쾌하게 만날 수 있을 때 나오기를 원한다. 나는 시인이 약속 때문에 억지로 나와서 내 앞에 앉아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건 껍데기와 앉아 있는 것이니가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제로 시인과의 만남은 이루어졌다. 물론 그날의 만남은 아주 행복했다. 시인은 정말 나와 만나고 싶을 때 나왔기 때문이다.
30쪽
유아는 자신에게 쾌락을 제공하는 젖꼭지가 이제는 금지되었다고 느끼게 된다. 이 경우 젖꼭지는 아이의 쾌락을 충족시켜주는 단순한 대상을 넘어선다. 한때 쾌락을 주었던 젖꼭지가 금지되자마자, 이것은 유아에게 욕망 대상이 된다. 당연히 이 순간 유아는 욕망주체로 탄생한다. (중략) 우리는 금지된 것만을 욕망한다. (중략) 현재 작동하는 우리의 욕망은 모두 과거 금지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라캉이 인간에 대해 내린 결론이다.
40쪽
그렇지만 여기서 우리는 인문학의 정신과 그 힘이 어디에 있는지 직감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솔직함과 정직함이다. 자신의 상처나 약점을 솔직하게 토로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고칠 수가 없다. 상처를 냉정하게 진단하지 않는다면, 치료의 전망도 없을 것이다.
41쪽
진정한 인문학자는 일체의 허영과 가식을 걷어내고 인간과 사회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아이와 같은 눈을 가지고 잇기 때문이다.
55쪽
어떻게 해야 이 네모난 얼음이 둥근 그릇과 소통할 수 있겠는가? 이 얼음이 네모남이란 고착된 자의식을 버려야만, 그래서 그릇의 둥긂을 수용할 수 있을 대에만 소통은 가능할 것이다. (중략) '얼음'과 '물'의 비유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얼음'과 '물'이 상이한 두 가지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실체substance가 가지는 두 양태mode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중략) 결국 치열한 자기 수양에 의해 우리는 성인도 될 수 있고, 아니면 평범한 사람으로 남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67~68쪽
혜능은 시를 통해서 신수가 강박관념에 빠져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혜능에 따르면 신수는 왜 마음을 닦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저 이전의 부처들과 선배 스님들이 마음을 닦았기 때문에 자신도 닦을 뿐이라는 식이다. 다시 말해 신수의 생각에는 도대체 마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숙고가 빠져 있다는 것이다.
76쪽
만들어진 습관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변화가 지나가버린 것이라면, 습관은 그것을 낳은 변화를 넘어서 존속하는 것이다. 게다가 습관은 그것이 습관인 한에서 그리고 그 본질 자체에 의해 그것을 낳는 변화에만 관계될 뿐이라고 했을 대, 그것은 더 이상 그런 변화가 존재하지 않아도 존속하는 것이다. (중략) 바로 이것에 의해 습관이냐 아니냐가 가려진다. 습관은 따라서 단지 어떤 상태일 뿐만 아니라 어떤 경향이자 어떤 능력이기도 하다. -『습관에 대하여』
83쪽
[우리는] 가까이 '손안에 있는' 존재자를 '배려함'에서 사용 불가능한 것으로, [다시 말해]특정한 용도로 사용하기에는 부적절한 것으로 만나게 될 수 있다. 이 경우 작업 도구는 파손된 것으로 판명되고 재료는 부적합한 것으로 드러난다. 도구는 여기에서도 어쨌거나 손안에 있기는 하다. (중략) 이런 사용 불가능성의 발견에서 도구는 마침내 우리 '눈에 띄게' 되는 것이다. - 『존재와 시간』
84~85쪽
결국 하이데거에게 있어 '배려함'이 '특별하게 의식하지 않고 어떤 것과 관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눈에 띔'은 '어떤 것과의 친숙했던 관계가 좌절되어 어떤 것을 의식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중략) 하이데거는 오직 '손안에 있지 않은' 예외적인 경우, 즉 특이한 사건이 발생한 경우에만 우리의 생각, 즉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눈에 띔'의 작용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중략) 바로 낯섦이 찾아오는 바로 그 순간이 우리의 생각이 깨어나 활동하기 시작하는 시점이라는 것이다.
96쪽
광학은 무엇보다도 빛, 그리고 그것을 느끼는 눈에 대한 사유라고 할 수 있다. 광학이 흥미로운 이유는 이 학문이 우리의 일상적 경험을 근본적으로 낯설게 만들면서 출현했기 때문이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붉은 장미꽃을 보고, 이 꽃은 붉은색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마치 그 장미꽃이 붉은색을 성분으로 가지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광학은 전혀 다른 사실을 알려준다. 꽃이 붉게 보이는 이유는 그 꽃이 태양빛 중 붉은색을 띠는 파장대의 빛만을 반사하고, 그 빛을 우리 눈이 감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 꽃은 붉은색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붉은색을 튕겨내는 셈이다.
104쪽
욕쟁이 할머니의 식당에서 느끼기 쉬운 불쾌감이나 거부감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자신과 대화하는 사람이 어떤 삶의 문맥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는지 섬세하게 읽어내야 한다. 자신의 문맥에 따라 상대방의 이야기를 재단하는 순간, 오해와 갈등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112쪽
가장 두려운 악인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 모두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산 사람에게 아직 죽음이 오지 않았고, 죽은 사람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121쪽
이처럼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자유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자유가 없다면 책임도 있을 수 없다.
123쪽
어떤 행위가 사회적 통념에 맞느냐 그르냐가 쟁점이 아니라, 행위자가 자율적인 선택을 했느냐 타율적 선택을 했느냐가 쟁점이기 때문이다.
127쪽
정확히 말해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긍정했다가는 살아남기도 힘든 사회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중략) 한마디로 남자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남성들은 여성을 타자로 경험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거나 숨기고 있는 여성에게서 어떻게 낯섦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내 생각과 욕망에 상대방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때에만 그는 나에게 타자로 드러날 수 있다.
131쪽
어머니나 아이에게 남은 유일한 관계는 책임이란 관계다. 이 관계를 통해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를 타자로 긍정하면서 그에 부단히 반응할 수 있고, 아이도 자신의 어머니를 타자로 긍정하면서 그에 반응할 수 있다. 완벽한 일치도 아니고 완벽한 분리도 아닌 관계. 이것이 바로 레비나스가 생각했던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다.
142쪽
자공이 물었다. "평생 동안 실천할 만한 한 마디 말이 있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바로 서다! 자기가 바라지 않는 일은 남에게 행하지 말아야 한다." -『논어』「위령공」
149쪽
맹자와 주희의 윤리적 감수성이 인간의 본성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정약용의 그것은 바로 위기에 빠진 어린아이에 가 있었던 셈이다. 다시 말해 우리 마음에 '측은지심'이 생겼을 때 주희는 그것을 발생시킨 '본성'이라는 내적 원인으로 자신의 사유를 진행시켰던 반면, 정약용은 그 어린아이를 구해야 한다는 '실천'이라는 외적 방향으로 자신의 사유를 진행시킨 것이다.
154쪽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였다. (중략) 이처럼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56쪽
"지금 당신은 근면과 성실이란 미명 아래 사유의 의무를 방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금 당신이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하고 있는가?"
171쪽
유한자인 우리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파괴해야만 한다.
184쪽
다시 말해 이리가라이에 따르면 남녀평등 이념 속에서 평등이란 잣대는 여전히 남성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성이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요구하는 기준에 맞추어 자신을 만들어가게 되면,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고 남성적 정체성을 내면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91쪽
너는 들어보지 못했느냐? 옛날 바다새가 노나라 서울 밖에 날아와 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이 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와 술을 권하고, 아름다운 궁궐의 음악을 연주해주고, 소와 돼지, 양을 잡아 대접하였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하고 슬퍼하기만 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결국 죽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자기와 같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 아니다. -『장자』「지락」
231쪽
상업자본은 공간의 차이, 다시 말해서 가격의 차이가 나는 서로 다른 두 공간에서 이윤을 획득한다. (중략) 그러니까 상업자본이 이용한다는 공간적 차이는 단순한 공간적 차이라기보다 가격 차이가 나는 공간적 차이인 셈이다. 반면 산업자본은 상업자본과는 달리 시간의 차이를 이용해서 이윤을 남기려고 한다. (중략) 상업자본이 이미 존재하는 공간적 차이를 이용할 수 있을 뿐이지만, 산업자본은 스스로 유행을 만들어서 시간적 차이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233쪽
자본주의는 노동자가 자신이 벌어들인 돈으로 자신이 만든 상품을 활기차게 구매할 경우에만 유지되는 체제이다.
237쪽
"오히려 나는 우리나라에 사치가 더 많았으면 좋겠다. (중략) 왜냐하면 부자들의 사치는 많은 수공업자와 가난한 사람을 먹여 살리기 때문이다." -『사치와 자본주의』
247쪽
자본주의는 상품을 가진 사람보다는 자본을 가진 사람에게 우월함을 보장하는 체제다. (중략) 그렇지만 월급을 받아 소비자가 되는 짧은 한순간, 상황은 180도 달라진다. 순간적이나마 노동자는 상품을 구매할 돈을 가지고 있고 자본가는 팔아야 할 상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순간 노동자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중략)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자본가가 월급을 준 이유는 노동자가 자신이 만든 상품을 자신이 받은 돈으로 사게 하기 위해서이다.
250쪽
결국 대중매체가 제공하는 이미지들에 길들여짐에 따라 스펙터클 사회의 거주민들은 점점 현실에 대한 방관자, 혹은 구경꾼으로 변하게 된다. (중략) 아니 정확히 말해 온몸으로 겪어야만 했던 현실 세계는 사라지고 시각적으로 특화된 이미지의 세계만 남게 된 것이다. (중략) 권력의 입장에서는 좋을 것이다. 현실에 치열하게 참여하는 실천가가 줄어들고 거리를 두고 냉소적으로 구경하는 방관자가 늘어나게 되니까 말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대중매체의 볼거리들이 기본적으로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서 주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볼거라기 선정적이고 자극적일수록, 우리는 대중매체에 쉽게 빠져들게 된다. 자본은 이를 이용해 우리의 내면에 신상품의 유행과 이미지를 각인시킨다. 결국 우리는 여가시간마저 자본의 지배를 받고 있는 셈이다.
269쪽
빼앗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주어야만 한다. 이것을 '은미한 밝음'이라고 말한다. 유연하고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법이다. 물고기는 연못을 벗어나게 해서는 안 되고, 국가의 이로운 도구는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 -『도덕경』36장
307쪽
자신의 적성이나 혹은 아이의 적성을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훈계나 명령을 내리지 않고, 자신이나 아이가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즐거워하는지, 혹은 어떤 일을 할 때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하는지 관찰하기만 하면 된다.
312쪽
민주주의에서 시간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다양한 개인들을 엄연한 권리의 주체로서 긍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랑시에르에게 고마워할 일이다. 그는 합의라는 절차 속에 내재하는 억압과 불평등을 간파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