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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은 짧고 직업은 길다 ㅣ 직업에 관한 고찰 1
탁석산 지음 / 창비 / 2009년 10월
평점 :
다 읽은 날짜 : 2012년 9월 17일 월요일
"우리나라 사람들은 중3, 고3, 27세, 40세에 직업에 대한 고민을 가장 많이 하고, 한 직장에서 평균 8년 근무하며, 한곳에서 3년 이상 근무하면 옮기고 싶어한다." (「조선일보」, 2008년 2월 12일)
"40대 이후엔 명문대 못 나온 게 흠이 안 되죠. 그간 쌓아온 경력과 인맥, 자신의 의지가 더 중요해요. 미래학자들은 120세까지 일하는 날이 도래하고 일생에 8번 직업을 바꿀 수 있다고 예견합니다."
본문에서 가장 처음 책 귀퉁이를 접은 곳이다. 직업 고민을 가장 많이 한다는 중3, 고3을 지나 25살이 되었다. 군대도 가지 않는 25살 여자로 학교에 다니는 게 드문 풍경은 아니지만, 확실히 취업시장에서 리즈시절은 지났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에 본 면접에서도 '학교를 좀 오래 다녔네요?' 라는 소리를 들었으니. 딴에는 다른 '생각없이 사는' 20대보다는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며 살아왔다고 자부해 왔다. 가고 싶은 길 하나만 보고 걸어오기도 했고. 좋게 말하면 일관적이나, 나쁘게 말하면 다른 쪽으로 대비가 전혀 안 돼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지원했던 회사에 덜컥, 하고 붙었다. 그제서야 두려워져서 직업 관련 책을 빌렸다. '100점짜리 자소서 쓰기'나 '면접 전날 보는 책' 따위가 아니라, 직업을 구할 때 무엇을 중시해야 하는지 돌아보는 그런 책으로.
『성적은 짧고 직업은 길다』는 글쓰기 관련책 필자로 자주 마주쳤던 것 같은(정작 나는 탁석산의 책을 그동안 1권밖에 읽지 않았다) 탁석산의 직업론을 담은 책이다. 두 권 중에 첫째 권이다. "흥, 니가 이래도 날 안 집어들어?"라고 도발하는 듯한 제목이었다. 20대가 되면 성적에서 좀 자유로워지나 했는데 웬걸, 지금도 내 가장 큰 컴플렉스는 바로 성적이다. 평균 평점이 높지 않아 항상 자신감이 없었다. 지금도 아주 떳떳하지는 못하다. 학점은 성실성을 가늠하는 척도라는데, 그렇다고 내가 수업 땡땡이나 치고 딴짓만 하며 산 건 아니다. 다만 적성에 안 맞는데도 무서운 줄 모르고 남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공부한 게 문제였다. 부족한 만큼 몇 배는 열심히 했어야 하는 걸 알면서 실천하지 않았다. 구직 적령기에 다다르니 자신감은 더 수직하강했다. 고등학교 때 수능 점수로 커트라인을 정하듯, 기업도 취업 적정선이 정해져 있었다. 저자는 성적에 맞춰서 자기 상황은 고려하지 않고 직업을 생각하는 걸 두고 경각심을 주려고 제목을 지었겠지만, 내게는 한편으로 위로가 되었다. 맞다. 성적이 낮다고 내 꿈의 크기까지 낮출 필요는 없는 것이다. 부화뇌동하며 남들 가는대로 따라가기보다, 더 깊이있는 고민과 궁리 끝에 직업을 결정하라는 애정어린 조언이었다.
3부로 나뉘어진 이 책에서 제일 인상적인 부분은 2부 '그냥 놀고 먹으면 안 될까'였다. 여기서 스스로 돈을 벌어 생활하는 사람들의 자존감 이야기를 비중있게 다룬다. 그가 제시한 사례 하나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노숙자라고 해서 아무 일도 안 하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일거리를 찾아 나섭니다. 카메라는 길거리에 버려진 파지를 주워 리어카에 싣고 팔러 다니는 노숙자를 따라다니며 그 모습을 담았습니다. 그는 하루에 2만 원 정도 벌어 그 돈으로 밥을 사 먹습니다. 자기가 번 돈으로 밥 사 먹는 것에 그는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다른 노숙자들처럼 무료 급식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중략) 그런데 불황이 깊어지면서 벌이가 많이 줄었습니다. (중략) 그러다가 마침내 그도 무료 급식 줄에 서게 됩니다. 이때부터 이 노숙자는 말이 없어집니다. 평소 성격이 활달하고 말주변이 좋았던 그는 풀이 죽어 지냅니다. 자기 손으로 벌어먹는 것이 그동안 그의 존엄성을 지켜 주었던 것입니다. 자기 손으로 먹고산다는 것, 이것은 인간 존엄의 기본입니다.
탁석산은 먹고 살기 위해 직업을 갖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보통 자아실현을 위해서, 행복 추구를 위해서 직업을 찾는다는 답이 더 그럴듯해 보인다고 생각하는데 거기에 반기를 든 것이다. 직업을 갖는 제 1의 이유는 누가 뭐라고 해도 '먹고 살기 위해서'라고 잘라 말했다. 앞에 나왔던 노숙자 사례처럼 인간은 자기가 벌어서 사는 그것 자체로 본인의 존엄성을 확인한다. 그러니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버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건 너무 1차원적인 이유라며 천대해 왔다. 나만 하더라도 누가 '먹고 살기 위해 일한다'고 하면 안타까워 하거나 편견어린 시선으로 보았다. 또 가식적으로 군 것도 같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생활 유지 때문인데 기본은 제처두고 멋진 말만 골라서 포장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문득 쉴 새 없이 아르바이트에 몰두했던 지난날들이 떠오른다. 그동안 대학 입학한 이후로 학교 다니며 드는 기본 생활비는 혼자 힘으로 마련해 왔다. 용돈 받아 쓰는 친구들이 가끔 부럽긴 했지만 난 내 돈으로 생활한다는 게 좋았다. 수입을 낼 수 있다는 것, 한 달 계획을 가지고 생활을 운용하는 것 등등 장기적으로 보면 더 유익할 일들을 먼저 시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직업을 갖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때로 일하기 팍팍할 때 '먹고 살기 위해 일한다'고 투덜댈지라도 나를 너무 구박하지는 말아야겠다.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찾을 때, 자기가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그만의 방법도 특징적이어서 여기에 옮겨 둔다. 70퍼센트 정도의 힘을 쏟고도 잘해야 능력이 있다고 말해도 좋다는 것이 요지다. 100퍼센트 이상 힘을 쏟아 좋은 결과를 단기간에 만들지라도 나중에는 기진맥진하여 활력을 잃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70퍼센트의 힘만 들이더라도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나중에 정말 젖먹던 힘까지 써야 하는 시기에 전력을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무슨 일을 할 때 얼마만큼 힘을 쓰는지는 관심 밖이었다. 결과에만 집착했다. 나는 70퍼센트만 쓰고도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항상 혼신의 힘을 다했던 건 아닐까? 나중까지 버티기엔 버거울 정도로? 70퍼센트론(?)을 들었는데 오히려 결론은 이상한 쪽으로 흐른다. 70퍼센트만 집중해도 수려한 결과물을 낼 수 있도록 내공을 많이 쌓아야겠다는 쪽으로. 열심히 하는 자에게 설마 불운을 가져다주진 않겠지.
쓰인 내용이나 글투가 대학 진학을 앞두거나 진로를 고민하는 청소년을 위한 책으로 보였으나 내게도 귀중한 가르침을 주었다. 좀 더 일찍 직업관이나 직업론 관련 책을 읽어둘걸 하는 후회가 든다. 자료는 차고 넘친다는 말을 또 다시 실감한다. 게으른 내가 받아먹지 못한 게다. 첫 출근 전까지 직업을 다룬 책들을 차곡차곡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