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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살아가기 - 비혼여성, 임대주택, 민주화 이후의 정동
송제숙 지음, 황성원 옮김 / 동녘 / 2016년 6월
평점 :
절판


 

전에도 한 번 빌렸다가 다 못 읽고 반납했나, 아니면 그냥 슥 훑고만 왔다. 드디어 자세를 고쳐 앉고 읽는데 학술적 용어가 많아서 읽는 도중 꽤 버퍼링이 걸렸다. '정동'이나 '레짐' 같은 용어가 나올 때마다 작아졌다. 딴에는 글을 읽고 글을 쓰는 입장인데도 기본적인 개념에도 취약하다니,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동시에 연구자들의 용어는 이늘 이렇게 어느 정도의 장벽이 있는 채로 대중에게 전달되어야 하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연구자들만 보라고 만든 책은 아니었을 테니, 그건 저자나 번역자나 출판사에서 신경 썼어야 할 부분이라고 본다.

 

[혼자 살아가기]는 30대 초반~30대 후반의 비혼 여성 16명을 심층 인터뷰한 내용과 저자의 연구 내용이 어우러진 책이다. 역시나 심층 인터뷰가 재미있었다. 일부 인터뷰이가 하는 말은, 마치 나의 미래를 보여주는 것처럼 생생해서 정신이 퍼뜩 드는 기분까지 들었다. 저임금 불안정 노동을 하면서 비싼 전세금을 마련할 만큼의 생활수준에 다다르지 못해 허덕이는, 그러면서 진보적(책 속에서는 '좌파적'이라는 말로 나왔다)인 성향을 지닌 사람들.

 

학생운동도, 노조운동도 하지 않았다. 대학 저학년일 때 집회 참가가 처음이었고 첫 직장에서 사회운동에 대해 조금 감을 잡은 내가, 감히 '좌파'니 '진보'니 자처할 순 없겠지만, 주거 환경이나 생활 태도가 유사해서 많이 공감하며 읽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이제 막 30대에 들어선 비교적 젊은 축이라는 것이고(100세 시대에 솔직히 40대도 젊은 게 아닌가 생각한다) 적어도 현재 하는 일이 불안정 노동은 아니라는 것 두 가지다.

 

더 높은 수준의 감정 노동을 수반하는 일을 하면서도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채 임금 후려치기를 당하고, 여성 혼자 '독립'해서 나가 산다는 것에 대한 가족과 사회의 편견과 맞서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사실 희망은 찾기 힘들었다. 말 그대로 현실을 담담히 읊는 느낌이었달까.

 

기억에 남는 부분은, 여성운동 의제에서 '비혼 여성'은 여전히 꼴찌로 밀려나 있다는 것이었다. 기혼 여성의 출산, 육아, 이후 경력단절 문제가 그나마 사회적으로 꾸준히 이야기되는 '주류 이슈'라면, 비혼 여성의 삶은 그만큼 시급하고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과, 결혼이라는 제도를 거치지 않고 홀로 되는 것 모두 '선택'의 문제인데도 평등한 위치에서 다뤄지지 않는 데서 오는 답답함을 느꼈다.

 

앞으로도 도시 빈민이자 비혼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일 가능성이 높아서 그런지 나도 비혼 여성에 대한 진전된 정책이 나왔으면 하고 바랐다. 공동체 같은 거 필요없으니 단 10평이라도 합리적인 가격에 마련할 수 있는 독립된 공간, 여자 혼자 사는 것이 약점이 되지 않는 사회 분위기. 1인 세대가 늘어가고 특히 비혼 여성이 늘어가는 추세가 있으니, 대출 제도에서 불이익을 입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도.

 

기대했던 것만큼 흥미로운 책은 아니었으나, 오랜만에 사회과학서를 완독했다는 데에 의의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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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거짓말
이유리.임승수 지음 / 레드박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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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의 저자 임승수 씨가 쓴 책(공동저자 이유리 씨도 있다)이어서 더 관심이 갔다. 그러나 이런 분야가 본인의 장기는 아닌 듯했다. 전반적으로 글이 '선동적으로 쓰여졌다'는 느낌이었고, 주관적인 견해가 많이 들어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통계자료도 분명했고 근거가 있었는데도 '왠지'. 내가 충성스런 국민이어서 그런 건 결코 아닐텐데 설명할 수 없는 이 기분은 뭘까.

 

2. 소제목 하나하나는 궁금해 죽겠을만큼 흥미롭다.

 

3. 지금 돌아보면 어떻게 저렇게 허술한 거짓말에 속을 수 있을까 싶지만 그만큼 국가가 '국가'란 이름으로 철저히 통제하고 조작했다는 소리니까 좀 무서웠다. 국가는 생각보다 위험하고 강력한 존재였다. 수많은 국민 중 고작 한 사람 분인 내가 마음대로 거부할 수 없는 그런 막강한 존재. 그러니 국가의 거짓말이 더 치명적인 것.

 

4. 고작 별 5개로 책 한 권을 평가하라는 건 너무 가혹하다. 선택할 수 있는 별수가 10개는 되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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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선거이야기 - 1948 제헌선거에서 2007 대선까지
서중석 지음 / 역사비평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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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50년대의 우리나라 국민들은 참 영민하고 지혜로웠다. 2010년대의 우리나라 국민들이 멍청하고 지혜롭지 못하단 소리는 아니다. 하지만 그때 사람들은 적어도 나라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던 이들을 진심으로 존경했고, 일본의 앞잡이 역할을 했던 사람을 질색했다. 똑똑한 줄 아는 권력자가 뒤에서 별의별 수를 쓰고 있어도, 사실은 다들 알고 있었다. 어떤 것이 맞고 옳은 길인지를.

 

2. 2010년대에 이승만, 박정희가 없는 것은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거에 나온 사람들의 질이 높아진 것만도 아니다. 그 시절에는 조봉암도 있었고 장준하도 있었다. 너무 동떨어진 위인들이라고? 정치판에 오래 몸을 담궈서 신선미가 떨어진지 한참 됐다 뿐이지, 김영삼도 당시에는 주목받는 재기발랄한 정치인이었다. 오히려 지금이 정치판으로 향하는 더 많은 길이 열린 듯한데도, 참신한 인재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비극이다.

 

3. 1950년대에서 1960년대로 넘어갈 때, 이승만이 권력을 쥐고 있지 않았다면 한국 정치의 판도는 지금과는 분명 달랐을 것이다. 양당이 모두 보수당으로 몸집을 불려가지 않았다면, 아마 내가 겪었을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는 달랐을까? 1950년대에 진보당이 여당 못지 않은 영향력을 가졌다는 건 꿈 같은 일로만 느껴진다. 얼마 전 치렀던 국회의원 선거에서 진보신당은 3%를 얻지 못해 해산되었고, 통합진보당도 야권연대를 통해 열 몇 석의 자리를 겨우 차지했는데.

 

4. 내가 알 만한 이야기는 박정희 때부터겠군, 하고 지레짐작했던 건 착각이었다. 이걸 보면 저절로 외치게 된다. 이승만 개객끼. 왜 공영방송 KBS에서 이승만 다큐가 방영되면 안 되는지 똑똑히 알았다.

 

5. 권력이란 참 무서운 것이다. 나도 권력을 한 번 잡게 되면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게 되려나. 컴퓨터를 향한 무한애정처럼. 그러나 잦은 웹서핑으로 해치는 건 내 삶의 치열함일 테지만, 그들이 자신의 이득을 챙기려고 저지른 일들은 너무나 큰 희생을 불러왔다. 적어도 남에게 폐는 끼치지 않고 살아야지. 폐로 치면 서로 甲을 다툴 인간들이 정치판에만도 잔뜩이다.

 

6. 삼성은 그때도 똑같았다. 한국비료가 삼성 쪽이었구나. 실망스러운 맘조차 안 들었다. 역시나.

 

7. 선거에서 승리하는 경험은 중요하다. 지지하는 사람, 정당에 따라 누군가에겐 쓰디쓴 패배가 되겠지만. 젊은 세대가 꼬박꼬박 투표를 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자신의 한 표 가치가 너무나 미약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미약이 아니라 아예 아무 힘도 쓰지 못한다고 믿으니까(실제로도 어느 정도는 그렇고) 굳이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20대인 우리는 그래봤자 10번의 선거도 참여하지 못했다. 그나마 이번 정국이 워낙 특이해 이런 저런 투표를 많이 하게 된 거다. 애초에 선거 참여 기회가 훨씬 적었는데, 두세 번 시도하다 안 된다고 좌절하는 건 너무 이른 선택이 아닐까. 특히나 지금 패권을 잡고 있는 세력에 반대하는 사람들이라면 그 판도가 영화처럼 한번에 바뀔 거라고 기대하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할 듯하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좋다. 작은 승리의 경험이라도, 선거 참여 의욕을 돋운다. 내 한 표가 가치있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해봐야 안다. 선거에 참여하는 짜릿함을. 좌절해봐야 소용없다. 그렇다고 누가 나서서 내 삶을, 내 미래를 챙겨주지 않는다. 내가 야물딱지게 알아서 잘해야 한다. 정치와 이어지지 않는 일상은 거의 없다. 그 중요한 선택을 하도록 왜 남들에게만 맡겨둘까. 정치에 환멸을 느껴서 무관심하게 되는 것. 그게 못된 정치인들이 바라는 모습이다. 왜 그들에게 놀아나나.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해도 모자랄 판에. 신경을 안 쓰니까 이상한 법안도 제멋대로 통과시키고 너희들을 따라오라며 윽박지르는 것 아닌가. 머슴들을 잘 뽑아야 한다. 자칫하면 내가 머슴이 된다.

 

8. 다음 선거에서는 진보신당이 해산되지 않기를..

 

9. 조만간 이 책을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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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tetic 2012-06-23 0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찬찬히 블로그를 둘러보다가 문득 이 포스팅의 8번에서 멈춰서게 되네요...
기독당과 한나라당의 지지율과 경쟁해야 했던 지난 4.11 총선이 생각나서 일까요... 2%에도 못 미쳤던 지지율...
여담이지만 <건축학 개론> 감상평 정말 재밌게 보고 간답니다.~~~ 글솜씨가 보통이 아니신걸요? 조만간 <씨네21> 지면에서 뵐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요~~ 정론지 기자가 꿈이시라면 저도 어쭙잖지만, 리영희, 송건호 선생의 저작들도 참고하시면 도움이 될거라 생각합니다. 그럼 앞으로도 좋은 책들 소개 많이 해주셔요~ 저도 따라 읽게요~~~

들꽃 2012-06-30 23:28   좋아요 0 | URL
아! 이 댓글 보고 의기소침해져있던 제가 기운을 차렸던 기억이 나요ㅠㅠ 사실 같이 글을 썼던 분들께서도 저한테 글을 잘 쓴다고 칭찬해준 적이 몇 번 있지만, 확실히 논리적이거나 그런 부분은 모자람을 느끼고 있었거든요. 건축학 개론 리뷰도 공들여서 쓰긴 했는데 기대했던 것보다는 글을 잘 쓰지는 못해서 조금 아쉬웠었어요. 하지만 격려어린 말씀 덕분에 뿌듯해졌어요 ㅋㅋ 리영희 선생님 글 읽어보려고 했는데 게을러서ㅠㅠ 이번 방학에는 읽기 쓰기에 전념하는 시간이 될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D
 
후불제 민주주의 - 유시민의 헌법 에세이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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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불제 민주주의. 제목이 곧 내용이다. 대의민주주의, 행복, 자유, 애국자, 진보와 보수, 파시즘, 경쟁, 코드 인사, 지역주의, 정치 중립, 공무원의 영혼 등 다양한 것들을 다루나 '후불제 민주주의'만큼 명확하게 정의내려진 것은 없었다. 많은 이들의 희생 끝에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주의를 누리기에 우리는 너무나 '봉건적'인 '국민'이기에, 간극이 상당하다. 사회문화 시간에 배운 문화정체 현상과 연결지어 생각하면 쉽다. 모든 힘을 다해 얻어낸 민주주의가 한국 사회에겐 과분할 정도여서, 앞으로 꾸준히 '후불'해줘야 마땅하다는 것. 공감한다.

 

2. 지식소매상 유시민은 뛰어난 사람이다. 그냥 개인 유시민으로 보아도 나쁘지 않은, 오히려 괜찮은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가 머릿속에 있는 개념을 대중들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만큼 설명을 잘하고, 자신의 견해를 확실하게 펼 줄 알며, 계속 글을 읽고 싶게 만드는 내공을 지닌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정작 자신은 좋은 정치를 펼쳐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을 1순위 목표로 두고 있는데 말이다. 잘하는 것과 잘하고 싶은 것이 엇갈리는 일은, 유시민조차도 피해갈 수 없는 일인가 보다.

 

3. 딱히 의도한 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은근히 자기자랑을 해서 귀여워 보였다. 칼 같은 유시민에게도 인간적인 면이 있군.

 

4. 이명박 정부에 대한 날선 비판이 인상적이었다. 실은 이 책을 쓰게 된 가장 큰 계기가 이명박이란 사람과, 그 이후의 현실 때문이었을 테다. 대다수 공감하는 바였다. 그러나 역시나 지울 수 없는 노무현의 남자-의 향기. 하기야 난 고작 한 사람의 독자일 뿐인데 그의 삶에 진한 그림자를 드리운 이를 인생에서 빼 버리라고 하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인 것 같다. 나 또한 어떤 글을 쓰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것이나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애정이 자연스레 드러날 텐데.

 

5. 유시민의 다른 책을 더 읽어보고 싶어졌다. 경제학카페부터 시작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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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해도 괜찮아 - 영화보다 재미있는 인권 이야기
김두식 지음 / 창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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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비교적 남에게 상처주는 말을 덜하고 살아간다고 착각하던 때가 있었다. 여전히 그 착각은 계속되고 있다. 정도가 덜해졌을 뿐이지. 그런데 『불편해도 괜찮아』는 내가 얼마나 부끄러운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깨닫게 해 주었다.

 

2.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여성과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그 책은 그나마, 당사자로서 불편과 고통을 자주 겪어봤던 경험이나 있지 이번엔 생전 느껴보지 못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했다. 성 소수자, 청소년, 장애인, 노동자, 양심적 벙역 거부자 등등. 나머지는 평소에도 약자로 생각했었는데 청소년은 조금 의아하게 느껴졌다. 아마 나처럼 생각하는 '어리석은 어른'이 많을 줄 미리 알고, 저자가 가장 첫 꼭지로 마련한 모양이다. 초중고 시절 임원을 자주 맡았고, 중학생 때는 학생회와 선도부를 겸하며 산 범생이였어서 그런지 청소년이 '억압받고 권리를 존중받지 못하는 대상'이라고 생각지 않았었다. 불만은 있었지만 사소한 것이라고만 여겼다. 머리를 좀 더 기르고 싶은 마음, 염색해 보고 싶은 마음, 노래방과 오락실에 조금 더 머무르고 싶은 마음 등등. 하지만 그게 내 인생을 심각하게 불행하게 만드는 요소라고 생각지 않았기에,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규격화된 틀 안에서 안정된 삶을 살았다. 각자의 개성과 자유가 더 중시되는 요즘 '깨인' 아이들은 청소년의 삶을 어른들이 멋대로 규정한 것이 '잘못'이라는 걸 안다. 그래서 불만의 목소리도 커지게 된 것이겠지. 어쩌면 나는 무지했기 때문에 평온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기 부모를 욕으로 대신해 부르고 부모를 '찌질하다'고 부모 앞에서 서슴없이 말하는 모습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모르는 꼰대 기질이 있는 건가.

 

3. 또한 교복을 맞춤해서 잘 입고 다니는 애들이라고 해서 스스로 사고할 힘이 없다거나, 부당한 것에 반항하지 않는 멍청한 아이는 아니라는 점을 밝혀두고 싶다. 좀 더 마음에 드는 스타일로 꾸미고 싶은 욕구가 있었으나, 절대적이지 않았을 따름이다. 학교 규칙을 잘 따르는 아이들을 전부 찌질이인 양 몰아가는 건 석연치 않다.

 

4. TV프로그램에 비해 영화를 찾는 빈도도 관심도 적고, 거기다 여간해선 외화를 보지 않는 독특한 습성 때문에 책장을 넘기면서 맞게 되는 영화들은 대부분 생소했다. 정말 잘 알려진 <빌리 엘리어트> 정도 되어야 아, 했을 정도니. 반면 드라마나 한국 영화에는 강했다. 왠지 모를 이질감과 불편함을 느꼈던 지점을 저자가 짚어주었을 땐 마치 텔레파시라도 통한 듯 반가웠다. 비슷한 감수성을 공유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은 대개 편안함을 가져다 주지만 '같은 곳에서 불편'을 느끼니 어쩐지 서글픈 마음도 들었다. 애청했던 <미안하다 사랑한다>가 무참히 까였는데도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나 역시 그 부분이 극단적이라고 생각해 잘 받아들일 수 없었으니까. 특히나 드라마 안에서 아무렇지 않게 행해지는 '데이트 폭력'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며, 한국 드라마의 괴이한 문법을 지적할 때는 내 속이 다 시원했다. 드라마 속 여주인공들은 어째서, 남주인공이 자기 감정을 이기지 못해 퍼붓는 키스의 폭력성을 감지하지 못한단 말인가. 어째서 그걸 사랑이란 이름으로 감싸안는가. 이건 작가들도 각성해야 할 부분이다.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보는 시청자도 문제고.

 

5. <300>을 장애인 영화로, <밀양>을 기독교 영화로, <빌리 엘리어트>를 노동자 영화로 바라보는 시선이 자못 신선했다. 아마 내가 이 영화를 모두 안 봐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미리 접했더라면 알아챘을지도 모르겠다. <연애의 목적>이 발칙한 연애담이면서 교단에서의 권력관계나 '문란한' 여선생의 사회적 위치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영화란 것은 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이기에.

 

6. 저자가 쓰면서 가장 불편했던 꼭지가 성 소수자 꼭지였던 듯했다. 격정적인 성관계 묘사나, 남남커플에 대한 거부감이 느껴졌다. 나 역시 그것들을 속 편히 보는 사람은 아니지만, 알음알음 습득한 사전지식 때문에 그리 생소하지는 않다. 그런데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콘텐츠들로 '성 소수자'를 접하면, 지나치게 정형화된 이미지가 생기므로 주의해야 한다. 꽤 오랫동안 게이 커플이나 레즈비언 커플들이 이성처럼 각각 남녀역할을 한다고 믿어왔다. 그게 얼마나 편견이 깃든 사고였는지는 나중에야 알았다.

 

7. 제노싸이드 부분은 진저리쳐지는 내용이라 글자 하나하나가 아프게 읽혔다. 대량학살이 상부에 있는 나쁜놈 한둘의 무시무시한 야망과 악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권력구조에서 취약한 평범한 다수의 개인들이 '윗사람의 명령'에 따라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는 데서 나온다는 것. '악의 평범성'. 한나 아렌트의 표현은 적확했다.

 

8. 책을 읽으며 영화, 드라마에 관심이 생긴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내가 가지고 있던 잘못된 편견을 많이 누그러뜨리고 올바른 다른 지식으로 채울 수 있어 뿌듯했다. 이를테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이 단순히 병역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대체복무 인정을 바라고 있다는 점은 충격적이었다. 흔히 군대 한 번 빠져보겠다고 꼼수 부리는 이들로 낙인 찍힌 그들이 실은,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하며 얻은 것이 수감생활과 전과자라는 낙인이라니. 확실히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섣부른 판단을 내리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것은 없다. 자명한 일인데도 이렇듯 스스로 느껴보지 않고는 모른다. 모르면서 아는 척은 하지 말아야지. 비록 드러내지 않더라도 올바르지 않은 생각을 갖는 것 자체가 타인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

 

9. 이 책을 읽고 나서,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만든 책은 믿을 만하다는 확신이 굳어졌다. 인권위가 꼭 모자란 짓만을 자행하는 곳은 아니다.

 

10. 의심스러울 때는 약자의 이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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