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
권혁범 지음 / 또하나의문화 / 2006년 1월
평점 :
절판


세익스피어의『로미오와 줄리엣』를 보면 ‘나는 분홍만큼이나 바르다’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분홍은 여성을 상징한다. 그만큼 남성에게 순종적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은 연애소설에 나오는 가련한 이미지로 미화되고 만다. 달콤해야 하고 사랑스러워야 한다.
그리고 엄마의 길로 접어들면 여성의 삶은 더욱 차가운 현실적이 된다. 대부분의 여성이 결혼하고 나면 직장을 포기해야 한다. 말이 포기인지 거의 강압적이다. 여성의 능력이 우수하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가정과 육아 문제에 있어 여성의 멍에는 무겁기만 하다. 이제 여성은 현모양처가 되어야 한다. 저녁에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리며 살아야 한다.
그런데 만약 내가 여성이라면 정말로 이런 삶이 행복할까? 아마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것이다. 이제까지 남성주의 패턴은 불편한 것이 없다. 너무나 낭만적이다 보니 때로는 에로티즘에 가까웠다. 하지만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불편한 것이 너무 많다. 무엇보다도 언제나 남자를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차별 속에서 남자가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대단히 모험적이다. 우선 마초들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여성의 문제를 여성이 아닌 남성이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을 지혜롭게 극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허하게 메아리만 울리는 페미니스트가 되고 말 것이다.
저자는『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를 통해서 허울뿐인 남성의 페미니스트를 경계한다.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성의 눈으로 바라 본 것은 아니었을까, 라는 반성을 한다. 좀 더 현실적으로 여성의 눈이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래야만 여성이 어떤 차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여성에 대한 사회적인 불평등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 문제에 있어 얼마 전 타계한 미국 여성 운동가 베티 프리던의 말이 인상적이다. 그녀는 ‘가정은 안락한 포로수용소’라고 했다. 그냥 듣고 있자면 속이 거북할 정도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여성에게는 성의 정체성이 위태롭게 흔들린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베티 프리던은『여성의 신비』에서 여성다움을 강조하는 신비스러움으로 인해 여성의 사회생활을 억압하고 대신에 집에서 헌신하도록 하여 우울증을 만들어내는 남성 중심의 코드 때문이다. 우리 사는 세상의 절반이 여성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성의 지배가 당연시되고 현실에서는 여성은 화려하고 섹시할 뿐이다. 그러니 여성이 그녀 말대로 이름모를 병에 걸리는 것은 운명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저자가 단순히 이름모를 병을 고치기 위해 페미니스트가 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 보다는 남성중심의 사회가 가지고 있는 모순들을 파헤쳐 우리 사회가 페미니스트들에게 관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페미니스트라고 해서 여성의 문제로 한정해서는 안 된다. 여성의 문제를 남성이 함께 고민해보야 한다.
시대는 계속 바뀌고 있는데 시대정신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 시대는 고여 있는 물과 같다. 이것이 저자가 페미니스트를 대하는 자세다. 고여 있는 물은 썩을 수밖에 없다. 여성의 문제를 페미니스트만 고민해서는 안 된다. 이제는 보통 남성들도 일상적으로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남성이 여성화되라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여성의 고민을 함께 해보자는 것이다. 더 이상 여성에게 가정이 안락한 포로수용소가 아니었으면 한다.
저자 말대로 남성, 여성 모두가 생긴 대로 사는 세상이었으면 한다. 또한 성의 도덕보다는 성의 문란이 더 좋다는 저자의 말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곧 여성에게 여성다움을 깨뜨리는 것이다. 남녀 모두에게 평등한 여성주의가 정말로 남성을 살리는 것이다. 여성의 삶이 과거보다는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도 여성의 사회참여는 불평등하다. 이런 불평등속에서 여성의 삶은 슬픈 포로수용소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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