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 부키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 사회에서 경제위기의 고통은 공정할까? 불공정할까? 존 롤스에 따르면 ‘자연의 분배방식은 공정하지도 불공정하지도 않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특정한 사회적 위치에 놓이는 것 역시 부당하지 않다. 그것은 타고 나는 요소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공정이나 불공정은 제도가 그러한 요소들을 다루는 방식에서 생겨난다’고 거듭 말했다. 세계적인 경제위기 속에서 한국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세계를 버리고 한국 혼자 살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의 경제위기가 고통스러워야 한다는 것은 불공정하다. 그래서 한국 경제를 변화하기 위해서는 뭔가 구조적인 문제가 지속되고 있음을 간과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불공정한 경제’를『나쁜 사마리아인들』을 통해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명쾌한 통찰을 보여준 장하준 교수가 이번에는『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로 다시 한 번 세계의 이목을 한꺼번에 사로잡았다.『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사다리를 걷어차 버린 부자들이 자유시장주의를 역설하면서 ‘우리가 했던 대로 하지 말고, 우리가 말하는 대로 하라’며 개발도상국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쳤다고 비판했다. 한마디로 신자유자들에게 세계화라는 현대판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장하준의 ‘현실로서의 경제학’은 신자유주의의 맹점을 파고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로소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위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해하게 되었다.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우려는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니라 ‘불공정한 경제’여서 심각하다는 것이다. 요즘 ‘워킹 푸어’(working poor)이라는 모순적 현상이 아주 일상적이다. 어떤 사람이 일하지 않아서 별다른 소득이 없어 가난하다고 하면 어느 정도는 수긍할 만하다. 그러나 일하는 가난은 열심히 일하는데도 여전히 가난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하준은『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더 나은 자본주의’를 제시하고 있다. 또한 상식적 모순에서 벗어나기 위한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방안에 대한 거침없는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
 

이 책에서 저자는 ‘흰 코끼리 프로젝트들’을 비판하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흰 코끼리 프로젝트(white elephant project)는 불교에서 신성한 동물로 여기는 흰 코끼리는 동남아시아에서는 왕권의 정당성과 위엄을 상징하기 때문에 일을 시킬 수 없는 짐승이다. 보기에는 번드레하지만 유지하는 데에는 엄청난 돈과 노력이 들어가는 데다 실질적인 이용가치는 전혀 없는 물건을 가리킨다. 그래서 세계 경제의 불공정을 만드는 근원이『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는 말 그대로 나쁜 사마리아인들이었다면 이 책에서는 ‘나쁜 흰 코끼리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나쁜 흰 코끼리들에 대한 저자의 비판을 몇 가지 살펴보면 첫째, 자유 시장에 대한 문제다. 그들(신자유주의자)은 ‘시장은 자유로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가장 이윤이 높은 일을 할 수 있으며 기술 혁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하준은 ‘자유 시장은 환상이다’라고 했다. 즉 모든 시장에는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모종의 규제와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장이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규정하는 객관적인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경제학이 물리학이나 화학 같은 과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경제학은 정치적 행위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둘째, 잘사는 나라와 못사는 나라의 임금 격차에 대한 그들은 개인의 생산성 결과라고 한다. 하지만 장하준은 시스템의 차이에서 생긴다고 하였다. 가령 부자나라 버스운전자가 가난한 나라 버스운전자보다 50배나 높은 임금을 받게 되는 것은 ‘노동시장에서 이민자의 수용정책’ 때문이다. 셋째, 기술 혁명에 있어 그들은 인터넷이 세탁기보다 세상을 더 많이 바꿨다고 한다. 그러나 장하준은 반대다. 세탁기가 인터넷보다 세상을 더 많이 바꿨다. 탈산업화 사회에 따른 제조업이 구닥다리 신세로 전락되었다는 점, 가장 최근에 일어난 변화에 영향을 더 많아 받는 점을 지적하였다. 
 

넷째, 경제활동을 있어 인간의 본성을 두고 그들은 이기심을 정당화했다. 이기심이 지속될 수 있는 경제 체제를 만드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항상 ‘최악의 행동’을 할 것이라는 것을 유념하라고 한다. 반면에 장하준은 이기심이 인간의 본성 중의 하나이지만 유일한 동기는 아니라고 반박했다. 그보다는 이타심, 의무감 등이 행동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장하준은 ‘도덕성은 착시 현상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다섯 째, 그들은 선진국들이 자유 시장 덕분에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장하준은 자유 시장이 아니라 보호무역과 정부개입의 결과라는 것이다. 여섯 째, 아프리카 저개발에 대 그들은 ‘숙명’이라고 했다. 나쁜 기후, 민족 분쟁, 바람직하지 못한 문화 등등 발전의 가능성을 어렵게 만든다고 했다. 하지만 장하준은 자유 시장 경제 정책 때문이라고 했다. 비록 아프리카에 나쁜 문화가 산재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문화라는 것은 경제발전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에 가깝다’는 것이다.
 

일곱째, 기업가 정신에 있어 그들은 부자나라들이 더 투철하다고 한다. 그러나 장하준은 가난한 나라들이 더 투철하다는 것이다. 다만 공동체 차원의 집단적 노력이 부족이 큰 장애 요인이었다. 다시 말하면 영웅적이고 개인적 차원이 기업가 정신은 제도적이고 집단적 차원으로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덟째, 교육에 있어 그들은 높은 교육이 경제적 성공의 원천이라고 했다. 하지만 장하준은 사회 전체의 능력이 좌우했다. 학력 인플레이션은 교육을 생산성을 높이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아홉째, 기업에 좋은 것은 나라 경제에도 좋다고 하면서 그들은 GM에 좋은 것이 미국에도 좋다고 했다. 그러나 장하준은 GM에 좋은 것이 항상 미국에도 좋은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역설의 주장에는 규제의 효율성이 자리매김했다. 장하준이 말한 규제란 기업가들에게 지속 가능한 발전에 저해되는 행위를 못하도록 하는 것이며, 장기적으로 산업 부문 전체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조치를 강제로 취하게 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평등에 있어 그들은 기회의 균등을 주장했다. 반면에 장하준은 결과의 균등이 보장되어야 했다. 기회의 균등은 차별 정책에는 부당하다는 데 그치지 않고 역차별 정책마저 부당하다고 한다. 이러한 불공정함 때문에 장하준은 결과의 균등이야말로 실질적인 기회의 균등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장하준의『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역사적인 자본주의 경제학을 압축적으로 제시하면서 우리가 경제 시민으로서 권리를 행사하기를 바라고 있다. 저자가 자본주의에 대해 통쾌하게 비판한다고 해서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 말대로 ‘자본주의는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좋은 경제 시스템’이다. 그러나 자유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자유 시장 자본주의가 마치 자본주의의 장밋빛이라고 떠들어대는 것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올바른 경제학을 배워야 이유는 어렵지 않다. 우리가 나쁜 경제 시스템에서 더 나은 자본주의를 말하는 것은 거대한 역설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나쁜 흰 코끼리들을 경계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국가의 역할 - 장하준이 제시하는 '우리 모두를 위한 발전과 진보의 경제학'
장하준 지음, 황해선, 이종태 옮김 / 부키 / 200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계는 지금 경제 위기에 흔들리고 있다. 자본주의의 황금시대가 빛을 바래면서 오히려 우리는 자본주의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경제 위기는 그 이전에도 꾸준히 되풀이 되어 왔다. 그럴 때마다 최선의 정책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대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유효한 전략이더라도 시대적이 한계에 노출되면서 더 이상 효력을 상실했다. 현 시점에서 경제 위기의 주범인 신자유주의도 같은 궤도에 있다. 신자유주의의는 말 그대로 ‘큰 정부가 나쁘고 작은 정부가 좋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경제학으로 당면한 문제들의 해법을 찾아보면 경제 주체인 것을 두고 ‘시장’과 ‘정부’ 중에서 어느 것이 선택권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신자유주의에서 경제 주체는 ‘시장’이다. 신자유주의의 주장대로 집을 사면 부자가 된다. 그런데 우리는 하우스 푸어, 즉 집을 사면 가난해지고 있다.




이러한 역설에 대해 장하준의『국가의 역할』은 갈채를 받을 만하다. 신자유주의를 거침없이 비판하는 그의 담대한 도전뿐만 아니라 탄탄한 구성과 시의성 있는 문제 제기는 충분히 주목할 만했다. 앞으로의 경제가 불투명하고 마땅한 대안도 없는 상황에서 그의 경제학은 우리들이 선택해야 할 새로운 기회가 되기에 충분했다. 저자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우선성’(primacy of market)이다. 좀 더 말하면 ‘정부 실패론’이며 ‘규제 완화’다. 그래서 이 책에서 저자는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제도주의적 정치경제학’을 주장하고 있다. 이제는 국가가 설계자, 옹호자, 개혁자라는 역할을 주도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국가를 경제학으로 영역으로 이끈 것은 피구의 ‘후생경제학’(welfar economicse)과 ‘케인스의 경제학’( Keynesian economics)임을 알 수 있다. 후생경제학은 자유방임적 정책이 최적의 자원 배분을 달성하지 못하는 설명하면서 ‘국가의 가격 신호’ 조작을 정당화했다. 그리고 케인스의 경제학은 자유 시장 경제가 완전고용 상태에서도 최적의 자원 배분을 달성하지 못할 수도 있음을 증명함으로써 실업과 경기 변동에 대응하는 적극적인 예산 정책을 정당화했다. 하지만 이러한 국가 개입주의는 2차 대전 후 신자유주의의 구조로 팽창되었다. 여기에는 케인스를 비판한 통화주의(Monetarism), 제도적 경화증(institutional)과 관련된 신계약주의(new contractarianism), 관료주의의 주인-대리인 모델(Principal-Agent Model)이라는 반개입주의의 이론들이 있다.

  

그러면 신자유주의는 무엇이 문제일까? 저자는 먼저 신자유주의의 내적 모순을 비판하고 있다. 한마디로 신자유주의는 ‘일관성 없는 지적 독특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신자유주의는 신고전학파 경제학과 오스트리아 자유주의 전통간의 정략결혼으로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신고전학파는 자신의 개입주의를 벗어나기 위해 ‘외부경제 효과론’을 정치적인 영역에서 다루지 않았다. 다음으로 제도주의적 관점에서 자유 시장을 논하면서 국가 개입이 없는 시장이 자유 시장인가? 라는 회의적인 물음을 던졌다. 또한 그는 시장이 실패했다고 해서 꼭 경제가 실패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시장을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을 구성하는 수많은 제도적 매커니즘 중의 하나라고 여겼다.

  

그리고 시장과 정치의 관계를 조명하는 데 있어 그는 ‘모든 가격은 정치적이다’라고 거듭 주장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국가의 범위를 제한하고, 자유재량 정책의 여지를 줄이며, 관료주의적 운영의 규칙을 강화하는 등의 엄격한 규칙에 기반한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기관의 설립 등을 통해 경제를 탈정치화해야 한다고 했다. 물론 자원 배본에 있어 어느 정도까지는 ‘객관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면 정치적 정당성이 위협받을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심층적으로 볼 때 정치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운 가격이란 존재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경제의 탈정치화는 사실상 민주주의를 거세하겠다는 완곡한 어법이라고 지적했다.

  

저자는 신자유주의의 구조적 문제점을 드러냄과 동시에 ‘발전과 진보를 위한 경제학’이라는 보다 현실적인 주장들을 펼치고 있다. 가령, 경제발전을 위해서 초국적기업의 유치는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고 한다. 기술경제학(economics of technology)에 따르면 지속가능한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국내의 기술적 역량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외국인의 직접 투자 유치의 성패가 규제 시스템의 ‘자유도’가 아니라 그 나라 시장의 ‘규모’가 어떤가에 있음을 일깨워주고 있다. 결과적으로 초국적 기업의 역할이 커지는 것은 사실이더라도 국가의 전략적 산업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적재산권(IPR)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지식 창출을 위한 혹은 지식을 공개하는 인센티브에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그래서 저자는 ‘규제의 경제학과 정치학’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찾고 있다. 규제의 경제학에 따르면 ‘규제가 없다면 시장도 없다’는 것이다. 정부개입이 단순히 시장을 규제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시장을 창출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규제의 정태적 효율성이 아닌 동태적 효율성의 변화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편 규제의 정치학에 따르면 ‘자기 이익을 대단히 중요하기는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 유일한 동기는 아니다’는 것이다. 그 보다는 도덕적 가치에 따라서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부 실패론자들에게는 ‘순진한 생각’이겠지만 사람들의 가치가 사회화 과정을 통해 변화된다는 것은 권력의 남용을 통제하는 중요한 방식이다.

  

장하준의『국가의 역할』은 발행 연도가 2006년 11월이라 지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과 대안은 현재 및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과거의 경제 행위(신자유주의)로 인한 현재의 경제적 위기는 앞서 말했듯이 ‘자본주의의 희생양’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국가의 역할’이 미미하다면 미래의 경제 또한 같은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단지 어떠한 희생양이 요구될지 모를 뿐이다. 그리고 비록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국가의 역할이 제시되고 있지만 시장과 정부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우리가 경제의 위기에서 보다 중요한 관심사항은 시장과 정부의 이분법적인 사고가 전부는 아니다. 우리가 통합적인 사고를 지향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경제 위기가 경제학의 문제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 말대로 ‘정치경제학’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 장정일의 독서일기 ㅣ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1
장정일 지음 / 마티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도서관이 가까이 있다는 것은 금상첨화(錦上添花)다. 많은 책을 읽을 수 있고 읽고 싶은 책을 무료로 대출(1인 3권)할 수 있다. 그리고 좀 더 바지런하면 금방 나온 신간을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읽을 수 있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 남의 손때가 묻지 않는 맨얼굴의 책은 언제나 첫사랑 같은 떨림이 있다. 그러나 빌려보는 것 못지않게 사야만 하는 책이 있다. 단순히 책만(?)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장정일이 독서일기인『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에서 말한 것처럼 ‘책 속에 길’이 있기 때문이다.

책 속에 길을 찾는 이 책을 들여다보면 장정일의 필력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는 남들이 듣기 좋게 말하는 책 속의 길을 거부했다. 주례사처럼 들려서 가슴이 먹먹해서 그랬다. 그래서 그는 흔하디흔한 책 속의 길에 메스를 들이댔다. 굳이 메스를 가한 까닭은 ‘책 속으로 난 길이 아니라, 책의 가장자리와 현실의 가장 자리 사이로 난 길’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책을 파고들수록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그가 말한 참된 독서란 ‘내 앞에 주어진 개별적인 책을 읽는 것일 뿐 아니라, 그 책을 생성한 유, 무형의 생산 현장 전체를 읽는 일’이다.

먼저 그는 속독 대신에 천천히 읽기를 권하고 있다. 책을 건성건성 많이 읽는 것보다는 제대로 읽어야 사고의 땔감이 된다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독서의 속도란 독자의 이해력과 책의 난해도가 빚어내는 상호조합이다. 그러니 사람마다 자신의 정상적인 속도에 따라 하는 것이 실질적인 이점이 된다. 정상적인 속도에 있어 속도보다는 천천히 읽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이유인즉 단지 책 읽기만이 아니라 다른 인생관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야마무라 오사무가『천천히 읽기를 권함』에서 말한 대로 ‘읽기의 방식은 삶의 방식’에 있다고 저자는 우리의 권태로운 눈을 끌어당기고 있다.

그는 독서 천황이라고 불리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속독 예찬과는 다른 패턴을 지향하고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속독의 대가답게 300쪽 책을 단 10여분 만에 읽을 수 있다. 비록 내 취향은 아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한결같이 멋지다는 탄성을 내지르게 한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속독은 직업적인 선택에 따른 합리적인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그를 흉내 낸다면 ‘불행한 독자’가 되는 것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무엇보다도 ‘책의 죽음’에 대한 악영향이 커다란 문제였다. 저자에 따르면 독서의 속도란 독자의 이해력과 책의 난해도가 빚어내는 상호조합이다. 그러니 독서의 속도에 일반화를 언급하는 것은 우문(愚問)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다치바나의 ‘책 한 권을 쓰려면 100권을 읽어야’ 하는 것에 공감하고 있다. 다치바나는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입력대 출력의 비율이 100대 1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했다. 한편 그는 문학작품을 읽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문학이 주인이라고 한다면 논픽션은 문학의 서자라고 여기는 풍토에 따끔한 충고다. 그러나 그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책은 다름 아닌 논픽션이라고 했다. 저자 또한 논픽션을 지향하고 있다. 다양한 글쓰기가 가능한 사회가 희망이 있다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만큼 교양이란 폭이 넓은 세계다.

일찍이 셔먼 영은『책은 죽었다』에서 책을 인쇄 문화와 책 문화로 나눴다. 전자가 단순히 종이에 뭔가를 인쇄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그 이상의 존재를 말한다. 즉 전자가 전단지 같이 인간의 내적 활동을 촉발시키지 않는 반면에 후자는 ‘깊은 사고를 통해 깊은 대화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그는 책을 ‘기능적인 책’과 ‘안티 책(anti book=나쁜 책)’, 그리고 ‘책’으로 나눴다. 기능적인 책이 교과서나 여행서를 가리킨다면 안티 책은 상업적인 책이며 인쇄 문화였다. 바로 여기에서 책의 죽음이 나온다. 책이 사상이 아닌 물건처럼 팔릴 때다. 책의 매몰비용만을 추구한다면 사상은 죽고 만다.

그래서 저자는『엄마를 부탁해』 같은 베스트셀러에 대한 정서적 거리감을 주저 없이 밝히고 있다. 베스트셀러는 당대의 지표다. 그러나 베스트셀러가 단순히 사람의 오감만을 어루만지며 눈물샘을 자극하고 그것이 마치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다.『엄마를 부탁해』와 같이 엄마의 외도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더 좋은 이유는 간단하다. 전자가 ‘귀신의 궁시렁’에 불과하다면 후자는 ‘삶의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는 것이다. 그리고『엄마를 부탁해』가 베스트셀러여서 마치 수준 높은 문학 작품으로 맞아떨어지는 것은 위조술에 지나치 않다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저자의 독설(讀說)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책 읽는 일은 도(道)가 아니라 현실로 돌아온다고 했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 시대의 ‘아웃사이더’라고 해도 무방하다. 콜린 윌슨은『아웃사이더』에서 “병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문명 속에서 자기가 병자라는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간이 아웃사이더”라고 했다. 즉 아웃사이더는 ‘진리의 희생자’라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데카르트의 순간’을 전복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가 진리와 만나는 방법에 있어 데카르트의 순간은 상식적이다. 이것은 곧 ‘자기 인식’이다. 하지만 저자는 자기 인식 보다는 ‘자기 배려’가 중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자기 인식이 자기 수련이라는 점진적 변화가 없는 반면에 자기 배려는 자기 수양의 과정이며 타자에 대한 배려이며 더 나아가 공공선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독서가 중요하다는 것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래서 장정일의 독서 일기인 이 책은 매우 의미가 남다르다. 저자의 관심사는 다름 아닌 ‘독서는 자기 배려’라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돈 한푼 안 쓰고 1년 살기
마크 보일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은 뭘까? 이러한 질문에 어렵지 않게 답하는 것이 ‘의식주’다. 돌이켜보면 의식주에 대한 고민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예전보다는 살기 좋아졌다고 하지만 갈수록 부담이 커지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의 욕망은 보다 더 좋은 의식주를 충족하기 위해 땀을 흘리고 있다. 이로 인해 우리는 돈의 지배를 달갑지 않게 받고 있다. 의식주에 대한 고민에서 자유롭다고 한다면 하루하루를 돈을 벌기 위해 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삶을 즐길 것이다. 그러나 의식주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돈과 끊임없이 사투를 벌어야 한다. 이러한 무한경쟁에서 승자는 당연히 돈이다. 돈만 주면 다 되는 세상이 아닌가? 그러니 돈 없이 산다는 것은 얼마나 무모한 도전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 의식주는 돈의 위조품에 불과하다.


그래서 ‘프리코노미’(freeconomy)운동을 벌이고 있는 마크 보일을 주목하게 되었다. 그는 놀랍게도 돈의 문명에 대해 빛과 소금을 선물해주고 있다. 그의『돈 한푼 안 쓰고 1년 살기』는 우리들 눈으로 허구 같지만 사실이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그의 열망이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하여 자연과 더불어 펼쳐지고 있다. 정말로 ‘돈 한푼 안 쓰고 1년 살기’가 가능할까? 라는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오히려 우리가 돈을 위해 일한다. 돈이 이 세상을 접수하고 말았다, 라는 저자의 충고를 깊이 있게 받아 들여야 했다. 더구나 ‘화폐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불평등과 환경파괴와 인간에 대한 경멸을 추진하는 한 시스템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우리에게 당면한 지구의 위기다. 신용경색이 구제받을 수 있다면 조지 몬비오트가 ‘자연경색’(nature crunch)은 구제 받을 없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였다.


이 책을 보면 자연경색은 우리들이 돈과 수많은 갈등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저자가 말한 ‘돈이 곧 빚이다’라는 은유는 매우 시사하는 바가 남다르다. 그래서 저자는 ‘응용 영성’(applied spirituality)을 실천하고자 했다. 응용 영성이란 나의 믿음들을 물질적인 세계에적용하는 것이다. 저자는 머리와 가슴과 손 사이에 모순이 적을수록 정직한 삶에 그만큼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믿었다. 즉, 돈 없이 사는 삶에서 비(非)물질적인 혜택을 본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누군가의 삶을 더욱 즐겁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당신이 무엇인가를 아낌없이 준다면 그 행위는 유대와 우정을 돈독하고 그 결과 밝은 공동체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충돌이 아니라 공동체를 투쟁이 아니라 우정을 그리고 지구의 모든 종(種)들과 화합하는 것을 원했다.


저자는 ‘돈 한푼 안 쓰고 1년 살기’라는 목표를 실천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규칙을 정했다. 먼저 ‘노 머니’에 관한 원칙이다. 1년 동안 어떠한 돈도 받을 수 없고 지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정상’에 관한 원칙이다. 1년 동안 나 스스로 해결하며 살아가겠지만 그렇다고 친구가 전기를 켠다고 해서 그 방을 나가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받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남에게 베푸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위대한 재능의 하나였다. 셋째, 다음 사람에게 베푸는 행위에 관한 원칙이다. ‘다음 사람에게 베풀기’(pay it forward)는 무조건적이 베풂이다. 넷째, 타인에 대한 존경에 관한 원칙이다. 다른 사람의 희망을 존중해준다면 그 사람도 당신의 생활방식을 존경해줄 것이다. 다섯째, ‘화석연료 반대’에 대한 원칙이다. 국경을 넘는 것처럼 걸어서나 자전거로 불가능한 여행일 경우만 히치하이킹 한다는 것이다. 여섯째 경비 선(先)지급 불가에 관한 원칙이다. 평소 예상할 수 있는 청구서에 대해 돈을 미리 지급해서는 안 된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저자가 말한 ‘돈 한푼 안 쓰고 1년 살기’라는 체험을 다양하게 공감할 수 이었다. 저자 말대로 돈을 포기한 삶의 구석구석은 황량했다. 그것은 그 삶 자체가 힘들어서 아니라 현대 서구 사회에 사는 사람들이 안락에 너무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소비지상주의가 우리의 행복을 비틀거리게 한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에게 소비지상주의는 아마도 정상적인 삶이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부유해졌는데도 여전히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만족할 줄 모르고 언제나 더 많은 것을 바라는 데 있다. 그래서 저자가 지향하는 ‘슬로우 라이프’는 아주 소중한 삶의 지혜다. 단순히 전통적인 기술을 사용하는 경이로움이거나 환겨에 이로운 점이 많다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 보다는 자신이 사용하는 물건과 더욱 가까워질수록 감사의 마음이 더욱 커지는 덕분에 있다.


일찍이 E. F. 슈마허는『자발적 가난』에서 삶에 있어 ‘직선의 논리’와 ‘곡선의 논리’를 말했다. 직선의 논리가 많음이 곧 많음이라고 한다면 곡선의 논리는 적음이 곧 많음이라고 했다. 전자가 생존의 논리를 위한 것이라면 후자는 삶의 가치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부(富)가 가져오는 문제에 있어 전자가 탐욕스러운 이기주의자라고 한다면 후자는 자발적 가난이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돈의 지배에 대한 비판 의식과 돈 한푼 안 쓰고 1년 살기를 직접 부대끼며 느낀 실존적 고민은 다름 아닌 ‘베풂의 정신’이었다. 즉 아무런 보답도 생각하지 않고 어떤 사람에게 베풀면 당신도 어떤 도움이 필요할 때 무료로 받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주는 행위와 받는 행위의 유기적 흐름이며 마법의 댄스다. 그래서 우리가 마법의 댄스와 함께 여럿이 춤을 추면서 돈의 망령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떨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마음짐승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헤르타 뮐러의 소설은 ‘언어의 향연’이 안개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녀의 조어법(造語法)을 빌리자면 ‘언어안개’라고 할 수 있다. 언어안개 속에서 어디로 가야하는지 말해 줄 사람은 없으리라.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불안한 길을 오직 ‘나’만이 언어들을 주섬주섬 챙겨야 한다. 작가에게 루마니아의 독재 상황은 치명적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소설 속에서 주고받은 말들은 간결하면서도 어둡게 부서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독특한 은유(隱喩)라는 간절함이 삶의 메마름을 적셨다. 이번『마음짐승』도 마찬가지다. ‘마음’과 ‘짐승’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언어를 가지고 작가는 ‘마음짐승’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작가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도 정작 그녀의 언어는 시적이며 은유적이라 우리는 남몰래 가슴에 새길 수밖에 없다. 

『마음짐승』을 찬찬히 펼치면 루마니아 독채 치하에서 대학생 롤라의 죽음이 있고 죽음을 전후로 작중화자인 ‘나’와 에드가, 쿠르트, 게오르크라는 세 남자와의 얽히고설킨 굵직하게 아픈 시간들이 있다. 얼굴에 빈곤한 지방을 가졌던 롤라는 자신이 살던 메마른(굶주림) 고향을 떠나 도시로 왔다. 메마름이 모든 것을 먹어치웠지만 롤라는 하얀 셔츠를 입은 남자가 곧 ‘내 사랑’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그녀에게는 맹목적인 증오가 있었다. 맹목적인 증오란 구내식당에서 접시 위의 고기를 먹는데 숟가락만 먹는 것이다. 나이프와 포크를 쓸 수 있으면 그녀가 굳이 짐승처럼 먹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짐승처럼 먹어야 했다. 

만약 롤라가 ‘내 사랑’을 하고자 했다면 어땠을까? 자살했을까? 아마도 그녀는 자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4년 뒤에 내 사랑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 사랑은 한 밤중에 전차를 타는 남자와 달랐다. 내 사랑은 하얀 셔츠를 입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을 부시게 하는 남자다. 반면에 한 밤중에 전차를 타는 남자는 옷 속에 그림자만 들어 있다. 그러나 독재 치하에서 그녀의 맹목적인 증오는 더 이상 숨 쉴 구멍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빨간 수첩을 가진 당원에도 불구하고 당은 그녀를 경멸했고 국가적 수치로 여겼다. 이유인즉 그녀가 자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자살은 자살로 끝나지 않고 침묵을 남겼다. 그녀의 친구 에드가의 말대로 ‘침묵하면 불편했지만’ 오히려 침묵으로도 많은 것을 짓밟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침묵…그럴 것이다. 삶의 소중한 것을 침묵으로 무겁게 지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런가 하면 이 소설에서 보듯 ‘마음짐승’을 쉬게 하는 것인지 모른다. 이 소설을 읽으면 사람은 누구나 마음짐승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먼저 ‘생쥐’일 수 있다. 털을 벗어놓고 무(無)로 사라지는 것이다. 소설에 따르면 그녀는 다른 여자의 남편을 빼앗는다. 그 남자는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 노래하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얻는다. 그녀가 그를 갖고자 하므로 그가 아닌, 그의 들판을. 그리고 그녀는 그를 소유한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지만 그녀는 그를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무인간’일 수도 있다. 누군가로부터 부당한 취급을 당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까? 문득 삶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나무인간인지 아닌지 의심스러워진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나무인간처럼 지루한 삶을 버티며 살 수 있을까? 나무인간이 독재자들이 만든 하나의 허영이라고 한다면 사는 동안 우리는 흉측한 짐승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른 짐승과 달리 묘지를 만든다. 아이러니하게도 묘지는 독재자들이 가장 즐기는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 나오는 청춘들은 묘지 만드는 것을 방해하고자 한다. 단지 이 세상에서 ‘걷고, 먹고, 자고, 다른 누군가를 사랑했다고’ 해서 묘지를 만드는 것은 그들에게는 독재자의 오류보다도 더 가장 큰 오류였다. 이 소설에서 ‘나’는 어떤 죽음이든 자루와 같다고 했다. 그 자루에는 허리띠, 창문, 호두와 노끈이 들어 있다. 자루에 든 네 가지는 곧 맹목적인 눈물과 같다. 

이중에서 호두와 관련된 테레자의 죽음은 남다르다. 사람들은 벼락출세한 자, 자기를 기만한 자, 양심불량자를 ‘자두 처먹은 놈’일고 불렀다. 또한 독재자를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내’가 사랑했던 테레자의 겨드랑이 아래에 죽음의 덩어리인 호두가 있었다. ‘나’에게 그녀의 호두가 문제인 것은 ‘호두는 우리에게 대항했으며 모든 사랑에 대항해 자랐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모든 걸 누설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우리의 우정을 갉아 먹었다. 어디까지가 사랑이고 어디까지가 증오인지 불분명했으나 사랑이 풀과 지푸라기처럼 섞여 자라나길 바랐다. 하지만 ‘나’에게 사랑은 가장 어리석은 식물이 되고 말았다. 

『마음짐승』을 쓴 헤르타 뮐러는「문학이 증인이 될 수 있는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꽃잎과 나뭇잎을 먹었다. 그들과 내 혀가 친척이 될 수 있도록, 우리가 비슷해질 수 있도록. 왜냐하면 그들은 알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나는 아니었다.’ 그들(식물)은 사랑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왜 사랑을 모르는 것일까? 우리 사는 곳이 지옥이며 더욱 더 지옥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부조리한 권력의 생리 때문일까? 부패한 권력 앞에서 사랑은 작아질 수밖에 없는 것인지 모른다. 좀 더 불안하게, 좀 더 하찮게… 작가에 따르면 하찮음은 상실이 이미 습관이 되었을 때의 정거장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2010년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은 한 둘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욕망의 바벨탑이 허물어지고 세워지기를 계속하고 있다. 일찍이 역사학자인 부르크하르트는『세계사적 고찰』에서 ‘우리는 경험을 통해 어느 한 순간 영리해지기 보다는 영원히 지혜로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2009년 노벨문학상 작가인 헤르타 뮐러를 통해 우리는 루마니아의 참다한 역사를 새로운 서사구조로 눈여겨보게 되었다. 작가와 루마니아의 역사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었다. 차우셰스쿠 정권하에서 하루하루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겪었다. 이로 인해 작가는 생의 의지를 깨달았다. 작가가 말하는 생의 의지는『마음짐승』에서는 에밀 시오랑이 말한 ‘이유 없는 불안’이었다. 다시 말하면 독재하의 이유 없는 불안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실존의 물음부터 인간을 소외시킨다는 것이다. 

『마음짐승』은 불행하다. 겉보기에는 자살이라고 하더라도 내면에는 타살의 흔적들을 떨쳐 버릴 수 없다. 그러나 자살, 타살보다 더 생각해봐야 할 것은 다름 아닌 ‘피부’다. 폴 발레리는 ‘가장 깊은 것은 피부다’라고 노래한 바 있다.『마음짐승』에서 빈곤한 지방을 가진 얼굴이며 이발사와 손톱가위는 피부를 억압한다. 그러보면 이 세상에서 자신의 피부를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스럽게 일깨워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나무인간이 된다면 피부는 부서지기 쉬우며 감정의 호르몬은 더 부서지기 쉽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