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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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언제였던가? 그때의 혼란스러움은 두려웠다. 추석을 보내고 귀경하는 길이었다. 어둠이 달라붙었을 때 이미 고속도로는 주차장이나 다름없었다. 끈적거리는 지루함이 못내 싫었을까? 운전을 하고 있던 친구가 국도로 달리자고 했다. 다행히 차의 속도는 빨라졌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질흙같이 어둡고 낯선 곳을 자동차의 하이빔 만으로 의지한 체 돌파하기에는 친구와 나는 나약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방향을 잃어버렸고 때로는 길을 헤매다 사고 날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초초하게 보내다가 문득 마을입구에 ‘생사리(生死里)’라고 적혀 있는 대리석을 지나쳤다. 생사리….

 
공지영의『도가니』를 읽고 나니 ‘생사리’가 떠올랐다. 무슨 까닭인지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당혹스러움은 이 소설에 나오는 강인호 앞에 펼쳐진 무진과 생사가 다르지 않다는 데 있었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지도책과 도로 곳곳에 표지판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엉뚱한 길을 달렸던 것일까? 우리가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이 그렇게 쉽게 어둠에 파묻혀 쓸모없게 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백지상태에서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생사의 수많은 갈림길에서 공지영이 선택한 무진시(霧津市)는 암담했다. 무진 즉 안개가 1차적인 이유였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안개 탓이다.’라는 일종의 위선에 찬 인간들의 끔직한 현실이 유독 눈에 띄었다. 이것은 정말이지 감추고 싶고 드러내고 싶지 않은 추한 안개였다. 공지영 말대로 광란의 도가니였다. 남들과 달리 몸을 불편한 장애아에게 자의반 타의반 장애시설로 수용되는 것은 단지 그들만의 행복은 아니었다. 장애아를 보살펴야 하는 부모들, 더 나아가 이들 모두들 책임져야 할 자애(慈愛)학원에게도 행복이었다.

하지만 자애학원에서 잘 먹고 잘 놀아야 할 장애아들에게 행복은 멀리 있었다. 장애아들에게는 당장의 배고픔과 외로움이 눈앞에 있었다. 그래서 무차별적인 폭력을 가하는 선생들 앞에서 장애아들은 눈치를 봐야 했다. 이와는 달리 장애아들의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그들의 성(性)을 장난감마냥 가지고 놀았던 학원 이사장 앞에서 그들은 눈치를 볼 수 없었다. 눈치를 버려야 할 만큼 장애아들의 마음은 이미 병들어 있었다. 성폭행을 당한 장애아 중에서 한명은 절벽에서 떨어졌고 또 한명은 기찻길에서 사고를 당했다. 그러나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장애아들의 절박한 입장은 철저하게 가려졌다. 이 모두가 “안개 탓”이었다.

『도가니』를 통해 자애학원의 더러운 현실이 생생하게 드러났다. 장애아들을 성폭행한 짐승같은 학원 이사장 때문에 가슴 한 구석이 아릿하게 물컹거렸다. 그리고 이내 분노의 도가니가 되었다. 왜 사람들은 행복이라는 이름을 내세우며 불행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성폭행을 당했던 장애아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를 냉정하게 심판해야 할 법(法)은 전혀 119 구조대 같지 않았다. 오히려 가해자인 학원 이사장의 잘못을 한 순간의 불장난이라고 하면서 물러서고 말았다. 법마저 걷잡을 수 없는 양심이 시커멓게 타들어갈 지경이니 굳이 다른 사람들을 몹쓸 인간이라고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라는 자괴감이 맴돌았다. 정말이지 “학원 이사장과 장애아의 인권이 같은 줄 알아요?”라는 뜨끔한 질문에 “예‘라고 답하지 못했다. 학원 이사장의 잘못은 분명한데 재판 결과 놀랍게도 그는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오히려 꼼짝 못하고 갇혀버리는 것은 정의(正義)였다.

책을 읽으면서 내 마음은 몇 번이나 벼락을 치면서 꽝꽝 울렸다. 맞딱드리고 싶지 않은 현실에 불편했다. 그리고 분노했다. “재판장 당신을 고소합니다. 당신은 죽은 거나 마찬가집니다.”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싶었다. 이렇게까지 법정에서 소란을 일으켜야 했던 것은 작가 말대로 진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단점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진실이 게으르다는 것’이었다. 즉 ‘진실 아닌 것들이 부단히 노력하며 모순된 점을 자고 분을 바르며 부지런을 떠는 동안 진실은 그저 누워서 감이 입에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는 절망때문이었다.

진실의 경계(境界)! 지금 이 말이 대수롭지 않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기간제 교사로 일했던 강인호가 자애학원의 비리에 맞서 싸우다가 끝내는 패배한 짐승이 되어 도망간 것을 굳이 탓할 까닭이 없어보였다. 만약 강인호같은 막막한 상황이었다면 나또한 그랬을 것이다. 눈 한번 감으라는 아내의 바람을 외면하고 남을 위해 그토록 자신있게 할 수는 있어도 부끄러운 자신의 결점이 드러날 때 설령 어렵게 진실을 얻었다고 해도 진실을 지켜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세상은 동화도 환상도 아니었다. 세상이 자기 뜻대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소설을 헤아려보면 그 안에는 공지영 만의 뜨거운 것이 담겨져 있었다. 작가의 전작을 읽어본 사람이 아니더라도 책을 읽고 이렇게까지 불편해지는 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더 깊게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공지영에게는 인생의 절박한 냄새가 확 풍겨왔다.『도가니』도 예외는 아니었다. 도덕적 폐허 시대에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깨닫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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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국왕의 일생 ㅣ 규장각 교양총서 1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엮음 / 글항아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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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의간식(宵衣旰食)이라는 말이 있다. 임금이 국정을 수행하느라 새벽에 옷을 입고 일을 시작하여 한 밤에 밥을 먹는 다는 뜻이다. 정말로 왕이 그랬을까? 그런데『승정원일기』를 보면 국왕의 바쁜 하루가 적혀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역대 왕 중에서 정조가 가장 바쁘게 국정을 다스렸음을 알 수 있다. 정조의 하루 일과는 아침 8시부터 시작되어 저녁 9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이로 인해 왕의 업무를 ‘만기(萬機)“라고 달리 부르게 되었다.

이러한 내용을 깔끔하게 담아낸 책이 바로 규장각한국학연구원들이 엮은『조선 국왕의 일생』이다. 이 책 덕분에 조선 국왕에 대한 이해를 한 단계 높일 수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사극(史劇)이라는 낡고 오래된 이미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였다. 저자들이 하나같이 규장각의 다양한 기록물들을 두루 살피면서 조선 국왕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조명하고 있어 충분히 읽어볼 만 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규장각은 조선왕조 최고의 도서관이며 왕립학술기관이었다.

먼저 왕의 학문, 제왕학(帝王學)을 살펴보면 성리학의 천명론(天命論)에 있다. 성리학 이전까지는 절대적인군주였다. 하지만 성리학의 영향으로 국왕이 신의 대리인이 아니라 인간들의 우두머리 즉, 수양을 통해 완성시키고 도달해야 하는 ‘미완성의 우두머리’로 변화되었다. 이로 인해 전자의 학문이 패도(覇道)의『정관정요』에 있었다면 후자의 학문은 왕도(王道)의『대학연의』에 있었다. 특히 왕도의 성리학적 수양론은 조선 국왕을 성인 군주로 만드는 사상이었다.

다음으로 왕실의 건강법을 살펴보면 식치(食治)이다. 『예기』에서 예(禮)는 일이 생기기 전에 제재하는 것이요, 법(法)은 생긴 후에 제재하는 것이라고 했다. 유학의 근본은 덕치(德治)인데 이것이 곧 예치(禮治)다. 이러한 논리는 질병의 치료에도 적용되었다. 병이 나기 전에 양생(養生)이 중요했다. 여기에서 덕치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식치며 법치에 해당하는 것이 약치(藥治)다.  

그리고 임금이 사는 집, 궁궐의 전각 이름에는 성리학적 군주가 되는 방법이 담겨져 있다. 가령 경복궁을 살펴보면 왕실의 침전(寢殿)인 강녕전(康寧殿), 편전(便殿)인 사정전(思政殿), 정전(正殿)인 근정전(勤政殿)으로 각각 구분되었다. 이중에서 가장 ‘조선적인’ 특색을 나타내는 것은 편전인데 일상적인 정치 행위가 펼쳐지는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한편, 이 책은 왕의 반쪽인 왕비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왕비는 그 자체가 정치적 존재였다. 즉 왕비가 된다는 것부터 정치적이며, 왕자를 낳는 것도 정치적이며, 왕을 보살피는 것도 정치적이었다. 이런 왕비가 되는 과정은 신부 공채라 할 수 있는 삼간택(三揀擇)의 절차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특채였다. 즉 간택은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앞서 말했듯 왕비의 가장 중요한 책임은 왕자를 낳는 것이었다. 그래서 왕비의 침전인 경복궁의 교태전(交泰殿)과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의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선 국왕의 일생을 통해 조선의 궁중 문화를 두루 살펴볼 수 있는 이 책의 의미는 남다르다. 단순한 가르침이거나 즐거움에 있지는 않았다. 일찍이 헤럴드 블롬은『세계 문학의 천재들』에서 “나는 지혜가 삶을 위한 문학의 진정한 유용성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덧붙이자면 위대한 문학이란 곧 지혜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규장각에 있는 다양한 기록물들을 위대한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떨까? 이 책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또 하나의 귀중한 지혜를 보여주는 좋은 길잡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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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를 껴안고 -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일본과 일본인
존 다우어 지음, 최은석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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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은 어떻게 재건되었을까?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더글러스 맥아더에 있었다. SCAP(연합국 사령부)가 맥아더 사령부라고 불릴 정도였다. 전후 독일과 달리 일본에서는 미국만이 통제권을 행사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 식민지에 대한 맥아더의 메시아적 열정이 폭발적으로 작용했다. 전쟁으로 인한 황폐해진 일본을 안정시키는 핵심으로 군국주의 일소와 민주화를 구축했다. 이것이 그의 ‘미국화’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맥아더에게는 일본의 특수한 권력 형태인 ‘천황(天皇)’을 간과할 수 없었다. 존 다우어은『패배를 껴안기』에서 이 문제에 대한 갈등을 치밀하게 서술하고 있다. 대부분의 책들이 전쟁의 당사자인 일본에 대한 반감을 강조하고 있어 정작 패전국 일본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강대국이 되었는가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반면에 이 책은 제목에 나와 있듯 ‘승자(미국)과 패자(일본)의 껴안기’라는 전후 문화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이 책은 먼저 승자의 ‘천황 껴안기’를 다루고 있다. 승자에게 전쟁의 최고 책임자인 천황에 대한 처벌은 불가피했다. 일본은 천황에 의해 신민(臣民)화된 나라였다. 그러나 승자의 점령 후 일본 국민의 교다쓰(허탈) 상태라는 심리적 붕괴가 일본 최대의 적이 되었다. 이런 불안함을 느낀 승자는 천황을 평화와 민주주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즉 신격화된 천황을 국민에게라는 ‘쐐기정책’을 펼쳤다.

다음으로 승자의 ‘관료주의 껴안기’이다. 앞서 말했듯 승자에게 일본은 문화적으로 이국적이었다. 승자의 문화만으로 통치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승자의 선택은 일본을 직접이 아닌 간접통치를 하게 되었다. 이른바 상명하복이라는 관료주의는 일본 정치체제 중에서도 가장 비민주적인 기구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일본의 민주화를 실현하려고 했던 승자의 정책은 관료주의를 통해 ‘신식민지혁명’에 불과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승자의 시민이 되었다.

이렇듯 승자의 껴안기가 ‘위로부터의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패자의 껴안기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이 책을 좀 더 주목하게 되는 부분이었다. 가령, 가스토리 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 종전 후 일본에서는 매춘과 퇴폐가 성행하였다. 이는 일본 여성의 정조를 지키는 방파제였지만 패전에 뒤이은 하위문화가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단 한명의 미국인만을 상대하는 판판은 미국식 소비주의 문화의 선구자인 동시에 충성(忠誠)을 보여 줄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래서 가스토리 문화에서는 섹스와 혁명이 같았으며 ‘니쿠다이’가 칭송되면서 개인의 육체가 관능화되었다.

한편, 패자의 '과학의 껴안기'는 상당히 이색적이었다. 일본은 패전의 원인에 대한 책임을 실용주의적으로 직결시켰다. 원자폭탄에 항복했던 일본은 패전의 결정적 요인을 바로 ‘사이언스’라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그들은 발 빠르게 군수산업을 기계공업으로 전환하면서 ‘과학 기술’을 가속화하였다. 더구나 한국전쟁이라는 뜻밖의 행운을 이용해서 일본은 에드워즈 데밍(W.Edwards Deming)이 제창한 ‘품질 관리’를 받아들여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일찍이 루스 베네딕트는『국화와 칼』에서 일본의 이중적인 성격을 말한 바 있다. 국화와 칼이 말해주듯 이 책에서 그녀는 ‘그러나 또한(but also)'이라는 틀로 일본을 이해하고자 했다. 그런 면에서 전후 일본에 관한 최고의 역사서인 존 다우어의『패배를 껴안기』는 껴안기를 패전 후 다른 세계로 도약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보여주고 있다. 국화와 칼에 견주어 보면 ‘육체와 과학’이 아닐까?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일본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이 아니라 일본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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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데카르트를 읽으면 행복한가요? 

 

말로 표현하기가 참 힘들어. 표현하려고 하면 혼란스럽기만 하고. 어떤 땐 이런 생각이 들어. ‘이런 것 저런 것 고민하는 나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내가 거만하고 몹쓸 인간이라서 그런 걸지도 몰라. 나도 남들 가는 길을 가면서 그럭저럭 세상사에 순응하면서 사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 내가 제안하는 삶이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얼마나 더 풍성한지 설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신적 세계를 추구하는 삶이 얼마나 즐겁고, 얼마나 많을 것을 경험할 수 있는지 당신에게 알려 줄 수만 있다면…그건 정말 끝없는 즐거움이고, 말로 형언하기 힘든 행복이야. -서머싯 몸의『면도날』중에서







여기 세 종류의 면도날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인라인의 면도날(Heinleini Razor)입니다. 이 면도날은 로버트 하인라인의『스타쉽트루퍼스』에 나오는데 ‘어리석음(stupidity)으로 인한 일을 악의(malice) 탓으로 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사기꾼에게 속아 친구 돈마저 잃어버렸을 때 그의 잘못은 어리석음에 있습니다. 혹 그 사람을 사기꾼과 한패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입니다. 이 면도날은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가장 간단하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복잡한 설명은 싹둑 잘라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서머싯 몸의 면도날(Somerse Maugham’s Razor)입니다. 이 면도날은 아직까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할 때 우리의 가슴에 선명한 자국을 남깁니다. 서머싯 몸의 『면도날』에 나오는 래리는 삶이 단지 먹고살기 위해 살아야 하는지 고민합니다. 그럴 때 사람은 누구나 자기 확신이라는 극적이 순간과 부딪히게 마련입니다. 언제 찾아오겠다고 어떻게 해서 그렇다는 것도 없이 어느 순간 불쑥 삶의 강렬한 열정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때 조종사였던 래리는 전쟁터에서 허망하게 전사한 전우를 보고 난 후 백지상태가 되어버립니다. 백지상태에 놓이면서 그는 세상 모든 일을 알았던 것은 잊어버리고 오히려 세상에 대해 몰랐던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솟아오른 절망감으로 인해 그는 자신의 가치에 대한 쓰디쓴 진실 때문에 고민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그는 전쟁이 끝나고 고향에 돌아왔지만 많은 사람의 기대감을 저버리고 그 무엇을 찾아 미지의 삶으로 외로운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이런 그를 어느 누구보다도 안타깝게 바라보며 제발 사랑하는 사람 곁으로 돌아오라고 호소하는 사람은 약혼녀 이사벨이었습니다. 전쟁이 아니었더라면 래리와 이사벨은 아무 걱정없이 결혼했을 것입니다. 또한 이사벨에게 모피코트를 사주기 위해 래리는 남들처럼 적당한 일을 하면서 돈을 벌었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평범한 삶이었지만 동시에 안전한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평범하게 살아도 행복을 누리지 못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래리는 이 모든 것이 싫다고 했습니다. 래리 말대로 ‘아무것도 안하고 싶었고 돈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보다는 공부하고자 하는 욕구가 뼛속 깊이 새겨졌습니다.

일찍이 E.F. 슈마허는『자발적 가난』에서 삶에 있어 직선의 논리와 곡선의 논리를 말합니다. 직선의 논리가 많음이 곧 많음이라고 한다면 곡선의 논리는 적음이 곧 많음이라고 했습니다. 전자가 생존의 논리를 위한 것이라면 후자는 삶을 가치 있게 만든 것입니다. 이를 부(富)가 가져오는 문제에 있어 전자가 탐욕스러운 이기주의자라고 한다면 후자는 자발적 가난이었습니다.

인생의 앞날에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작가 말대로 사람이란 오로지 그 삶 자체가 전부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둘러싼 모든 요소들이 그 사람을 만듭니다. 돈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어느 정도 돈에는 개인적인 자존심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인생은 짧고 할 일은 많은 그래서 1분 1초를 낭비할 시간도 없는 상태에서 돈으로부터 자유는 시간을 절약하는데 빼놓을 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래리는 돈보다는 자기 자신의 가치에 대한 사랑을 열망합니다. 앞서 말했듯 래리에게 돈은 자발적 가난이라는 최소한의 버팀목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래리가 평범한 삶을 거부할 수 있었던 것은 삶을 두루두루 살피면서도 데카르트를 읽었기 때문입니다. 래리는 데카르트를 읽으면서 ‘평온함, 품격, 명석함’을 배웠습니다.

어느 누구는 래리를 나약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정말이지 현실감각이라고 찾기 힘들다고 쓴소리를 할 것입니다. 남들처럼 공부를 하거나 돈을 벌어야 하는데도 래리는 자신의 즐거움을 찾아 어두운 싸움을 합니다. 비록 그 싸움에서 실패한다고 해도 끝가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데카르트를 읽으며 맛보는 순수한 기쁨은 실패를 잊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데카르트를 읽지 않는 것일까요? 데카르트를 읽으면 우리는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에게는 지혜가 자유의 수단이었습니다. 반대로 우리에게는 데카르트가 골치 아픈 문제로 여겨졌습니다. 성공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돈인데 데카르트는 돈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데카르트를 사랑하는 래리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내가 가지 못한 길을 가고 있다는 용기 있는 행동이 마냥 부러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은 지혜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단지 래리 혼자만의 작은 행복이 아니었습니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에게 행복한 삶을 살게 하는 면도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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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자히르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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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자히르!

당신은 우리를 어디론가 떠나게 했습니다. 당신을 사랑해서 그렇습니다. 일찍이 스탕달은 『연애론』에서 사랑에 눈 먼 사람을 말했습니다. 사랑하기 전에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뭇가지가 사랑한 후에 놀랍게도 다이아몬드 가지로 반짝인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사랑은 다이아몬드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머릿속을 스치는 남녀 간의 흔한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남녀 간의 사랑은 결혼 문제가 놓여 있지만 빛이 납니다. 반면에 오자히르! 당신을 사랑하면 웬일인지 우리는 고독해졌습니다. 당신은 어느 누구보다도 우리의 외로움을 파고들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사랑은 어두웠습니다. 남녀 간의 사랑이 겉을 화려하게 하는 타인의 사랑이라면 당신과의 사랑은 나를 정면으로 만나는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의 노예인가요? 자유인가요?

파울로 코엘료의 『오 자히르』에서 처음 만난 당신을 통해 사랑의 앞모습과 뒷모습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종군 여기자 에스테르는 어느 날 당신을 찾아 길을 떠납니다. 에스테르가 그랬던 것처럼 나 또한 그랬습니다.

에스테르는 떠나기 전 그동안 같이 살아온 남편에게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털어놓았습니다. 즉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이 좋으냐는 질문에 “예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당신 없이도 살 수 있다고? 하는 질문에도 똑같이“예스”라고 말했습니다. 그녀의 대답을 곱씹어 보면 사랑의 앞모습은 전자이며 사랑의 뒷모습은 후자였습니다. 전자가 사랑의 노예라고 한다면 후자는 사랑의 자유였습니다.

그녀가 말하는 사랑의 자유는 다름 아닌 ‘자아 찾기 여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에 매달리면서 어쩔 수 없이 끌려가야 한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절망과 동행해야 합니다. 그녀는 결코 이런 삶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절망은 죽음보다 훨씬 무섭다는 것을 그녀는 알았습니다. 절망의 굴레는 그녀 말대로 어제와 같은 삶입니다.

오늘이 어제의 허기를 채우며 가까스로 산다고 한다면 ‘어떠한 모험도 할 수 없는 철저한 외로움’이라는 헤아릴 수 없는 불행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녀의 슬픔을 어루만지면서 어떻게 불쑥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떠나버릴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었습니다.

 

사랑은 피 묻은 천조각인가요?

그녀는 전쟁터에서 삶과 죽음을 들여다봤습니다. 삶이 총성 없는 전쟁이라고 한다면 총알이 빗발치는 진짜 전쟁에서 그녀가 찾고자 했던 것은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피비린내 나는 인간의 어두움이 속살을 드러냈지만 그녀는 전쟁터에서 뭔가 중요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전쟁 밖에서 이루어지는 로맨틱한 사랑은 사랑의 한계 중에서도 ‘신의 사랑’에 불과했습니다. 신의 사랑이란 한 사람이 자신의 배우자의 모든 면을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치명상을 입고 죽어가는 군인이 의사를 부르지 않고 자신의 피 묻은 천 조각을 주면서 ‘아들과 아내에게 내가 사랑한다고 전해주세요.’라고 가슴 뭉클한 사연을 통해 그녀는 우리는 혼자가 아닌 같이 살 수 밖에 존재라는 것이 뼛속 깊이 사무쳤습니다. 즉 ‘우리가 이웃들을 사랑한다면 그건 곧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면 모든 것은 제자리를 되찾을 것’이라고 들려주었습니다.

사랑의 거리는 143,5㎝?

오자히르! 당신은 사랑을 잃지 않고 살아갈 때 비로소 행복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파편화된 삶의 고통에 맞서며 우리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라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게 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에 치여 혹은 어떻게 해서든 상대방의 관심을 끌어 보려는 사랑 때문에 결국에는 나 자신의 가치가 제로인 상태에서 당신의 사랑은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기찻길 선로 같은 사랑이 얼마나 활력이 없는지 새삼 느꼈습니다. 기찻길 선로는 143,5㎝로 반듯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그 길이를 줄이거나 늘어나게 할 수 없습니다. 기찻길 선로 같은 규칙적인 사랑은 사랑을 주고받는 사람의 오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당신과 나 사이의 사랑은 아마도 그 거리를 찾아내는 여행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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