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기고 싶은 명문장 - 흔들리는 나를 세우는 고전의 단단한 가르침
박수밀.송원찬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5월
평점 :
품절


시험 삼아 내 입으로 읽으니, 이를 듣는 것은 나의 귀였다. 내 팔로 글씨를 쓰니, 이를 감상하는 것은 내 눈이었다. 내가 나를 벗으로 삼았거니, 다시 무엇을 한탄하랴!

이덕무,『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

 

옛 지식인 이덕무 선생을 만난 것은 뜻밖의 기쁨이었다. 책을 좋아한다고 사뭇 만족했지만 정작 마땅한 필명 하나 못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간서치(看書痴) 이덕무 선생을 만난 것이다. 책만 보는 바보만으로도 부족했는지 스스로를 오우아거사(吾友我居士)라고 하지 않았던가? 오죽 했으면 내가 나를 벗으로 삼을 정도였을까? 깨달음의 깊이에 대한 놀랐던 순간부터 오우아거사는 가슴에 새기고 싶은 명문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필명을 쓰며 나 자신의 정체성이 모호했는데 ‘오우아’라는 필명과는 정말이지 벗으로 지낼 만큼 궁합이 잘 맞았다. 가끔씩 서평 때문에 상을 받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오우아라는 필명을 보고는 옆 사람들이 “오~우아!”라고 하면서 감탄사를 터뜨렸다. 기막힌 오우아의 반전이라고 해도 좋을 듯 했다.

 

돌이켜 보면 오우아의 반전은 박수밀, 송원찬이 지은『새기고 싶은 명문장』이 우리의 마음을 맑고 아름답게 때로는 단단하게 설파한 덕분이다. 저자들은 고전을 탐독하면서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어떤 문장이 가슴에 확 꽂혀다, 고 했다. 명문장은 말 그대로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일침(一針)이며 죽비소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좋은 문장이라고 하더라도 어느 누구도 찾지 않으면 여전히 고전이라는 낡은 틀 속에 갇혀버리고 말 것이다. 또 하나 고전의 걸림돌은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읽어도 글 속에 숨은 뜻을 다 헤아리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막막함이다. 저자들은 이런 기대와 우려를 말끔히 씻어 내리며 고전의 명문장을 가려내어 사람들이 읽기에 딱 좋게 새겨 주고 있다.

 

『새기고 싶은 명문장』은 웅숭깊은 고전의 울림을 수신(修身), 결단(決斷), 태도(態度), 의지(意志), 언행(言行), 관계(關係)로 나눠 들려주고 있다. 그래서 고전이라고 해서 고전 속 진리만으로 남는 게 아니라 우리들 삶으로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다.

 

첫째, 수신에서는 무자기(毋自欺)의 정신이다.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라는 세 글자는 내가 평생 동안 힘써온 바이다.

김장생,『사계유고(沙溪遺稿)』, 「시상(諡狀)」

 

수신은 모든 덕목의 시작이며 자기(自己)는 그 주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자기는 자기를 아는 것(自知) 못지않게 무자기(毋自欺) 즉, 자신을 속이지 않아야 한다. 무자기는 많은 지식인들이 자신의 좌우명으로 가장 즐겨 삼은 까닭은 어렵지 않다. 혼탁한 세상을 헤쳐 나가는데 있어 무자기만큼 고언이행(苦言利行)은 없을 것이다. 온갖 감언이설로 우리의 양심이 불편할 때 무자기는 순수한 마음을 찾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결단에서는 독서의 올바른 방법이다.

 

배우되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고, 생각하되 배우지 않으면 위험하다.

『논어(論語)』「위정(爲政)」

 

요즘은 책을 권하는 사회다. 열심히 책을 읽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책만 읽고 그것으로 끝나면 우리는 백면서생을 벗어날 수 없다. 반대로 생각만 하고 책을 읽지 않으면 우리는 독단자라는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책은 공부하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백과사전이며 동시에 마음의 거울이다. 우리가 백과사전에서는 단답형으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반면에 마음의 거울에서는 주관형으로 지혜를 얻을 수 있다. 거울을 맑고 깨끗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사색하면서 독서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셋째, 태도에서는 벽(癖)이다.

 

벽이 없는 사람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일 뿐이다. 대저 벽이라는 글자는 ‘질병’과 ‘편벽됨’에서 나온 것이니, 병 가운데 지나치게 치우친 것이다. 그러나 홀로 자기만의 세계를 개척하는 정신을 갖추고, 전문의 기예를 익히는 것은 종종 벽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가 있다.

박제가, 「백화보서(白花譜序)」

 

누구나 완벽(完璧)해지려고 한다. 그러려면 속된 말로 미쳐야 미친다. 혹, 미치지 못한다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절벽(絶壁)이다. 완벽과 절벽은 벽(癖)을 가진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럼에도 벽을 가진 사람은 비정상적이며 기인(奇人)이라는 부정적인 탓에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정말로 아무 쓸모없는 사람은 벽이 없는 사람이지 않을까? 기인(棄人)이지 않을까?

 

넷째, 의지에서는 지혜의 수고스러움이다.

 

사람이 후덕한 지혜와 능통한 지식이 있는 것은 항상 질병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맹자(孟子)』「진심상(盡心上)」

 

우리가 자주 듣는 말 중에 ‘아는 것이 병’이라는 말이 있다. 아는 것이 너무 적으면 몰라서 그럴 수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아는 것이 너무 많으면 잡념과 망상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모르는 것이 약’이 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아는 것이 병’이라는 숨은 의미는 지혜 그 자체가 병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지혜를 얻는 일이 병을 앓는 것처럼 고생스럽다는 것이다. 만약에 약(藥)으로 처방된 지혜로 살고자 한다면 그것은 병(病)일 것이다. 그러나 고(苦)에서 얻어진 지혜로 살고자 한다면 그것은 약(藥)이 될 것이다.

 

다섯째, 언행에서는 멈춤이다.

 

대저 이른바 지지(止止)라는 것은, 능히 멈춰야 할 곳을 알아 멈추는 것을 말한다. 멈춰야 할 곳이 아닌데도 멈추면, 그 멈춤은 멈출 곳에 멈춘 것이 아니다.

이규보, 「지지헌기(止止軒記)」

 

주마간산(走馬看山), 앞만 보는 인생은 달리는 말과 같아 산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무한 경쟁 때문에 남보다 얼마나 빨리 가느냐에 따라 성공이 좌우된다. 그러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경주가 아니라 멈춤이라 하겠다. 삶을 직선으로만 달리는 것을 다행이라 여기지만 삶의 곡선은 쉬어 가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멈출 곳이 아닌데도 멈추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욕망보다는 미련에 가까워 부끄럽다.

 

여섯째, 관계에서는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다.

 

세상에 백락이 있은 후에야 천리마가 있다. 천리마는 항상 있으나, 백락과 같은 사람은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

한유,「마설(馬說)」

 

모든 일에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가령, 말을 잘 보는 백락(佰樂)과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천리마(天裏馬)가 있다고 하면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먼저일까? 앞서 말한 대로 ‘백락이 있은 후에야 천리마가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천리마가 있다고 한들 천리마를 알아보는 백락이 없다고 한다면 천리마는 여느 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백락의 안목과 백락을 알아보는 안목 중에서 어느 것이 먼저인지 선택하라고 한다면 어떨까? 굳이 우리가 어려운 선택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법구경(法句經)』 중에 다음과 같은 진리가 있다.

 

비록 백년을 살지라도 최상의 진리를 모른다면 그 같은 진리를 알고 사는 그 하루가 훨씬 낫다

 

이 책을 찬찬히 읽어보면 삶의 올바른 긍정의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다. 고전의 단단한 가르침은 백년을 살아온 지혜이다. 이것을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아도 충분하다. 그러나 배움에 있어 뛰어난 명문장은 뛰어난 명문가와 같다는 생각에 망연자실(茫然自失)할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홍길주는『수여난필속(睡餘瀾筆續)』에서“저 사람이 배운 것은 모두 내가 읽은 것이고, 저 사람이 하는 말은 다 내가 아는 것이다. 어찌 저 사람만 우뚝 뛰어나고 나라고 하지 못할 법이 있겠는가?”라고 전혀 뜻밖의 생각을 펼치면서 ‘망연자실이란 자신보다 뛰어난 성취를 이룬 사람의 수준을 따라가려고 분발하는 마음’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삶이 힘들고 외로울 때 고전의 명문장을 벗 삼아 망연자실하는 것도 또 다른 오우아이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킬리만자로의 눈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가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산정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가사 중에서

 

 

이 세상을 숨 가쁘게 살아가는 방식에서 멀리 벗어나고 싶어서 그랬는지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즐겨 불렀다. 하지만 삶의 박자를 전혀 맞추지 못하며 기대에 못 미쳤다. 무엇을 하고 싶은데 나는 한 박자 너무 느리거나 너무 빨랐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타 들어가는 느낌이라는 게 이거구나 싶을 정도로 거짓말로 살아야만 했다. 거짓말은 지금의 삶이 초라하고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변명과 다르지 않았다. 이럴 때 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눈』을 읽는 것은 얼마나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아마도 거짓말이라는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만족할 것이다.

 

 

헤밍웨이의 단편집 제목과 같은 『킬리만자로의 눈』에 나오는 해리는 자신이 거짓말로 살아왔기 때문에 ‘거짓말로 죽어야 한다.’고 하면서 비극적인 삶을 끌어안고 있다. 누구에게나 재능이 있다고 하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 해리의 직업은 작가였다. 그러나 그가 사랑했던 여자는 불행하게도 그의 재능의 파괴자였다. 사랑하면 더 완전한 인간에 가까워지리라 믿었는데 오히려 그는 ‘등뼈가 부러졌다는 이유로 자신을 물어버린 어떤 뱀’이 되고 말았다. 차라리 자신의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는 도마뱀이 더 괜찮지 않았을까? 라는 의문이 남는다.

 

 

돌이켜보면 거짓말로 산다는 것은 자기 삶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유쾌한 방법일 것이다. 정말이지 사랑하지 않고 거짓말만 하게 되었을 때 돈값을 훨씬 잘할 수 있다는 해리의 절망을 공감하게 된다. 돈값은 우리의 영혼을 콜레스테롤로 가득 채우기 때문에 피곤한 일이다. 더구나 죽음 앞에서 딱딱해질 정도라고 한다면 우리의 영혼은 혼란스러워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통증을 소진하는 것은 어떨까? 거짓말을 파괴하는 아주 단순한 방법은 다른 영혼이 되는 것인데 킬리만자로에 올라가는 것은 아주 좋은 파괴이지 싶다. 우리가 살아온 인생의 빛과 어둠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 같아 그렇다.

 

 

그러면 왜 킬리만자로를 일까? 우리의 인생길에서 만나는 킬리만자로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가치들이 마치 ‘온 세상처럼 넓고, 크고, 높고, 햇빛을 받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하얗게 빛나거나’(「킬리만자로의 눈」), 반대로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 나 자신을 놓아버리면 내 영혼이 몸 밖으로 나간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잠을 자지 않고 누워 있으면서 뭔가에 정신을 파는 방법’(「이제 내 몸을 뉘며」)이었다. 그래서 평행한 길은 놔두고 근육이 아플 정도로 킬리만자로를 오르는 것은 ‘모든 걸 가질 수도 있었는데, 매일 우리는 그것을 더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어’(「하얀 코끼리 같은 산」) 피곤하기 때문이며, 모든 것 즉 ‘생각할 의무, 써야 할 의무, 다른 의무들을 등 뒤에 뒤에 버리고 왔다’(「심장이 둘인 큰 강 1부」)는 행복이 아닐까?

 

헤밍웨이의 단편집『킬리만자로의 눈』은 아주 단순하게 거짓말을 파괴하는 소설 같았다. 어느 순간 삶에 의욕을 잃고 죽음 혹은 허무에 빠진 우리에게 사냥을 하거나 스키를 타거나 송어 낚시를 하라고 한다. 사소하다고 하면 너무 사소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며 아주 ‘좋은 파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 매일 맞고 꺽이며 사는’(「프랜시스 머콤버의 짧고 행복한 삶」) 두려움에서 벗어나 ‘댐이 터진 것 같은 절대적 흥분상태’를 느낄 것이다.

 

 

일찍이 단편소설의 거장 레이먼드 카버는 문학이란 삶에 연결되어 있어야 하며, 삶에 충실하고, 삶을 바꾸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소설의 중심인물은 움직이는 캐릭터여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인지 헤밍웨이의『킬리만자로의 눈』을 읽는 내내 마음이 어디론가 쏜쌀같이 움직였다. 낮보다는 밤이 더 강렬하여 잠들지 못하는 밤에 불을 켜두어야만 했다. 그것은 자신감이 아니라 ‘빛이 아주 좋고 정말 아름답다’(「깨끗하고 불이 환한 곳」)는 것이 진짜 문제였다. 혹, 거짓말로 들리겠지만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어느 누구도 외롭지 않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 없는 사회 - 합리적인 개인주의자들이 만드는 현실 속 유토피아
필 주커먼 지음, 김승욱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신이 있다? 신이 없다? 종교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조심스럽다. 그것은 사회를 이루는 제도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에 대해 제대로, 확실하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파스칼처럼 내기를 해보는 것은 어떨까? 파스칼은『팡세』에서 신이 있다와 신이 없다, 둘 중에서 어느 것이 우리에게 수지가 맞는지를 따져보았다. 그리고 내기라는 확률론으로 신이 있다는 것이 이롭다고 하였다. 파스칼 말대로 종교는 '존중할 만하다, 인간을 올바르게 알았으므로. 사랑할 만하다, 참된 행복을 약속하므로.' 그러나 기독교를 옹호하면서 성서학의 핵심이 되는 ‘숨은 신’을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이성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 같아 달갑지 않았다. 또, 하나님의 심판, 즉‘예수 천국, 불신 지옥’ 이라고 하는 따끔한 두려움은 얼마나 혼란스러운가?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초월적 신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삶이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닌 탓에 때로는 우리의 감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 설명할 수 없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모든 것을 인과의 원리로만 생각한다면 삶의 자잘한 굴레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가령, 삶이 고통스럽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사는 것은 나약한 인간의 변명에 불과하다.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큼이나 삶을 초월하는 것은 어찌 보면 삶의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초월이라는 가능성의 힘을 이용하여 인생을 좀 더 깊은 심연에서 이해하고자 열망한다. 하지만 문제는 절대자로부터 삶의 위로와 믿음을 구하는 것이 정말로 최선의 선택이라는 데 있다. 이것이 가장 종교적인 구속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 시대에 가장 정상적인 삶의 모델은 뭘까? 필 주커먼은『신 없는 사회』에서 제목 그대로 ‘신 없는 사회’라는 우려를 말끔히 씻어 내리고 있다. 저자 말대로 요즘 세상이 어느 때보다 종교적이라 신이 없다, 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것은 망상에 가까울 만큼 텅 빈 생각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종교적으로 떨리는 마음으로 읽으면 신이 없다, 라는 것만큼 단단한 생각은 없다고 할 정도다. 무엇보다도 ‘합리적인 개인주의자들이 만드는 현실 속 유토피아’는 마치 다이아몬드 같다. 다이아몬드는 가장 단단한 물체인데 놀랍게도 속은 텅 빈 상태다. 또한 무색에 가까울수록 더욱 빛이 잘 투과되어 찬란한 무지갯빛을 발한다는 것이다. 다이아몬드가 물질의 가장 좋은 결과를 얻어내듯 신 없는 사회는 삶의 결정체라는 점에서 서로 통한다.

 

 

저자는 사회학적 분석을 통해 현실 속에서 삶의 결정체가 가장 좋은 결과가 나타난 곳으로 덴마크와 스웨덴을 주목했다. 이유인즉 이 두 나라는 비종교적이다. 종교적 열정이 그다지 없기 때문에 신 없는 사회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두 나라가 가장 살기 좋고 쾌적한 곳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점을 깨닫게 해준다. 흔히 종교가 없다고 한다면 현실이 지옥 그 자체라는 잘못된 믿음을 강요한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유일한 구세주라고 하거나 죄악으로 도덕을 지키게 한다. 하지만 두 나라를 보면 정반대다. 두 나라는 종교에 대해 회의적이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없이도 ‘매끈하고 공정하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오히려 청교도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세운 가장 종교적인 미국이 종교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미국의 종교적인 갈등과 불신이 암묵적 계속 되고 있는 것은 단지 그들만의 고민이 아니라 세계적이다.

 

 

저자는 가장 종교적인 결과가 나타난 미국과 덴마크, 스웨덴을 비교하면서 종교 없이도 세상이 안정적 잘 돌아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모호하면서도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의 상식으로 종교에 대한 열정이 없다면 교회를 간다든가, 기도를 드린다, 라는 종교적 활동을 한다는 게 사실상 어려워 보인다. 한편으로는 이런 어려움을 참고 종교적 활동을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회의적이라고 한다면 분명히 모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덴마크와 스웨덴은 그런 모순이 아무렇지 않게 일상화 되어 있는 독특한 사회다. 가령, 두 나라에서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이 거의 없다. 심지어 구원이나 부활도 믿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들이 냉소적이거나 염세적이라 그런 것일까?

 

 

이 책을 통해 저자는 다양한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문제의 해결책을 찾고 있으며 그들이 ‘합리적인 회의주의자’라는 것을 자연스러운 사실로 받아들이게 한다. 그들의 종교적 무관심이라는 모순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는 생각이 온화하게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인간의 좋은 점들을 믿는다. 그 좋은 점들이야말로 기독교의 진정한 본질이다. 다른 사람을 죽이지 못하는 것, 노인을 보면 반드시 도와야 한다는 것 등등. 이런 것들이야말로 살아가면서 지침으로 삼아야 할 좋은 규칙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기독교인이다.(p 27)

 

 

돌이켜보면 종교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어겨서는 안 될 규칙이다. 그래서 반종교적인 사람은 규칙을 어기면 그만이다. 하지만 종교적으로 무관심한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종교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그것은 살아가면서 지침으로 삼아야 할 좋은 규칙이기 때문이다. 조금 다르게 말하자면 절대적인 규칙을 지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으며 좋은 규칙은 조금은 어겨도 괜찮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가 곧 ‘초월적 종교’와 ‘문화적 종교’를 구별하게 한다. 이 책의 의도대로 죽은 뒤 어떻게 될 것인가? 라는 인터뷰를 통해서 두 가지 종교적 믿음을 간단하게 답할 수 있다. 즉 초월적 종교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천국에서 두 팔 벌려 나를 기다리실 거예요.” 반면에 문화적 종교의 입장에서는 “그냥 죽는 거죠. 그러니까 살아 있을 때 제대로 살아야 돼요.”

 

 

그래서 우리는 문화적 종교가 단순히 세속주의자들이 자기 이득만 생각하면 하는 것이라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 어떤 면에서는 문화적 종교는 문화적 관성으로 ‘그냥 항상 해오던 일’이다. 이러한 까닭은 문화적 종교에는 세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자기 정체성 또는 집단 정체성이며 다른 하나은 명목상의 종교 활동이다. 나머지 하나는 무신론자에 대한 반대다. 먼저 자기 정체성 또는 집단 정체성을 살펴보면 초자연적인 요소에 대한 믿음은 없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명목상의 종교 활동을 살펴보면 사람들이 종교적 신앙 없이도 각종 의식과 명절, 통과의례 등에 참가한다는 것이다. 끝으로 무신론자에 대한 반대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데도 뭔가 커다란 존재가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저자는『신 없는 사회』에서 덜 종교적인 나라에 대한 깊은 호기심으로 종교적 모순과 한계를 명쾌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일까? 그동안 종교에 대해 ‘불편한 백지상태’였다면 앞으로는 덴마크, 스웨덴 사람들처럼 ‘편안한 백지상태’로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편안하다는 것은 옮긴이의 말처럼 신이 없는 사회라고 해서 정말로 신의 존재가 아예 없는 사회가 아니라 ‘종교의 힘이 약한 사회’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종교를 믿지 않아도 내 가치관이 종교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초월적 종교에 대한 불완전한 믿음보다는 ‘문화적 종교’라는 세속주의가 가장 합리적인 믿음이라고 하겠다. 종교의 위기와 사회적인 문제가 서로 겹치고 있는 시점에서 이 책이 던지는 질문과 대답은 우리에게 ‘문화적 종교’를 성찰하게 한다. 이것이 종교적인 세상에서 삶의 행복을 위한 필 주커먼의 가장 순수한 긍정이며 매혹적인 내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현실, 그 가슴 뛰는 마법 - 종교, 신화, 미신에 속지 말라! 현실을 직시하라!
리처드 도킨스 지음, 김명남 옮김, 데이브 매킨 그림 / 김영사 / 201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리처드 도킨스를 ‘눈 먼 시계공’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일까? 도킨스는 인간을 비롯한 지구의 생명에 대해서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를 가장 간결하고도 멋진 ‘지상 최대의 쇼’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시대 최고의 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진화론을 근거로 하여 지적인 설계자를 비판하는 것은 타당하다. 하지만 이것이 도킨스의 현실의 전부는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도킨스의 날카로운 주장은 오히려 과학의 경이로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도킨스가 진화생물학자라는 사실은 너무나 자명한 현실이다. 별로 놀라울 것이 없다. 놀라울 것이 너무나 많은 탓에 무감각해서 그렇다. 그러나 거꾸로 과학의 경이로움 즉, 새로운 무언가를 밝혀내는 것은 과학의 문외한들에게도 즐거운 학문이 될 것이다.

 

이번에 나온『현실, 그 가슴 뛰는 마법』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모든 세대의 독자를 위해 가장 쉽고 가장 재미있게 풀어쓴 과학 입문서’ 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과학 입문서라고 해서 고통스럽게 읽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읽는 것 못지않게 행간의 내용을 이해할 만한 시간이 감동적이어야 한다. 이 책이 어느 때보다 더 생동감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도킨스의 명쾌한 문장뿐만 아니라 천재적인 일러스트 데이브 매킨의 황홀한 그림이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가 한번쯤 고민해 볼만 한 여러 가지 흥미로운 과학적인 질문에 친절하게 설명하면 데이브 매킨의 상징적은 그림은 한층 이해의 폭을 넓히면서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을 찬찬히 읽다보면 어느 순간 과학이라는 묘한 뉘앙스를 알게 된다. 단순한 흥밋거리로만 알고 있었던 현실의 모든 현상들에 대한 비밀을 알 수 있는데 과학은 개념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에서 저자는 “나는 현실 세계에도 마법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현실이기에 더 마법적이고, 우리가 그 작동 방식을 이해하기에 더 마법적이다. 현실이야말로 가슴 뛰는 마법이다.”라고 역설하고 있다. 저자의 핵심적인 주장에 따르면 현실은 다름 아닌 과학적인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법적이라는 것이다. 결국 과학의 경이로움은 현실이라는 구체적인 현상에서 영향을 받는 가슴 뛰는 마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도킨스는 왜 현실을 가슴 뛰는 마법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알게 된다. 바로 도킨스가 생각하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발명은 무엇인가? 라는 것이다. 도킨스는 자신이 중요한 물건으로 분광기(spectrometer)를 선택했다고 겸손하게 말했지만 시실은 정반대다. 분광기만큼 도킨스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없다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분광기는 무지개기계인데 뉴턴의 프리즘보다 세련된 물건이다. 뉴턴 이전 사람들은 프리즘을 통해 무지개를 만든다는 것을 알았지만 프리즘이 흰빛을 물들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뉴턴의 생각은 달랐다. 뉴턴은 프리즘 세 개를 사용한 결정적 실험을 통해 흰빛은 여러 색의 혼합이고 프리즘은 혼합된 색을 구별하는 것이라고 증명했다.

 

우리는 망원경에다 분광기를 달면 지구에서 볼 수 없는 우주에 관한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된다. 그 순간, 우주라는 것이 놀랍게도 현실이 된다는 것이다. 도킨스에 따르면 우리가 현실을 아는 방법은 세 가지다. 하나는 우리의 오감으로 직접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소금은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둘은 우리의 오감으로 감지할 수 없을 때 망원경이나 화석을 통해 우리의 감각을 향상시킴으로써 간접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가령, 공룡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분명 존재했다는 사실 때문에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셋은 좀 더 간접적인 방법으로 모형이다. 현실이 이러지 않을까 하는 모형을 만든 다음 그 모형이 옳다면 어떤 것의 존재를 믿어도 좋다. 가령, 유전자는 DNA라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는데 DNA에 관한 지식은 전부 모형을 통해 발견되었다. 이로 인해 DNA도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현실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마법에 대해서도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하나는 초자연적인 마법이다. 신화나 동화를 보면 주문에 의해 왕자가 개구리로 바뀐다. 하지만 이런 마법은 이야기일 뿐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둘은 무대 마법이다. 무대 마법은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지만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셋은 저자가 주장하는 ‘시적 마법’이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이것은 캄캄한 밤에 별들을 바라다보면서 숨 막히는 희열을 느끼는 ‘순수한 마법’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법은 깊이 감동하는 것, 신나는 것을 말하며 ‘내가 정말로 살아 있구나.’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도킨스는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할 현실과 마법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안내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이 진정한 현실이고 마법인지 알게 된다. 현실이라는 문제가 간단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감각이 아는 것뿐만 아니라 아직 모르는 것들까지 현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럴 때 과학은 어떤 것이 현실일 가능성을 찾는데 유용한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 말대로 어떤 것의 존재를 믿어도 좋은 경우는 오직 진정한 증거가 있을 때뿐이다. 진정한 증거는 우연한 과정과는 반대다. 만약에 어떤 것이 단순히 우연한 과정이라고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마법적일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가슴 뛰는 마법은 ‘과학적 기법을 통해 이해되는 현실세계의 사실’이라는 것이다.

 

가령, 세상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라는 질문에 답하는 많은 기원신화들을 보면 신에게 매혹당하고 있다. 중국의 반고, 인도의 브라마 같은 창조 신화는 현실적인 것이 전부는 아니다, 라는 것을 보여준다. 현실 그 너머를 상상한다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아름다운 가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쯤에서 고민해야 할 문제는 창조자의 주체는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창조자 자신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신화가 삶의 다른 의미에 대해서는 많은 도움이 되겠지만 우주의 시작에 대해서는 똑같지 않다는 것에 저자와 마찬가지로 실망하게 된다. 과학자의 눈으로 봤을 때 다른 의미란 곧 초자연적인 것을 말한다. 하지만 우주의 시작은 과학적으로 ‘빅뱅’(Big Bang)이라는 인과(因果)의 원리로 입증할 수 있지 않은가!

 

저자는 다른 질문에서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현실적 상황 안에서 과학의 존재를 역설하고 있다. 먼저 현실적 상황에서 최초의 인간은 누구였을까?, 사물은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 지진이라 무엇일까? 기적이란 무엇일까? 이라는 질문에 대하여 ‘신화적인 대답’을 제시한다. 그리고 나서 ‘정말로’, ‘어떻게’라는 강한 의문으로 과학의 존재를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신화보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즉 최초의 인간은 존재하지 않다. 이유인즉 시간을 거슬러 185,000,000세대 전 할아버지의 모습은 놀랍게도 ‘네 발 달린 물고기’다. 그런가 하면 지진은 거인의 재채기가 아니다. 오히려 판구조론에 따라 대륙은 ‘덜컥’거리면서 움직인다. 끝으로 기적은 초자연적이며 순수한 픽션에 가깝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저자는 기적이라는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해 반대한다. 문제는 초자연적이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을 때 가장 안전한 해결 방법이라는 것이다. 즉 가장 어려운 문제를 가장 쉽게 해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무언가를 초자연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아예 설명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쩌면 그보다 더 나쁘다. 설명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지구의 생명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억측과 비상식이라는 초자연적 현상에 의존한다는 것은 아무런 개연성이 없다. 그래서 일까? 도킨스의 마법, 종교․신화․미신에 속지 말라! 현실을 직시하라!는 과학의 마법은 옮긴이의 말처럼 얼마나 ‘이성적인 감동’인가? 앞으로도 도킨스의 가슴 뛰는 마법이 기대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3차 산업혁명 - 수평적 권력은 에너지, 경제, 그리고 세계를 어떻게 바꾸는가
제러미 리프킨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에너지 체계는 문명의 성격을 결정한다.

『3차 산업혁명』중에서

 

 

 

미래 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안해온 저명한 사회 사상가 제러미 리프킨의『3차 산업혁명』은 『소유의 종말』, 『공감의 시대』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현대적(現代的)인 대작(大作)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적이라는 것은 단순히 연대기적으로 분류된 고정된 시간이 아니라, 늘 새롭게 접근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대작이라고 하는 것은 세계 경제의 변화를 지속적으로 인식하면서 통찰하는 새로운 관점이 대단히 진지하면서도 흥미롭게 읽히는 묘한 중독성을 빼놓을 수 없다. 바로 이러한 까닭으로『3차 산업 혁명』을 주목하는 것은 아주 의미 있는 탐구이다. 지금, 이 책을 읽지 않으면 우리가 사는 혹은 살아야 할 문명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3차 산업혁명』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세계 경제의 몰락을 극복할 수 있는가?라는 적절한 대안을 모색하면서 전지구적(全地球的) 문제로 한층 더 부각시키고 있다. 앞서 설명했듯 저자의 혁신은 문명의 성격을 에너지 체계가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에너지 체계가 중요한가? 1차, 2차 산업혁명은 석탄, 석유, 천연가스 같은 화석연료에 의존했다. 화석연료는 특정한 장소에서만 생산되기 때문에 엘리트 에너지라고 불렸다. 그러나 3차 산업혁명은 태양열, 지열, 풍력 같은 재생 에너지를 사용한다. 화석연료에서 재생 에너지로의 패러다임의 변화는 단순히 지구 온난화라는 기후 변화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근본적으로 엔트로피의 증가에 있다는 본질을 발견하게 된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열역학 제2법칙은 에너지는 사용 가능한 형태에서 불가능한 형태로, 질서 있는 상태에서 무질서한 상태로 흐른다. 이것이 곧 엔트로피다. 가령, 석탄을 태우면서 생겨난 에너지는 소멸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흩어진 에너지를 다시 모은다고 해서 석탄 덩어리를 만들어 재사용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이런 에너지의 양이 제한되어 있어 지구의 파괴적 결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열역학 관점에서 지구는 태양과 우주에 대해서 닫힌계(系), 즉 에너지는 교환하지만 물질을 교환하지 않는다. 따라서 지구의 화석연료는 엔트로피의 증가에 따른 부작용으로 인해 고갈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피할 수 없다. 탄소 시대 화석연료 사람들은 산업화가 유발한 막대한 엔트로피 청구서를 간과했다.

 

 

 

그래서 저자는 3차 산업혁명의 다서 가지 핵심 요소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재생 가능 에너지로 전환한다.

2. 모든 대륙의 건물을 현장에서 재생 가능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는 미니 발전소로 변형한 3. 모든 건물과 인프라 전체에 수소 저장 기술 및 여타의 저장 기술을 보급하여 불규칙적으로 생성되는 에너지를 보존한다.

4. 인터넷 기술을 활용하여 모든 대륙의 동력 그리드를 인터넷과 동일한 원리로 작동하는 에너지 공유 인터그리드로 전환한다.

5. 교통수단을 전원 연결 및 연료전지 차량으로 교체하고 대륙별 양방향 스마트 동력 그리드상에서 전기를 사고팔 수 있게 한다.

 

 

 

우리가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화석연료가 아닌 재생 가능 에너지를 활용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무한 경쟁의 자본주의 경제에서 벗어나 지속 가능한 녹색 경제를 지양해야 한다. 1차, 2차 산업혁명은 사람들을 근면하게 했다. 각 개인의 근면함은 생산성이 높은 노동력이었으며 물질적 진보를 이뤄냈다. 아메리칸 드림에서 보듯 승수 쌓기라는 이기적인 자아를 강조한다. 하지만 3차 산업혁명에서는 ‘생명애’(biophila)에 공감하는 ‘생태학적 자아’(ecological self)다. 생명애는 생물권 의식으로 지구상의 모든 다른 종들이 공동 생물권 안에서 협동과 상호 의존함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최선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근면함이 아니라 공감해야 한다.

 

 

 

그런데 3차 산업혁명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또 하나 중요한 요소가 있다. 저자 말대로 이것은 모든 역사적인 거대 경제 혁명에서 증명된 사실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체제다. 즉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체제는 새로운 에너지 체계를 만들어 내는 활동의 흐름을 관리하는 매커니즘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가령, 1차, 2차 산업혁명에서 전화나 텔레비전이라는 커뮤니케이션 기술은 중앙집권화된 에너지를 관리하기 위한 수직적 권력의 체제였다. 그러나 3차 산업혁명에서 인터넷이라는 커뮤니케이션 기술은 분산형 에너지를 관리하기 위한 수평적 권력이 핵심이다. 우리의 의식이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으로 피라미드 세상에서 수평적인 세상으로 변화한다는 것은 상생하기 위해서는 협업해야 한다는 것을 어느 때보다 잘 보여주고 있다.

 

 

 

『3차 산업혁명』을 공감해서 그럴까? 우리는 ‘깨끗한 부자’를 간절히 희망하게 된다. 데이비드 캘러핸에 따르면 깨끗한 부자란 3차 산업혁명의 첨단 기술 정보산업을 통해 새롭게 부자가 된 사람을 말한다. 반면에 더러운 부자는 2차 산업혁명의 환경 오염적인 채굴 산업으로 부자가 된 사람을 말한다. 문명의 위기 속에서 재생 가능 에너지에 공감해야 한다는 제러미 리프킨의 해법은 첨예한 이익관계를 돌파하는 대단한 용기가 될 것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살아있는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놀이’에 열중해야 한다. 왜냐하면 저자는 ‘사람이 놀이에 열중하고 있을 때보다 더 자유롭다고 느낄 때가 있는가?’라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깨끗한 부자는 매우 새로운 의미에서 우리의 현재이며 미래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