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마음 - 나의 옳음과 그들의 옳음은 왜 다른가
조너선 하이트 지음, 왕수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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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제껏 각고의 노력으로 공부해온 까닭은

인간의 행동을 비웃기 위해서도,

그것에 동정의 눈물을 흘리기 위해서도,

그것을 미워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였을 뿐.

스피노자 <정치학 논고>

 

우리는 다 같이 사이좋게 지냈을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사이좋게라는 의미에는 어느 정도 옳고 그름이라는 도덕적인 마음이 스며들어 있다. 만약에 도덕적인 마음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 구토감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도덕적인 마음이 있다고 해서 항상 우리가 구토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 갈등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이유에 대해서 최고의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바른 마음』에서 이 책의 제목과 같은 ‘바른 마음(Righteous Mind)’이라고 말한다. 저자가 말하는 바른 마음이란 우리는 본성적으로 도덕적이지만 도덕적인 체하고 비판과 판단도 잘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일상을 보면 어떤가? 크고 작은 도덕적인 잘잘못을 따지며 충돌한다. 가령, 도덕적인 딜레마 중에서 ‘트롤리 문제(trolley problem)의 딜레마’가 있다. 이 딜레마에 따르면 트롤리 한 대가 선로를 빠른 속도로 내려갈 때 선로 위에는 다섯 명의 인부가 있다. 이 때 두 가지 시나리오가 있다. 하나, 다섯 명의 인부를 살리기 위해 선로를 바꾸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쪽 선로 위에는 한 사람이 서 있다. 둘, 어떤 한 사람을 선로 위로 넘어뜨리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다섯 명의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한 명이 희생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하는데 앞서 도덕적인 판단이나 결정을 내려야 한다. 칸트의 의무론에 따르면 추론의 과정을 통해 도덕적인 판단하게 되고 직감이 추론을 정당화하는 사후 합리화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흄은 ‘이성을 열정의 노예’라고 말했다.

 

그런데 도덕적인 판단을 어떻게 하는지 유명한 뇌 연구 결과를 보면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다. 즉 도덕적인 판단에 있어 감정을 처리하는 영역이 훨씬 더 활성화되는 양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저자 말대로 도덕은 너무나 감성적이다. 도덕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마치 코끼리(직관) 등에 올라탄 기수(추론) 같다고 할까? 우리는 무엇이 옳은지를 강하게 직감하고 난 후 그 느낌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누군가의 마음을 바꾸고 싶다면 코끼리에게 먼저 말을 걸어야 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바른 마음을 증폭시키는 도덕 심리의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 직관이 먼저이고 전략적 추론은 그다음이다. 둘, 도덕성은 단순히 피해와 공평성 차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셋, 도덕은 사람을 뭉치게도 하고 눈멀게도 한다는 것이다.

 

도덕적 사고는 결코 과학자가 아니다. 오히려 유권자의 표를 잡으려는 정치인이다. 선거철마다 우리는 서민층들이 좌파(진보)가 아닌 우파(보수)를 지지하는 현상을 접하게 된다. 이런 현상이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지 묘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 몸소 느끼게 된다. 이유인즉 바른 마음은 여섯 가지 미각 수용체를 지닌 혀와 같다는 것이다. 도덕성 기반 이론의 내용에는 최소한 6가지가 있다. 배려/피해 기반, 자유/압제 기반, 공평성/부정 기반, 충성심/배신 기반, 권위/전복 기반, 고귀함/추함 기반이다. 진보주의자들이 배려/ 피해, 자유/압제, 공평성/부정 등 3가지 기반을 중시하는 반면에 보수주의자들은 나머지 6가지 기반을 모두 활용한다. 사실상 유권자들은 도덕적 이해에 따라 투표한다. 따라서 피해자들을 돌보는 차원에서 사회의 정의를 실현시키는 데만 매달려서는 유권자의 표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앞서 말했듯 편협한 도덕성만을 주장하는 것은 도덕적 구토감을 일으킬 뿐이다.

 

우리는 때때로 무임승차하는 사람들에게는 양보하지 않는다. 한 개인의 이기적인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러한 능력이 있다는 것은 이기심을 초월하여 초사회적인 이익 즉, 나보다는 우리를 위해서 진정으로 노력을 다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이 조건에 따라 군집 생물이 되기도 한다고 하면서 ‘군집 스위치(hive switch)’라고 했다. 비유하자면 ‘인간은 90%는 침팬지이고 나머지 10%는 벌과 같다’는 것이다. 같은 관점으로 뒤르켐은 개인이 전체의 행동에 따르고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집단적 들썩임(collective effervescence)’이라고 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가 적응하면서 선택한 최선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집단성이라는 것 때문에 이념과 종교 갈등으로 온갖 추악한 짓을 저지른 것도 사실이다.

 

『바른 마음』은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고 이해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좀 더 다른 시각으로 탐구하고 있다. 바로 호모 듀플렉스(Homo duplex: 이중적인 인간)이다. 호모 듀플렉스에 따르면 마음이란 개인적인 이기심과 사회적인 이타심이 교차한다. 자신만 옳고 상대방은 틀리는 것을 정당화하며 집단적으로 이쪽은 좋고 저쪽은 나쁘다는 식의 편 가르기를 한다. 하지만 저자의 새로운 주장을 보면 우리가 이편저편으로 나뉘는 까닭은 인간의 본성이다. 우리의 마음이 집단적으로 바름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좀 더 건설적으로 싸우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직감을 이해하고 나서 여섯 가지 도덕 기반의 적절한 전략이 필요하다. 바른 마음은 옳음 vs 그름이 아니라 옳음 vs 옮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 이보다 좋은 느낌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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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논쟁 - 괴짜 물리학자와 삐딱한 법학자 형제의
김대식.김두식 지음 / 창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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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의 천재가 만 명을 먹여 살리는 게 착각일까? 인생은 공부의 연속이다. 공부를 즐겁게 하면 모를까,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살려고 출세를 하고자 한다면 공부를 지겹도록 해야 한다. 공부가 성공의 척도이다 보니 남들과 경쟁 해야만 한다. 경쟁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우리는 경쟁이라는 공회전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경쟁을 통과한 사람들이 천재(天才)가 되다보니 우리는 천재에게는 뭔가 특별한 능력이 있기를 기대한다. 사회적으로 출세한 사람이 많은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안에 숨겨진 욕망이며 불가피한 변명이지 싶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공부를 하면서도 무기력에 빠져든다. 공부를 하면서도 ‘공부’의 정체성은 흐릿해지고 대신에 ‘천재’라는 것이 절망적으로 각인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진짜 공부’가 중요하다고 누누이 역설해왔다. 그럼에도 공염불에 불과했던 것은 천재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인지 모른다. 누군가가 정의감을 못 이겨 한국 교육의 허상을 폭로한다고 하더라도 무의미한 싸움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한 게 사실이었다. 한 순간 시한폭탄이 터져 놀라면 그만이다. 괴짜 물리학자(김대식)과 삐딱한 법학자(김두식) 형제의『공부 논쟁』을 읽는 내내 안타까움을 숨길 수 없었다. 천재에 집착하는 오직 일등주의에 쏠리는 현실이 답답할 지경이었다. 시대의 흐름에 한 발자국씩 다가서기는커녕 역행하고 있어 우리의 미래가 서글퍼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국 사회를 줄기차게 염려하는 이 두 학자의 창의성을 보면서 불안한 희망이라는 뇌관을 제거 할 수 있었다. 창의성이란 김두식의 표현을 빌리자면 근본적으로 남과 다를 수 있는 용기다.

 

『공부 논쟁』에 있어 가장 민감하면서도 아슬아슬한 마음이 들었던 것은 우리나라 학자들이 노벨상을 받지 못하는 이유였다. 우리나라 사람이 노벨상을 수상한다고 하면 축하할 일이다. 그런데 형제들이 이것을 반대하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한국 사람에게 집착하고 있는 반면에 형제는 ‘한국에서 박사를 딴 사람’에게 더 의미를 두고 있다. 한국에서 박사를 딸 수 있을 정도가 된다면 한국 사회가 그만큼 기초 과학이 잘 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노벨상을 타게 된 것도 기초 과학의 인프라가 두텁게 형성되어 있기에 가능했다. 아인슈타인은 굳이 노벨상을 타지 않아도 큰 실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인슈타인의 천재성이 노벨상의 전부인양 호들갑을 떨고 있다. 한 명이 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충분한 근거를 앞세우면서 말이다.

 

오직 한명, 즉 천재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의심하기란 어렵다. 그 결과 한국 사회는 천재에 대한 환상이 만연하여 불평등한 대가를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저자들이『공부 논쟁』에서 천재의 허구론을 주장하는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15세에 인생이 결정되어 일찌감치 번아웃(burn out)되는 학생들이 그렇고, 해외 명문대 교수의 연구를 따라하면서 하버드대 한국 분교가 되어 버린 교수들이 그렇고, 이 모두가 한국식 공부가 목표로 하는 ‘장원급제 DNA’을 주입한 결과다. 장원급제 DNA에서 중요한 것은 학문적 성과보다는 입신양명이다. 비록 입신양명 때문에 한국 사회가 괄목한 만한 경제적 성공을 이뤘다고 하더라도 돈벌이와 출세의 수단이라는 쓴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 이제라도 우리의 교육이 ‘장인(丈人) DNA’으로 개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장인 DNA은 호기심을 가지고 학문적 성과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장인 DNA은 창의성이 있는 독립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부 논쟁』을 읽고 나면 과학자를 중소기업사장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삐딱한 주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오히려 경쾌하다고 할 수 있다. 형제는 한국 공부의 풍토에서 장원급제 DNA은 천재인 동시에 바보가 된다고 역설한다. 천재라는 타이틀은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이며 이러한 감옥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천재는 무죄라는 담보를 제공받는다. 그러니 자신이 사는 세계의 고통에는 무심하기 짝이 없는 바보가 쉽다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진짜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은 갑자기 돌출한 새로운 주장은 아니다. 문제는 진짜 공부를 하는 방법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면서도 진짜 공부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사람들이 장원급제 DNA가 아닌 장원DNA으로 진짜 공부를 하는 거대한 전환을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한국사회 공부에 직격탄을 날리는『공부 논쟁』은 굳이 읽지 않아도 왠지 책을 읽은 것 같은 ‘책에 대한 책’이 아니다. 진짜 공부는 장인 DNA라는 것. 더 이상 공부 논쟁을 하지 않기를 기대해 볼만한 가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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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외로움을 느끼는가
존 카치오포 외 지음, 이원기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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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실험이 하나 있다. 행복한 사람과 외로운 사람 중에 누가 쿠키를 많이 먹을까? 답은 외로운 사람이다. 우리 뇌는 외로움을 치유하기 달콤하고 기름진 물질을 찾게 된다. 그래서 행복한 사람보다 외로운 사람이 쿠키의 맛을 더 좋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의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또한 언제 그랬는지 모르게 외로움이 사라진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만성적인 외로운 사람이 쿠키를 많이 먹게 되어 결과적으로 비만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러 가지의 이유가 있겠지만 외로운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무엇일까?

 

이 문제에 대해 『인간은 왜 외로움을 느끼는가』는 근거를 밝히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외로움이 불러일으키는 간섭 효과(interference effect)이며 이것을 극복하는데 필요한 자기조절 능력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간섭 효과란 집중력을 분산시키는 것을 말한다. 가령, 눈앞에 보이는 쿠키를 먹고 싶다는 욕구 때문에 정작 쿠키를 먹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 방해를 받는 것이다. 그래서 외로움이 불러일으키는 간섭 효과는 사회적인 유대감을 방해하면서 자신감의 결여와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악화시킨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만성적인 외로움은 사회적 고립감과 노화를 가속화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혼자 살 수는 없다. 혼자 사는 것은 혼자 있는 시간과는 다르다. 혼자 있는 시간은 뭔가에 열정을 불태울 수 있는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즐거움이다. 하지만 혼자 사는 것은 사회적 고독이라는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사회적 유대감이 요구되는 것이다. 만약에 사회적 유대감이 낮거나 없다고 한다면 우울한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결과에 대해 전적으로 유전자를 탓할 수만은 없다. 일찍이 에드워드 윌슨은 유전자는 우리의 행동을 제어하는 ‘규제 장치’를 제공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 규제는 탄력적이며 유연하다는 것이다. 즉 인간 행동에서 유전자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못지않게 환경에 의해 큰 영향을 받는 다는 것이다. 우리는 환경에 따라 외로움을 달리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환경적인 요소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문화적 특성이다. 어쩌면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가 외로움을 더욱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사회적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개미나 벌도 사회적 동물이라고 할 수 있다. 개미나 벌들은 몸에서 분비되는 화학물질을 통하여 의사소통을 하면서 개인의 행동을 제약하면서 공동생활을 한다. 다시 말하면 사회성이 강한 곤충들은 화학물질 같은 유전자의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우리는 화학물질이 아닌 문화에 의해 우리의 행동을 조절하게 된다. 결국 문화적인 규범과 개인적인 욕구 사이에서 외로움은 복잡하고 미묘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외로움이 심할수록 치유하는 방법이 극단적으로 치닫게 된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사회적 조절 가설(social control hypothesis)’을 인식하게 된다. 사회적 조절 가설이란 사회적 고립이 우리의 심신을 병들게 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주위에 여러모로 도움을 주는 친구가 하나도 없다면 그 사람은 비만이 되거나 과음하거나 흡연하게 될 가능성이 훨씬 높게 된다. 사회적 유대감이 없는 상황에서는 사회적 고립감은 채찍이다. 반면에 사회적 유대감에서 느끼는 친밀감은 당근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외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과 교류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 그래야만 채찍이라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사회적 유대감을 갖기 위한 방법으로 ‘EASE’는 아주 간단하다는 것이다. 즉 첫째, E(Extend Yourseif: 다른 사람에게 손 내밀기)다. E는 안전하고 작은 일부터 시작하라는 것이다. 가령, “오늘 날씨 참 좋죠?”라는 인사말을 하는 것이다. 둘째, A(Action PIan: 구체적인 행동 계획)이다. A는 사회적 유대감은 인기 경쟁이 아니라는 것이며 다른 사람과 교류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데 자신의 에너지를 투자하는 것이다. 셋째, S(Selection: 선택)이다. S는 사회적 관계는 양(量)이 아니라 질(質)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가령, 상대방의 외모나 지위에 이끌리는 유대감은 좋지 못하며 자신과 닮은꼴의 관계는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넷째, E(Expect the Best: 최선을 기대하기)다. E는 사회적 만족을 위해 자신을 보호하려는 독단적인 행동을 포기하는 것으로 호혜주의 힘이 되는 것이다.

 

외로움. 흔히 군중 속의 고독을 말할 때 쓰는 감정이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외로움이란 사회적 유대감이 사라질 때 느끼는 고통이다. 이러한 요인은 인간은 침팬지나 보노보와 달리 ‘제3의 적응 방식’으로 진화한 탓이다. 인간과 침팬지, 보노보의 DNA가 98% 이상 일치하더라도 그들의 적응방식은 달랐다. 즉, 침팬지, 보노보가 이기적인 두뇌라면 인간은 사회적 두뇌를 발달시키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사회적 두뇌는 경쟁이 아닌 협력으로 사회적 관계를 만들었다. 따라서 우리가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대로 ‘사회적 유대감에 신경을 쓰고, 다른 사람들에게 손을 내뻗고, 끊어진 관계를 원하라고 촉구하는 자극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외로움이라는 자극제가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지나친 고독감 때문에 심신을 마모시킬 정도로 자기 조절력을 상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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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지 말고 진보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목수정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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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삶을 위한 고민으로 어떻게 하면 낙타형 인간이 프로메테우스처럼 탈바꿈할 수 있을까? 니체는『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낙타형 인간은 ‘짐깨나 지는 정신’이라고 주장했다. 낙타는 사막에서 훌륭한 짐꾼이다. 낙타는 무거우면 무거운 대로 짐을 짊어져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낙타는 짐이 무겁다고 불평불만을 하지 않는다. 이보다 힘겨운 노동이 있는지 의문스럽다. 문제는 이것이 낙타의 강인함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낙타는 자신이 짊어져야 할 운명을 묵묵히 ‘예’라고 하면서 거부하지 않는다. 어제와 오늘이 무료하게 반복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낙타의 어리석음보다는 프로메테우스의 ‘아니오’라는 용기에 감탄하게 된다. 프로메테우스의 ‘아니오’라는 용기 덕분에 우리는 불을 인간답게 사용할 줄 알게 되었다.

 

어둠을 밝히는 불을 보면서 깨닫는다. 불은 어둠을 싹둑싹둑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어둠 속으로 스며들면서 타오른다는 것을. 그래서 니체는『즐거운 지식』에서 불꽃처럼 타오르는 '이 사람을 보라'고 했던 것이다. 즉,

 

이 사람을 보라

 

그렇다, 나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다!

불꽃처럼 가라앉을 줄 모르는 나는

타오른다, 나를 탕진해버리기 위해.

내가 손에 쥔 것들은 빛이 되고,

내가 방치한 것은 재가 된다.

나는 확실히 불꽃이기 때문이다!

 

2011년 스테판 에셀이라는 불꽃같은 혁명가를 만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분노하라』를 통해서 전 세계적으로 분노신드롬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그를 주목하게 된 것은 우리가 삶의 부조리 앞에서 침묵해온 지 오랜 탓이다. 그래서 분노하라는 메시지는 잠든 영혼을 깨울 정도로 강렬하였다. 하지만 분노가 분노에서 끝난다고 하면 그것은 감정의 폭발이지 싶다. 진정한 분노라고 하면 뭔가를 창조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런 그가『멈추지 말고 진보하라』는 자서전(自敍傳)을 마지막으로 우리 곁을 떠났을 때, “스테판 에셀이 죽었다.”라는 짧은 부음(訃音)에는 한 사람에게 보낼 수 있는 안타까움 못지않게 완벽한 믿음에 대한 찬사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란 어려웠다. 비록 그는 저 세상에 있지만 완벽한 믿음은 죽은 후에도 이 세상에서 불꽃처럼 더 타올랐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그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한 위대한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이 의심할 수 없는 진리라고 확신한다. 루소의『사회계약론』에 따르면 ‘우리는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도처에 사슬에 묶여 있다.’고 했다. 하지만 어떤가? 우리는 거꾸로 사슬에 묶여 있는 체 어떤 선택도 하지 못하면서 태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기 제어’가 요구된다. 자기 제어는 오만의 반대말인데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법에 반하는 꿈을 종결짓는 다시 말해 ‘법률에 의한 욕망의 제어장치’라는 것이다. 더구나 양심에 의한 자기 제어가 없다고 한다면 인간의 존엄성은 한낮 공상에 불과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그가 세계인권선언문에 참여하면서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법 앞에서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그가 인간의 존엄성과 법이 같은 운명체라고 역설하면서 궁극적으로 원했던 것은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행복! 좀 더 구체적으로 그의 행복을 들여다보면 개인의 행복이 끊임없는 패배를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얼마나 조화롭게 할 수 있는가에 있다. 더불어 개인의 행복이 개인만의 행복으로 끝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야한 하는 사회적 소명과 함께 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하고 있다. 즉, 행복은 우리가 상호의존하는 존재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이런 그를 행복한 혁명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행복한 혁명가가 되기 위해서 3단계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하면서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고 한다. 먼저 1단계는 앞서 말한대로 ‘분노하라’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을 때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2단계는 ‘희망하라’는 것이다. 희망은 혼란에 맞서 다시 도약하는 ‘용기’와 절망을 극복하는 ‘회복 탄련성’에 있다. 그리고 3단계는 ‘사랑을 사랑하라, 감탄을 감탄하라’는 것이다. 보잘 것 없는 인간을 사랑하고 감탄하는 것만큼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이러한 탈바꿈이 없다고 한다면 행복이라는 이유만으로 혹은 인권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잡는 문제에 빠지고 말 것이다.

 

스테판 에셀은 행복한 혁명가가 되기 위해 시(詩)를 낭송했다. 그의 애송시 중 하나가 페르난두 페소아의『뱀의 길』이다.

 

진실을 진실로서 인정하는 것, 동시에 실수를 인정하는 것, 순응하지 않고 반대편으로 살아가는 것, 모든 방법을 통해 모든 것을 느끼는 일은 결국 모든 것에 지성을 갖는 일이다. 사람이 하나의 정상에 우뚝 섰을 때, 그는 모든 정상들로부터 자유롭다. 마치 하늘의 한 점에 모인 모든 정상들 위에 홀로 서 있는 것처럼. 그러나 인간은 결코 하늘의 한 점에 모이지 않는다. 모든 정상에 서 있는 자들이 그런 것처럼.

 

그는 시를 낭송하면서 타인과 소통하였고 더 나아가 삶을 찬미할 줄 알았으며 행복을 전파했다. 이 책을 옮긴 목수정의 말대로 그는 ‘고갈되지 않는 에너지, 지치지 않는 낙관주의, 행복에 대한 변함없는 취향을 이 지닌 사내’였다. 그리고 어느 누구보다도 ‘좋은 인생’을 살았다. 좋은 인생이란 우리가 쌓아온 그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믿음을 갖는 인생이다. 그러니 우리는 좋은 인생의 정상에 홀로 서 있는 이 사람을 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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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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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페르페투움 모빌레(perpetuum mobile)이라는 기묘한 기계 장치가 있다. 이 기계 장치는 스스로 움직임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갖추고 있다. 즉, 운동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외부로부터 새로운 에너지가 투입될 필요도 없다. 그래서 페르페투움 모빌레는 모든 물리학자들에게 꿈의 기계 장치였다. 꿈은 희망인 동시에 환상이다. 희망이 많다고 하면 꿈은 실현 가능하다. 하지만 꿈이 환상적이라고 하면 실현이 불가능하여 기묘한 상태가 된다. 그런데 물리학에서는 그토록 어려웠던 문제도 사회학에서는 가능한 이유는 뭘까? 아마도 이러한 고민 때문에 사회학을 다루는 넓고 깊이 있는 생각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닐까.

 

『액체 근대』,『유동하는 공포』라는 망각하기 쉽지 않은 책을 통해 알게 된 지그문트 바우만의 사고는 근대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탐색한다. 바우만은 근대를 20세기 근대와 21세기 근대로 나눈다. 20세기 근대를 근대라고 했을 대 21세기 근대는 이차 근대, 탈근대 등등 여러 가지 용어로 쓰여 지고 있다. 이러한 차이에 대하여 저자는 감각적이면서도 쉽게 ‘고체 근대와 액체 근대’로 사고를 확장시킨다. 고체 근대가 견고해서 무거운 근대라고 한다면 액체 근대는 유동적이어서 가벼운 근대라는 것이다. 그런데 액체 근대의 주체는 자유를 누리는 듯 보이지만, 바로 그 대가로 개인의 불안, 불행에 대해 홀로 무한책임을 지도록 강요당한다.

 

그래서『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서 다루고 있는 통찰력 있는 사회적인 이슈들은 하나같이 주목할 만하다. 앞서 고민했던 문제에 대해 바우만은 사회적 삶은 물리학이 다루는 현상이 아니라는 독특한 주장을 펼치면서 열역학 제 2법칙(엔트로피)가 적용되지 않는 힘을 지닌 놀라운 기계장치라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엔트로피를 모든 과학의 제 1법칙이라고 했다. 간략하면 엔트로피는 열은 높은 온도에서 낮은 온도로 흐르는데 이 과정에서 일부 에너지가 손실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제러미 러프킨은『엔트로피』에서 엔트로피를 ‘모든 물질과 에너지는 사용이 가능한 것에서 불가능한 것으로, 혹은 이용이 가능한 것에서 불가능한 것으로, 또는 질서있는 것에서 무질서한 것으로 변화한다.’ 고 지적했다. 결국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것은 액체가 되는 것이며 무질서의 상태가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고독은 액체일까? 고독은 단단하다. 결코 유연하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눈으로 보여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고독한 인간은 생각하는 인간이다. 고독을 저울질하는 생각의 정도에 따라 고독은 얼마든지 유연해질 수 있다. 이것이 곧 고독의 액체화이며 고독을 잃어버리는 것이 된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고독이 유동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일분일초라도 손 안에 스마트폰이 없다고 하면, 트위터와 카카오톡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감당해야 할 답답함은 고독보다 더 단단하다. 어쩌면 그것은 고독이 아니라 고립에서 오는 불안감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트위터의 속성상 새들처럼 지저귀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우리의 생명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으며 바우만이 지적하는 것처럼 140글자의 유행이라는 것이다. 유행이 단순히 모방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더 이상 어떤 해석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바우만은 물리학 용어를 사용하면서 유행이라는 운동에너지는 소멸되지 않는 ‘잠재적인 에너지’ 즉, 그 자신의 운동량만으로도 계속해서 무한정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우만의 견해에 따르면 유행이야말로 사회학적으로 가능한 페르페투움 모빌레가 된다.

 

유행은 두 가지 인간의 욕구와 열망이라는 운동 에너지에 의해 움직인다. 인간의 욕구는 ‘개성이나 독특성을 추구하려는’ 것이며 인간의 열망이란 ‘보다 큰 전체의 부분이고자 하는’ 것이다. 좀 더 살펴보면 ‘무언가에 소속되어 일체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꿈과 동시에 자기 자신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꿈, 또한 사회적인 지원에 대한 욕망과 동시에 자율성에 대한 강한 욕망, 모방하려는 충동과 동시에 구분되려 애쓰는 충동’이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안전’과 ‘자유’다. 안전과 자유는 서로 모순된다. 그래서 안전과 자유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데 코스트 최소화(cost minimization)가 중요한 목적이 된다. 하지만 코스트 최소화는 불확실하고 위태로워 오히려 자신을 고갈시키는 창조적인 에너지의 원천이 된다는 것을 간과할 수 있다. 유행에 한 발 앞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창조적인 에너지가 될 수도 있지만 그 이면을 보면 개성의 상실이라는 역효과를 초래한다. 이로 인해 우리는 유행을 소비할수록 인간 상실이라는 더 큰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동하는 세상에서 ‘보여지는 존재’에 대한 욕망은 프라이버시를 해체하는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프라이버시를 개인의 비밀이라고 한다면 사적이며 닫힌 공간이 된다. 만약 누군가 내 비밀을 알고 있다면 더 이상 주권(sovereignty)이 없게 된다. 주권은 ‘내가 누구이며 무엇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이다. 하지만 우리는 네트워크된 사회에서 끊임없이 접속해야 한다. 그 결과, 우리는 공적이며 열린 공간에서 프라이버스를 해체 당하고 있다. 겉만 보면 네트워크는 인간들 상호 간의 강력한 유대를 형성하는 것 같다. 하지만 비밀이 없는 유대 관계는 오히려 인간들 상호 간의 우대들이 모두 약화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가 된다. 개인은 집단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서 잠시 인터넷을 차단하고 휴대 전화도 끄는 등등 디지털 도구에서 자유로워지면 완전한 고독을 만끽할 것이다.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는 의사소통의 기술은 환상에 불과할 뿐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프라이버시는 인터넷으로 일상화된 의사소통의 기술의 단념과 절제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우리에게 유동하는 근대를 산책하며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 44개의 편지를 보냈다. 44개 편지에 담긴 사유의 주체는 고독, 세대차이, 오프라인과 온라인, 질병 권하는 사회, 공포에 대한 공포, 경계 긋기, 운명과 성격과 같은 것들이다. 이러한 사유를 통해 저자는 유동하는 근대가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어떻게 얄팍하게 하는지 규명하고 있다. 가령, 유동하는 근대에서 플렉서블(flexible) 존재로 사는 방식은 하나의 질서다. 인류학자 메리 더글라스가『순수와 위험』에서 말한 것처럼 질서란 바로 ‘적절한’ 사물들이 그 어떤 다른 자리가 아니라 바로 정확히 있어야 하는 그 ‘제자리’에 위치해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제는 사물들의 적절한과 제자리를 판단하는 것이 ‘경계’라는 것이다. 경계는 ‘질서를 보전하거나 복구하는 일’을 하기 위해 원하지 않는 것들을 제거해야만 하는 ‘청소’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경계의 양면성에 따라 ‘바람직한 사람’이거나 ‘바람직하지 못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바람직한’에 대해 반항하게 된다. 반항의 본질은 카뮈의『시지프 신화』을 통해 보다 깊이 있게 보게 된다. 즉,

 

우리는 항상 그의 짐의 무게를 다시 발견한다. 그러나 시지프는 신들을 부정하며 바위를 들어올리는 한 차원 높은 성실성을 가르친다. 그 역시 만사가 다 잘 되었다고 판단한다. 이제부터는 주인이 따로 없는 이 우주가 그에게는 불모의 것으로도, 하찮은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서는 이 돌의 부스러기 하나하나, 어둠 가득한 이 산의 광물적 광채 하나하나가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정(山頂)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속에 그려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행복한 시지프를 통해 자신만의 구원하고 싶어 한다. 행복한 시지프는 부조리한 운명에 맞선 자기애이며 자긍심이다. 행복한 시지프는 자신의 고통을 자신이 짊어지고 가면서도 강인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그럼에도 바우만은 반항하는 인간으로 행복한 시지프보다는 프로메테우스을 주장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주었다는 벌로 고통을 받는 존재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얼마든지 돌과 불의 문제에 부딪칠 수 있다. 돌이 자신을 위한 문제라고 한다면 불은 타인을 위한 문제다. 이때 우리가 유동하는 세상에서 선택해야 할 것은 프로메테우스처럼 타인들의 비참한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 아닐까? 유동하는 삶의 위기에서『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은 여러모로 한 평생의 지식이 될 만큼 놀랍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장석주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리의 껍질이 아니라 진리의 낟알들을 찾고 가려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때문인데 완전히 고독한 순간까지 그렇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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