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만 보는 바보 진경문고 6
안소영 지음 / 보림 / 200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간서치(看書痴)란 말이 있다. 책에 미친 사람이라고 한다. 남들이 그렇게 부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고 스스로를 간서치, 라고 부를 정도면 평범하지 않다. 말 그대로 책이 곧 그 사람의 목숨이다. 이 책에 나오는 이덕무가 그런 사람이다. 얼마나 책이 좋았으면 그랬을까, 라는 안쓰러움이 있었지만 사뭇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기행(奇行)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왜일까? 그것은 저자 말대로 역사속의 인물과 마주대하는 일이 천편일률적이라는 답답함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동안 우리는 역사라는 이름 속에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을 가두어 버렸다. 단지 역사적인 정보를 머릿속에 기억하다보니 정작 그들의 삶은 늘 그림자에 가려져 왔다. 즉 역사라는 잿빛 구름에 가려 과거 이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일상사는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했다. 따라서 그 눅눅함이 어느 정도인지 우리는 짐작할 수도 없었다.

이럴 때 이덕무의 삶을 되돌아보고 있는 이 책은 충분히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다. 이 책은 『삼국사기』와 같은 정통 역사서는 아니다. 그보다는『삼국유사』에 가깝다. 부드럽고 유쾌하게 해서 읽는 맛이 난다. 이덕무라는 아웃사이더 지식인의 애환을 통해서 18세기 당시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이덕무의 진면목은 아니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은 적어도 이덕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말이 있을 정도이다. 이것은 부러움을 넘어서 시기심이 익살스럽게 넘쳐난다. 책만 보는 바보라고 해서 오직 책만 아는 바보라는 생각은 오히려 우리가 바보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는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스승이었다.

그에게 책은 양식(糧食)이었다. 가난한 탓에 배고픈 배를 밥이 아니라 책으로 채웠다. 그것도 모자라 『맹자』를 팔아 끼니를 때워야 했던 설움은 얼마나 비통한 일인가? 또 서자라는 신분의 굴레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온종일 책만 읽을 수밖에 없었다. 대장부의 비애감을 생각해보면 책 읽는 것이 마냥 즐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눈(目)으로만 책읽기를 하지 않았다. 그는 눈과 귀, 코, 입이라는 감각을 동원해서 책을 읽었다. 만약 그가 눈으로만 책을 읽었다면 책은 양식(良識)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독서 자체는 한마디로 <이목구심>이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면서 책을 읽었다. 그는 비록 책상 앞에 앉아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우주(宇宙)를 수십 번 오갔다. 이렇듯 그는 책을 통해서 마음의 빗장을 열고 비로소 세상 속으로 들어가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가 그를 실학자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마음가짐 때문이다. 이덕무를 비롯해 그의 벗인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도 책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그리고 그의 스승인 박지원, 홍대용은 어떤가? 그들은 신분을 초월하여 서로 하나가 되어 시와 노래를 부르며 고난의 시대를 풍미했다. 풍자와 해학이 넘쳐흐르는 그들은 무엇보다도 책으로 맺어진 인연이었다. 또한 책으로 배운 사상으로 비뚤어진 세상을 바로잡으려고 실천하였다. 

이렇듯 책이 가지고 있는 힘은 대단하다. 이덕무와 그의 벗들은 이런 책과 함께 동고동락했다. 그렇다고 뜬구름 마냥 세월을 허비하지 않았다. 비록 어려운 환경에서도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떳떳했던 마음의 여유로움은 나약한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이 모두가 책을 벗삼은 깨달음이다.

앞서 말했듯이그들은 눈으로만 책을 읽지 않았다. 즉 그들은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하는지 알았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어떻게 책을 써야 하는지도 알았다. 가령, 유득공은 우리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책을 읽었고 몸소 그곳을 수십 번 오가는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보스러울 정도로 그 즐거움에 빠져 들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삶은 과거의 이런 재미와 감동에 비하면 건조하다. 지금 종로에는 18세기 백탑 대신 빌딩들이 우후죽순처럼 세워졌다. 도시에 갇힌 삶 때문에 18세기와 같이 산다는 것은 모순이다. 변화는 시대적인 흐름이다. 사는 게 편리해졌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마음의 행복은 찾아볼 수 없다. 우리도 이제 책만 보는 바보가 되었으면 한다. 18세기 이덕무가 간서치라는 이름으로 되살아나는 것은 이러한 까닭일 것이다. 그의 집이 구서재(九書齋)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여러모로 유익한 생활의 발견인 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 가족입니다 - 2005 보림창작그림책공모전 대상 수상작 보림창작그림책공모전 수상작 11
이혜란 글 그림 / 보림 / 200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 날 단란한 가족에게 훼방꾼이 나타난다. 그런데 그 훼방꾼이 다름 아닌 할머니라는 다소 놀라운 사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현재진행형 이야기다. 지금은 핵가족시대다. 사는데 바쁜 나머지 집 안에 같이 있으면서도 엄마 아빠와 아이가 서로 얼굴 보기도 힘든 때도 있다. 그러니 멀리 시골에 있는 할머니와 떨어져 사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 책 『우리 가족입니다』는 느닷없이 할머니가 집에 들어오면서 벌어지는 일상을 아이의 눈으로 진솔하면서도 담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이와 할머니는 처음부터 충돌한다. 시골에서 도시까지 겁도 없이 택시를 타고 왔기 때문이다. 이렇듯 할머니는 엉뚱하다. 할머니의 이상한 행동은 시간이 갈수록 가족 모두에게 무거운 삶의 무게로 다가온다. 아이는 아이대로 불만이어서 당돌하게도 아이가 할머니를 가족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


이처럼 할머니가 아이에게 이방인이라는 가족 간의 문제를 이 그림책은 잘 표현하고 있다. 세심한 관찰력이 돋보이고 건조함이 묻어나는 일상의 풍경은 삶의 고단함을 그대로 옮겨온 것 같았다. 즉 할머니의 별난 행동에 맞서는 아이의 화난 표정 그리고 이를 묵묵히 지켜보는 엄마 아빠의 소박함이 공감을 넘어서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무엇보다도 할머니를 업고 가는 아빠의 뒷모습이 인상적이다. 뭐랄까, 가슴이 시리고 아프지만 한편으로는 행복함에 젖어 들었다. 가족이 이런 것이구나, 를 아주 구체적이면서도 절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가족! 생각만 해도 가슴이 물컹거린다. 하지만 한 집 안에 같이 산다는 것이 가족이라는 이름의 전부는 아니라고 본다. 어쩌면 그것은 말 그대로 이름에 불과하다. 그 보다는 가족 간의 사랑과 믿음이 있어야 한다. 아이에게 ‘할머니는 아빠의 엄마’라는 평범한 말을 통해서 작가는 우리가 짊어질 노인의 문제를 사랑스럽게 어루만지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
김훈 지음 / 푸른숲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읽어보면  <슈가캔디 마운틴> 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신비한 하늘나라인데 동물들이 죽으면 모두 그 나라로 간다. 그 나라에서는 일주일 일곱 날이 모두 일요일이다. 한마디로 동물들의 천국인 셈이다. 이러한 동물에 대한 의인화는 인간의 이익을 위해 살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고발하면서 한편으로는 인간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다.
그런데 이번에 나온 김훈의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이라는『개』는 예전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다. 개라는 동물이 등장하는 것은 다를 바 없으나 그 개가 말하는 세상이야기는 정말로 개가 말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을 일으킨다. 그만큼 개에 대한 치밀한 묘사가 돋보인다. 바람에 흔들리는 수염의 미묘한 떨림조차 생생하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동물성의 한계를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 면에서 개라는 동물은 특별하다. 개는 다른 동물과는 달리 사람과 가깝게 지내다보니 동반자 같다. 더구나 우리가 사는 집이라는 공간에서 함께 살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로 인해 인간의 잘잘못을 개는 아무런 의심 없이 똑똑히 보고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개의 운명은 불안하다. 인간의 잣대로 길들여진 나머지 인간을 주인으로 삼아야 한다. 그것이 개가 이 세상에서 사는 법이다. 인간이 싫다고 야생으로 돌아갈 수 없다. 다시 돌아가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인간의 품에서 살아왔다. 여기에 나오는 보리라는 진돗개 수놈을 보더라도 그렇다. 보리는 개 특유의 신바람과 눈치를 몸으로 표현하면서 당당하게 살아간다. 다만 그 당당함을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고 제 잘난 맛에 산다는 푸념을 짖어댄다. 그래서 개의 발바닥은 가난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가난하다는 말을 되새겨 보아야한다. 이 말은  사람의 관점인 동시에 동물들의 하소연이다. 사람이 자연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사람들끼리 소곤거리며 떠들어대는 사이 다른 한편에서는 소외당한 동물들이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한 체 살아왔다. 그들의 한(恨)은 곧 사람과 살면서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으로 받는 폭력을 감당하기에는 그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바보처럼 순하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리에게 사랑의 대상인 흰순이의 죽음은 어쩌면 개죽음이다. 그렇게까지 꼭 잔인해야 하는 걸까? 또한 보리에게 저돌적인 악발이는 공포의 대상이다. 악발이는 말 그대로 사람의 폭력성을 그대로 물려받은 싸움개이다. 자신의 영역을 상징하는 오줌의 힘이 강하면서도 역겨운 놈이다. 그렇게까지 꼭 사나워야 하는 걸까?
이렇듯 저자는 보리라는 개를 통해 사람과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세상을 본다. 세상은 분명 거칠다. 그리고 불합리하다. 이로 인해 보리의 발바닥은 가난할 수밖에 없는지 모른다. 이는 역설적으로 사람들 또한 가난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행복하게 산다면 개는 굳이 신비한 하늘나라로 가도 되지 않아도 된다. 저자가 보기에 개는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며 우리의 주위를 배회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이제 우리는 개를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 좋으나 싫으나 주인을 위해 사는 개는 야성을 버렸는데 우리는 누구를 위해 자신을 버릴 수 있는가? 반성해볼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괴짜경제학 - 상식과 통념을 깨는 천재 경제학자의 세상 읽기
스티븐 레빗 외 지음, 안진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6월
평점 :
절판


 

사과 속에 왜 레몬이 들어있는 것일까? 무척 흥미로우면서도 책 제목만큼이나 괴짜 같았다. 그것은 뭐랄까, 그동안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사실을 뒤집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레몬이 아닌 수박이나 포도가 들어있는 경우도 가능한 일은 아닐까? 이러한 나의 괴짜 같은 생각은 이 책을 읽고 나서야 그 진실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정보의 비대칭성 문제‘에 있었다. 저자는 이를 부동산 중개업자가 가지고 있는 정보의 미묘한 노림수에 비유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끝가지 읽어봐도 정보의 비대칭성과 레몬의 상관관계는 나오지 않는다. 아쉽게도 그 해답은 다른데 있었다.

이 책에 앞서 우리는 애컬로프라는 경제학자를 알고 있으면 많은 도움이 된다. 애컬로프는 <레몬 시장>이라는 논문에서 정보의 비대칭성 문제와 시장 관계에 대한 분석을 하고 있다. 그가 여기서 예를 든 것은 중고차 시장이다. 그에 따르면 중고차를 사려는 사람보다 파는 사람이 차의 결함을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고차를 구입하는 사람은 결국에는 겉만 번지르르한 레몬(흠이 있는 낡은 차를 가리키는 구어)을 비싼 값에 산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러한 정보의 그물망은 촘촘하지 않는다. 경제학이라는 다소 무겁고 머리 아픈 정보는 경제학자에게는 맡기고 만다. 이로 인해 우리는 더욱 정보의 비대칭 문제에 무관심할 수밖에 없다.

이럴 때 저자는 괴짜 경제학을 가지고 왔다. 괴짜라는 말이 나타내듯 상식을 거부한다. 상식은 곧 사회 통념이라는 그럴듯한 포장술로 인해 진실을 왜곡하고 만다. 그것은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거대한 도덕적 질서이다. 하지만 저자는 인센티브라는 강한 충격을 경제의 주요 동기로 보고 있다. 또한 인센티브가 피라미드라는 구조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즉 인센티브가 높을수록 정보의 비대칭성 문제가 강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경제학의 진실을 찾는 게임을 한다. 무엇보다도 그의 강력한 무기는 숫자라는 실증적인 수단이다. 사람의 마음을 계량화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숫자화 될 때 경제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숫자를 조작하는 부정행위를 저지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숫자는 또한 거짓말을 그대로 보여준다.

가령, 낙태의 합법화가 범죄율을 줄였다고 한다면 엉뚱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낙태와 범죄율의 상관관계는 숫자를 통해서 명확해진다. 다른 어떤 범죄 예방 프로그램보다도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사회적인 문제가 꼭 책상에서 고민해서 나오는 이런 저런 정책에 의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삶은 자잘한 부분에서 뜻밖의 결과가 생겨나는 것이다. 어쩌면 나비효과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나비가 날아가기 위해서는 날개를 움직여야한다. 그만큼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저자의 괴짜 같은 경제이야기들은 비범하다. 비범하다고 해서 다른 경제학자가 그렇듯 기념비적 논문을 발표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비범함은 그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고 들을 수도 없었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의 괴짜 같은 질문과 대답이 한편으로는 매우 실용적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가 진짜로 알고 있는 세상이 사실은 가짜라는 문화의 충격이 우리에게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이러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읽어 볼만하다.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은 변하기 마련인데 그 변화의 흐름을 단순하면서도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과 속에 엉뚱하게도 레몬이 들어있는 사진은 결론적으로 괴짜가 아니다. 그것이 경제학의 숨겨진 사실이다. 그만큼 그의 통찰력이 돋보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여름 밤의 꿈 - Shakespeare's Complete Works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윤기.이다희 옮김 / 달궁 / 2005년 6월
평점 :
품절


 

예전에 신문을 보는데 셰익스피어 작품을 제대로 번역해서 전집을 발간한다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번역하는 분이 우리에게 신화학자로 알려진 이윤기 선생이고 보니 더욱 설Ž다. 요즘 같이 삶이 어려운 시절에 고전을 읽는 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고전에는 행복한 삶이 가득 들어있다. 하지만 이러한 고전이라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단점은 읽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셰익스피어 작품이 어떻게 다가올 지 사뭇 궁금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셰익스피어 압축 파일을 푸는 시리즈’가 드디어 세상에 나오고 보니 앞서 말한 우려스러움이 말끔히 사라져버렸다. 책의 표지는 현대적인 느낌이어서 좋았다. 또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그 손길이 무척이나 가볍다는 것이었다. 책을 읽기 전에 미리 책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을 맛깔스럽게 설명하고 있는 덕분에 그의 압축 파일을 해독하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만큼 고전이라는 타이틀이 가지고 있는 무게감이 이제는 가벼워졌다고 해도 좋을 듯 했다.

이번에 나온 『한여름 밤의 꿈』 또한 가볍다. 가벼운 만큼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마법에 걸린 사랑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데…. 마법이 그렇듯 현실과는 달리 환상적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을 때 혹은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을 때 마법은 애타는 사람의 마음을 충분히 유혹한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마법의 유혹에서 눈을 뜨자마자 처음 본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첫 사람이 누가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것이 마법의 장난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첫눈에 사랑하고 만다.

이 책의 내용은 대강 두 갈래로 나뉘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먼저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두 남자가 벌이는 사랑의 삼각관계다. 그리고 또 하나는 <퓌라모스와 티스베>를 연극하려는 우왕좌왕하는 몇몇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러한 스토리를 본다면 이 책은 평범함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만의 독특한 글 솜씨를 마주대하는 즐거움이 있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 깊은 맛에 취해 한바탕 꿈을 꾸는 듯하다.

가령, 삼각관계라는 복잡하고 미묘한 갈등 속에서도 유머러스하고 재치 있는 말로 인해 오히려 유쾌해진다. 그 유쾌함을 계속 따라가다 보면 운명이 엇갈린 사랑하는 남녀는 마법에서 깨어나 진실한 사랑을 알게 된다. 그런데 다른 한쪽에서 <퓌라모스와 티스베>를 연극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그들은 연극의 ‘연’자도 모르면서 <퓌라모스와 티스베>의 슬픈 사랑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비극적인 희극이라고 말하면서 한바탕 놀고 싶은 것이다.

이처럼 꿈같은 이야기를 통해 셰익스피어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다. 하지만 아름다움 때문에 비극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누구나 사랑으로 인해 아파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픔이 지나고 나면 사랑은 더욱 아름다운 것이다. 이것이 사랑의 법칙이자 인생의 법칙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랑의 굴곡없이 첫눈에 반한 사랑은 아무래도 나태한 사랑이라는 즉, 마법의 달콤한 장난이다. 그 장난에서 셰익스피어는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이 책을 읽는 순간은 한 순간이었지만 곳곳에 나오는 맛깔스러운 대사들은 두고두고 남는다. 이것이 어쩌면 셰익스피어의 매력이 아닐까 한다. 한바탕 상쾌한 꿈을 꾸게 만든다. 그리고 그 꿈에서 깨어나면 사랑하는 사람을 더욱 사랑하게 만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