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 問 라이브러리 2
도정일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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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일까? 2+2=4일까? 조지 오웰의『1984』에 나오는 윈스턴 스미스가 고민하는 문제이다. 그의 나이가 39세라고 한다면 초등수학을 걱정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 이 소설에서 이상한 일의 정체는 빅 브라더에 있다. 그가 감시와 통제하는 전체주의에서 2+2=5는 현재이며 2+2=4는 과거이다. 역설적으로 과거는 진리이면 현재는 만들어진 진리이다. 그래서 그는 과거를 기억하고자 일기를 쓰면서 정치전체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이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냉전 시대의 치열한 이데올로기의 싸움이 베를린 장벽과 함께 무너졌다. 그리고는 세계화 시대에 걸맞게 자유주의가 넘쳐났다. 그중에서도 시장(市場)이 빠르게 변화했다. 가령, 전 세계인들이 맥도날드 햄버거를 같은 시각에 먹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빠르게 먹는다는 것(패스트푸드)이다. 이른바 시장이 템포바이러스에 감염되면서 문명화된 사회가 곳곳에 위협받고 있다. 광우병, 정크 푸드, 문명의 야만 등 우리의 생명과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다.

이런 안타까운 일들이 발생할 때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화의 장밋빛이 무서울 정도다. 그런데도 세상은 여전히 장밋빛의 멍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것이다. 혹은 ‘아Q주의’의 오류이다. 루쉰의『아Q정전』에서 나온 이 용어는 밖에서 실컷 얻어맞고 패했으면서도 집에 돌아와서는 “나는 패하지 않았다. 나는 정신적으로 승리했다.”라고 믿는 정신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도정일의『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을 읽었다. 생각의 나무에서 ‘답이 아닌 질문의 절실함을 위하여’라는 ‘問라이브러리’ 시리즈는 우리 시대 최고의 지성인들이 해당 사안에 대하여 말 그대로 절실하게 사회와 문화를 비평하고 있다. 도정일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공적 지식인이다. 이 책에서 그는 시장전체주의가 어떻게 야만을 야기하는지 문제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동시에 건강한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

그동안 많은 지식인들이 혹은 문학이 '현재의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 낙원(paradise) 혹은 유토피아(utopia)를 그려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듣기 좋고 말하기 쉽다고 해서 은근슬쩍 넘어가서는 안 된다. 경계해야 할 것은 경계해야 한다. 낙원이 과거지향이라면 유토피아는 미래지향이다. 결국 상상력이 상호 배타적이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통합적 상상력은 과거가 미래에, 미래가 과거에 상호 침투하고 작용하게 한다. 이것이 과거-미래의 동시화이다.

그는 세계화에 따른 단일세계의 현재적인 문제점을 자본-기술이 지배하는 비합리성을 사려깊게 들려주고 있다. 즉 고도 생산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무한파괴가 불가피하고 효율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환경의 무한오염이 불가피하다. 그러므로 고도 생산성과 효율성은 생산의 사회적, 인간적 효용의 증대와는 반드시 일치하고 오히려 그 효용성을 감소시킨다. 이것이 곧 효율과 효용 사이의 모순이다. 자연과 인간의 고통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 효용의 감소이고 이 감소 위에서만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야만성이라고 그는 밝히고 있다.

그는 아직 답하지 못한 야만성에 관련된 다양한 질문을 풀어 놓는다. 우리는 질문을 통해 우리 사회가 인간의 얼굴을 가진 문명의 전환해야 함을 비로소 알 수 있다. 앞으로는 어떻게(how)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왜(why)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전자가 기술주의적 사고이며 도구 이성이라면 후자는 인문주의적 사고이며 비판적 이성이다. 오늘날 문사철(文史哲) 즉 인문학적 가치들이 문제해결을 위해 되살아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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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속 내 친구 일공일삼 49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 지음, 김영진 옮김, 유타 바우어 그림 / 비룡소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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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텔레비전 속에 친구가 있다! 이 책을 읽고 마음은 책 제목에 있었습니다. 텔레비전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하며 그곳에 친구가 있다고 해서 솔깃했습니다. 돌이켜보면 텔레비전은 아이뿐만 아니라 엄마 아빠에게도 친구입니다. 아이들이 같이 놀아주라고 떼를 쓰거나 혹은 심심하다고 투정 부릴 때 리모컨을 누르면 간단하게 해결됩니다. 그때부터 텔레비전은 엄마 아빠의 손과 발이 됩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아이들이 점점 텔레비전과 가깝게 지낼수록 나는 그것과 멀어졌습니다. 나에게 텔레비전은 친구이지만 좋은 관계는 아닙니다. 단지 내가 필요에 따라서 텔레비전이 켜졌다 할 뿐입니다. 그러니 텔레비전 속 친구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아니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다릅니다. 아이들은 텔레비전 속 친구와 말을 합니다. 그래서 내가 모르는 아이들의 텔레비전 속 친구가 누구인지 궁금했습니다.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의『텔레비전 속 내 친구』는 엉뚱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불안한 마음을 아주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책에는 텔레비전 속 친구가 나옵니다. 아이들 친구라고 해서 아이들 눈높이 맞는 피터팬을 닮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텔레비전 속 친구는 칼 아저씨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 안톤이 칼 아저씨를 만나게 된 계기는 리모컨에 있는 파란 단추 덕분입니다. 이 단추를 누르면 정규방송 화면이 찌지직거리고 나면 칼 아저씨를 볼 수 있습니다.

칼 아저씨의 최대 장점은 무슨 얘기든 나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엄마 아빠는 이런저런 일로 늘 티격대격 합니다. 더구나 안톤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어?”라고 질문했을 때 엄마는 ‘자기가 믿는 것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멍청한 질문이라고 여깁니다. 그럴수록 안톤은 칼 아저씨에게 더욱 의존하게 됩니다.

그래서 칼 아저씨는 안톤이 텔레비전의 밖 세상에서 잘 살아가도록 도와줍니다. 칼 아저씨 덕분에 ‘보통’ 밑의 평점이 하나도 없는 끝내주는 성적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안톤이 친구들에게 인기가 없다고 하자 그것은 스스로 그렇게 믿으니까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라고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학교라면 질색을 하는 아빠를 대신하여 담임을 만나기 위해 텔레비전 밖으로 나온 칼 아저씨의 용기가 아주 멋졌습니다.

이런 칼 아저씨에게 최대 장점이 또 있다면 그것은 바로 통쾌함입니다. 안톤의 자존심을 망가뜨리지 않습니다. 엄마가 자신의 방에 들어와서 돼지우리 같다며 야단을 치자 “아빠한테 화가 났으면서 나한테 잘못을 떠넘기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엄마는 화만 났다하면 나한테 화풀이다.”라고 맞섭니다. 그러자 안톤의 엄마가 따귀를 때립니다. 그때 이 모습을 지켜보던 칼 아저씨가 “작고 마른 어린애들을 때리는 크고 뚱뚱한 엄마들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형편없는 인간들이야.”라고 말합니다.

이 책을 읽으면 안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칼 아저씨가 자신의 엄마를 가장 형편없는 인간이라고 비난하는데도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거침없이 말합니다. 이것은 곧 엄마 아빠의 무관심이 안톤을 외롭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허허로움을 칼 아저씨의 도움으로 채웠지만 끝내 안톤은 텔레비전 속으로 망명하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 안톤같은 아이들이 텔레비전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면 엄마 아빠는 리모컨을 살펴봐야 합니다. 혹 파란 단추가 있는지? 만약 없다고 해서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언젠가 모르는 사이에 생길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듯 아이에게 가장 좋은 친구는 엄마 아빠입니다. 앞으로는 리모컨의 파란 단추가 아닌 엄마 아빠의 사랑 단추를 누를 수 있기를 희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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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뛰는 삶 - 간절히 원하는 그 모습으로 살아라
강헌구 지음 / 쌤앤파커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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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호박벌을 아세요? 세상에서 가장 부지런한 동물이라고 합니다. 꿀을 모으기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1주일에 1,600km를 날아다닙니다. 겨우 2,5cm 밖에 안 되는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생기는지 경이롭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호박벌은 사실상 날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몸은 너무 크고 뚱뚱한데 날개는 형편없이 작고 가벼워서 날기는커녕 떠있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호박벌은 그 엄청난 거리를 날아다닙니다. 그 비결은 자신이 날 수 없게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꿀을 따 모으겠다는 목적만이 있을 뿐입니다. 목적을 향해 호박벌의 가슴은 뛰었을 것입니다. 만약 데카르트가 호박벌을 알았다면 “나의 가슴은 뛴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가슴이 뛴다는 말은 매우 평범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성공의 열쇠라고 했을 때 전혀 새로운 의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어느 누구는 호박벌을 보면서 신세를 한탄할 수 도 있습니다. 호박벌의 가슴에 비해 자신들 가슴은 살기 위해 숨 쉬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런 두근거림이 없습니다. 지루한 일상을 반복하는 무기력한 삶이 두렵다고 말합니다. 행복은 정말로 꿈같을까요?

강헌구는 [가슴 뛰는 삶]에서 행복은 꿈이 아니라 비전이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비전(Vision)은 막연한 꿈(Dream)과는 다르다고 합니다. 꿈이 ‘-하고 싶은 것’, ‘-가 되고 싶은 것’과 같은 막연한 바람이나 소망이라면, 비전은 ‘-까지는 반드시 -할 것’, ‘-까지는 반드시-가 될 것’처럼 기한이 있는 미래의 청사진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먼저 우리들 비전에 대해 ‘되돌아 보고, 들여다 보고, 내다보라.’고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과거를 회상하며 반성하고 반추하여 얻은 혜안과 현재를 바르게 보고 인식하는 통찰력, 그리고 장래를 내다보고 운명을 건 결단을 감행하는 선견지명, 이 세 가지 요소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저자는 성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고의 전환을 이야기합니다. 저자 말대고 그것은 임계사고에 있습니다.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온다는 말 대신 임계점까지 노력해야만 결과가 나온다고 합니다. 임계점이란 물이 99도가 아닌 100도에서 끓듯이 하나의 상태가 다른 상태로 가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지점입니다.

돌이켜 보면 자기 계발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새로운 인생 목표는 늘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패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유인즉 가슴이 뛸 만큼 제대로 된 비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기 계발에 있어 강조하는 시간전망(time perspetive)이 짧았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더 멀리 내다보고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이 책을 읽고 제목에 나와 있듯 가슴이 뛰기 시작해서 행복했습니다. 저자의 속도감있는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누구나 호박벌이 될 수 있다는 비전을 발견하게 됩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비전! 당신의 가슴도 그렇게 뛰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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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의 나라
이케가미 에이코 지음, 남명수 옮김 / 지식노마드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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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는『국화와 칼』에서 일본인들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컸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러나 또한(but also)'이라는 표현 때문이었다.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일본인들은 누가 참으로 용감하다고 하면서도 겁쟁이다, 라며 덧붙여 말하게 되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녀 또한 일본인들에 대해 싸움(칼)을 좋아하면서도 아름다움(국화)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싸움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이러한 궁금증에 대하여『사무라이의 나라』는 일본 정신의 실체를 파헤치고 있다. 저자의 견해를 따라가다 보면 그동안 상상 속에 있던 사무라이(さむらい)의 뜻이 명확해진다. 좀 더 말하면 이중적으로 다가온다. 하나는 종자(從者)라는 개념으로 귀족을 시중드는 남자들을 말한다. 또 하나는 무사(武士)라는 개념으로 전투가 직업인 성격이 거친 자들을 말한다.

사무라이의 역사를 보면 헤이안 시대의 우아한 귀족 문화 속에서 낮은 신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중세에 이르러 일본 정치의 주역이 된 것은 그들이 ‘무장한 영주(토지 소유자)’로서 성공했기 때문이다. 즉 12세기 후반 사무라이에 의한 최초의 준 중앙 정부가 성립되었다. 가마쿠라 막부에서 도쿠가와 막부까지 사무라이는 신분이 상승하면서 엘리트 계층이 되었다. 메이지 유신 때 대도(帶刀: 폭력을 행사하는 군사신분을 상징)를 금지당했고 집단의 특권도 부정되었지만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사무라이의 권력 구조를 보면 주군에 대한 무사의 강렬한 충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막스 베버는『경제와 사회』에서 다양한 사회의 ‘보호자- 피보호자’ 관계에서 일본은 ‘가신 봉건제’라고 말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사무라이 집단은 하나의 이에(家)아레 결합되었는데 이는 군신기능과 경제기능을 함께 가지는 혈족 관계의 조직체였다. 이에의 핵심인 혈족과 가신이라는 부하들이 주종관계를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도쿠가와 시대에는 주종관계가 재설정되는데 폭력보다는 자기 수양을, 군신 관계에서 조직으로, 능력에서 신분으로 바뀌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사무라이들이 어떻게 태어나고 현실적인 고난들과 싸워나갔는지 살펴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사무라이가 어떤 존재인가? 라는 질문과 마주칠 수밖에 없다. 무사에 깃든 살인과 파괴의 어두운 그림자들이 오랫동안 우리들에게 야만이라는 심리적인 보복으로 증오해왔다. 하지만 사무라이의 심연을 들여다볼수록 일본 정신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사무라이의 실체는 명예형 개인주의에 있다. 사무라이 문화는 명예로운 무사가 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통제해야 했다. 그 뒤 일본 역사에서 사무라이를 길들이는 사회 정치적 과정은 개인적인 자기의식을 공공의 사회 목표와 책임에 조화시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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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과 서 - 동양인과 서양인은 왜 사고방식이 다를까 - EBS 다큐멘터리
EBS 동과서 제작팀.김명진 지음 / 예담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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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 때 영어 시간에 부정의문문을 배웠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헷갈렸다. 가령, ‘키위를 안 좋아하니? (Don't you like kiwis?)'라는 질문에 만약 키위를 좋아한다면 우리말로 대답할 때는 ‘아니오’가 된다. 상대가 ‘안 좋아하니?’하고 부정형으로 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어로 대답할 때는 ‘예’라고 대답해야 한다. 왜냐하면 상대의 질문이 긍정이든 부정이든 상관없이 대답하는 사람 자신의 의견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동양인과 서양인에 나타난 생각의 구조를 알 수 있는 책이 바로『동과 서』이다. 일찍이 인도 시인 타고르는 동양과 서양의 차이를 산과 양옥(洋屋)이라고 비유했다. 그가 동양의 문화를 산으로 본 것은 멀리서 보면 산은 아주 무질서해보이지만 산에 올라가면 송이버섯, 산삼, 옹달샘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서양의 문화를 양옥으로 본 것은 양옥은 평수만 정해지면 건축 자재의 양을 숫자로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전자를 직관적 방법이라고 하고 후자를 분석적 방법이라고 비교한다. 직관적 방법은 전체의 연결성 속에서 개체를 보는 반면에 분석적 방법은 각 부분들을 통해 전체를 보는 것이다. 이것을 관찰자와 대상이라는 시점에서 본다면 전자는 2인칭시점이 되고 후자는 1인칭 시점이 된다. 즉 전자는 대상이 중심이 되어 관찰자를 바라본다면 후자는 관찰자가 중심이 되어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또한 판단의 기준에 있어 서양인은 스스로를 평가할 때 사회의 평가나 다른 사람들의 인정같은 외재적 기준보다는 자기 자신의 성취감을 중심으로 평가하는 내재적 기준을 적용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미드에 따르면 주체로서의 나(I)와 객체, 혹은 대상으로서의 나(Me)라는 두 가지 자아가 있다. 전자는 개인적 신념과 충동에 의해서 행동하는 자아이다. 반면 후자는 사회에 적응하고 사회의 요구를 대표하는 자아로 일명 ‘일반화된 타자’라고 한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동양과 서양의 사고방식이 왜 다를 수밖에 없는지 알게 된다. 저자는 두 문화에 표현되는 차이의 생성을 밝히면서 이를 바탕으로 두 문화의 이해의 폭을 넓히고 있다. 그만큼 서로 다른 두 문화를 탐색하는데 아주 유용한 나침반 역할을 해주고 있다. 그러면서 요즘같이 두 문화가 우열을 가리며 충돌하는 상황에서 이 책은 두 문화의 존재가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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