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짜사회학
수디르 벤카테시 지음, 김영선 옮김 / 김영사 / 200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괴짜 경제학』을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다. 기존의 경제학은 말 그대로 경제라는 수치내지 성장이라는 양적인 측면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경제의 문외한으로써는 어렵고 지루했다. 반면에 ‘괴짜 경제학’은 달랐다. 경제학자인 노르베르트 해링(Norbert Haring)의 ‘이코노미 2.0’이라는 개념처럼 일상의 경제학을 알기 쉽게 파헤쳤다. 그래서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제 3자의 입장’에서 상상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학교 교사와 스모 선수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라는 것이다.

사회학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바로『괴짜 사회학』이다. 이 책의 저자는 미국 도시의 빈민을 연구하던 대학생일 때 시카고의 흑인빈민 거주 지역인 레이크 파크 주택단지에서 설문조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생명의 위협을 뼈저리게 느끼는 것과 동시에 그는 한 가지 고민에 빠졌다. 그곳에서 만난 마약 판매 갱단인 블랙 킹스의 보스였던 제이티를 흑인으로 불러야 할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정답은 놀랍게도 ‘깜둥이’였다.

이처럼 흑인 빈민을 연구했던 그는 민족지학(民族誌學)이라는 방법을 사용했다. 흔히 사회학 분야에는 두 가지 입장이 있다. 한 가지는 양적, 통계학적 기법을 이용하는 입장이다. 나머지 한 가지는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직접적인 관찰을 통해 삶을 연구하는 입장이다. 앞서 말한 민족지학은 후자에 속했다. 다시 말하면 흑인들의 복잡한 삶을 이해하고 싶다면 그들과 어울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흑인 빈민 주택 단지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새로운 사실들을 눈으로 보게 된다. 마약, 섹스 그리고 싸움질이 난무하는 그곳에서 지역사회의 문제 해결 능력이 효과적인 시스템으로 작동되는 것을 보게 된다. 갱단과 지역 주민들에게는 도덕주의보다 실용주의가 우세했다. 뿐만 아니라 그곳이 주택단지라고 말하는 것은 사회적 편견과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곳은 서로가 공동체라고 느끼면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돕고’ 살았다. 이른바 자경(自警)주의적 정의로운 사회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안타까운 현실은 위기 그 자체였다. 온갖 사회정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곳은 가난했다. 더구나 공공기관의 부패는 역설적이었다. 그곳에서 경찰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도움을 요청해도 오지 않았다. 대신에 ‘경찰도 하나의 갱단이야.’라고 직설적으로 말하면서 그들에게 시달리는 중압감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게 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흑인 빈민들의 진짜 얼굴을 마주대할 수 있게 되었다. 저자 말대로 ‘깜둥이면서 가난한 것은 어떤 느낌인가?’라는 질문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일자리를 얻을 수조차 없다는 절망감이 그들의 희생을 강요하게 했다. 이런 고통 속에서 ‘왜 가난한가, 왜 이렇게 범죄가 많을까.’ 반문하는 흑인 여성에게서 그들의 깊은 상처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럼, 이제는 백인을 연구하겠나?’라는 날선 충고는 우리에게 살아있는 사회학이라는 희망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일깨워주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줄기없는 나무는 나무인가요?  

 

인간은 미지의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이며, 길도 질서도 없는 원시림이다. 원시림의 나무를 베고 깨끗이 치우고, 강압적으로 제어해야 하듯이 학교 또한 자연인으로써 인간을 깨부수고, 굴복시키고, 강압적으로 제어해야 한다. (…) 줄기를 잘라낸 나무는 뿌리 근처에서 다시 새로운 싹이 움터 나온다. 이처럼 왕성한 시기에 병들어 상처입은 영혼 또한 꿈으로 가득 찬 봄날 같은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기도 한다. 마치 거기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내어 끊어진 생명의 끈을 다시금 이을 수 있기라도 한 듯이. 뿌리에서 움튼 새싹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나지만, 그것은 단지 겉으로 보여지는 생명에 불과할 뿐, 결코 다시 나무가 되지는 않는다. -헤르만 헤세의『수레바퀴 아래서』 중에서

 

 





『법구경』에 다음과 같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근본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나쁜 마음을 가지고 말을 하거나 행동하면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 수레바퀴가 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인생이 꼭 바퀴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만 바퀴없는 인생이란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도 겉만 다를 뿐 수레바퀴와 같습니다. 수레를 굴레가게 하듯이 우리의 몸을 움직이게 합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퀴 혼자서는 굴러갈 수 없습니다. 남의 손길이 필요한데 소가 될 수도 있고 마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수레바퀴에게 소나 마음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소가 이끄는 데로 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약 수레바퀴 같은 삶을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행복할까요, 불행할까요. 괴테는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고 말했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네발 달린 동물이든 두발 달린 사림이든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헤르만 헤세는 “수레바퀴 아래 깔리게” 되거나 “마음의 상처를 입고 당황한 나머지 수레바퀴에 치인 달팽이처럼 촉수(觸手)를 움츠리고 껍질 속으로 기어들어가 버린다고” 불안스럽게 말했습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한스 기벤라트는 영리한 두되를 가진 특별한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장래는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주(州) 시험에 합격하여 신학교에 입학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신앙심이 잇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시험 결과에 달려 있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여정에 있어 그의 두 번째 삶이며 동시에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는 기대에 어긋남 없이 2등으로 합격했습니다.

 

하지만 남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지만 그는 신학교에서 출세를 위한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와 같이 공부하는 하일너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친구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하일너는 반항아였고 한스는 모범생이었습니다. 또한 하일너가 호모를 좋아한 나머지 시(詩)를 낭독하며 생활했다면 한스는 학생이라는 의무감으로 공부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은 우정의 꽃을 활짝 피우며 신학교의 답답함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공부와 담을 쌓을 수밖에 없었고 성적 또한 ‘수’에서 ‘가’로 형편없이 내려앉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도 한스는 행복했습니다. 하일너와 어설픈 낭만적인 우정은 불과 1~2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어느 때보다 그는 황홀했습니다. 그는 신학교라는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숨가쁘게 살아왔습니다. 그가 걸어온 길은 국도(國道)였습니다. 언제나 앞으로 나아갔으며 어제까지도 이해하지 못했던 내용을 하루가 다르게 터득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수학의 세계였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주제 영역에서 벗어나거나 주변 영역을 서성거릴 가능성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호머의 시(詩)를 배우면서 그의 인생은 내리막길로 치달았습니다. 신학교에서 방황은 삶의 오솔길을 발견하게 했습니다. 오솔길에서 시의 문법을 말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공부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호머의 역사를 이해하면서 호머의 시 세계에 빠졌습니다. 그에게 호머는 진정한 영웅이었습니다. 즉 영웅이란 “단순히 이름이나 숫자로 남기를 거부하며 타오르는 눈빛”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영웅의 시를 읽으면서 자신의 사랑과 꿈을 앗아가는 신학교 공부를 멀리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오솔길을 마음껏 걸어 다녔습니다. 공부를 하면서도 왜 해야만 하는지 고민했던 그에게 오솔길을 세상사는 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국도와 달리 넓은 세계를 조망해볼 수 있게 했습니다.

 

쇼펜하우어는『세상보는 방법』「나를 만드는 방법」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먼저 알아라. 자신을 먼저 알지 않고는 자기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얼굴을 비춰볼 거울은 있으나 마음을 비춰볼 거울은 없다. 자신의 신중한 성찰을 거울로 삼아라. 바깥의 모습이 잊혀졌을 때 마음의 심상을 생각하고 그에 의지하라.”

 

한스는 자기의 주인다운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아버지가 바라던대로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해서 목사가 되는 훌륭한 삶을 거부했습니다. 그 보다는 시를 통해 잃어버린 자신의 마음을 되찾으면서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유넌기 때의 훌륭한 낚싯꾼을 갈망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혼자만의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신학교의 울타리에서 자신 만의 맑고 아름다운 정원을 거닐고자 했던 한스의 꿈은 쓸쓸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른 한스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한 사람만의 문제로 봤습니다. 그래서 열병을 앓고 있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올 줄 알았습니다. 혹은 기분전환이라는 처방전도 하나의 방법이었습니다. 우등생이었던 한스가 어느 날 대장장이가 되었습니다. 이 무렵 사랑도 예외는 아니었으나 겉만 번지르르한 사랑에 위로는커녕 상처를 받았습니다.

 

수레바퀴처럼 돌아가는 세상입니다. 수레바퀴 위에 올라탄다는 것은 걱정이 없습니다.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대로 몸을 의지하며 됩니다. 어제와 오늘이 똑같고 오늘이 내일이 똑같습니다. 하지만 수레바퀴 아래서는 달팽이처럼 움츠러들겠지만 삶의 주인이 바로 자기일 때 사자처럼 포효하는 용기도 있습니다. 어제는 오늘의 보물이고 오늘은 내일의 보물입니다. 그러니 제발 함부로 줄기를 자르면 안 됩니다. 앞서 말했듯 줄기 없는 나무는 결코 나무가 될 수 없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안의 물고기 - 물고기에서 인간까지, 35억 년 진화의 비밀
닐 슈빈 지음, 김명남 옮김 / 김영사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찰스 다윈은『종의 기원』에서 “나는 곰과의 동물들이 자연선택에 의해 물속에서 살기에 더 적합한 신체 구조와 습성을 가지게 되고 입이 점점 터 커지며 마침내 고래 같은 동물이 되어가는 것이 전혀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원숭이가 인간의 조상”이라며 그를 비판했다.

우리가 ‘진화’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알기 쉬운 것이 바로 자연선택, 적자생존이다. 하지만 이것 못지않게 중요한 생물학적 법칙이 있다.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닐 슈빈의『내 안의 물고기』를 주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생물학적 모든 것의 법칙이라고 할 만한 개념으로 ‘지구의 모든 생명체에는 부모가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인간은 ‘업그레이된 물고기’라는 과학적 발견을 일깨워주고 있다. 

저자는 인간의 몸은 다른 동물들의 몸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으로 인간의 부모를 찾아내고자 한다. 즉 이 책에는 물고기에서 인간까지의 35억 년 진화의 비밀이 담겨져 있다. 가령, 그는 우리가 박쥐의 날개를 만들고자 한다면 손가락을 아주 길게 늘이면 된다고 했다. 해부학자 리처드 오언이 발견했던 다양한 생명들의 중요한 패턴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리처드 오언은 생물들의 팔다리는 모두 공통의 설계를 따른다고 했다. 즉 팔의 상완골이나 허벅지의 대퇴골처럼 먼저 한 개의 뼈가 있고, 거기에 두 개의 뼈가 관절로 연결되며, 거기에 또 작고 뼈들이 여러 개 붙어 있고, 마지막으로 손가락이나 발가락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즉, 뼈 한 개- 뼈 두 개- 둥근 뼈 여러 개- 손. 발가락, 이라는 패턴을 알게 된다.

그런데 저자가 무엇보다도 역점을 두었던 것은 팔다리의 패턴을 다름 아닌 물고기의 지느러미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겉으로 봐서는 곰이 ‘거의 고래 같은’ 만큼이나 인간이 ‘거의 지느러미 같은’ 것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우리의 일상적인 통념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 그는 우리에게 생명의 역사는 다시 한 번 화석 물고기를 탐구하게 한다.

생명의 역사에 있어 확실히 어류로 보이는 유스테놉테론(3억 80000만 년 전)과 확실히 양서류로 보이는 아칸토스테가(3억 6500만 년 전) 사이에는 ‘잃어버린 고리’가 있었다. 그러나 육기어류라 불리는 ‘틱타알릭’(3억 7500만 년 전)이 발견되면서 비로소 생명의 수수께끼가 풀렸다. 육기어류라는 것은 물고기와 사지동물의 중간단계에 속하는 것으로 발이 있는 물고기라는 것이다.

인간의 몸이 왜 이렇게 생겼을까? 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첫째 생물의 팔다리는 지느러미에서 생겨났다. 그리고 최초의 팔다리는 걷는 도구가 아니라 헤엄치는 도구였다. 둘째 틱타알릭이라는 물고기는 ‘팔굽혀펴기’를 할 수 있었다. 셋째 생명의 위대한 전환은 새로운 DNA의 탄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지느러미 발생에 관여했던 오래된 유전자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닐 슈빈의『내 안의 물고기』는 ‘틱타알릭’을 흥미롭게 소개하고 있다. 동시에 그동안 진화의 ‘잃어버린 고리’라고 당연시 여겨왔던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한다. 오히려 그는 ‘찾아낸 고리’라고 하면서 생명의 진화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시야를 열어놓았다. 그만큼 생명의 역사는 앞으로 발견해야 할 고리가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미같은 사랑은 어떤가요?

 

 어릴 때부터 나를 너무 귀여워해서 내가 지금 이렇게 되었다고 말이야. 또 내가 엄마 치마폭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되었다고. 하지만 사람은 항상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 수 있는데, 난 남자보다 여자가 되고 싶어. 왜냐하면 여자야말로 이 세상에서 최고의 존재거든. (…) 그러니까.. 말해 봐. 네가 남성다움이란 무엇이지? 음…그 누구에게 허풍 떨지 않는 것…심지어 권력을 쥐고 있더라도 말이야…아니야, 그것 이상이야. 허풍 떨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문제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남자가 된다는 것은 그 이상의 무엇이야. 그건 명령이나 팁 따위로 그 누구도 깎아 내리지 않는 것이지.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네 옆에 있는 누구에게나 자신이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또 마음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지  

                                                      - 마누엘 푸익의『거미여인의 키스』 중에서

 

듣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표범여인이 있습니다. 보통 때는 여느 여자들처럼 얌전하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나 남자가 그녀에게 키스를 하면 잔인한 짐승으로 변합니다. 표범여인이 되어 키스하는 남자의 얼굴을 할퀴며 끝내는 죽이고 맙니다.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돌변하게 만들었을까요? 표범여인의 비극은 섹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녀에게 섹스는 더러운 것이며 죄를 짓는 것이었습니다.

마누엘 푸익은『거미여인의 키스』에서 표범여인이 사랑 때문에 죽음이라는 벼랑 끝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해야 하는데 정작 사랑할 수 없어 생기는 병일수도 있습니다. 혹은 사랑하는 마음과 달리 사랑이 그토록 깨지기 쉽다는 안타까움을 견디지 못해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표범여인은 다릅니다. 동물원에 갇힌 표범처럼 만들어진 야성(野性)때문입니다. 사람 같은 동물이 된다는 것은 거짓을 몇 겹으로 두르며 살아야 합니다.

만약에 사랑하는 사람이 표범여인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당신은 그녀에게 키스를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그녀가 거미여인이기를 바랄 것입니다. 거미여인은 아무 일 하지 않고 사랑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끈기있게 거미줄을 만들어 놓고 어느 순간 사랑이 오면 붙잡습니다. 거미여인에게 사랑은 곧 삶이었습니다.

이 소설에서는 거미여인으로 불리는 몰리나가 있습니다. 그는 미성년자 보호법 위반으로 구속된 동성애자입니다. 그와 함께 비좁은 감방에 수감된 발렌틴은 게릴라 활동을 하다가 검거된 정치범입니다. 성격이 다른 두 남자가 평행선을 달리면서 삶에 대한 고통과 희열을 쏟아냅니다. 발렌틴이 책을 읽으며 자신의 스타일을 지키려고 한다면 몰리나는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사랑의 환상에 빠집니다. 그중에 하나를 보면 조국의 침략자를 여자가 사랑할 수 있는가를 두고 몰리나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합니다. 반면에 발렌틴은 여자 게릴라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생물학적으로 본다면 그들은 남자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문화적으로 본다면 즉 젠더로 봤을 때 그들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발렌틴이 말 그대로 남성이라고 한다면 몰리나는 여성같은 남성입니다. 남성과 여성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감성에 있습니다. 감성이 예민하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은 여성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남성과 여성의 이성애(異性愛) 보다 남성과 남성의 동성애(同性愛)가 훨씬 더 예민한 감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사랑은 단순히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가령, 존 스튜어트 밀은 나보다 더 뛰어난 사상가, 내 생애의 영광이며 으뜸가는 축복이라고 말했던 여인은 해리엇 테일러였습니다. 그녀는 보통 사람이 한 가지도 가지기 힘든 여러 장점을 한꺼번에 타고난 미인이요, 재치있고 자연스러운 기품이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밀은 그녀를 기억하는 것은 나에게 하나의 종교였다. 그녀가 옳다고 생각한 것은 나에게 모든 가치의 근본이요 내 생활을 이끌어나가는 표준이었다. 라고 고백할 정도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시몬드 보부아르는 그 어떤 남자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르트르를 만나면서 자기를 능가하는 단 한 사람의 남자라고 말했습니다.

이렇듯 사랑의 가치는 작가 말대로 ‘사랑은 또 하나의 기적’입니다. 그리고 이 기적은 서로의 육체를 쳐다보게 만든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그들은 서로에게 아름다운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몰리나의 사랑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요? 흔히 거짓 섹스라고 불리는 동성애에 대해 달갑지 않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런 엇갈린 사랑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몬드 보부아르는『제2의 성』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즉 사실 동성애는 의식적인 배덕도 아니며 숙명적인 저주도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상황에서 선택하는 하나의 태도를 갖는 것과 동시에 자유로이 선택하는 하나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사랑을 선택하는 기준은 다를 것입니다. 어는 누구는 표범여인이 될 것이고 어느 누구는 거미여인이 될 것입니다. 표범여인에게 사랑은 유리그릇에 담겨져 있는 물과 같습니다. 반면에 거미여인에게 사랑은 흐르는 물입니다. 고요있는 물은 소리도 없으며 흐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흐르는 물은 소리가 납니다.

모름지기 사랑은 작가 말대로 사랑하는 사람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수많은 어려움이 도사리라고 있는 어두운 오솔길 위에서 사랑을 얻을 때까지 싸워서 이기는 사람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안에서 싹튼 자신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 몸속에는 거미줄이 수북하게 쌓여 있을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5
이권우 지음 / 그린비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책만 보는 바보 즉 간서치였던 이덕무는 스스로를 오우아거사(吾友我居士)라고 했다. 내가 나의 벗이라는 뜻인데 책에 파묻혀 살았던 자신의 심정을 고백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앙드레 지드는 “나에게 한 권의 책을 읽는 다는 것은 그 저자와 함께 15일 동안 집을 비우는 일이다.”라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호모 부커스다. 책을 통해 우리는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다. 지식에 대한 이해의 폭이 상승하면서 사고방식에까지 많은 혜택을 받는다. 즉 어떤 문제에 있어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정리할 수 있어 무지의 답답함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책에 대한 이런저런 찬사는 많은데 정작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하는지? 어려움과 대면하기 일쑤다. 또한 사회적 양서(良書)와 개인적 양서의 충돌에서 발생하는 책의 눈높이도 빼놓을 수 없는 문제다. 가령 니체의 『차라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머리를 싸매고 전전긍긍하며 읽어야 하는가? 라는 회의가 앞선다.

우리 시대의 책벌레인 이권우는 『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에서 이중환 선생의 글을 인용하면서 책읽기의 두 종류를 이야기하고 있다. 먼저 비타민적 읽기다. 당장의 효과를 노리고 읽는 것이 아니라 은근짜하게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읽기다. 다음으로 아스피린적 읽기다. 빠르게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실용적 독서다.

이중에서 어느 정도 책 냄새를 아는 사람이라면 비타민적 읽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려면 먼저 천천히 읽어야 한다. 이른바 속독(速讀)은 주마간산(走馬看山)에 비유할 수 있다. 제대로 읽을 수 없으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면에 정독(正讀)은 주자(朱子)가 말한 격물치지(格物致知)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깊이 읽고 겹쳐 읽는 것이다. 한 분야의 책을 두루 섭렵하여 지식을 깊게 하는 것이 깊이 읽기다. 그리고 같은 주제를 각각 다른 분야에서 다른 책들을 서로 비교하며 읽는 것이 곧 겹쳐 읽기다.

마지막으로 쓰기 위한 독서술(讀書術)이다. 읽는 것 못지않게 글쓰기를 위해서라는 것이 확실시해야 한다. 그래야 문자향(文字香)이 예사롭지 않다. 한 편의 글이나 한 권의 책에서 주제의식나 논리 전개의 방식, 은유나 직유 같은 수사학을 눈여겨보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애써야 한다.

저자가 말하는 책읽기의 달인 방법은 독서를 가늠할 수 있는 작은 단면에 그치지 않는다. 책이 사람을 만든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더 할 나이 없이 효과적인 방법론이다. 우리가 호모 부커스일지라도 거장(巨匠)들의 독서론을 엿보고 싶은 까닭은 독서의 희열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저자의 독서론은 ‘각주와 이크의 책읽기’라고 할 수 있다. 각주라는 말이 본문의 어떤 부분을 보충하여 설명하기 위하여 본문의 아래쪽에 베푼 풀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자신의 세계관과 감성을 옹호하고 보충하고 지지하는 책을 읽는 행위가 바로 각주의 책읽기다. 반면에 이크는 “놀랐다.”라는 감탄사인데 저자는 지적 충격으로 해석한다. 즉 나를 깊고 넓게 만드는 것이 이크의 책읽기다. 전자가 행복한 책읽기라면 후자는 고통의 책읽기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책읽기의 달인에 있어 진정한 발견은 애들러 말대로 하자면 “더 적게 이해하는 상태에서 더 많이 이해하는 상태로 스스로를 고양하는 것”이다. 그래서 “책읽기는 고통”이라는 저자의 주장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덧붙이면 과정은 고통이나 그 결과는 행복한 것이 책읽기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1)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호모 쿵푸스 실사판 : 다른 십대의 탄생] 공부는 셀프!
    from 그린비출판사 2011-04-06 17:35 
    ─ 공부의 달인 고미숙에게 다른 십대 김해완이 배운 것 공부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 몸으로 하는 공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적절한 계기(혹은 압력?)를 주시곤 한다.공부가 취미이자 특기이고(말이 되나 싶죠잉?), ‘달인’을 호로 쓰시는(공부의 달인, 사랑과 연애의 달인♡, 돈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공부해서 남 주자”고.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근대적 지식은 가시적이고 합리적인 세계만을 앎의 영역으로 국한함으로써 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