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이별 - 김형경 애도 심리 에세이
김형경 지음 / 푸른숲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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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세상에 통용되는 몇 가지 이별의 지침들이 있기는 했다. 떠난 사람은 깨끗이 잊는 게 낫다. 바쁘게 지내다 보면 곧 괜찮아질 것이다. 이런 때일수록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지내야 한다. 슬픔이나 고통은 혼자 조용히 처리해야 성숙한 사람이다. 그런 지침들은 그러나 마음의 고통을 덜어주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아니, 아픔이 더 오래 지속되게 만드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17쪽

그보다 좋은 것은 애도 작업을 통해 우리가 진정으로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대상 없이도 살아갈 수 있고, 혼자 힘으로도 잘해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자신감과 자율성이 강화된다. 그리하여 애도 작업이 끝나면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한결 강하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변화하게 된다. 생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며 새로운 자기, 새로운 비전, 새로운 생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45쪽

'괜찬하'라고 말하지 않기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느냐고 인사할 때 '괜찮다'는 의례적인 답을 건네지 말고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한다. 여전히 좀 슬프다. 무거운 마음이 걷히지 않는다 등등. 감정을 표횬하는 것만으로도 내면의 문제가 조금씩 해결된다.-88쪽

정신분석은 늘 '지금 이곳'을 강조한다. 그 단어 속에는 과거나 미래에 살지 말라는 경고뿐 아니라, 현실 너머를 꿈꾸지 말라는 의미도 들어 있을 것이다. 환상은 의존성이나 나르시시즘처럼 성장하면서 버려야 하는 생존법이다. 그러지 않으면 외부 현실을 인식하는 눈을 갖지 못하게 되어 허공에서 비둘기를 꺼내고자 애쓰게 되기 때문이다.-106쪽

용기 있게 살아가기
세상의 모든 가치가 사라지고 생이 무의미해질 때, 그런 때조차 묵묵히 살아가는 것이 애도 작업의 일부이다. 인간 뿐 아니라 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의심이 생길 때, 의혹을 품은 채 신에게 경배하는 일이 삶의 일부이다. 실패나 실연을 무릅쓰고 다시 미래를 꿈꾸는 것, 밥을 먹는 자신에 대한 역겨움을 참아내며 계속 먹는 일이 바로 용기이다. -169쪽

울음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눈물은 한 사람의 가장 위대한 용기, 고통을 참고 견딜 수 있는 용기가 있음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간혹 어떤 이들은 겸연쩍은 얼굴로 자가가 울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나의 동료 가운데 한 사람도 눈물을 흘렸다고 고백했다. 그는 한때 부종에 시달라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부종의 고통에서 벗어나 있었다. 나는 그에게 어떻게 부종을 이겨냈는지 물었다. 그는 이렇게 고배했다.
"실컷 울어서 부종을 몸 밖으로 내보냈다네."-212쪽

용서하지 않을 자유, 용서할 수 있는 용기
정말로 용서하고 싶지 않다면 억지로 용서할 필요는 없다.용서하지 않고도 과거를 정리하고 화해할 수 있다. 하지만 용서하면,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용서할 수 있다면 가해자보다 강해졌다는 뜻이다. 진정한 자유는 용서한 사람이 받는 선물이다.-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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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비타 악티바 : 개념사 1
최현 지음 / 책세상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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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가 발전하면 민주주의가 성숙될 것 같은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촛불집회를 과잉 진압하는가 하면 표현의 자유마저 침해당하는 등 여러 가지 좋지 않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것은 인권이 권력보다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시적으로 직장 내에서의 여성의 불평등은 위선적이다. 남성의 정신적 잔향이 아주 강하게 남아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 진학률에도 불구하고 여성 경제 활동인구는 최저 수준이다. 순전히 여성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어서 여기저기서 감정싸움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인권이 나빠지고 있는 현상이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며 얻을 수 있는 것은 인권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것이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기의 정의만을 절대화하는 한계에 부딪치면서 사회의 분열을 초래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할 인권(Human Right)이란 무엇일까? 최현의『인권』은 이 물음에 대해 개념사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인권이라는 하나의 주제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인권의 역사를 다루면서 인권에 대한 인식을 넓혀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인권이 당면한 문제에 대해 어떻게 확대되었는지 깊이 있게 답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고 추정되는 권리’로 정의되는 인권은 보편적 가치이며 오늘날 ‘지구적 가치’로 전환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인권을 둘러싼 다양한 논쟁을 관찰하면서 저자는 아직까지 당위적인 가치에 머물러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정체성은 현실에 바탕을 둔 시민권(Citizen Right)을 통해 인권을 바로 보지 않았다는 문제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인권이 도덕적, 당위적, 추상적인 권리라고 한다면 시민권은 제도적, 법적, 현실적인 권리였다. 그래서 저자는 사회 문제를 정의롭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권이라는 당위적 가치를 근간으로 하여 시민권과 연계하여 파악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시민권의 역사를 살펴보면 고대의 고전적 시민권에서 근대의 보편주의적 시민권(온전한 시민권)으로 그리고 현대의 사회권으로 확대되었다. 인권과 달리 시민권에는 ‘의무와 권리가 함께 한다,’는 원리에 근거한다. 그러나 시민권이 사회를 통합하는 과정의 이면에는 여전히 개인주의-보편주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물론 자본주의 시장 논리도 빼놓을 수 없다. 결과적으로 다양한 소수자 집단들은 여전히 필요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여성들의 불평등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했던 아이리스 영(Iris Marin Young)의 ‘집단 인지적(group-differentiated) 시민권’은 공동체 방안이다. 그녀에 따르며 더욱 공정한 시미권이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것은 ‘사회 경제적 지위 때문에 온전한 시민권에서 배제된 것이 아니라 문화적, 심리적, 신체적 정체성 때문에 차별’을 받는다는 것이 그녀의 견해였다. 저자도 이 점을 분명히 하면서 개인주의적 보편주의라는 부당한 불평등을 줄여 사회 통합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고 전망했다.

이 책을 통해 인권에 대한 욕구는 대하여 이것을 실현시키는 시민권 제도의 개선이 필요한 상황을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은 인권에 대한 편향적 사고에서 벗어나 인권을 확대, 심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바야흐로 국민적 시민권에서 지구적 시민권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소수자들에게 대한 관심이 절실할 때이다. 그래서 다문화 시민권의 존중이야말로 진정한 인권의 회복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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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독서 -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
유시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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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이점은 무엇일까? 엘빈 토플러는『부의 미래』에서 가슴에 새길만한 몇 가지를 말했다. 그중에 지식은 원래 비경쟁적이라는 것이다. 즉 지식은 수백만 명이 사용하더라도 감소되지 않으며 수백만 명이 똑같은 지식을 사용할 수 있다. 사실 사용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더 많은 지식을 생성해 낼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이다. 또 하나, 지식은 명시적일 수도 암시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식은 표현될 수도 표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 혹은 타인과 공유하거나 자기 마음속에 간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탁자, 트럭이나 다른 유형의 물건들은 마음속에 간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 스스로를 ‘지식소매상’이라고 부르는 지식인이 있다. 바로 끊임없이 읽고 쓰는 유시민이다. 18세기 이덕무가 스스로를 ‘간서치(看書痴)’라고 자신의 습관적 사고를 말했다면 21세기 유시민은 이러한 관성의 법칙에서 변화해왔다. 다시 말하면 책에서 지식으로, 바보에서 소매상이라는 진보적인 사고방식으로 내면적인 성장을 계속 해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저자가 단순히 다른 사람의 정신 궤적을 따라가는데 만족했다면 그의『청춘의 독서』는 빛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이 책에서 밝히고 있듯 그는 아널드 토인비가 말한 ‘역할의 전도’현상에 적응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토인비의 역사는 도전과 순응의 연속이라는 말에 주목했다. 그러면서 그는 시대가 바뀌고 도전의 성격이 달라지면 응전에 성공하는 주체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한편으로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명확한 지를 반성하면서 앎의 절실함을 고백하고 있다. 가령, 랑케의『젊은이를 위한 세계사』를 읽으며 ‘역사는 발전하거나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리저리 변화할 따름이라는 것’을 믿었다. 하지만 E. H. 카의『역사란 무엇인가』를 읽게 된 후 비로소 지식인의 고뇌 즉 무지의 자각이 충격적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럴수록 그는 더욱 진보적 지식인이 되었다. 

진보는 곧 E. H. 카의『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이성의 이름으로 그 제도와 그것을 떠받치는 공공연한 또는 은폐된 가설에 근본적인 도전을 감행한 대담한 결의’였다. 그래서 그는 알고 있는 사실들에 대한 역사가의 임무는 랑케의 ‘가위와 풀’로 만든 것이 아니라 E. H. 카가 말한 ‘자루’와 같다는 것에 공감했다. 즉 가위로 오리고 풀로 붙이는 것이 아니라 자루에 무엇인가를 넣어주지 않으면 사실은 일어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지식인의 의무는 지식을 일어서게 하는 것이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저자가 지식의 자루에 담았던 것은 고전 작품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전을 낡은 지도라고 달리 불렀던 것은 세상의 부조리함에 방법적인 회의를 했던 청춘을 고전 작품들과 동고동락했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과 대화하면서 자신의 신념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자신의 신념을 명확하기 위해 또 다른 고전을 읽고 읽었다. 이러한 지나한 독서를 통해 그는 그릇된 편견과 고정 관념을 극복할 수 있었다.

가령, 도스토옙스키의『죄와 벌』을 읽고 사회악을 어떻게 바라 보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이 소설에서 라스꼴리니꼬프는 전당포 노파를 살해한다. 이유는 전당포 노파가 사회악이기 때문이었다. 니체의 초인(超人)사상에 따르면 선한 목적은 악한 수단이 정당화될 수도 있다. 혹은 도스토옙스키처럼 “아무리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악한 수단을 사용한 데 따르는 정신적 고통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악한 수단으로는 선한 목적을 절대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20대에 마지막으로 읽은 고전이었던 헨리 조지의『진보와 빈곤』에서는 문명이 발전해도 빈곤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를 재조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 헨리 조지는 문명이 발전해도 단순 노동의 임금은 오르지 않으며 오히려 지대(地代) 즉 토지 가치가 오른다고 했다. 그의 지대이론에는 토지의 경제적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리카도가 말한 토지의 비옥도가 아니라 토지의 위치라고 설득력있게 주장했다.

유시민의『청춘의 독서』를 유쾌하게 읽으면서 고전 작품들의 실체를 만날 수 있었으며 그 가치를 새삼 깨달았다. 흔히 고전이라고 하면 꼭 읽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마크 트웨인이 “고전 문학을 누구나 다 읽고 싶어 했으면서도 실제로는 아무도 읽고 싶어 하지 않는 것들”이라고 지적했던 고전콤플렉스에서 누구나 자유롭지 못한 게 우울한 현실이다.

저자는 이점을 우려하면서 고전을 읽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동시에 고전에 나와 있는 단편적인 주요 사상하나만으로 마치 고전을 다 앍고 있다는 착각의 오류에 대해 따끔한 충고를 아끼지 않고 있다. 이것은 훌륭한 독서가 아니며 ‘좋은 책은 그 자체가 기적이다.’라는 저자의 진심을 거부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삶을 치유하고 변화시킨 책들은 많다. 이러한 책 속에 담긴 지혜와 지식은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삶의 나침반이 되어 줄 것이다. 유시민이『청춘의 독서』에서 언급했던 고전 작품들은 여전히 녹슬지 않는 주옥같은 책들이다. 그렇기에 세계를 보다 열린 눈으로 사유할 수 있도록 있게 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사유의 힘을 자신의 머릿속에만 담아두지 않고 타인과 소통하고자 하는 저자를 보면서 지식은 탁자가 아니다, 라는 강한 인상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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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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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발전이라는 미명아래 삽질공화국이 대한민국의 4대강을 파헤치고 있다. 오로지 인간만을 위한 경제이다 보니 4대강 하나쯤 희생양이 되는 것쯤이야 ‘나쁜 사마리안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4대강이 아니더라도 무분별한 개발 독주는 맹렬하게 확산되어 왔다. 이런 상황에서 4대강만 특별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은 합리적 선택이라는 궁색한 변명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러한 폭력적인 방식은 한 나라의 경제성장의 지표에서 찾을 수 있다. 세계적으로 GNP에서 GDP 체계를 사용하고 있다. GNP는 한 나라가 소유한 생산요소를 국내외의 생산활동에 투여한 대로 받은 소득을 산출하는 ‘소득지표’다. 반면에 GDP는 국내에 있는 모든 생산요소를 결합하여 만들어낸 최종생산물의 합인 ‘생산활동지표’다. 거시경제에서는 GNP가 경제성장의 지표였으나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GDP의 체계가 되었다. GNP가 국내경기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선택이었다.

세계 경제가 빠르게 세계화로 변하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시장을 개방하면 한 나라의 경제 문제는 시장의 자연적인 힘으로 해결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시장자유주의가 필수다. 이른바 탈규제, 최소국가론이라는 구조조정을 통해서 모든 나라가 ‘하나 밖에 없는 최선의 모델(one-best way)'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델의 장밋빛 미래는 전 세계의 모든 국가는 비슷한 정도로 성장하고 부유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낙관적인 기대와 달리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하나 밖에 없는 모델이란 미국식 자본주의를 말한다. 이 모델은 신자유주의를 목표로 하고 있다. 자본주의 역사에 있어 19세기 고전적 자유주의는 획일적으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 칼 폴라니가『거대한 전환』이라고 부른 대변동을 거치면서 자본주의의 다양성이 생겨났다. 즉 자기 나라의 실정에 맞는 자본주의를 발전시켰다. 그런데 1980년 대 이후 신자유주의 경제학이 본격화되면서 세계는 자본주의의 다양성이 다시 위기를 맞고 있다. 그래서 세계는 시장을 전폭적으로 개방하는 ‘우월한 자본주의’와 시장 개방을 억제하는 ‘열등한 자본주의’가 있을 뿐이라고 우려의 목소리가 팽배하고 있다.

장하준은『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미국식 자본주의에 대하여 가장 명료하게 공세를 펼치고 있다. 그만큼 우월한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잘 파악하고 있다. 노엄 촘스키가 이 책을 ‘현실로서의 경제학’이라고 추천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세계화를 통해 경제성장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장주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충돌이 불공평하게 진행된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그래서 독일식 자본주의를 주장했던 리스트는 ‘사다리를 걷어차 버렸다.’고 비난했다. 즉 정상의 자리에 도달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뒤따라올 수 없도록 자신이 타고 올라간 사다리를 걷어차 버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말했듯 미국식 자본주의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위반한 결과였다. 높은 관세와 광범위한 보조금으로 국가가 경제시스템을 장악하면서 오늘날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 그런데도 다른 나라들에게는 자유무역을 일관되게 실천해온 최상의 국가라고 하면서 유인하고 있다.

세계 경제의 악순환을 부각시키고 있는『나쁜 사마리아인들』의 내용을 보면 ‘세계화에 관한 신화와 진실’을 알리는 데 있다. 저자에 따르면 토머스 L 프리드먼의『렉서스와 올리브나무』를 다시 읽는데서 시작하고 있다. 토마스 L 프리드먼은『렉서스와 올리브 나무』에서 새로운 글로벌 패션을 주장했다. 냉전 시대에는 인민복, 네루 의상, 러시아의 가죽 모자와 가죽 코트가 있었다. 그러나 세계화 시대에는 오직 황금 구속복(golden straitjacket) 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황금 구속복은 곧 세계화 시대를 규정짓는 정치, 경제적 의복이었다.

저자는 황금 구속복을 입고자 하는 나라는 16가지 황금률을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령,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폐지하거나 인하할 것, 외국인 투자를 저해하는 규제를 폐지할 것, 공기업과 수도, 전기, 가스 등 국유 사업이나 공익사업을 민영화할 것, 자본 시장에 대한 규제를 완화할 것 등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황금 구속복을 입어야 세계화가 덫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만약 방직기 제조사로 출발한 도요타가 프리드먼 말대로 황금 구속복을 입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렉서스를 수출하는 국민이 아니라 누가 뽕나무를 차지할 것인지를 놓고 싸우는 국민이 되었을 것‘이라고 비유한 저자의 통찰력을 폄하해서는 안 된다. 이쯤에서 우리가 주지해야 할 사실은 세계화의 상징이 된 렉서스와 반세계화의 상징이 된 올리브나무의 역학 관계다. 돌이켜보면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는 불가분의 관계다. 렉서스인 동시에 올리브나무여야 한다.

다음으로 부패하고 비민주적인 나라에는 등을 돌려야 하는가? 에 있다. 저자는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신자유주의 정책의 실패에 대한 변명으로 부정부패를 부당하게 이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신공공관리(New Public Management)을 통해 부정부패를 줄일 수 있다고 했지만 ‘시장의 힘이 지나치게 작아서가 아니라 지나치게 크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부정부패의 원칙을 간과한 나머지 실패하고 마는 것을 역설적으로 경고했다. 그리고 시장과 민주주의에 있어 결코 자유시장과 민주주의는 타고난 짝이 아니었다. 민주주의가 1인 1표라고 한다면 시장은 1달러 1표의 원리였다. 이로 인해 ‘강한 긴장’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끝으로 문화는 경제 발전에 영향을 미치는가? 를 살폈다. 보통 가난한 사람들의 특징으로 게으름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저자는 ‘국민들이 게을러서 나라가 가난한 것이 아니라 가난하기 때문에 국민들이 게으른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경제와 문화의 관계에 있어 경제를 발전시키기 전에 먼저 문화 혁명을 단행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앞서 말했듯 경제 발전이 문화에 미치는 영향이 훨씬 더 크며 문화의 재발명에 있어 그를 뒷받침하는 경제 구조와 제도의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고 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속셈을 파악하게 되었다. 세계화라는 승자독식 게임에서 그들은 줄기차게 ‘경기장을 평평하게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 왔다. 그러나 저자는 ‘기울어진 경기장’이어야 한다고 독특한 주장을 펼쳤다. 경기장의 높은 쪽이 개발도상국이고 낮은 쪽이 선진국이어야 한다. 그래서 평평한 경기장에서는 불공정했던 게임이 오히려 기울어진 경기장에서는 공정해진다는 것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하나 있다. 조지프 스티클리츠가 “GDP가 보여주는 숫자 너머를 봐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매일 같이 일하고 주말에도 쉬지 않는다면 GDP는 증가하겠지만 모든 사람들이 더 행복해진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을 떠올리게 했다. 세계화를 단순한 성장 논리만으로 질주한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그만큼 삶의 질을 나타내는 ‘인간개발지수(HDI)’는 밑바닥 수준에 불과할 것이다. HDI는 아마르티아 센 교수의 ‘역량’ 개념을 기초로 하고 있는데 행위자가 자신의 목적, 지향, 가치 등을 실제로 수행할 수 능력을 말한다. 따라서 세계화라는 자본주의의 단일성이 가진 한계를 제대로 인식하고 자본주의의 다양성이 희망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유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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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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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는 우리에게 두 개의 눈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얼굴에 있는 육체의 눈입니다. 다른 하나는 가슴에 들어 있는 마음의 눈입니다. 많은 알라디너들이 신경숙의『외딴방』을 ‘내 인생의 책’이라고 말했습니다. 왜 그랬을까? 여러 번 곱씹은 후 ‘내게 글쓰기란 무엇인가?’라는 문장을 마주하면서 마음 한 구석이 물컹거렸습니다.

1990년 이후 각종 문학상을 차지했던 신경숙이『외딴방』에서 글쓰기 때문에 힘들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녀가 소설가여서 당연한 문제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눈으로 보면 글쓰기에 대한 추억이 사뭇 달라졌습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그녀에게 글쓰기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까닭으로 기억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전 소설인『외딴방』에서 글쓰기를 은밀하게 좋아했던 초년고생을 떠올렸습니다. 그녀가 말하는 초년은 서른 살을 경계로 하고 있습니다. 좀 더 세세하게 보자면 열여섯에서 열아홉 그리고 먼 훗날 서른 살이었습니다. 열여섯에서 열아홉 나이에 얽힌 갖가지 아픔이 서른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뭔가를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래도록 막연했던 두려움을 지나쳐오면서 그녀는 고적한 목소리로 생의 버팀목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아 이것 없이는 외로웠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말했던 ‘이것’은 무엇이었는지 그 속내가 궁금했습니다. 그녀의 삶 한 자락을 펼쳐보면 그녀의 삶이 시작된 1979년 열여섯 이후 열아홉에 이르는 사년의 과거와 1995년 서른둘의 현재가 서로 만나고 있습니다. 열여섯이었던 그녀는 외사촌과 함께 고향을 떠나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서울 구로 3공단으로 들어갔습니다. 일자리를 얻기 위해 상경한 그녀들은 을씨년스러운 공단의 굴뚝이 보이는 삼층 벽돌집에서 방 하나에 세를 놓아 큰 오빠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놀랍게도 삼층 벽돌집에는 서른일곱 개의 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습니다.

서른일곱 개의 방…… 하지만 도시에서는 굳이 서른일곱개의 외딴방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곳에서 그녀가 바라본 세상은 모순이었으며 남들과 다르게 살아야 하는 열등감이 어느 순간 평범한 일상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낮에 일했던 동남전기회사의 열악한 작업 현장은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이 단지 가난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철야작업에 지쳐도 생리휴가여도 무급으로 계산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다도 읽는 내내 안쓰러웠던 것은 밤에 산업체 특별학교에서 공부했으나 말이 좋아 주경야독(晝耕夜讀)이지 현실은 야멸찼습니다. 그녀와 함께 다녔던 사진작가가 되고 싶다던 외사촌, 전화교환원이 되고 싶다던 희재 언니의 꿈은 공순이라는 날선 비수에 그만 산산이 부서지고 맙니다. 사랑의 물거품도 다반사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 시절이 그립다고 말했습니다. 비록 열여섯의 나이에 가족들의 짐을 덜기 위해 교복대신 푸른 작업복을 입었지만 그녀에게는 작가에 대한 열망으로 버텨냈습니다. 공장에서 숨 가쁘게 일하면서도 그녀는 뜻도 모른 체 좋아하는 시(詩)를 노트에 옮겨 적었습니다. 가난과 외로움이라는 현실을 바꿀 수는 없을지라도 문학만이 위안이었습니다. 문학이 곧 자신이었으며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던 슬픔과 낭만이 가장 행복했던 때였습니다. 더구나 공장에서 학교로 가기 위해 교복으로 갈아입었던 그 때의 오후 다섯 시를 기적의 시간이라고 불러보고 싶었습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외딴방’이라는 단어를 놓고 이런저런 고민을 해봤습니다. 말 그대로 외딴방은 삶의 한쪽으로 쫓겨난 방이라는 탓에 마음이 산란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외딴방은 하나의 통과의례를 상징했습니다. 흔한 말로 진주조개가 진주를 만들듯 사랑의 아픔없이는 지금의 나는 여전히 불안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층민의 굴레라는 부끄러움을 잔뜩 묻히며 마음이 아팠다는 어설픈 감정이었다면 오히려 상처가 더욱 깊었을 것입니다. 삶을 방으로 비유해보면 ‘자기만의 방’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외딴방은 방과 방 사이의 중간단계에 놓여 있습니다. 즉 타인의 방과 자기만의 방의 사이입니다.

겹겹이 쌓인 고민 하나를 더 생각하면 나의 외딴방은 어떠했는지 자문해봤습니다. 나에게 행복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과거를 더듬어봤습니다. 일찍이 괴테는 “살아있는 한 방황한다.”고 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더라도 아쉬움이 맴도는 것 또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지금의 하고 있는 일이 꼭 하고 싶어서 것이라고 한다면 다행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꼭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외딴방의 기적은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신경숙은 외딴방에서 가질 수 없는 것을 치열하게 가지려고 했습니다. 온 몸의 뼈가 뚝뚝 끊어질 정도였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위대한 일은 탄탄해졌습니다. 뭔가를 좋아하게 되고, 그래서 더욱 사랑하게 된다는 게 이런 거구나,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외딴방에서 느슨함도 못자라 오만하여 불행과 행복이 안개에 쌓여 흐릿했습니다. 그녀와 나는 치열함과 게으름이었으며 이것이 오늘의 그녀와 내가 살아가는 방식을 기억하게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삶을 오로지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깨달음의 순간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녀는 외딴방에서 글쓰기 때문에 살았습니다. 또 글쓰기 때문에 삶을 더욱 사랑했습니다. 또 글쓰기 때문에 고독한 절망을 견뎌냈습니다. 그녀 말대로 글쓰기는 ‘이것으로만이, 나, 라는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소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튼튼히 뒷받침해주었습니다. 그녀는 글쓰기 덕분에 행복했습니다. 그녀는 글쓰기로 인해 자신의 존재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소설을 읽고 나서 나의 글쓰기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봤습니다. 신경숙이 말하는 글쓰기를 더 듣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책 관련 잡지를 보다가 ‘신경숙의 서재 탐방’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문제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잡지(출판저널)에서 “쓰기 먼저 하려고 애쓰지는 않았으면 해요. 우선은 읽고, 느끼고, 경험하는 게 우선이거든요. 자기가 놓여 있는 그 순간을 최대한 보고 느끼고 경험해야 해요. 그래야 글도 치열해지니까.”라고 의미심장한 그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소설가의 삶은 굴곡이 많습니다. 그녀처럼 치열하게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게 그녀처럼 고맙다는 말을 아끼지 않아야 했습니다. 그녀의 꿈이 스며든 외딴방은 누구에게나 있었을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의 첫 출발지이라는 것, 삶의 밑그림을 시작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그곳에서 밀물과 썰물 같은 고통을 어떻게 견뎌내야 우리의 꿈이 꿈다워질까요? 그녀는 [외딴방]에서 손(手)에 달렸다고 다소 차분하게 말했습니다. 즉 ‘네가 만났던 사람들의 슬픔과 기쁨들을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퍼뜨리렴. 그 사람들의 진실이 너를 변화시킬 거야.’라고 손(手)으로 다가서게 했습니다. 글쓰기에는 아무 걱정도 없어 보였던 손이 그녀로 인해 희망을 넘나들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 그리고 먼 훗날, 외딴방에서 살았던 것처럼, 잠 못 이루며 책장을 넘기거나 볼펜을 움켜지며 써내려가며 행복했던 것처럼, 그녀 말대로 문학이 그냥 좋았던 것처럼 다른 사람이 되어 보고 싶게 했습니다. 그녀의 외딴방은 단순히 과거의 어느 날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이 팍팍할 때 조금이라도 외딴 거릴 수 있는 자유, 홀로서기의 자유를 닮아보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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