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살의 인생론 - 성장을 위한 철학 에세이
안광복 지음 / 사계절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고민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인생과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열일곱 살의 인생이 소중한 것일까? 어쩌면 이것은 우리가 겪어야 할 인생과업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시련 때문에 그럴 것이다. 흔히 청소년을 질풍노도의 시기이며 미성숙한 존재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열일곱 살의 현실은 서럽다. 오직 공부해야만 학생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정작 그들의 불안한 심적 고통에 대해서는 시큰둥하다.


그런 면에서 안광복의『열일곱 살의 인생론』은 좋은 멘토였다. 나이 마흔 살에 열일곱 살 청소년들을 위해 그는 자신의 경험과 철학을 15가지 주제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러한 질문을 통해 그는 마흔 살의 교사가 아니라 자신의 기억 속에 아팠던 열일곱 살 학생으로서 아이들과 만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열일곱 살의 고민에 대한 그의 철학적인 성찰은 ‘성장통을 넘어서는 데 도움을 주는 지혜’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열일곱 살의 영혼을 크고 단단하게 만들었다.


이 책을 통해 열일곱 살의 겪는 문제를 몇 가지 살펴보면 하나,「의미-내가 바라는 것 뭘까?」라는 것이다. 열일곱 살이면 어른들로부터 공부만 잘하면 뭐든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다는 잔소리를 귀가 따갑게 들어야 한다. 열일곱 살에게 공부는 인생 역전을 꿈꾸는 로또와 같다. 그러나 저자는 공부만 해서는 삶을 이끌지 못하며 행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공부만을 맹목적으로 쫒는 것은 ‘판도라의 상자’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삶의 성장 과업에 있어 공부만 생각한 나머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고민 자체를 놓아버리게 된다. 이런 사람을 니체는 ‘낙타형 인간’이라고 했다.


둘,「짝사랑-사랑은 인생의 구원인가?」라는 것이다. 사랑의 열병을 앓는다면 아마도 고흐의 선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흐는 성냥을 켜서 손가락을 불 속에 집어넣고는 사랑하는 그녀의 부모에게 “제발, 제 손가락이 성냥불에 타고 있는 동안만이라도 그녀를 만나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절하게 요구했다. 사랑이 자신의 반쪽을 찾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플라톤이 ‘사랑은 영원을 향해 가는 사다리’라고 했듯이 플라토닉 사랑(platonic love) 즉 정신적 사랑이어야 한다. 자신이 바라는 이상형을 쫒는 사랑은 온전할 수 없다. 짝사랑은 환상일 뿐이다. 에리히 프롬이『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을 하려면 혼자 설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 봐야 한다.


셋,「인생 진도표-삶의 낙오자는 언제 결정될까?」라는 것이다. 사춘기(思春期)가 청소년기를 말한다면 사추기(思秋期)는 40대를 말한다. 공자는 40대를 불혹(不惑)이라고 했지만 오늘날은 구본형 말대로 ‘불혹이 아닌 유혹의 시기’로 봐야 적절하다. 한편 생물학자 최재천은 50대를 전후로 하여 “인생은 이모작하라.”고 권했다. 미국 의학 협회에 따르면 노인을 다음과 같이 기준으로 정했다. 첫째, 스스로 늙었다고 느낀다. 둘째, 자신이 배울 만큼 배웠다고 여긴다. 셋째, 이 나이에 그런 일을 뭐 하러 해, 라며 투정 부린다. 넷째, 자신에게 미래는 없다고 느낀다. 다섯째, 젊은 층의 활동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여섯째, 듣기보다 말하기를 즐긴다. 일곱째, 좋았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이제 인생에 있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저자 말대로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한 인생의 낙오자란 없는 세상이다.


넷,「변화-위기를 기회로 바꾸고자 한다면?」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엄청난 힘을 가진 고릴라이지만 힘없는 어린 아이 같은 인간을 이기지 못한다고 했다. 이러한 이유에 대해 동물학자 클라이브 브롬흘은 ‘인간은 야수에 맞서 어린아이가 되는 전략’ 때문이었다. 사회생활도 마찬가지다. 고릴라보다는 ‘착한 어린아이’가 되어야 잘 할 수 있다. 학교의 목적은 다름 닌 착한 어린아이를 길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착한 어린아이의 비극이라는 문제를 간과할 수 없다. 미래가 불확실할수록 저자는 기회를 바꿀 수 있는 담대함이라는 답을 들려주었다.


다섯,「애도-죽은 뒤에도 삶은 이어지는가?」라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자 베레나 카스트는 삶이 치유되는 과정을 5단계로 정리했다. 즉 마주하지 않으려는 시기, 분노와 노여움의 시기, 죄책감에 시달린 시기, 탐색과 분리의 시기, 새롭게 자신과 세계와 관계를 맺는 시기다. 이러한 과정을 프로이트는 ‘슬픔 노동’이라고 했다. 슬픔을 이겨내는데 노동하듯 많은 노력이 필요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상실의 고통이 그냥 고통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 보다는 카르페 디엠(carpe deim),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여야 한다. 지금을 즐기며 죽음을 기억해야 삶이 그만큼 소중하며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인 T.S. 엘리엣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개성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안광복은『열일곱 살의 인생론』에서 열일곱 살과 열린 대화를 하면서 그들의 절절한 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하루 종일 책상 앞에서 씨름하는 열일곱 살에게 이런저런 멘토를 들려주는 책보다 잠 한 숨 편히 자는 것이 더 호소력이 있다. 그러나 이 책에는 열일곱 살이 알았더라면 좋았을 15가지들이 있다. 저자의 바람과 같이 우리의 영혼을 맑게 해주며 앞으로 살아가는 데 용기와 희망이 가득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식의 역사 -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지식을 찾아
찰스 밴 도렌 지음, 박중서 옮김 / 갈라파고스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1) 저 나무 안에는 다람쥐가 있다.
(2)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태어나면 또한 죽는다.

위의 문장에서 (1)과 (2)의 차이는 뭘까? 먼저 생태계로 보면 전자는 사람과 동물들이 알 수 있는 것이다. 단 특정한 환경이 필요하다. 가령, 배가 고프거나 다람쥐 둥지를 찾고자 하는 경우다. 반면에 후자는 사람은 알지만 동물은 모른다. 동물에게는 추론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지식으로 보면 전자는 특수한 지식이며 후자는 보편적 지식이다. 그래서 사람이 알아야 할 지식이 보편적이라는 논리가 적용된다. 보편적 지식은 누구나 어렵지 않게 아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한 정보와는 다르다. 보편적 지식은 지식의 발전과 축적의 성과다.

찰스 밴 도렌의『지식의 역사』는 말 그대로 지식의 역사를 개관하고 있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지식을 찾아’서 라는 부제만큼이나 방대하다. 저자 말대로 지식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인류가 약육강식의 생태계에서 21세기 지식 생태계로 변화했듯 지식 또한 같은 궤도를 지나왔다. 이 책에서 저자는 지식의 궤도를 ‘진보’의 파노라마로 조명하고 있다. 지식이 어떻게 형성되고 당대인들의 정신을 어떻게 드러내는지를 보여주면서 지식과 관련된 사회적, 문화적 현상을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연대기적 서술이 아닌 보편사적 관점에 따라 지식의 변화는 진보는 멈추지 않았다.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 속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이 책을 통해 지식의 진보의 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BC 6세기 그리스의 지식 폭발이다. 고대인의 지혜는 투키디데스의 말대로 강한자의 정의였다. 이것은 성스러운 것이며 올바른 것이었다. 하지만 그리스 시대는 아르스토텔레스가 “아는 자는 곧 알려진 것을 지닌 자”라고 말했다. 여기서 알려진 것은 ‘에피스테메'(epsiteme)라고 부른 것으로 학문이었다. 학문은 체계화된 지식을 말한다. 이러한 학문 덕분에 첫째, 무엇에 관해서든 여러 가지 진리들이 아니라 오로지 단 하다의 진리만이 있다는 관념이 생겼다. 둘째 아는 사람과 알려진 사이의 근본적인 관계에 대한 관념이 생겼다. 셋째 교육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생겼다. 넷째 과학 그 자체의 관념, 그리고 과학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수학의 관념이 생겼다.

다음으로 르네상스이다. 르네상스인이란 작은 일부분에 관해 모든 것을 알기 보다는 모든 것에 대해서 조금씩 보다는 더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동물의 일부분에 관하여』에서 어떤 주제에 관해 ‘과학적 지식’과 ‘교육적 면식’ 그리고 ‘일반 교육’을 말했다. 과학적 지식은 특정한 분야의 전문적 지식을 말하며 교육적 면식은 어떤 주제에 교육을 받은 사람은 어떤 분야에서 비판력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일반교육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비판력 있는 사람을 말하는데 이것이 곧 르네상스인이다. 하지만 그 방법에 있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역적 방법이 아니라 베이컨의 귀납적 방법으로 지식을 추구했다.

그리고 16~18세기 과학적 방법의 발견에 있어 ‘갈릴레오-데카르트 혁명’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과학(science)의 유래는 중세 라틴어 지식에 해당하는 ‘스키엔티아’(scientia)였다. 스키엔티아가 모든 사람이 아는 것이라고 한다면 사이언스는 특별한 사람 즉 과학자만이 아는 것이었다. 그래서 과학의 세 가지 특징을 보면 첫째 과학은 특수한 세계관을 지닌 특별한 사람들이 수행하는 것이다. 둘째 과학은 생각이나 감정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거의 전적으로 사물을 다룬다. 셋째 과학의 특별한 방법과 그 결과를 보고하는 데 사용되는 독특한 언어를 사용하는 데 수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수학적 진리에 있어 갈릴레오는 “자연의 책은 수학으로 작성되었다.”라고 했으며 데카르트는 기하학을 이용하여 모든 현실의 사학적 방정식을 적용했다.

끝으로 20세기 과학과 기술, 예술과 미디어를 대략적으로 알게 된다. 먼저 과학과 기술에 있어 고대인들의 사물의 인식이 자신들의 오감과 정신을 이용한 패턴이었다면 20세기는 가설의 검증을 통한 개념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세기에 원자론이 부흥했는데 원자(原子)의 불가분성이라는 것은 분자(分子)의 개념으로 변화되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인이 알지 못했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하이델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를 알게 된다. 다음으로 예술과 미디어를 보면 매클루언의 통찰을 볼 수 있다. 그는 “미디어는 메시지다.”라고 했다. 이는 미디어의 의사소통될 경우에 의사소통의 내용과 효과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한편 피카소, 브라크 같은 입체파 예술가들은 사물의 표상이 아니라 ‘회화적 사실을 구축’했다.

이 책은 모두 15개의 카데고리로 나눠 ‘지식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지식의 습득에 있어 백과사전식으로 한다면 진부할 수밖에 없다. 물론 지식을 얻는 속도는 빠를 것이며 양(量)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속도가 빠른 만큼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으며 양이 많은 만큼 잡동사니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지식을 보편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매우 유용하다. 보편적 지식은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삶의 가치다. 우리는 보편적 지식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안목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곧 보편적 지식의 탄생이며 21세기 르네상스인의 거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 부키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 사회에서 경제위기의 고통은 공정할까? 불공정할까? 존 롤스에 따르면 ‘자연의 분배방식은 공정하지도 불공정하지도 않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특정한 사회적 위치에 놓이는 것 역시 부당하지 않다. 그것은 타고 나는 요소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공정이나 불공정은 제도가 그러한 요소들을 다루는 방식에서 생겨난다’고 거듭 말했다. 세계적인 경제위기 속에서 한국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세계를 버리고 한국 혼자 살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의 경제위기가 고통스러워야 한다는 것은 불공정하다. 그래서 한국 경제를 변화하기 위해서는 뭔가 구조적인 문제가 지속되고 있음을 간과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불공정한 경제’를『나쁜 사마리아인들』을 통해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명쾌한 통찰을 보여준 장하준 교수가 이번에는『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로 다시 한 번 세계의 이목을 한꺼번에 사로잡았다.『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사다리를 걷어차 버린 부자들이 자유시장주의를 역설하면서 ‘우리가 했던 대로 하지 말고, 우리가 말하는 대로 하라’며 개발도상국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쳤다고 비판했다. 한마디로 신자유자들에게 세계화라는 현대판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장하준의 ‘현실로서의 경제학’은 신자유주의의 맹점을 파고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로소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위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해하게 되었다.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우려는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니라 ‘불공정한 경제’여서 심각하다는 것이다. 요즘 ‘워킹 푸어’(working poor)이라는 모순적 현상이 아주 일상적이다. 어떤 사람이 일하지 않아서 별다른 소득이 없어 가난하다고 하면 어느 정도는 수긍할 만하다. 그러나 일하는 가난은 열심히 일하는데도 여전히 가난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하준은『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더 나은 자본주의’를 제시하고 있다. 또한 상식적 모순에서 벗어나기 위한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방안에 대한 거침없는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
 

이 책에서 저자는 ‘흰 코끼리 프로젝트들’을 비판하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흰 코끼리 프로젝트(white elephant project)는 불교에서 신성한 동물로 여기는 흰 코끼리는 동남아시아에서는 왕권의 정당성과 위엄을 상징하기 때문에 일을 시킬 수 없는 짐승이다. 보기에는 번드레하지만 유지하는 데에는 엄청난 돈과 노력이 들어가는 데다 실질적인 이용가치는 전혀 없는 물건을 가리킨다. 그래서 세계 경제의 불공정을 만드는 근원이『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는 말 그대로 나쁜 사마리아인들이었다면 이 책에서는 ‘나쁜 흰 코끼리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나쁜 흰 코끼리들에 대한 저자의 비판을 몇 가지 살펴보면 첫째, 자유 시장에 대한 문제다. 그들(신자유주의자)은 ‘시장은 자유로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가장 이윤이 높은 일을 할 수 있으며 기술 혁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하준은 ‘자유 시장은 환상이다’라고 했다. 즉 모든 시장에는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모종의 규제와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장이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규정하는 객관적인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경제학이 물리학이나 화학 같은 과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경제학은 정치적 행위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둘째, 잘사는 나라와 못사는 나라의 임금 격차에 대한 그들은 개인의 생산성 결과라고 한다. 하지만 장하준은 시스템의 차이에서 생긴다고 하였다. 가령 부자나라 버스운전자가 가난한 나라 버스운전자보다 50배나 높은 임금을 받게 되는 것은 ‘노동시장에서 이민자의 수용정책’ 때문이다. 셋째, 기술 혁명에 있어 그들은 인터넷이 세탁기보다 세상을 더 많이 바꿨다고 한다. 그러나 장하준은 반대다. 세탁기가 인터넷보다 세상을 더 많이 바꿨다. 탈산업화 사회에 따른 제조업이 구닥다리 신세로 전락되었다는 점, 가장 최근에 일어난 변화에 영향을 더 많아 받는 점을 지적하였다. 
 

넷째, 경제활동을 있어 인간의 본성을 두고 그들은 이기심을 정당화했다. 이기심이 지속될 수 있는 경제 체제를 만드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항상 ‘최악의 행동’을 할 것이라는 것을 유념하라고 한다. 반면에 장하준은 이기심이 인간의 본성 중의 하나이지만 유일한 동기는 아니라고 반박했다. 그보다는 이타심, 의무감 등이 행동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장하준은 ‘도덕성은 착시 현상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다섯 째, 그들은 선진국들이 자유 시장 덕분에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장하준은 자유 시장이 아니라 보호무역과 정부개입의 결과라는 것이다. 여섯 째, 아프리카 저개발에 대 그들은 ‘숙명’이라고 했다. 나쁜 기후, 민족 분쟁, 바람직하지 못한 문화 등등 발전의 가능성을 어렵게 만든다고 했다. 하지만 장하준은 자유 시장 경제 정책 때문이라고 했다. 비록 아프리카에 나쁜 문화가 산재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문화라는 것은 경제발전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에 가깝다’는 것이다.
 

일곱째, 기업가 정신에 있어 그들은 부자나라들이 더 투철하다고 한다. 그러나 장하준은 가난한 나라들이 더 투철하다는 것이다. 다만 공동체 차원의 집단적 노력이 부족이 큰 장애 요인이었다. 다시 말하면 영웅적이고 개인적 차원이 기업가 정신은 제도적이고 집단적 차원으로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덟째, 교육에 있어 그들은 높은 교육이 경제적 성공의 원천이라고 했다. 하지만 장하준은 사회 전체의 능력이 좌우했다. 학력 인플레이션은 교육을 생산성을 높이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아홉째, 기업에 좋은 것은 나라 경제에도 좋다고 하면서 그들은 GM에 좋은 것이 미국에도 좋다고 했다. 그러나 장하준은 GM에 좋은 것이 항상 미국에도 좋은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역설의 주장에는 규제의 효율성이 자리매김했다. 장하준이 말한 규제란 기업가들에게 지속 가능한 발전에 저해되는 행위를 못하도록 하는 것이며, 장기적으로 산업 부문 전체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조치를 강제로 취하게 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평등에 있어 그들은 기회의 균등을 주장했다. 반면에 장하준은 결과의 균등이 보장되어야 했다. 기회의 균등은 차별 정책에는 부당하다는 데 그치지 않고 역차별 정책마저 부당하다고 한다. 이러한 불공정함 때문에 장하준은 결과의 균등이야말로 실질적인 기회의 균등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장하준의『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역사적인 자본주의 경제학을 압축적으로 제시하면서 우리가 경제 시민으로서 권리를 행사하기를 바라고 있다. 저자가 자본주의에 대해 통쾌하게 비판한다고 해서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 말대로 ‘자본주의는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좋은 경제 시스템’이다. 그러나 자유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자유 시장 자본주의가 마치 자본주의의 장밋빛이라고 떠들어대는 것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올바른 경제학을 배워야 이유는 어렵지 않다. 우리가 나쁜 경제 시스템에서 더 나은 자본주의를 말하는 것은 거대한 역설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나쁜 흰 코끼리들을 경계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국가의 역할 - 장하준이 제시하는 '우리 모두를 위한 발전과 진보의 경제학'
장하준 지음, 황해선, 이종태 옮김 / 부키 / 200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계는 지금 경제 위기에 흔들리고 있다. 자본주의의 황금시대가 빛을 바래면서 오히려 우리는 자본주의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경제 위기는 그 이전에도 꾸준히 되풀이 되어 왔다. 그럴 때마다 최선의 정책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대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유효한 전략이더라도 시대적이 한계에 노출되면서 더 이상 효력을 상실했다. 현 시점에서 경제 위기의 주범인 신자유주의도 같은 궤도에 있다. 신자유주의의는 말 그대로 ‘큰 정부가 나쁘고 작은 정부가 좋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경제학으로 당면한 문제들의 해법을 찾아보면 경제 주체인 것을 두고 ‘시장’과 ‘정부’ 중에서 어느 것이 선택권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신자유주의에서 경제 주체는 ‘시장’이다. 신자유주의의 주장대로 집을 사면 부자가 된다. 그런데 우리는 하우스 푸어, 즉 집을 사면 가난해지고 있다.




이러한 역설에 대해 장하준의『국가의 역할』은 갈채를 받을 만하다. 신자유주의를 거침없이 비판하는 그의 담대한 도전뿐만 아니라 탄탄한 구성과 시의성 있는 문제 제기는 충분히 주목할 만했다. 앞으로의 경제가 불투명하고 마땅한 대안도 없는 상황에서 그의 경제학은 우리들이 선택해야 할 새로운 기회가 되기에 충분했다. 저자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우선성’(primacy of market)이다. 좀 더 말하면 ‘정부 실패론’이며 ‘규제 완화’다. 그래서 이 책에서 저자는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제도주의적 정치경제학’을 주장하고 있다. 이제는 국가가 설계자, 옹호자, 개혁자라는 역할을 주도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국가를 경제학으로 영역으로 이끈 것은 피구의 ‘후생경제학’(welfar economicse)과 ‘케인스의 경제학’( Keynesian economics)임을 알 수 있다. 후생경제학은 자유방임적 정책이 최적의 자원 배분을 달성하지 못하는 설명하면서 ‘국가의 가격 신호’ 조작을 정당화했다. 그리고 케인스의 경제학은 자유 시장 경제가 완전고용 상태에서도 최적의 자원 배분을 달성하지 못할 수도 있음을 증명함으로써 실업과 경기 변동에 대응하는 적극적인 예산 정책을 정당화했다. 하지만 이러한 국가 개입주의는 2차 대전 후 신자유주의의 구조로 팽창되었다. 여기에는 케인스를 비판한 통화주의(Monetarism), 제도적 경화증(institutional)과 관련된 신계약주의(new contractarianism), 관료주의의 주인-대리인 모델(Principal-Agent Model)이라는 반개입주의의 이론들이 있다.

  

그러면 신자유주의는 무엇이 문제일까? 저자는 먼저 신자유주의의 내적 모순을 비판하고 있다. 한마디로 신자유주의는 ‘일관성 없는 지적 독특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신자유주의는 신고전학파 경제학과 오스트리아 자유주의 전통간의 정략결혼으로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신고전학파는 자신의 개입주의를 벗어나기 위해 ‘외부경제 효과론’을 정치적인 영역에서 다루지 않았다. 다음으로 제도주의적 관점에서 자유 시장을 논하면서 국가 개입이 없는 시장이 자유 시장인가? 라는 회의적인 물음을 던졌다. 또한 그는 시장이 실패했다고 해서 꼭 경제가 실패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시장을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을 구성하는 수많은 제도적 매커니즘 중의 하나라고 여겼다.

  

그리고 시장과 정치의 관계를 조명하는 데 있어 그는 ‘모든 가격은 정치적이다’라고 거듭 주장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국가의 범위를 제한하고, 자유재량 정책의 여지를 줄이며, 관료주의적 운영의 규칙을 강화하는 등의 엄격한 규칙에 기반한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기관의 설립 등을 통해 경제를 탈정치화해야 한다고 했다. 물론 자원 배본에 있어 어느 정도까지는 ‘객관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면 정치적 정당성이 위협받을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심층적으로 볼 때 정치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운 가격이란 존재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경제의 탈정치화는 사실상 민주주의를 거세하겠다는 완곡한 어법이라고 지적했다.

  

저자는 신자유주의의 구조적 문제점을 드러냄과 동시에 ‘발전과 진보를 위한 경제학’이라는 보다 현실적인 주장들을 펼치고 있다. 가령, 경제발전을 위해서 초국적기업의 유치는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고 한다. 기술경제학(economics of technology)에 따르면 지속가능한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국내의 기술적 역량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외국인의 직접 투자 유치의 성패가 규제 시스템의 ‘자유도’가 아니라 그 나라 시장의 ‘규모’가 어떤가에 있음을 일깨워주고 있다. 결과적으로 초국적 기업의 역할이 커지는 것은 사실이더라도 국가의 전략적 산업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적재산권(IPR)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지식 창출을 위한 혹은 지식을 공개하는 인센티브에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그래서 저자는 ‘규제의 경제학과 정치학’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찾고 있다. 규제의 경제학에 따르면 ‘규제가 없다면 시장도 없다’는 것이다. 정부개입이 단순히 시장을 규제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시장을 창출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규제의 정태적 효율성이 아닌 동태적 효율성의 변화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편 규제의 정치학에 따르면 ‘자기 이익을 대단히 중요하기는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 유일한 동기는 아니다’는 것이다. 그 보다는 도덕적 가치에 따라서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부 실패론자들에게는 ‘순진한 생각’이겠지만 사람들의 가치가 사회화 과정을 통해 변화된다는 것은 권력의 남용을 통제하는 중요한 방식이다.

  

장하준의『국가의 역할』은 발행 연도가 2006년 11월이라 지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과 대안은 현재 및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과거의 경제 행위(신자유주의)로 인한 현재의 경제적 위기는 앞서 말했듯이 ‘자본주의의 희생양’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국가의 역할’이 미미하다면 미래의 경제 또한 같은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단지 어떠한 희생양이 요구될지 모를 뿐이다. 그리고 비록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국가의 역할이 제시되고 있지만 시장과 정부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우리가 경제의 위기에서 보다 중요한 관심사항은 시장과 정부의 이분법적인 사고가 전부는 아니다. 우리가 통합적인 사고를 지향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경제 위기가 경제학의 문제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 말대로 ‘정치경제학’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 장정일의 독서일기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1
장정일 지음 / 마티 / 201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도서관이 가까이 있다는 것은 금상첨화(錦上添花)다. 많은 책을 읽을 수 있고 읽고 싶은 책을 무료로 대출(1인 3권)할 수 있다. 그리고 좀 더 바지런하면 금방 나온 신간을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읽을 수 있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 남의 손때가 묻지 않는 맨얼굴의 책은 언제나 첫사랑 같은 떨림이 있다. 그러나 빌려보는 것 못지않게 사야만 하는 책이 있다. 단순히 책만(?)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장정일이 독서일기인『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에서 말한 것처럼 ‘책 속에 길’이 있기 때문이다.

책 속에 길을 찾는 이 책을 들여다보면 장정일의 필력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는 남들이 듣기 좋게 말하는 책 속의 길을 거부했다. 주례사처럼 들려서 가슴이 먹먹해서 그랬다. 그래서 그는 흔하디흔한 책 속의 길에 메스를 들이댔다. 굳이 메스를 가한 까닭은 ‘책 속으로 난 길이 아니라, 책의 가장자리와 현실의 가장 자리 사이로 난 길’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책을 파고들수록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그가 말한 참된 독서란 ‘내 앞에 주어진 개별적인 책을 읽는 것일 뿐 아니라, 그 책을 생성한 유, 무형의 생산 현장 전체를 읽는 일’이다.

먼저 그는 속독 대신에 천천히 읽기를 권하고 있다. 책을 건성건성 많이 읽는 것보다는 제대로 읽어야 사고의 땔감이 된다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독서의 속도란 독자의 이해력과 책의 난해도가 빚어내는 상호조합이다. 그러니 사람마다 자신의 정상적인 속도에 따라 하는 것이 실질적인 이점이 된다. 정상적인 속도에 있어 속도보다는 천천히 읽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이유인즉 단지 책 읽기만이 아니라 다른 인생관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야마무라 오사무가『천천히 읽기를 권함』에서 말한 대로 ‘읽기의 방식은 삶의 방식’에 있다고 저자는 우리의 권태로운 눈을 끌어당기고 있다.

그는 독서 천황이라고 불리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속독 예찬과는 다른 패턴을 지향하고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속독의 대가답게 300쪽 책을 단 10여분 만에 읽을 수 있다. 비록 내 취향은 아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한결같이 멋지다는 탄성을 내지르게 한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속독은 직업적인 선택에 따른 합리적인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그를 흉내 낸다면 ‘불행한 독자’가 되는 것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무엇보다도 ‘책의 죽음’에 대한 악영향이 커다란 문제였다. 저자에 따르면 독서의 속도란 독자의 이해력과 책의 난해도가 빚어내는 상호조합이다. 그러니 독서의 속도에 일반화를 언급하는 것은 우문(愚問)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다치바나의 ‘책 한 권을 쓰려면 100권을 읽어야’ 하는 것에 공감하고 있다. 다치바나는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입력대 출력의 비율이 100대 1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했다. 한편 그는 문학작품을 읽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문학이 주인이라고 한다면 논픽션은 문학의 서자라고 여기는 풍토에 따끔한 충고다. 그러나 그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책은 다름 아닌 논픽션이라고 했다. 저자 또한 논픽션을 지향하고 있다. 다양한 글쓰기가 가능한 사회가 희망이 있다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만큼 교양이란 폭이 넓은 세계다.

일찍이 셔먼 영은『책은 죽었다』에서 책을 인쇄 문화와 책 문화로 나눴다. 전자가 단순히 종이에 뭔가를 인쇄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그 이상의 존재를 말한다. 즉 전자가 전단지 같이 인간의 내적 활동을 촉발시키지 않는 반면에 후자는 ‘깊은 사고를 통해 깊은 대화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그는 책을 ‘기능적인 책’과 ‘안티 책(anti book=나쁜 책)’, 그리고 ‘책’으로 나눴다. 기능적인 책이 교과서나 여행서를 가리킨다면 안티 책은 상업적인 책이며 인쇄 문화였다. 바로 여기에서 책의 죽음이 나온다. 책이 사상이 아닌 물건처럼 팔릴 때다. 책의 매몰비용만을 추구한다면 사상은 죽고 만다.

그래서 저자는『엄마를 부탁해』 같은 베스트셀러에 대한 정서적 거리감을 주저 없이 밝히고 있다. 베스트셀러는 당대의 지표다. 그러나 베스트셀러가 단순히 사람의 오감만을 어루만지며 눈물샘을 자극하고 그것이 마치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다.『엄마를 부탁해』와 같이 엄마의 외도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더 좋은 이유는 간단하다. 전자가 ‘귀신의 궁시렁’에 불과하다면 후자는 ‘삶의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는 것이다. 그리고『엄마를 부탁해』가 베스트셀러여서 마치 수준 높은 문학 작품으로 맞아떨어지는 것은 위조술에 지나치 않다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저자의 독설(讀說)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책 읽는 일은 도(道)가 아니라 현실로 돌아온다고 했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 시대의 ‘아웃사이더’라고 해도 무방하다. 콜린 윌슨은『아웃사이더』에서 “병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문명 속에서 자기가 병자라는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간이 아웃사이더”라고 했다. 즉 아웃사이더는 ‘진리의 희생자’라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데카르트의 순간’을 전복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가 진리와 만나는 방법에 있어 데카르트의 순간은 상식적이다. 이것은 곧 ‘자기 인식’이다. 하지만 저자는 자기 인식 보다는 ‘자기 배려’가 중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자기 인식이 자기 수련이라는 점진적 변화가 없는 반면에 자기 배려는 자기 수양의 과정이며 타자에 대한 배려이며 더 나아가 공공선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독서가 중요하다는 것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래서 장정일의 독서 일기인 이 책은 매우 의미가 남다르다. 저자의 관심사는 다름 아닌 ‘독서는 자기 배려’라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