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 필요한 시간 - 강신주의 인문학 카운슬링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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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라는 말에서는 왠지 지혜롭다는 것이 느껴진다. 지혜는 곧 배움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지혜롭다고 해서 철학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철학을 모른다고 해서 삶이 불편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들에게 ‘철학이 필요한 시간’을 역설하는 철학자가 있다. 바로『철학이 필요한 시간』을 지은 강신주다. 이 책에서 저자는 철학이 필요한 까닭을 ‘인문정신’에서 찾고 있다. 저자가 말하는 인문정신의 핵심은 어렵지 않다. ‘솔직함과 정직함’이면 충분하다. 솔직함과 정직함이 진짜 인문정신의 맨얼굴이라고 한다면 가짜 인문정신은 ‘페르소나’다. 자기 위로와 자기 최면일 뿐이다.


가령, 후회하지 않는 삶은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 이러한 질문에 니체는『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을 가두고 있는 담벼락을 망치로 부수겠다고 했다. 니체의 망치는 다름 아닌 ‘영원 회귀’였다. 어제의 고통이 내일의 행복으로 여기는 것이 ‘영원불멸’이다. 하지만 영원 회귀에서는 어제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몇 년 주기로 해서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슬픈 과거는 슬픈 미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현재의 고통에 맞서야 한다. 고통에 맞서지 않고 비겁한 행동을 한다면 우리는 삶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삶의 주인과 관련해서 최시형의『해월신사법설』은 당당했다. 이 책에서 최시형은 “나를 향해 위패를 설치하라(向我設位)!”고 주장했다. 또 하나 “사람은 모두 한울님(天主)을 모시는 영기(靈氣)로 살아간다.”고 말했다. 최시형이 말한 향아설위, 영기 등은 모두 동학(東學)의 필연적인 결과였다. 동학이 기독교의 서학(西學)의 반대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동학이 비범한 인문정신인 것은 ‘인내천(人乃天)’에 있다. 저자는 인내천 사상에서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초월자를 긍정하는 초월적 사유를 부정하자마자, 인간 내부에 잠재한 생명력을 긍정하는 내재적 사유가 전개된다는 사실’을 주목하였다.


그런가 하면 사르트르는『존재와 무』에서 인간을 ‘대자(對自)’라는 개념으로 파악했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존재는 컴퓨터나 의자처럼 스스로 행위를 결정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무는 인간은 스스로의 본질을 만들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인간이 자신과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돌아보고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반성의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사물과 달리 ‘자신에 대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이 책에는 인문정신의 48가지 맨얼굴들이 거침없이 드러나고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었던 48가지 맨얼굴들 이었으나 무심코 지나쳐 왔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을 만나면서 우리는 철학에 관심을 갖는 것뿐만 아니라 인문정신도 강렬하게 배울 수 있다. 이것은 들뢰즈가 말했던 ‘강렬한 독서’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강렬한 독서란 ‘감응하는 독서’를 일컫는다. 단순히 어휘에 대한 해석이나 설명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의 삶을 흔들어버리거나 나의 허영을 부수고 내 맨얼굴을 보도록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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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 버돗의 선물 - 한정판 스페셜 기프트 세트 (스태들러 색연필 세트 + 그림엽서 + 케이스)
테드 겁 지음, 공경희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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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마다 영혼이 새로 태어나므로 나는 매일 밤 오늘의 기록을 묻는다. 오늘이나 어제의 실망이 내일의 가능성에 영향을 미치게 하지 않는다.-34쪽

버돗의 선물은 '많을수록 좋다'를 신념으로 삼던 자들에 대한 비난을 의미했다. 엄청난 액수의 구제금에 비해 버돗의 5달러는 보잘 것 없었고, 가장 소박한 구제 노력에도 명함을 내놓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 작음과 순수함에 사람들은 감동하고 열광했다. 너무 작은 선물이라 감동하고 열광했다. 너무 작은 선물이라 대공황에 눈금 하나 새기지 못했지만, 그 액수보다는 그 선물이 주는 상징적인 의미가 더 중요했으리라.-44쪽

버돗의 선물은 재산이나 우정을 되돌리지는 못했지만 일부에게 절망에 굴하지 말라는 설득이 되었을 것이다. 몇몇 사람에게는 그의 제안이 자신감을 회복해 일상에 맞서게 했는지도 모른다.-74~75쪽

유대어로 고통을 뜻하는 말은 초리스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인생이 안겨 주는 평범한 고통이 아니라 마음과 의지에 가하는 진짜 큰 타격인 영혼의 무거운 짐을 뜻한다.-95쪽

마침내 남을 도울 위치가 되었다는 것은 그의 삶에서 큰 변화를 의미했다. 그가 갈구한 것은 바깥의 인정이 아니라, 그런 베풂이 주는 내적인 확인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가치에 대한 선언이었다. 또 다른 세상에 살지만 많은 것을 공유한 이들의 가치에 대한 선언이기도 했다.-147쪽

'충분함'은 대공황기의 대표적인 표현이었다. 그것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의 척도였다. 그것은 소비가 아닌 보존에 대한 말이었다. '충분함'은 전 가족이 모일 수 있는 말이고, 신뢰의 몸짓이었다. 또 반항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것은 축복을 크게 헤아리고, 영혼을 굳건하게 하고, 절망이 틈타지 않게 하는 말이었다.-217~218쪽

조금 더 가진 이가 조금 덜 가진 이게 내미는 손길, 거기에 상대에 대한 배려까지 더해진다면 그 나눔과 베풂 속에서 아름다움이 피어날 것이다. 그런 관계를 이상적인 해결책일 뿐이라고 말하기 쉽지만, 이 책은 우리가 그것을 현실로 만들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메시지는 바로 그것일 듯 싶다. 착한 손을 내밀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고 가르쳐 준다.-2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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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니까 청춘이다 - 인생 앞에 홀로 선 젊은 그대에게
김난도 지음 / 쌤앤파커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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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의 맑고 향기로운 말씀 중에 다음과 같은 배움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장미꽃에 하필이면 가시가 돋쳤을까 생각하면 짜증이 난다. 하지만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가시에서 저토록 아름다운 장미꽃이 피었다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감사하고 싶을 것이다.” 하필이면, 이고 가시가 돋친 원망을 하게 되는데 그게 꼭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음 한 켠에는 가시는 아름다움의 방해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가르침은 ‘아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록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반쪽자리 진리에 머무를 뿐입니다. 반면에 가시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라면 우리는 충분히 배울 수(educate) 있습니다. educate라는 말은 라틴어 ‘educare’에서 생겨났는데 ‘끌어낸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즉 인간의 내부에 원래 갖추어져 있는 능력과 재능을 끌어내어 활성해가는 것입니다.


서울대 최고의 멘토 김난도의『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신선한 충격으로 잠자고 있던 신경을 하나하나 깨웠습니다. 청춘은 활기찬 이미지와는 달리 마음속은 불안과 외로움 그리고 아픔으로 새까맣게 타들어갑니다. 고 3에서 대학생이 되면 어렵게 통과한 만큼 세상을 다 얻었다고 안심하지만 정작 대학은 취업전선을 방불케 합니다. 과열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수많은 전략과 전술로 상대방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그렇기에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고 맙니다. 어느 때보다 스펙(specitication)이 강렬한 세상입니다. 스펙을 ‘취업의 바이블’이라고 부를 만합니다. 그러나 취업을 내세우며 무의미한 스펙은 허울 좋은 명분에 불과합니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스펙보다는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어야 한다고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이런 저자의 대담성을 보고 있으면 무릎을 치고도 모자랍니다. 청춘들이 새겨야 할 것들을 솔직하게 끌어내는 덕분입니다. 그만큼 새로운 도전 앞에서 망설이는 청춘들이 많이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경쟁을 통해 성장해온 청춘들이 과연 잘 할 수 있을지 걱정되기도 합니다. 스펙이 승산 없는 전투라고 하는 것이 또 다른 대안을 찾아야하는 것은 아닌지 벌써부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자 말대로 ‘아프니까 청춘’입니다. 혹, 아프지 않기 위해서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 모두들 계획대로 하고 싶지만 막상 계획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새로운 미래가 온다』의 저자인 미래학자 다니엘 핑크는 “계획을 세우지 마라.”고 했습니다. 대신에 “멋진 실수를 통해 배워라.”고 충고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저자는 청춘을 인생시계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한 평생을 80이라고 가정하고 24시간으로 나눠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략 대학을 졸업하는 시간은 ‘아침 7시 12분’입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아침 7시 12분은 청춘들이 열망하기 좋은 최적의 시간입니다. 열망하기 앞서 아침 7시 12보다 빨리 일어나야 하는 건 당연합니다. 그러나 빨리 일어난다고 해서 자신이 가장 일찍 꽃을 피워야 한다는 것은 건강에 해롭습니다. 매화, 벚꽃, 장미 등을 보면 배울 수 있습니다. 계절 따라 피는 꽃이야말로 아름답습니다. 사람의 신체 리듬(rhythm) 또한 계절에 따라 바뀌기 마련이며 계절 따라 챙겨야 합니다. 그런데도 청춘들 대부분은 ‘매화’가 되려고만 합니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매화는 진정한 의미의 라임(rhythm)이 아닙니다.


저자의 경험이 알차고 진솔하게 스며든 이 책을 따라가다 보면 청춘을 풍요롭게 하는 비결을 알게 됩니다. 돌이켜보면 청춘들만을 위한 멘토는 아닌 듯합니다. 바로 자신의 라임으로 ‘카르페 디엠’(Carpe Diem) 하자는 것입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로 널리 알려진 카르페 디엠은 ‘평범한 삶을 살지 마라.’,‘현재를 즐겨라.’는 것입니다. 현재를 즐기기 위해서는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필요 없는 의무감으로 현재가 비참해져는 안 된다, 아직 오직도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현재가 흔들거려서는 안 된다, 자신의 목표를 확고하게 하고, 그 목적지를 향해 순간순간의 발걸음을 뚜벅뚜벅 옮겨야 한다는 저자의 멘토는 정말이지 ‘메모하기도 벅찰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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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의 축제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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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얼음이야. 정말이지 넌 도미니카 여자 같지가 않아.

차라리 내가 더 도미니카 사람 같아.”

『염소의 축제』중에서




얼음을 물끄러미 생각해봤다. 단단한 차가움이 앞섰다. 세상은 얼마든지 얼음이 되거나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처음에 ‘얼음 같은 여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다. 그런데 다시 그 말을 되새겨 볼 때 뭔가 강렬함이 새겨졌다. 단순히 얼음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얼음보다 더 단단한 그러면서도 통증이 느껴졌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염소의 축제』에서 우라니아의 통증은 얼음 같았다. 그것은 절망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절망이라고 해서 우중충한 죽음에 이르지 않았다. 오히려 우라니아는 얼음 같은 여자를 변명하면서 우리의 생을 혼란스럽게 했다. 절망이라는 것이 질병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얼음을 조금씩 깨뜨리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2010년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답게 이 소설에서 얼음도 하나의 열정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즉 자신의 존재감의 결여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감의 욕망을 더 단단하게 얼음이 될 때까지.

『염소의 축제』는 가혹했다. 독재자는 왜 살해되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은 답답했고 참을 수 없었다. 독재자에 대한 불안한 감정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더구나 동전의 양면과 같다. 동경하면서도 거부할 수밖에 없다. 거꾸로 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이 독재자가 즐기는 축제인지 모른다. 독재자는 하나의 세계를 탄생시킨다. 비록 그것이 권력 속에서 이루어지는 세계에 불과할지라도 독재자는 나쁜 영웅이다. 독재자는 그가 바라던 세계를 열었음에도 결국에는 조롱을 당한다. 조롱을 당하는 그 순간부터 독재자는 자신이 죽지 않기 위해 야멸찬 폭력을 멈추지 않는다. 이 소설을 보면 독재자에 얼룩진 역사의 방향은 어긋나지 않았다. 도미니카 공화국 트루히요의 독재시절을 거슬러 올라가는 이 소설에서 트루히요는 ‘조국의 아버지’, ‘자선가’라는 호칭으로 사랑받았다. 하지만 트루히요는 거짓과 위선으로 몰락했다. 뿐만 아니라 ‘염소’라는 최악의 질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염소일까? 트루히요는 철저한 규율과 훈련 덕분에 1930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영웅과 신비주의자가 지닌 무자비한 규율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그는 4시에서 1분도 빠르지도 않고 늦지도 않고 정확하게 일어났다. 그런가하면 무더운 여름에도 그가 원하지 않으면 땀을 흘리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강박관념은 특히 외모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는 “외모는 영혼의 거울이네.”라고 엄격한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아마도 그의 강한 남성성은 이때부터 단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이 비판에 노출될수록 혹은 자신의 권력을 지속적으로 과시하기 위해 ‘염소’라는 트라우마에 사로잡혔다. 권력은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반면에 그만큼 피곤한 것이다. 그래서 권력이라는 냉혹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달콤한 성욕으로 위로했다. 동시에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쾌락을 받쳤다.

도미니카 사람들이 트루히요를 우상화하는 것은 권력의 중독성과 닮았다. 하지만 권력을 넘어서면 어떤 당혹스러움이 가슴을 할퀴면서 나아갔다. 그것은 곧장 사람들의 잠재적 콤플렉스 즉 잠자던 야수성이라는 모순된 힘을 깨웠다. 그러니까 그들의 트루히요에 대한 감정은 두려움이 아니라 분노였다. 분노에 가득 찬 염소의 축제에서 도미니카 여성들은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도미니카 여성들의 수동성보다는 아이러니하게도 도미니카 남성들의 ‘적극적 수동성’에 실망하게 된다. 도미니카 여성들은 그들의 딸, 아내가 아니었던가. 이 소설에서 아구스틴의 딸이었던 14살 우라니아도 트루히요의 파티에 초대받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라니아의 처녀성은 파괴되었다.

35년이 지난 후, 우라니아는 다시 조국을 찾았다. 14살 순결을 잃어버렸던 고통을 소녀 혼자 버텨내기에는 얼마나 참담한가. 순결을 잃어버린 후 그녀는 미국에서 다시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 선택한 치료법은 공부였다. 그녀에게 공부는 기쁨이며 가장 영광스러운 오락이었다. 그녀는 텅 빈 마음을 메우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공부하는 도중에 그녀는 사악한 취미를 가지게 되었다. 바로 트루히요 시절에 관한 책을 읽고 수집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도미니카 역사를 읽으며 행복하면서 특별한 역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특별한 역사에 배신당한 것을 알았으며 자신의 아빠를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는 차가운 저주를 퍼부었다. 그녀가 35년 만에 조국을 방문한 이유는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구스틴을 병문안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아구스틴의 몰락한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러면 무엇이 그녀를 얼음 같은 여자로 만들었을까? 이 모두가 트루히요의 탓일까? 일찍이 수잔 손택은『은유로서의 질병』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질병은 두 가지 가설을 통해 확대됐다. 첫 번째 가설은 모든 사회적 일탈 행위가 질병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범죄 행위가 질병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범죄자는 비난받거나 처벌되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해되고, 치료받고, 교정되어야만 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두 번째 가설은 모든 질병이 심리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질병은 기본적으로 심리적인 사건으로 해석되었으며,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했기 때문에 병에 걸리게 된 것이며, 의지를 사용해 스스로를 치료할 수 있으며, 질병으로 죽지 않기를 자신들이 선택할 수 있다고 믿도록 유도됐다.

그녀의 마음 한 켠에는 아버지에 대한 씻을 수 없는 원망이 흘러 넘쳤다. 원망은 그녀 마음의 모서리를 차갑게 만들었으며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가두어버렸다. 어린 그녀의 뺨을 람피스(트루히요의 아들)이 만졌을 때 아구스틴은 소스라치게 화를 냈다. 그녀가 그 이유를 묻자 아구스틴은 “이 세상의 모든 악이야.”라고 말했다. 처음과 달리 트루히요의 권력에서 외면받자 아구스틴은 실연당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어떻게 해서든 다시 트루히요의 사랑을 받고자 했던 그는 끝내 자신의 어린 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아버지를 구원하기 위해 더러운 파티에 참석한 그날 밤 그녀는 자신의 하반신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것이 아구스틴에게는 평생 죄의식으로 맴돌았다. 그는 죄의식을 날려버리기 위해 그녀가 미국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물신양면으로 도왔다. 그럼에도 그는 그녀로부터 면죄를 받을 수 없었다. 그녀가 미국에서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그녀에게 아메리칸 드림은 허구에 불과했다. 
 

어쩌면 그녀에게 트루히요의 역사가 진짜 삶이 아니었을까. 한 때는 조국의 아버지였으나 독재자, 호색한이라는 것을 너무 쉽게 잊는 것은 아니었을까. 트루히요가 만든 세상은 위험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자유’의 잣대였다. 독재자 앞에서 더 많은 자유는 오히려 더 많은 자유의지를 의심하게 했다. 한편으로는 염소의 축제가 ‘유혈 축제’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혈 축제에 참가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염소가 살아있는 한 자기는 결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절박한 심정을 토해냈다. 그러나 우라니아는 분노를 토해내지 못했다. 대신에 자신을 얼음으로 만들었다. 아구스틴이 트루히요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하였듯 우라니아는 아구스틴에게 맹목적인 앙갚음을 했다. 그녀는 도미니카 여자라는 현실을 기꺼이 배반했다. 결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녀는 쌀쌀한 여자가 되고 싶었다.

『염소의 축제』에서 우라니아의 불행은 사소하지 않았다. 바로 처녀성이 상실되었다. 여자에게 처녀성은 평생을 아껴야 할 곳이다. 그곳에서부터 사랑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녀성의 파괴는 단순한 신체적인 고통만은 아니다. 결국에는 사랑의 파괴라는 멍에가 되고 만다. 이런 그녀에게 불행한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고 다독거린다면 그것은 불행했던 순간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얼음 같은 그녀가 녹을 수 있다고 한다면 잘못이다. 돌이켜보면 그녀의 얼음 같은 상처가 치료받아야 할 질병이라고 몰아세우면 그것은 또 다른 폭력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얼음은 녹으면 사라지고 마는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더 이상 마음의 감옥이라거나 마음의 불모지라고 하지 말자. 얼음은 마음의 순결이어야 한다.

2010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바르가스 요사는 “나의 정치적 견해 때문이 아니라, 내 문학작품에 때문에 수상을 결정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면 그가 말하는 문학작품은 뭘까? 로울로 가예고스 상 수상 연설문에서 작가는 “문학은 불”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문학은 반체제와 반항을 의미하며, 작가의 존재 이유는 항변과 반대와 비판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자 합니다.”라고 덧붙였다. 작가는 독재자 소설『염소의 축제』를 통해 트루히요 역사의 거짓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정의의 이름으로 누가 역사의 승리자이며 패배자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누군들 억울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트루히요 역사를 읽을수록 분명해지는 허구 앞에서, 그 모든 것의 거대한 위선 앞에서 그녀의 삶은 얼음 같았다. 어쩌면 차가운 열정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너머에는 키치(kitsch: 원래는 싸구려 예술을 말하나 여기에서는 넓은 의미로 순응주의를 표현함)에 대한 절망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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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을 위로해줘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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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일곱 살, 하나의 세계가 태어났다. 누군가 열일곱 살에 대해 묻는다면 위로받아야 할 존재라고 말할 것이다.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떠들어대도 정작 열일곱 살은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다. 그런가하면 위험한 폭발물이라고 지레 짐작하면서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는 시선은 따가울 정도다. 하지만 은희경은『소년을 위로해줘』에서 오늘날 열일곱 살이 겪고 있는 열등감을 파괴하지 않았다. 작가 말대로 열일곱 살은 도화선이 없기 때문에 그다지 위험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열일곱 살은 미성숙한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상자 속에 넣어 안전하게 보호되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 이것까지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상자를 내던지는 부주의함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궁금했다.

 

작가에게는 열일곱 살이 이미 지나간 생(生)이겠지만 어느 누군가에게는 지나가야 할 생이었다. 지나감은 지나가야 함과는 너무도 다르지만 문득 고개를 돌려보면 그것은 하나의 생으로 겹쳐졌다. 이 소설에서 열일곱 살의 존재를 지탱해주고 변화시키고 다른 세계를 자극했던 그 미묘함은 ‘카프카의 책’들이었다. 작가는 마치 열일곱 살을 카프카의 책을 읽는 사람과 책을 읽지 않는 사람으로 나누고 있다. 그래서 카프카의 책을 읽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위로해준다는 것이다. 물론 그 반대도 있으며 카프카를 읽는 사람과 읽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어떤 관계든 카프카는 빠지지 않았다. 만약 카프카가 없다면『변신』도 없으며 결국에는 열일곱 살은 지루함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아무런 위로도 받지 못하고 말이다.

 

『소년을 위로해줘』를 읽으면 ‘변신’의 도화선은 열일곱 살 연우였다. 이혼한 엄마와 함께 새로 이사한 아파트는『변신』에 나오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와 같았다. 그곳에서 연우는 자신의 방에서 벽에 걸린 거울을 보면서 이전에 살던 방의 주인이 누구일까? 두려웠다. 자신의 거울과 똑같은 길이와 너비를 가졌던 사람을 상상하는 것도 만남이라고 하면 만남일 수 있다. 더구나 자신의 창문을 올려다보는 정체불명의 여자를 몸을 숨긴 채 바라봐야 했던 것도 낯선 만남에서 오는 당혹감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방을 둘러싼 수수께끼에서 정작 연우는 주인공이 되지 못했다. 다만 거울 속 두 개의 얼굴은 전혀 다른 얼굴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귀국 청소년 독고태수를 만나면서 비로소 열일곱 살의 상처들이 오랜 침묵을 깨뜨렸다. 거의 무방비 상태였던 소년 시절에 연우는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라는 명분 아래 그의 소년 시절은 곪아버렸다. 그때부터 연우는 자신을 잃어버리고 ‘무엇다워야 한다는’ 말이 열일곱 살이 된 지금에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이것은 곧 연우의 생활을 하나하나 조각냈다. 그러나 독고태수는 달랐다. 처음 보는 자신에게 ‘미스터 심드렁’이라고 다짜고짜 내뱉는 말투도 그렇고 힙합 스타일의 헐렁한 반바지도 그렇고 알듯 모를 듯한 영문이 새겨진 티셔츠도 그렇고 완전히 비호감이었다. 자신에게 곤란하고 귀찮은 ‘긴팔원숭이’로 여겨졌던 독고태수였지만 그의 MP3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고 한 순간 전율하게 되었다. 이렇게까지 심장이 마구 뛸 줄이야…….

 

<소년을 위로해줘>

 

언제부턴가 거울을 쳐다보는 습관이 생겼지

표정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지울 수 있어

하지만 내 주위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결코 편하지 않아

글이 내게 강요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 남자스러움 말야

 

무엇다워햐 한다는 가르침에 난 또 놀라

습관적으로 모든 일들에 익숙한 척 가슴을 펴지만

그 속에서 곪은 상처는 아주 천천히 우리들을 바보로 만들어

우리는 진짜보다 더 강한 척해야 하므로

 

남자스러움? 연우에게 돌이킬 수 없는 열등감이었다. 가령, 중학생이었던 연우는 육교 아래에서 돈을 뜯겼을 때 자신의 실패를 다음과 같이 더듬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정확히 따져보면 엄마한테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육교 아래로 끌려갔을 때 내 주머니에는 이천원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 정도의 돈을 뺏기 위해 자기보다 약한 상대를 골라 마구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하는 치사함, 그리고 그런 일이 예사로 벌어지는 후진 세상이라니. 그런데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겨우 엄마에게 화를 내는 것뿐이었다. 정당하게 맞서지 못하고 만만한 데에 화풀이를 하는 나는 또 얼마나 비겁한가. 한심한 놈이라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그런데 힙합이 연우의 심장으로 파고들었다. 연우가 열일곱 살 때문이었을까? 클래식과 발라드보다는 힙합이 열일곱 살 세대가 서로에게 말을 거는 방식이며 꿈과 희망을 흥분하게 하는 것이다. 아니면 힙합이 가지고 있는 불굴의 자유의지가 사람의 모든 DNA에 내재된 리듬 때문일까? 이를 증명하듯 이혼한 엄마의 애인이자 대중음악평론가 재욱 형에 ‘힙합의 혁명성’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음악에서 선율이 차지하는 절대적인데 힙합은 선율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만큼 가장 막강한 선율을 배제해버린 채 음악의 완성을 추구하는 배짱이 두둑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힙합의 혁명성을 깨닫는 순간 연우는 ‘내가 그냥 나일 수 있는 세계, 이 세계에서 나는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다. 더 이상 비겁해질 필요도 없다. 그리고 더 이상은 약하지 않다.’는 것을 위로했다.



한편, 거울 속 또 다른 얼굴이었던 민기훈이 거울의 맞은편 벽에다 낙서한 흔적을 알게 된 연우는 무심코 그림을 완성해보았다. 그러자 날개를 활짝 핀 새가 나타났다. 그리고 자신이 거울을 보자 마치 자신의 어깨에 날개가 달려 있는 듯 했다. 민기훈이 그렸던 동물은 다름아닌 ‘그리핀’이었다. 그리핀은 독수리의 부리와 날개와 발톱 그리고 사자의 몸을 가진 상상의 동물이란다. 황금의 파수꾼이라고 불리는 그리핀! 무엇보다도 독고태수로부터 들었던 <소년을 위로해줘>를 부른 사람이 ‘G-그리핀’와 얽히면서 연우는 민기훈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과는 달리 모범생이었던 민기훈이 정통 음악이 아닌 마이너나 언더를 즐겼다는 것을. 이러한 의문은 채영을 만나면서 하나씩 수면 위로 떠올라왔다. 기훈과 채영 사이에서 제 삼자에 불과한 연우였다. 채영은 연우를 보면서 기훈을 언제가 사랑한 적이 있다는 식이다. 하지만 그런 연우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은 연우가 카프카를 닮았으며 그런 사람이라면 자신을 미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 소설에서 힙합, 카프카는 ‘소년의 감수성’이다. 다시 말하면 열일곱 살의 어두운 저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두운 이편과 저편은 힙합이 이전 음악과 구별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즉 ‘나를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소설에 따르면 ‘팝이든 포크든 록이든, 블루스든 주어가 나인 노랫말은 무수히 많다. 바람, 구름, 들꽃을 노래해도 거기에는 나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하긴 베토벤의 웅장한 교향곡이나 브람스의 애잔한 선율에도 나의 사상과 정서가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힙합은 나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직설적으로 토해낸다는 점에서 다르다. 부모에게 미안한 감정, 실패한 연애 이야기 등 사소한 일상에서부터 서열화된 교육제도의 모순, 승자독식의 사회구조에 대한 불만까지, 꾸밈없이, 솔직하게, 거침없이, 때로는 생경하고 과격하게 나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또 하나 소년의 감수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달린다.’에 있었다. 요즘 같은 문명인들에게 달린다는 것은 원시인으로 놀림의 대상이 된다. 그냥 걷기만 해도 될 것을 굳이 달려야 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그것이 ‘절제’때문이라고 하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절제란 재미있어도 그만둘 줄 아는 힘, 귀찮아도 힘들어도 지속할 수 있는 힘을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상 그렇다는 것이다. 연우는 주체할 수 없는 상실감을 통제하지 못해 마구 달리고 싶었다. 몸속에서 바람이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문제아로 찍혔던 태수는 빨간 불이라는 신호등을 무시하고 이 세상 끝까지 달리고 싶었다. 이 세상 모든 빨간 불을 모조리 파란 불로 바꾸면서 말이다.


 

은희경의『소년을 위로해줘』를 읽으면서 오랜만에 소통이 가능해지는 시원함을 느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제목에 나와 있듯 연우, 태수라는 소년들이다. 그리고 채영이라는 소녀도 있다. 이들 모두는 열일곱 살이기 때문에 그들의 연령대를 위로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소년의 감수성’은 우리들 모두의 이야기였다. 모든 불완전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경계인과 아웃사이더의 내면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내면에는 ‘나에게서 나를 빼앗아가는 것, 어쩌면 그것이 바로 폭력인지도 모른다.’는 것이 살갗에 와 닿았다. ‘인생은 내 안의 freedom. It’s twisted 난 나로서 움직여.’ 만약 문제가 안 풀린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작가는 이 소설을 ‘사랑이 식은 힘’으로 섰다고 고백했다. 사랑이 식는다고 외면하면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 우리가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사랑은 위로받아야 한다.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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