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과 육식 - 사육동물과 인간의 불편한 동거
리처드 W. 불리엣 지음, 임옥희 옮김 / 알마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이 말은 조지 오웰의『동물농장』의 일곱 계명 중에 나온다. 하지만 예외적인 동물이 있다. 바로 인간이다. 인간은 동물이기를 거부한다. 그러면서 지구의 절대적인 주인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동물을 사육하고 동시에 육식을 한다.

그러나 시시각각 육식에 빨간불이 켜지면서 몇 가지 충격적인 사실들이 밝혀졌다. 광우병(狂牛病)이 그렇고 조류 인플루엔자(AI)가 그렇다. 육식에 대한 두려움이 지구를 숨 막히게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사후대책이라는 것이 놀랍게도 잔인하다. 발생농장은 물론 반경 몇 미터이내의 동물들이 매장을 당한다.

수많은 동물들의 떼죽음을 보면서 인간의 철저한 이기적인 행동에 대해 더 이상 간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서 보았듯 인간은 생존을 위협하는 동물에 대해 비윤리적으로 처벌하고 있다. 더구나 죄의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동물을 살해하는 것을 정당화하는데 급급하고 있다.

과연 인간에게 무엇이 문제일까? 좀 더 부연하자면 인간이 동물에게서 멀어진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이 물음에 답하는 책이『사육과 육식』이다. 이 책에서 저자인 불리엣은 인간과 동물의 불편한 관계를 역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가 제시하고 있는 패러다임은 다름 아닌 사육이다. 그는 사육을 중심으로 전기사육시대, 사육시대, 그리고 후기사육시대로 구분하고 있다.

먼저 전기사육시대에는 인간과 동물 사이의 경계선이 불분명하여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넘나들 수 있는 샤면을 숭배했다. 동물을 숭배하고 상상 속에서 동물과 함께 했다. 그러나 사육시대에 들어오면서 ‘동물의 왕국’에 이르렀다. 여기서 동물의 왕국이라는 표현은 사회적으로 복잡한 인간 사회의 출현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인간 이해관계에 따라 동물을 이용했다. 마지막으로 후기사육시대에는 동물이 제공하는 제품을 풍부하게 소비하게 되었다.

이처럼 저자는 사육화의 역사적 변화에 주목하고 있다. 변화의 핵심에는 사육동물이 유용한 동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동물의 유용성을 물질적 용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한 물질적 용도 중에서도 1차적 용도인 고기(meat)를 중요시하고 있다. 예전에는 2차적 용도 즉 양털이나 노동을 얻기 위해 사육화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고기 때문에 사육화가 비롯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저자는 사육화에 따른 인간과 동물의 심리적 거리감으로 현대문명을 비판하고 있다. 사육시대에는 동물과 접촉하면서 죽음을 직접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후기사육시대에는 동물과 분리되면서 죽음을 볼 수 없었다. 이러한 차이는 동물을 대하는 인간의 시각과 행동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것은 양심의 가책이었다. 결국 사육화가 산업적으로 소비되면서 동물에 대한 양심은 그만큼 멀어져버렸다. 그리고 종(種) 차별주의를 내세우며 공격한다.

가령, 저자는 당나귀를 예를 들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사육화가 되는 과정에서 당나귀가 어떻게 변화되는지 제시하고 있다. 전기사육시대에는 당나귀는 신성한 동물이었다. 그러나 사육시대에는 정력의 상징으로 바뀐다. 더 나아가 후기사육시대에는 가장 멍청한 동물이 되어버렸다. 이것을 토대로 예전의 멀쩡한 소를 오늘날 광우(狂牛)라고 말하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세상에 미친 소(牛)라니!

일찍이 피터 싱어는『동물 해방』에서 ‘유인원 계획’(Great Ape Project)을 말한바 있다. 이 계획을 간단하게 말하면 인간과 다른 동물간의 간격을 좁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기본적인 권리를 보다 많은 존재(인간이 아닌 동물)에게 부여하려는 것이다.

후기사육시대에 인간의 고통은 곧 동물의 고통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동물이 진정으로 해방된다고 한다면 인간 또한 진정으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인간과 동물의 불편한 관계를 다시 생각해봐야 할 때이다. 이 책을 통해 동물에 대한 윤리적인 느낌을 한 번쯤 생각해 보게 되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8-05-31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람의 한평생 - 민속으로 살핀 탄생에서 죽음까지
정종수 지음 / 학고재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장례식장에 갈 때 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발걸음이 무겁다. 망자(亡子)에 대한 예의 때문일까? 아니면 두려움 때문일까? 어쩌면 예의 때문에 두려움이 떠나질 않았다. 예의가 너무나 현대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요즘이야 이런 죽음이 일상화되었지만 예전에는 집에서 망자를 떠나보냈다. 어릴 때 마을에서 상여가 나가는 모습을 보고 자란 탓에 장례식장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아마도『사람의 한평생』이 나를 사로잡은 것은 앞서 말한 충돌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다. 굳이 이유를 따져보면 장례식장이라는 이름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죽음을 다루는 의례를 상례(喪禮)라고 한다. 그리고 장례(葬禮)는 상례의 한 절차이다. 그런데 장례의 의미를 알고 나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장례란 시체의 처리 방법, 매장과 관련한 예절이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장례식장이라는 이름의 반전(反轉)은 상례의 허구에 불과하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점이 이것뿐만 아니었다. 혼례(婚禮)에 있어서는 남녀차별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보통 남녀가 부부의 연을 맺는 것을 두고 결혼(結婚)이라고 한다. 하지만 혼인(婚姻)일고 해야 옳다. 혼이란 여자의 집이란 뜻으로 남자가 여자에게 장가든다는 것이다. 인은 남자의 집으로 여자가 시집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결혼이라고 하면 남자가 여자에게 장가가는 것 밖에 안 된다. 결국 결혼은 반쪽 잔치의 행복이었다. 그래서 결혼 후 불행한 사람들이 많아지는 이유를 지레짐작 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책에는 전통이 혼란한 현실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다. 사람의 한 평생에 대한 다양한 풍속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또한 풍속을 설명하는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예술성이 돋보였다. 그만큼 예를 다하는 데 있어 소홀하지 않았다. 요즘같이 간편한 세상에서 책 속의 의례들은 다소 복잡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하더라도 관혼상제는 우리의 역사다.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잘못된 예를 바로 잡을 수 있는 바탕이 될 것이다.

이 책의 또 다른 재미는 실생활과 관련된 내용이 피부에 와 닿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관혼상제의 의미를 밝히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 왔는가? 에 대한 발자취인 동시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반추하게 한다. 그런데도 관혼상제라고 하면 그저 재미없고 딱딱하고 어렵다고 생각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이 책을 쓴 저자 덕분에 관혼상제의 이모저모를 흥미롭게 살펴 볼 수 있었다. 이 책은 단순히 의례의 절차나 형식을 정리한 것이 아니다. 그 보다는 저자가 ‘저승사자’로 불릴 정도로 발로 뛰며 체험한 결과물이다. 특히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라는 화두를 던지면서 궁금하게 한다. 그러면서 그 해답을 실생활에서 풀어나가는 것이 상당히 현실적이었다.

일찍이 공자(孔子)는『논어』(論語)「안연」(顔淵) 편에서 ‘非禮勿視, 非禮勿言, 非禮勿動’을 말했다. 풀이하자면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마라.’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공자가 말한 예를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경고로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우리는 지금 예가 아닌 것을 보고 예가 아닌 것을 말하고 예가 아닌 것을 움직이고 있다.

공자 말한 예를 좀 더 다른 시각으로 보면 노르베르트 엘리아스가『문명화 과정』에서 말한 ‘문명화 과정’일 수도 있다. 즉 내가 어릴 때 상여를 보고 자란 반면에 내 아들은 장례식장을 보고 자란다. 복잡한 현실을 고려하면 당연한 결과다. 오히려 내 아들이 상여를 보고 자라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그래야 우리 선조들이 상복을 벗더라도 적어도 3년 동안은 마음으로나마 상중(喪中)에 있는 것처럼 행동을 삼가는 ‘심상삼년(心喪三年)을 만든 까닭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람의 한평생』은 바쁜 현대인들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예의 형식이 뭐가 중요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의 형식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의 형식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도 문제다. 모든 문화는 예의 형식을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일까? 이 책에 담긴 관혼상제의 뜻을 하나하나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더구나 잘못 알고 있거나 이해하고 있었던 옛 사람들의 내면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역사란 무엇인가 까치글방 133
E.H. 카 지음, 김택현 옮김 / 까치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왜 1960년 4‧19혁명이 발생했을까? 이 질문에 단 한 가지 원인만을 말 할 수도 있다. 요즘같이 역사의 문외한 시대에서 전혀 모르는 것보다 조금이나마 알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를 단편적으로 기억하는 것은 위험하다. 무엇보다도 역사와 대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까? 이 문제에 대해『역사란 무엇인가』를 쓴 E. H카는 세 명의 수험생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로 앞서 말했듯 한 가지로 답하는 수험생은 C 학점을 받을 것이다. 두 번째로 여러 가지 원인들을 차례로 나열하는 수험생은 B 학점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원인들을 정리하고 질서를 수립하고 해석하는 수험생은 A 학점을 받을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A 학점을 받은 수험생답게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대답을 하고 있다. 그는 먼저 역사란 ‘역사가와 그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한다.

그는 완전한 역사 대신 경험주의적 역사를 주장한다. 이것이 역사의 사실과 과거의 사실을 구분하게 된다. 가령 4‧19혁명이 1960년에 일어난 것은 역사의 사실이지만 1961년에 일어난다면 과거의 사실이라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역사의 사실은 사실 자체의 어떤 성질이 아니라 역사가의 결정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현재의 눈을 통해서만 과거를 조명할 수 있고 과거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역사가의 기능은 과거를 사랑하거나 자신을 과거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로 과거를 지배하고 이해하는 데 있다.

E. H카는 이런 논리로 억센 개인주의를 반박한다. 즉 역사의 사실은 분명히 개인에 관한 사실이지만 그러나 사회와 고립된 개인의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보다는 사회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나폴레옹 같은 위인들은 자기의 시대를 실현하는 탁월한 개인으로 여겼다. 결국 그는 앞서 말한 대화는 곧 고립된 개인이 만든 대화가 아니라 오늘의 사회와 어제의 사회의 대화라고 거듭 강조한다.

이밖에도 그는 역사의 일반화를 지적하고 있다. 보통 역사는 특수한 사건을 다룬다고 한다. 물론 틀리지 않다. 가령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나 제 2차 세계대전은 모두 특수하다. 그러나 진정한 역사가의 관심은 특수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것 안에 일반화시키는 데 있다. 즉 이 두 가지 사건을 전쟁이라고 일반화시키는 것이다. 이렇듯 역사의 일반화가 중요한 것은 역사로부터 가르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그는 역사를 진보적인 학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과거가 미래를 밝혀주고 미래가 과거를 밝혀주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곧 역사의 정당화이다. 이로 인해 그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이야기했을 때 오히려 과거의 사건들과 서서히 등장하고 있는 미래의 목적들 사이의 대화라고 다시 한 번 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화하는 진화론 - 종의 기원 강의
스티브 존스 지음, 김혜원 옮김, 장대익 감수 / 김영사 / 2008년 3월
평점 :
절판


생물학에 있어 뉴턴이라고 말해지는 사람이 있다. 그는 바로『종의 기원』을 쓴 찰스 다윈이다. 그는 영국 군함 비글호를 타고 5년간 항해를 하면서 자료를 수집했다. 그리고 20년간 정리하고 분류하였고 그것도 모자라 다시 8년간 자신의 사상을 다듬었다. 이로 인해 그가 스스로 말했듯 ‘내가 할 수 있는 한 완전하고도 위대한’ 불후의 명저가 탄생했다.

이 책에서 그는 놀랍게도 진화론을 주장하고 있다. 다윈 이전에는 생물체들이 개별적으로 창조되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다윈은 생물체의 다양한 생존 경쟁 및 변이를 관찰하면서 ‘자연선택’이라는 것을 발견해냈다. 이를 달리 최적자 생존이라고 한다. 이러한 자연선택은 1%내지 그보다 작은 0.5%에 해당하는 미미한 이익일지라도 중요한 진화상의 결과를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이처럼 다윈의 책은 인류사를 바꾼 보기 드문 역작이다. 그래서 누구나 한번쯤 읽어도 좋을 교양의 반열에 올라있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어본 사람은 드물다. 단지 ‘진화론’이라고 말하면 그 책의 내용을 거의 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 책은 고전이라는 무게감에 비해 내용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그 보다는 그 책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 때문에 19세기 다윈 시대를 따라가야 하는 거리감이 더 부담스럽다.

그러면 이 책을 21세기 판으로 다시 쓰면 뭐가 달라질까? 이 물음에 스티브 존스는『진화하는 진화론』으로 답하고 있다. 스티브 존스 또한 다윈처럼 대단한 수집가이며 완벽주의자이다. 그는 자신을 달팽이 수집가라고 말할 정도로 수십 년 간 수십만 마리의 달팽이를 관찰했다.

이 책에서 스티브 존스가 주장하는 진화의 확신을 세 가지로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그는 HIV(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에 주목한다. 왜냐하면 HIV는 DNA가 아니라 RNA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HIV는 숙주의 세포를 파괴한다. 그것은 숙주의 세포들이 침략자의 RNA 정보를 인간의 DNA로 복제할 수 있는 요소를 이용해 자기 복제를 하도록 한다. 그런데 HIV는 정확한 복제를 만드는데 서툴며 이것이 곧 AIDS가 발생하는 이유이다. 그는 AIDS를 다윈주의 그 자체라고 말한다.

둘째로 그는 삶(자연선택)은 도박이다, 라고 말한다. 어떤 동물이든 수익을 바라며 큰돈을 걸지 아니면 승산이 높아지기를 바라며 내기를 미룰지 결정해야 한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선택하고 자연은 오로지 자신의 돌보는 생물의 이익만을 위해 선택하는 차이가 있다.

섯째로 그는 이 책의 원제를 ‘거의 고래 같은(almost like a whale)’으로 쓰고 있다. 이 말은 호수에서 헤엄치며 곤충을 입으로 잡아먹는 곰이 ‘거의 고래 같은’ 동물로 진화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한 다윈의 문장에서 따온 것이다. 이것을 두고 창조론자들은 거짓말이라고 한다. 즉 곰이 고래 로 진보하지 않았다. 반면에 진화론자들은 ‘자연을 비약을 하지 않는다.’ 라고 말하면서 진리임을 역설하고 있다. 오늘날 고래와 하마의 연관성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다윈의 주장이 틀리지 않았다고 그는 말한다.

우리는 스티브 존스의 탁월한 시야와 예리한 분석력 덕분에 다윈의『종의 기원』의 많은 부분을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말대로 이 책은 진화론의 어제와 오늘을 보여주고 있다. 이로 인해 진화론이 보다 우리 곁으로 다가왔으며 동시에 창조론의 오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진화론 대 창조론의 해묵은 논쟁은 더 이상 가치가 없어 보인다.

그래도 누군가 150년 전의 낡은 학문이라고 문제 삼을 수 있다. 그러면 일찍이『종의 기원』을 읽었던 헉슬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쉬운 자연선택을 생각하지 못했다니.”라고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이 책이 주장하는 용감하게 부정하는 방법론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지개 물고기 무지개 물고기
마르쿠스 피스터 지음, 공경희 옮김 / 시공주니어 / 199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6살 아들이 친구들과 장난감을 가지고 잘 놀다가도 언제 그랬는지 모르게 금방 싸우고 만다. 아들은 친구가 자기 것을 뺏는다고 울고 친구는 안 준다고 운다. 그럴 때마다 사이좋게(?) 놀아야지 말하지만 아들은 아들대로 불만이다. 왜 나만 양보해야 해! 내 거란 말야!

아이를 키우다보면 늘 이런 일로 소란스럽다. 더구나 장난감이 비싸고 멋져보일수록 혼자만 놀려고 한다. 아이의 못된 버릇을 고쳐보려고 큰 소리쳐보지만 그때뿐이다. 오히려 정서적으로 아이에게 좋지 않다. 그런 줄 알면서도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 나쁜 버릇… 어떻게 하면 아들의 마음을 아름답게 할 수 있을까?

그러던 어느 날 아들과 함께『무지개 물고기』를 보면서 바다 속을 구경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책 표지에 나와 있듯 한 눈에 봐도 아름다운 물고기를 볼 수 있었다. 파랑, 초록, 자줏빛 비늘 사이사이에 반짝반짝 빛나는 은비늘이 박혀 있는 무지개 물고기였다.

이 정도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일까? 무지개 물고기는 다른 물고기들이 같이 놀자고 해도 저 혼자 어디론가 가버렸다. 얄밉게도 반짝이는 물고기를 흔들면서 말이다. 또한 굉장히 많은 반짝이는 비늘에서 한 개만 달라고 해도 오히려 큰소리를 내며 주지 않았다.

무심결에 ‘무지개 물고기야, 이러면 안 되는데.’ 중얼거렸다. 분명 친구들이 싫어할 것이다. 아니다 다를까, 무지개 물고기는 욕심 탓에 그만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물고기가 되어버렸다. 더 이상 은빛 비늘은 반짝반짝하지 않았다. 그제 서야 자신의 잘못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아름다운 은빛 비늘을 다른 물고기들에게 하나하나 나눠주었다.

이 책을 통해 바다 속이 더욱 밝아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물고기가 있음을 신기하게 알게 되었다. 은빛 비늘이 아니라 은빛 마음으로 반짝반짝해야 무지개 물고기가 정말로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무지개 물고기 이야기는 아이들이 사이좋게 지내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 지 잘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누구나 다 알고 있기에 미미한 정도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은빛 마음을 보고 있으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아들은 무지개 물고기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동안 아이에게 ‘양보’하라고 타일렀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앞서 말했듯 아이에게는 양보라는 말이 엉뚱했을 것이다. 앞으로는 무지개 물고기를 떠올리며 친구들과 ‘함께 나누며’ 라고 들려주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