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눈 ㅣ 색채 3부작
막상스 페르민 지음, 임선기 옮김 / 난다 / 2019년 1월
평점 :
시(詩)를 몰랐으면 어땠을까? 앞도, 뒤도, 옆도 바라보지 않는 시에 대한 궁극을 갈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상의 즐거움이 곧 삶의 행복이며 그것으로 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토록 평범한 삶을 나는 견딜 수 없었고 방황의 그림자를 끝내 지우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다행히 고통 속에서도 불타오르는 시의 의지가 있었기에 이 세계를 단단히 버티고 있는지 모른다.
시가 우리 몸 밖으로 내 몰린 삭막한 풍경에서 막상스 페르민의『눈』에는 하염없이 시를 쓰는 남자, 유코가 나온다. 그는 자신이 꿈꾸는 삶을 본능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마치 시인이 하나의 직업 같았다. 그러나 그에게 시는 직업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어떤 삶의 잣대로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였으니까. 겨울에 내리는 눈을 보고 아름다운 시를 쓰는 그는 마음속에 눈을 품고 사는 존재였다. 눈은 시이며, 시는 눈이었다.
그는 눈의 깃든 아름다움을 말 그대로 아름답게 표현하는 최고의 시인이었다. 이것으로도 얼마든지 시인의 길을 걸어가도 무방하다. 문제는 그의 시에 색(色)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생겨났다. 순백색이라고 믿었던 눈의 아름다움은 빛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빛과 색을 똑같이 받아들이지만 놀랍게도 빛이 우리 몸 밖에 있는 것이라면 색은 우리 몸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의 시가 빛난다고 해서 특별하지 않은 일이고 결코 아름다울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절망적으로 하얗기만” 하는 절망적 아름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구도의 길을 떠난다. 어쩌면 한 편의 시에 색이 있다면 그 색이 시가 될 것이라는 자각은 눈의 여섯 가지 특징을 상상하게 한다. 이러한 상상은 색채의 대가 소세키 선생의 예술을 통해 가능해졌다. 이제까지 무채색이었던 그의 순백의 시는 무지개 색으로 생생하게 살아났다.
막상스 페르민의『눈』은 ‘한 편의 소설이면서 한 편의 시’가 되는 이야기라 쉽게 읽힌다. 하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소세키 선생의 예술을 읽는 데 오랜 시간이 흘렀다. 소세키 선생이 예상과는 달리 눈먼 화가여서 이런 사람이 어떻게 예술을 가르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의 강도는 오히려 낮은 편이다. 그 보다는 “사랑이란 가장 어려운 예술”은 매우 친숙하면서도 고통스러웠다.
소세키 선생과 곡예사의 사랑은 내가 아픈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에게 사랑이란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작가는 낭만적인 보통의 시간에다 죽음으로 슬픔의 무게를 더하는 것이나 멈추지 않고 사랑을 확장시킨다. 글을 쓰는 것, 춤을 추는 것, 그림을 그리는 것들의 결정적인 진실은 사랑의 투사라는 것. 그러면서 예술이라는 오래된 질문을 둘러싼 비밀 하나를 펼쳐 보인다. 그것은 바로 ‘곡예사의 예술’이다.
시인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시쓰기라는 줄 위에 계속 머물러 있는 일일세, 삶의 매 순간을 꿈의 높이에서 사는 일, 상상의 줄에서 한순간도 내려오지 않는 일일세. 그런 언어의 곡예사가 되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일세.(100p)
돌이켜보면, 예술가들은 특별한 꿈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특별한 운명을 가졌다고 해서 누구나 예술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말하고 있듯 예술가는 자신의 존재를 곡예사처럼 아름다움의 줄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야만 한다.
시를 몰랐으면 좋았을까? 아니다. 시를 몰랐으면 아름다움을 끝내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름다움은 예술이며 꿈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팽팽한 줄 위에서 현기증을 일으키는 사람과 균형을 잡는 사람이다. 사랑과 예술은 닮을 수밖에 없다. 사랑은 눈부시게 빛나는 중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