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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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히든 피겨스」(2016) 를 보면서 가슴 아픈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캐서린이 화장실로 뛰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는 멀쩡한 여자 화장실을 눈앞에 두고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대신에 그녀는 일하는 건물 밖으로 나와서는 800미터를 뛰어 다른 건물로 들어가서야 비로소 화장실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할 수 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유색인종(흑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녀는 유색인종 화장실만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감독은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을 화장실 문제로 보여주면서 “나사(NASA)에선 모두가 같은 색 소변을 본다.”는 묵직한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화장실이 어떤 곳인가요?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화장실은 꼭 필요한 장소입니다. 언제 어디서 일어날 줄 모르는 생리적인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서 한 번은 반드시 가야할 공간입니다. 화장실이 없다는 생각만으로도 존재의 무거움을 참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보면 화장실이 단지 간판으로 걸려 있다고 해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알 수 없습니다. 화장실이 어디에, 어떻게 있어야 하는지를 곰곰이 따져야 합니다. 화장실이 멀리 있거나 공간이 좁고 청결 태가 엉망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참아야 할 고통은 계속해서 남아있게 마련입니다. 볼 일을 보고도 왠지 뒤 끝이 좋지 못합니다.


화장실 같은 참사가 반복할 때마다 우리는 인간으로 실격을 당했다는 불편함을 피할 수 없습니다. 뭔가를 특별히 잘못한 일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 실격이라는 주홍 글자가 새겨지고 맙니다. 이러한 부조리한 사회를 보며 김승섭은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로 답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임상학자가 아니라 보건학자의 시선으로 타인의 고통을 파헤치고 있습니다. 임상학자는 차트에 적힌 질병을 약으로 처방합니다. 반면에 보건학자는 질병에 스며든 사회 역학을 진단합니다. 질병을 개인의 잘못된 위생 탓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환경을 원인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의지입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오줌권’ 투쟁을 계속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오줌권은 말 그대로 화장실을 갈 권리입니다. 사회적 약자들 입장에서 화장실에 가는 것은 하나의 투쟁입니다. 가령, 저임금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은 화장실이 두렵습니다. 쉬는 시간이거나 교대 시간이 아니면 화장실에 갈 수도 없습니다. 더구나 작업 인력이 부족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결국 화장실을 포기하고 오줌을 참는 게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하지만 노동자에게 되돌아오는 것은 방광염이라는 질병입니다. 이러한 방광염을 약으로 치료하면 일시적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의 고통을 제대로 치료하지 않는다면 오줌권은 아무 소용이 없는 권리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저자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기 위해서 공부했습니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타인은 장애인, 여성, 해고노동자, 트렌스젠더, 성폭력 피해자, 세월호 유가족, 천안함 생존자 등 다양합니다. 이러한 타인은 우리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 들입니다. 우리는 보통 시스젠터(cisgender)입니다. 출생시 법적 성별과 성별 정체성이 일치하는 합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존재는 트렌스젠터(transgender)와 같습니다. 출생시 법적 성별과 성별 정체성이 다릅니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 존재는 상대적으로 차별과 모멸감의 피해자가 되고 맙니다.


그들은 공기처럼 존재하는 차별 속에서 숨죽이며 살아갑니다. 때로는 가해자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합니다. 그럴수록 그들은 사회적 약자라는 트라우마에 갇혀 보이지 않는 인간이 되었으며 그들의 상처 또한 아픔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슬프거나 동정심으로 끝나지 않는 현실입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안타까운 참사는 계속 일어나는 데도 사회적인 변화가 없다는 안타까움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일찍이 플라톤은 "동등하지 않은 사람들을 동등하게 대하는 것만큼 불공정한 일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어떤 고통은 치료가 아니라 응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응답은 당사자의 고통에 찬 비명이 무엇인지 투명하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아주 어려운 상황에서도 저자는 자기와의 싸움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앞서 말한 오줌권이라는 말이 연구자의 언어인 동시에 정직한 언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유인즉, 당사자의 고통이 아닌 사회적인 고통으로 바라보게 되고 생각을 달라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평등한 세상이 되기 위해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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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선집 1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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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근본적인 입장은 여성도 인간이라는 것이다.” 마거릿 애트우드는『타오르는 질문』에서 여성의 권리를 변호했다. 그러면서 거듭 자신은 ‘나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고백했다. 그녀의 고백을 떠올리면 세상에는 두 가지 페미니스트가 있는 것 같다. 좋은 페미니스트와 나쁜 페미니스트다. 좋은 페미니스트가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이라면 나쁜 페미니스트는 여성의 권리를 오히려 은근슬쩍 억압하고 만다. 결과적으로 나쁜 페미니스트는 우리가 원하는 정의로운 세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비비언 고닉의『사나운 애착』을 읽으면서 또 하나의 페미니스트를 생각하게 되었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우리는 좋거나 나쁘다는 양가적인 감정으로 너무나도 쉽게 공감한다. 공감의 기준은 양심에 있다. 양심이 허락할수록 그만큼 우리는 좋은 페미니스트가 된다. 하지만 ‘사나운 애착’은 다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나운 페미니스트’여서 그렇다. 사나운의 사전적 정의는 획일적이지 않다. 성질이나 행동이 모질고 억세기 때문이다. 결코 좋다거나 나쁘다는 감정으로 이해할 수 없는 강렬함이 스며있다.


이 책에서 사나운 애착을 갖고 선택한 인물은 비비언 고닉의 엄마와 그녀다. 그들은 두 여인이면서 동시에 모녀(母女)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녀라는 애증이다. 모녀가 단순히 가족이라는 애착의 굴레여서 그런 것은 아니다. 모녀는 멀지도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관계다. 그들은 사소하거나 특별해 보이는 여러 가지 문제로 티격태격하는 하니까. 때로는 커다란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녀는 엄마와 같이 있으면 불편하면서도 안전하다고 말한다. 끝내는 엄마를 “가장 오랜 친구”라고 여긴다.


하지만 내가 찾고자 하는 사나운 애착의 실마리는 이것이 아니었다. 물론 이것이 아니라고 해서 방향이 달라지지 않았다. 실마리의 방향은 “난 절대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는 그녀의 외침이었고 그것을 좀 더 가까이 듣고 싶다는 마음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들이 살아오면서 부대낀 거리를 동행하게 되었다. 생각하건데 거리를 걷는데 감사해야 했다. 만약에 공원에 앉아 그녀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다면 어떤 상황이나 감정을 생각하는데 힘들었을 것이다.


그녀가 ‘불순분자’가 되는 데는 엄마의 영향력이 없지 않았다. 그녀를 낳고 온 몸으로 그녀를 사랑했으니까. 동시에 엄마의 억척스러움, 당당함 그리고 고통과 우울도 함께 그녀를 구성하는 요소가 되었다. 엄마 또한 각자 삶을 살 권리가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엄마가 말한 그 권리의 내면에는 그녀 자신이 ‘몸’으로 배운 게 최선이었다. 문제는 몸이 감당해야 할 의무에는 정작 ‘자기 삶’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까? 그녀는 단단하리라 믿었던 엄마의 몸이 어느 순간 산산조각 부서지는 것에 실망했다. 여성의 몸에 대한 권리는 없고 오로지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그녀는 엄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속적인 욕망이 아닌 ‘영혼의 환상’을 가지고 결혼하였다. 그런데 결혼한 순간부터 영혼은 사라지고 여자라는 역할만 더 커졌다. 40년 동안 남편을 위해 음식을 하는 등 집안일을 하는 것에 대해 회의하면서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가사노동이 힘들다거나 불편해서 생기는 뾰쪽한 감정은 아니다. 가사노동을 누가 하느냐가 걸림돌이었다. 그녀는 집안일을 여자 혼자서 하는 것을 미덕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이 책의 제목처럼 ‘사나운 애착’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사랑도 노력해서 얻어야” 한다. 남편이라고 해서 여자가 의무적으로 사랑해야만 하는 것은 쉽게 해결되지 않을 고통이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삶. 두 여자가 걸어온 시간은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두 여자의 삶과 여전히 평행적으로 살아가고 있으나 계속해서 걸을 것이다. 단순히 그녀들을 더 알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두 여자의 삶과 만나는 지점에서 사나운 페미니스트가 세상에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 사나운 페미니스트는 삶과 사랑의 불완전한 조각을 다시 맞추며 우리를 인간으로 타오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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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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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는 죽음 앞에서도 그 마음이 강철과 같고,

의사는 위기에 처해도 그 기세가 구름과 같다.

-안중근

 

김훈의『하얼빈』은 절박한 소설이다. 안중근의 빛나는 청춘을 소설로 써보겠다는 소망을 더 이상 미룰 수가 없다는 작가의 고백이 마음을 관통했다. 안중근은 대한제국을 치욕적인 식민지로 만들었던 일본의 정치적 거물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민족의 영웅이다. 안중근의 절박함은 개인적인 뼈를 갉는 아픔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절박함이었다. 그래서 일까? 삶의 밑바닥에서부터 소용돌이치는 안중근의 영혼은 대담한 정신으로 충만한 구름이 되어 휘몰아쳤다.


안중근의 삶과 죽음은 짧았다. 그러나 불의(不義)에 맞서는 운명은 강렬했다. 그가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쏜 세 발의 총알은 명중했다. 비록 사격 솜씨가 뛰어났다고 하더라도 마음가짐이 흐트러지면 결코 대업은 실패했을 것이다. 국가의 안위를 노심초사했던 그는 가족, 종교 그리고 목숨의 연민을 버리면서까지 묵묵히 자신의 삶의 방식을 지켰다. 불의에 대한 두려움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에 이러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했다면 총알은 불의의 과녁을 빗나갔을 것이다.


소설의 줄거리에서 이미 알 수 있듯 일본의 동양평화는 제국주의 침략이라는 강자의 논리였다. 나라 잃은 고단한 국민들이 무참히 희생이 되는 것을 보고 있으면 분노를 금할 수 없을 지경이다. 이러한 비극적인 격동의 시대에서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대한독립이라는 일편단심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러 나섰고 그래서 복수에 성공했으니 복수의 정의로움은 구국의 영웅다웠다. 


그러나 작가가 소설에서 진정으로 바라던 것은 안중근의 역사적인 사건을 낱낱이 확인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매우 느린 속도로 안중근의 행적을따라가면서 그의 마지막을 끝까지 잊지 않으려고 했다. 그의 마지막은 일본이 정치적인 논쟁에서 벗어나기 위한 말쑥한 논리에 따르면 결코 ‘파락호(破落戶)’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일본 법정에서 당당히 말한 대로 무지몽매한 “자객”이 아니라 “의병 참모중장”이라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우리의 심장을 끝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헛된 일을 좋아해서 이토를 죽인 것이 아니다. 나는 이토를 죽이는 이유를 세계에 발표하려는 수단으로 이토를 죽였다.(235p)


그래서 소설을 읽다보면 안중근의 생생한 비장함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작가의 표현대로 “안중근의 총은 그의 말과 다르지 않다.”(307p)는 것을 공감하게 되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31세 안중근이 가슴에 품었던 절박함의 베일이 벗겨지고,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오래된 질문에 골몰하면서 어떤 새로운 다짐이 필요한가? 라는 절박함을 깨달았다. 


약육강식(弱肉强食) 풍진시대(風塵時代). 시대의 장벽을 넘어 김훈의『하얼빈』을 통해 다시 살아난 안중근의 영혼은 ‘청춘의 언어’이며, 우리 모두의 정신적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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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 3부작
막상스 페르민 지음, 임선기 옮김 / 난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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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몰랐으면 어땠을까? 앞도, 뒤도, 옆도 바라보지 않는 시에 대한 궁극을 갈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상의 즐거움이 곧 삶의 행복이며 그것으로 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토록 평범한 삶을 나는 견딜 수 없었고 방황의 그림자를 끝내 지우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다행히 고통 속에서도 불타오르는 시의 의지가 있었기에 이 세계를 단단히 버티고 있는지 모른다. 


시가 우리 몸 밖으로 내 몰린 삭막한 풍경에서 막상스 페르민의『눈』에는 하염없이 시를 쓰는 남자, 유코가 나온다. 그는 자신이 꿈꾸는 삶을 본능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마치 시인이 하나의 직업 같았다. 그러나 그에게 시는 직업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어떤 삶의 잣대로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였으니까. 겨울에 내리는 눈을 보고 아름다운 시를 쓰는 그는 마음속에 눈을 품고 사는 존재였다. 눈은 시이며, 시는 눈이었다.


그는 눈의 깃든 아름다움을 말 그대로 아름답게 표현하는 최고의 시인이었다. 이것으로도 얼마든지 시인의 길을 걸어가도 무방하다. 문제는 그의 시에 색(色)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생겨났다. 순백색이라고 믿었던 눈의 아름다움은 빛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빛과 색을 똑같이 받아들이지만 놀랍게도 빛이 우리 몸 밖에 있는 것이라면 색은 우리 몸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의 시가 빛난다고 해서 특별하지 않은 일이고 결코 아름다울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절망적으로 하얗기만” 하는 절망적 아름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구도의 길을 떠난다. 어쩌면 한 편의 시에 색이 있다면 그 색이 시가 될 것이라는 자각은 눈의 여섯 가지 특징을 상상하게 한다. 이러한 상상은 색채의 대가 소세키 선생의 예술을 통해 가능해졌다. 이제까지 무채색이었던 그의 순백의 시는 무지개 색으로 생생하게 살아났다.


막상스 페르민의『눈』은 ‘한 편의 소설이면서 한 편의 시’가 되는 이야기라 쉽게 읽힌다. 하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소세키 선생의 예술을 읽는 데 오랜 시간이 흘렀다. 소세키 선생이 예상과는 달리 눈먼 화가여서 이런 사람이 어떻게 예술을 가르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의 강도는 오히려 낮은 편이다. 그 보다는 “사랑이란 가장 어려운 예술”은 매우 친숙하면서도 고통스러웠다. 


소세키 선생과 곡예사의 사랑은 내가 아픈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에게 사랑이란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작가는 낭만적인 보통의 시간에다 죽음으로 슬픔의 무게를 더하는 것이나 멈추지 않고 사랑을 확장시킨다. 글을 쓰는 것, 춤을 추는 것, 그림을 그리는 것들의 결정적인 진실은 사랑의 투사라는 것. 그러면서 예술이라는 오래된 질문을 둘러싼 비밀 하나를 펼쳐 보인다. 그것은 바로 ‘곡예사의 예술’이다. 


시인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시쓰기라는 줄 위에 계속 머물러 있는 일일세, 삶의 매 순간을 꿈의 높이에서 사는 일, 상상의 줄에서 한순간도 내려오지 않는 일일세. 그런 언어의 곡예사가 되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일세.(100p)


돌이켜보면, 예술가들은 특별한 꿈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특별한 운명을 가졌다고 해서 누구나 예술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말하고 있듯 예술가는 자신의 존재를 곡예사처럼 아름다움의 줄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야만 한다. 


시를 몰랐으면 좋았을까? 아니다. 시를 몰랐으면 아름다움을 끝내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름다움은 예술이며 꿈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팽팽한 줄 위에서 현기증을 일으키는 사람과 균형을 잡는 사람이다. 사랑과 예술은 닮을 수밖에 없다. 사랑은 눈부시게 빛나는 중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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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모르는 이야기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황시운 지음 / 교유서가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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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작은 죽음이다. 죽음은 큰 고통이다.

-하이데거


황시운의『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는 제목 그대로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러나 페이지 한 장을 미처 다 읽기도 전에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마침표가 아니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삶의 최전선이라는 게 있다. 그것은 삶의 끝이 아니라 또 하나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만약에 또 하나의 시작이 없다면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는 정말이지 허무하게 마침표로 끝났을지 모를 일이다.


우리는 누구나 크고 작은 불행을 몸소 마주하게 된다. 마주하는 순간이 정호승 시인의 말처럼 ‘슬픔이 택배’로 오거나 이 책의 저자의 말처럼 ‘거짓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인생의 가장 빛나는 날에 불의의 사고를 당했으니 더욱 믿을 수 없었다. 하반신이 마비되고 그것으로도 가혹한 운명은 부족했는지 신경병증성 통증에 시달린다고 하면 거짓말이 마치 진실과 뒤엉키기도 한다. 그러나 통증 때문에 사납게 비명을 지르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악취 나는 몸뚱아리 신세라는 작가의 고백을 듣고 나면 차라리 이 모든 게 거짓말이었으면 했다. 당신을 몰랐기에 더욱 그랬다.


어디 그뿐인가? 하반신이 마비된 체 ‘반쪽짜리’ 인생이 감당해야 할 수치심과 분노는 매번 곪아터졌다. 장애 때문에 남들과 같은 일상생활은 어렵다. 휠체어를 타고 지나가야 할 턱과 틈을 생각하면 당신을 모르는 나 또한 관자놀이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두려움이 채 사라지기 전에 차별과 혐오라는 타인의 무례한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그럴 때마다 사람이 아닌 ‘시한폭탄’같은 존재라는 죄책감을 끌어안고 버텨야만 했다. 슬픔이 빼곡해질수록 눈동자는 침묵할 수 없었고 눈물을 흘렸다. 


눈물의 무게만큼이나 고통이 사라진다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당신은 세상에는 울어도 해결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프지 않길 마냥 기다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장애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기적처럼 물러설 리가 없으며 제 살을 긁어내는 통증이 한바탕 눈물로 사라질 리가 없다. 장애는 삶의 불편한 조건이며 이러한 불편함을 선택하기까지 그만큼의 눈물겨운 시간을 지나왔을 테니까. 당신은 이것 밖에는 아는 방법이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당신의 말은 허공으로 흩어지지 않았다. 놀랍게도 우리의 심장과 맥박을 뛰게 하는 걸 보면 참 괜찮은 방법이었다.


돌이켜보면 장애 때문에 아무 것도 못한다는 좌절은 절망이 흘러가는 아픈 종착지다. 통증이 신체적인 고통이라고 한다면 좌절은 정신적인 고통이다. 고통 때문에 삶의 의지가 여지없이 무너지기 마련이며 쓸쓸하다. 작가에게 예기치 못한 상황이 너무 힘들어서 어떻게 버티며 지내왔는지 궁금했는데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작가는 통증과 필사적으로 싸우면서 ‘맑은 정신’으로 다시 살고 싶었다. 맑은 정신은 견딜 수 있는 경계이며 살고 싶은 의지였다. 


그러니 작가의 생존에 가까운 글을 읽고 다시 봄을 맞이했으면 한다. 아프고 다친 몸은 불편한 것이지 불행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아무런 흔적 없이 사라져도 좋을 마땅한 존재라고 여기는 것은 불행 때문에 자주 뒷걸음치는 이유에서다. 불편한 자신을 바라보고 이해하면서 죽을힘으로 버텨야낼 때 비로소 슬픔이 완성되는 것이다. 결코 슬픔의 미화(美化)가 아니다. 이러한 다짐은 우리의 삶을 더욱 삶답게 하는, 그리하여 우리는 수많은 장애를 결국 극복하며 사는 인간이라는 것을 기어이 믿고 싶어졌다.


당신을 몰랐던 우리는 이제 당신을 알게 되었다. 너무 바빠서 혹은 너무 무료해서 고쳐지지 않고 뾰족했던 마음이 조금씩 무너졌다. 눈을 감으니 낙엽처럼 메마른 가슴에 온기가 가득해졌다. 그리하여 오로지 이 세상을 끝내 사랑하고야 말겠다는 맑은 정신을 끝까지 움직이고 싶었다. 최소한으로 아주 가볍고도 촘촘하게 움직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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