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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운 애착 ㅣ 비비언 고닉 선집 1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12월
평점 :
“나의 근본적인 입장은 여성도 인간이라는 것이다.” 마거릿 애트우드는『타오르는 질문』에서 여성의 권리를 변호했다. 그러면서 거듭 자신은 ‘나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고백했다. 그녀의 고백을 떠올리면 세상에는 두 가지 페미니스트가 있는 것 같다. 좋은 페미니스트와 나쁜 페미니스트다. 좋은 페미니스트가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이라면 나쁜 페미니스트는 여성의 권리를 오히려 은근슬쩍 억압하고 만다. 결과적으로 나쁜 페미니스트는 우리가 원하는 정의로운 세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비비언 고닉의『사나운 애착』을 읽으면서 또 하나의 페미니스트를 생각하게 되었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우리는 좋거나 나쁘다는 양가적인 감정으로 너무나도 쉽게 공감한다. 공감의 기준은 양심에 있다. 양심이 허락할수록 그만큼 우리는 좋은 페미니스트가 된다. 하지만 ‘사나운 애착’은 다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나운 페미니스트’여서 그렇다. 사나운의 사전적 정의는 획일적이지 않다. 성질이나 행동이 모질고 억세기 때문이다. 결코 좋다거나 나쁘다는 감정으로 이해할 수 없는 강렬함이 스며있다.
이 책에서 사나운 애착을 갖고 선택한 인물은 비비언 고닉의 엄마와 그녀다. 그들은 두 여인이면서 동시에 모녀(母女)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녀라는 애증이다. 모녀가 단순히 가족이라는 애착의 굴레여서 그런 것은 아니다. 모녀는 멀지도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관계다. 그들은 사소하거나 특별해 보이는 여러 가지 문제로 티격태격하는 하니까. 때로는 커다란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녀는 엄마와 같이 있으면 불편하면서도 안전하다고 말한다. 끝내는 엄마를 “가장 오랜 친구”라고 여긴다.
하지만 내가 찾고자 하는 사나운 애착의 실마리는 이것이 아니었다. 물론 이것이 아니라고 해서 방향이 달라지지 않았다. 실마리의 방향은 “난 절대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는 그녀의 외침이었고 그것을 좀 더 가까이 듣고 싶다는 마음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들이 살아오면서 부대낀 거리를 동행하게 되었다. 생각하건데 거리를 걷는데 감사해야 했다. 만약에 공원에 앉아 그녀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다면 어떤 상황이나 감정을 생각하는데 힘들었을 것이다.
그녀가 ‘불순분자’가 되는 데는 엄마의 영향력이 없지 않았다. 그녀를 낳고 온 몸으로 그녀를 사랑했으니까. 동시에 엄마의 억척스러움, 당당함 그리고 고통과 우울도 함께 그녀를 구성하는 요소가 되었다. 엄마 또한 각자 삶을 살 권리가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엄마가 말한 그 권리의 내면에는 그녀 자신이 ‘몸’으로 배운 게 최선이었다. 문제는 몸이 감당해야 할 의무에는 정작 ‘자기 삶’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까? 그녀는 단단하리라 믿었던 엄마의 몸이 어느 순간 산산조각 부서지는 것에 실망했다. 여성의 몸에 대한 권리는 없고 오로지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그녀는 엄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속적인 욕망이 아닌 ‘영혼의 환상’을 가지고 결혼하였다. 그런데 결혼한 순간부터 영혼은 사라지고 여자라는 역할만 더 커졌다. 40년 동안 남편을 위해 음식을 하는 등 집안일을 하는 것에 대해 회의하면서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가사노동이 힘들다거나 불편해서 생기는 뾰쪽한 감정은 아니다. 가사노동을 누가 하느냐가 걸림돌이었다. 그녀는 집안일을 여자 혼자서 하는 것을 미덕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이 책의 제목처럼 ‘사나운 애착’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사랑도 노력해서 얻어야” 한다. 남편이라고 해서 여자가 의무적으로 사랑해야만 하는 것은 쉽게 해결되지 않을 고통이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삶. 두 여자가 걸어온 시간은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두 여자의 삶과 여전히 평행적으로 살아가고 있으나 계속해서 걸을 것이다. 단순히 그녀들을 더 알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두 여자의 삶과 만나는 지점에서 사나운 페미니스트가 세상에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 사나운 페미니스트는 삶과 사랑의 불완전한 조각을 다시 맞추며 우리를 인간으로 타오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