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김누리 지음 / 해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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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최대의 적은 약한 자아이다.

- 아도르노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화제의 명강의를 선보인 김누리 교수의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를 읽으면서 새삼 불행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자의 문제의식을 보니 불행의 일상화라고 해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불행은 전염병 같았습니다. 전염병의 특성상 감염되기 쉽고 치명적입니다. 문제는 전염병에 대한 사전 관리가 소홀하다보니 사후 관리가 제대로 될 리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헬조선’, ‘탈조선을 외치며 이상한 나라를 떠나고 싶어 할까요? 우리는 한강의 기적을 통해 세계인이 놀랄만한 경제발전을 이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을 심정으로 한강에 투신하고 있습니다. 한강의 악몽으로 인해 자살률이 세계 1위라는 굴레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이상한 나라에서 불행하게 살고 있을까요? 이상한 나라의 불편한 진실이 드러날수록 이상한 나라가 정말로 지옥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첫 번째, 이상한 나라는 사람들은 가장 모순적으로 자기 착취를 당연시 합니다. 그럼에도 마치 자유인처럼 아무렇지도 않다는 착각에 빠져 소외또한 당연시 합니다. 소외는 흔히 왕따라는 정도로 일상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소외의 좀 더 명확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 ‘삶이 뒤집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필요로 해서 돈을 만들었는데 어느 순간 돈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돈 없는 사람에 대한 차별 때문에 이백충’(한달에 200만원 이하의 소득으로 사는 벌레 같은 사람) 이란 말을 끔찍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이상한 나라는 민주주의자가 없는 민주주의 공화국입니다. 이상한 나라가 민주주의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광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을 보세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들은 촛불처럼 타오르며 민주주의를 외치며 불의에 저항했습니다. 그리고는 정권 교체를 만들어냈습니다. 이럴 정도로 이상한 나라는 광장 민주주의가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광장이 아니라 각자 일상으로 돌아가서 하는 모습들을 보면 지옥을 보는 듯합니다. 권위주의, 가부장주의, 꼰대 문화, 갑질 문화, 비정규직, 성차별, 성폭력이 비일비재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상한 나라의 사람들은 이것을 마치 민주주의의 천국처럼 여긴 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이상한 나라에서 일상 민주주의가 여전히 제자리걸음만 할뿐 성숙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이상한 나라는 약한 자아의 사회입니다. 아도르노가 지적한대로 약한 자아는 민주주의의 최대의 적입니다. 약한 자아는 자신감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자신감이 부족하기 때문에 약한 자아를 개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로 여기는 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유인즉 약한 자아는 사회의 고질적인 병()의 피해자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약한 자아의 바이러스는 놀랍게도 승자독식을 위한 교육이 슈퍼전파자라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백년을 건강하게 만들어야 할 교육이 약이 아니라 독()이 되어 불행을 감염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한민국이 왜 이상한 나라가 되었는지 객관적인 시각으로 봐야 합니다. 지구적인 관점에서 대한민국의 안팎을 두루 살펴봐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한계가 구체적으로 드러날수록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불편 한다고 해서 외면만해서는 한계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좀 더 현명하게 한계를 의식하고 반성해야 대한민국이 이상한 나라라이며 볼품없는 나라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에서 대한민국의 불편한 진실을 진단하고 해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독일을 모델로 하며 대한민국이 정상적인 나라가 되는 것을 통찰하고 있습니다. 독일하면 아우슈비츠의 악몽을 떠올리는 과거 파쇼적인 전쟁국가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180도 달라져 복지국가로 대한민국과 전혀 다른 정상적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대학 등록금이 없어도 공부할 수 있는 나라, 실업 상태여도 취업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 이러한 몇 가지 사실만으로도 독일이 얼마나 살기 좋은 나라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독일을 대안으로 본 것은 당연합니다. 독일처럼 통일만 되면 경제발전과 함께 국민이 잘 사는 나라가 된다는 장미 빛 희망. 대한민국처럼 분단국가에서 최선의 선택은 통일을 통해 사회 변화를 도모하고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독일의 통일에만 집중하다 보니 정작 중요한 현상을 놓치고 있다는 비판을 하게 됩니다. 한 나라가 통일이 되었다고 해서 그 나라 사람들의 자유를 자동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통일을 하는 것은 좋을 리 없습니다. 사회적, 문화적으로 통일이 되어야만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독일을 관심 있게 연구하면서 ‘68혁명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68혁명은 프랑스에서 시작된 사회변혁운동으로 기성세대의 부조리한 세상에 맞서 모든 형태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쳤습니다. 독일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독일의 68세대들이 새로운 독일을 만들었습니다. 과거청산을 성공적으로 했으며 대학생에게 생활비를 주는 바퓍제도를 시행하면서 교양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노사 갈등이 아닌 노사공동결정체로 경제 민주화를 완성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독일 헌법1조는 인간 존엄은 불가침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높은 시민정신으로 사회적 정의라는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확고한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나라에서는 어떤 일어나고 있나요? 68혁명의 이념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세계적으로 ‘30-50 클럽에 가입되어 있으며 한편으로는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 촛불혁명 등 위대한 민주주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부조리하고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서 모두들 불행하게 살고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나머지 이상하게도 불행을 당연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점에서 사회적 갈등을 폭발시키는 무서운 의식에서 벗어나 제대로 정의를 세워야 합니다. 모든 국민이 행복을 당연시해야 합니다.

 

일찍이 68세대의 정신적 지도자인 허버트 마르쿠제는 일차원적 인간에서 자유인이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노예 상태에 있으면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환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노예 상태는 지배자의 논리를 미화하는 것입니다. 지배자는 자본의 야수성을 가진 결코 좋은 괴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본에 대한 기대감으로 우리 삶이 좀 더 편안해질 것이라는 막연한 환상을 가지게 하니까요. 자본에 적응하며 사는 우리들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자본의 노예를 마치 삶의 이치인양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답게 사는 것이 비현실적인 꿈이 되어도 전혀 부끄럽지 않은 이상한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때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통의 생각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무한경쟁의 민낯을 보세요? 너무나 살인적인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이상한 나라에서 여전히 일차원적 인간으로 사는 게 올바른 것인지 같은 인간으로서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책을 통해 저자의 명쾌한 주장을 듣고 있으면 대한민국의 미래를 일차원적 인간에게 맡길 수 없다는 것에 공감하게 됩니다. 오직 일차원적인 경쟁만으로 인간이 살아가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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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복의 성자
아룬다티 로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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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받는 도시들에서

비는 어떤 언어로 내리는가?

-파블로 네루다

 

때로는 너무 많은 분노와 절망으로 숨 막힐 때가 있어요. 가슴이 붉게 타오르면서 폭발할 지경이에요. 세상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왜 일어나는지 모르겠어요. 꼭 그렇게 해야만 말이 되는 세상은 모순덩어리 같아요. 너무나 살인적인 모순. 세상이 무너지는 작용으로 인해 우리 자신도 무너지는 암흑이에요. 슬퍼할 일들이 너무 많아요. 이렇듯 가슴 속에 풀리지 않는 의문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소 냉소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인내심을 가지라고 했어요. 인내심.

 

아룬다티 로이의 지복의 성자를 묵묵히 읽으면서 예전과는 다른 인내심을 알게 되었어요. 소설은 인도의 참혹한 현실을 기억하고 있어요. 그러나 기억으로 끝나지 않고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어요. 작은 것들의 신출간 후 20년 만에 내놓은 지복의 성자큰 것들의 신으로 연결된 느낌이에요. 20년이라는 물리적인 시간이 흐를 정도로 인도에서 벌어지는 잔인한 현실은 비통했어요. 600페이지에서도 끝나지 않을 정도로 끔찍했어요. 고백하자면 증오와 폭력이 어떻게 끝날까, 라는 두려움보다는 언제 끝날까, 라는 조바심이 앞서다 보니 불안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어요.

 

어디 그뿐인가요. 까마귀들이 마구 울어대는 소리를 들었어요. 소름끼치는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당신들은 도저히 행복할 수 없는 생명체라는 적개심이 투명했어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이상하게도 마음 속 불을 쉽게 꺼뜨릴 수 없었어요. 인도는 거대한 용광로였어요. 모두를 불안하게 하니까요. 인종, 종교, 성별에 스며든 폭력적이고 차별적인 제도를 바라보면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찾는 게 오히려 부끄러워졌어요. 얼핏 우리가 인도와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도와 멀리 떨어진 것은 아니에요. 우리 모두가 위험한 존재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니었어요.

 

소설의 전반부는 인도의 카스트제도, 특히 불가촉천민이 어떻게 사는지 보여주고 있어요. 어머니가 이제 막 태어난 아기(안줌)을 보고 두려워하면서 6가지 반응하는 이야기로 시작해요. 그녀가 괴물이 아닌 이상 이것은 불가능해요. 하지만 가능했던 것은 그녀가 히즈라였기 때문이에요. 히즈라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3의 성을 가졌어요. 이제껏 살면서 제3의 성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 불편했던 것은 남자라서 그랬는지 몰라요. 모든 것이 남자 아니면 여자이었으니까요. “여자-남자, 남자-여자”(p25) 라는 말은 삶보다 죽음에 가까웠어요.

 

이러한 감정의 소용돌이는 작가의 말대로 언어 바깥에 있기 때문이에요. 언어에는 생각만 있는 게 아니라 영혼도 있어야 해요. 영혼이 없는 언어는 세상과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없어요. 차별과 편견에 시달리면서 자신의 세계가 무너져 내리고 말아요. 히즈라에 대한 박탈감, 삶을 불투명하게 하는 명쾌하지 못한 감정, 이 모든 것들이 언어 바깥에서 비극적이에요. 삶의 욕망으로 날아올랐으나 끝내 절망으로 추락하고 말아요.

 

하지만 그녀는 언어 바깥이라는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보통사람처럼 살고 싶어 해요. 여자이고 싶고, 엄마이고 싶다는 그녀의 당당함을 바라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울컥해져요. 단지 남자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모성의 본능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에요. 울컥함의 중심엔 자기 자신을 파멸할 권리가 있다는 거예요. 문제는 그녀가 삼십년을 콰브가(히즈라들이 사는 공동체)에서 살았지만 자신의 아이마저 자신이 키울 수 없다는 상실감을 깨달아요. 콰브가라는 속박의 베일이 벗겨지고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어지자 그녀는 떠나요. 세상 어디에도 갈 곳이 없는 그녀에게 최고의 안식처는 아이러니하게도 공동묘지이었어요. 공동묘지 또한 언어 바깥에 있으니까요.

 

작가는 우리가 모르는 언어 바깥으로 내몰린 사람들에게 연민을 가지고 있어요. 그들은 분명 사회적 편견의 피해자인데 동시에 행복 사냥꾼이라는 가해자라는 존재론적 역설을 문신처럼 지니고 있어요. 그들이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을 늘 불완전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는 게 잘못이 아니에요. 굳이 잘못을 변명할 까닭은 없어요. 변명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을 한 번쯤 위로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녀가 공동묘지에서 추락 받은 자들을 위로하는 것은 어떠한 대의명분이 있느냐, 없느냐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에요. 사람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영혼이라는 것, 눈으로도 말할 수 없고 입으로도 말하지 못하는 오직 가슴으로만 말할 수 있는 그런 영혼. 사랑은 영혼으로 시작해서 영혼으로 끝나는 것이에요. 만약에 영혼이 없다면 하면 우리는 언어 바깥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어떠한 위로도 받을 수 없어요. 그래서 그녀의 영혼이 묘지를 다른 곳으로 만들어요. 바로 잔나트 게스트하우스라는 모든 사람과 아무도 아닌 사람, 모든 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p14)의 낙원이에요.

 

소설의 후반부는 인도의 종교적 갈등이 얼마나 야만적인가를 보여주고 있어요. 야만적인 세계는 마치 삶은 계란”(p201) 같았어요. 겉으로는 정상적으로 보여도 속으로는 폭력적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노란색이 폭력적인 색깔이 아닐까, 라는 조금은 위험한 상상을 해봤어요. 적어도 노란색은 사랑이라고 믿었으니까요. 이러한 폭력과 사랑의 경계에서 작가의 분신 같은 틸로라는 여성을 중심으로 그녀를 사랑했던 세 남자(무사, 나가, 비플랍)의 이야기가 과거를 기억하게 해요. 비록 과거이지만 현재일 수도 있고 미래일 수도 있어요.

 

전쟁이나 폭력, 기타 사람에게 나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전염병이 강해요. 집단 감염을 일으켜요. 잿더미 속에서도 꺼지지 않고 계속 타다 적당한 바람이 불기만 하며 활활 타올라요. 그래서 무사가 카슈미르 남자들처럼 이슬람 전사가 된 불행한 운명을 동정하게 되요. 반대로 인도 정보국에서 근무하는 비플랍은 카슈미르가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무사의 허영을 부정해요. 결과적으로 우리는 비플랍을 부정하게 되는데 무사는 슬픈 사람이고 슬픈 사람을 보면서 슬퍼지는 감정은 우리 모두 문제이니까요. ,

 

너희는 우리를 파괴하고 있는 게 아냐. 일으켜 세우고 있는 거지. 너희가 파괴하고 있는 건 너희들 자신이야.(p567)

 

틸로는 영웅적인 무사를 동정하면서도 끝내 사랑하지는 못해요. 그들은 연인인 듯 남매 같았어요. 그래서 그들은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해요. 오히려 우리는 소설을 읽으면서 그들이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듣게 되요. 무사뿐만 아니라 나가도, 비플랍도 그래요. 운명을 뚝뚝 끊어내겠다는 의지 때문에 그녀는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해요. 운명에 배신을 당하더라도 운명을 사랑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요. 얼마든지 우리도 불로 만들어진 사랑”(p311)을 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녀는 불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불을 사랑하지 않았어요. 역설적으로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되요. 비록 나가와 결혼했지만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려는 것에 불과했어요. 그녀는 결혼이라는 가짜 삶을 통해 무엇을 간절하게 원하는지 알게 되요. 자신의 마음과 맞지 않는 주소에 사는 피로감에서 벗어나 끝내는 아이(미스 제빈 2)와 함께 새로운 보금자리 잔나트 게스트하우스에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해요. 산산조각이 난 이야기를 어떻게 위로할 수 있는지?

 

작가 말대로 지복의 성자는 세련되지 못한 이야기가 넘쳐나요. 종교, 계급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자들이 흘린 피가 언제 멈추는지 모르게 비처럼 내렸기 때문이에요. 어느 순간 비는 비가(悲歌)가 되어 죽음을 애도해요. 그러나 천벌을 받은 죽음의 땅에서도 사랑의 시가 노래되고 때로는 겨자 꽃이 피어요. 성자(聖者)의 아이러니는 슬픔이나 탄식이 아니라 희망이라는 것을.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것이라는 작가의 말을 믿고 싶었어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이 세상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어서 우리의 일상이 평범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우리 시대에는 세련된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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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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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이 작품의 강점은 쨍하게 아름다운 순간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배명훈(소설가)

 

쨍하게 아름다운 순간이 그냥 생겨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무언가 덜컥 내려앉은 기분이 들어야 한다. 삶의 퍼즐을 하나하나 맞춰나가면서 마지막 조각을 채우는 무수한 감정의 분위기. 어느 새 마음의 끝자락에 사랑이 매달렸다. 때로는 튀어 올랐다가 어느 순간 내려갔다. 그래서 사랑은 쨍하게 아름다운지 모른다. 포물선을 그리니까.

 

오랜만에 김초엽의 단편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으면서 기이한 경험을 했다. 시공간적으로 떨어진 이야기에 쉽게 가닿을 수 없다는 막연함이 쨍하게 부서졌다. SF적 상상력이 신선하고 경이로웠다. SF가 그리는 세계는 먼 곳이며 따라서 우리 또한 먼 곳을 향하게 된다. 하지만 다가올 미래를 확대해보면 어떤 세상일까? 배명훈 소설가의 표현을 빌려보면 과학소설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하며 사람들 코앞으로 좀 더 가까워져야 한다. 그래야만 쨍하게 아름다워지기 때문이다. 비록 흔한 포물선을 보이지 않더라도 말이다.

 

먼저 관내분실을 읽은 것은 2회 한국과학문학상 대상 수상작이라는 기대감이 없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기대감이 실망감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SF가 그리는 미래사회를 둘러싼 문제 중에서 가장 현실적으로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을 받았다. 다시 말하면 지금도 현실적인 문제이며 다가올 우리의 미래에도 여전히 불안함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미래의 도서관에서는 더 이상 책의 냄새를 맡을 수 없다. 책 대신 죽은 사람들의 정보가 데이터화 되었다. 그러니까 죽음을 저장하고 검색하는 마인드 도서관이다. 문제는 마인드로 검색이 가능한데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지금의 삶의 방식과 비슷하게 의미를 가지는 미래의 삶에서도 혼란스러움을 피할 수 없다. 만약에 혼란스러움을 야기하는 미래사회의 불투명함을 찾고자 하는 결론에 이른다면 죽음이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은 분실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실험은 어떤 문제를 수사의 흐름 속에서 관계를 이끌어간다. 소설은 임신이라는 아주 민감한 시기에 지민이 죽은 엄마(은하)의 마인드를 잃어버린 이야기를 시작으로 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와 관계를 깊이 파고들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 엄마에게 딸은 원죄의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라는 상처로 남는다. 이를 둘러싼 갈등으로 엄마의 비밀이라는 묵직한 질문을 하게 되고, “엄마는 마치 없는 사람 같았다.”(251p)는 답을 하게 된다. 엄마의 세계를 통해 우리 시대의 여성의 존재와 상처를 천천히 짚어보면서 ‘82년생 김지영이 선명하게 시선에 들어올 정도로 깊은 연민을 느끼게 되었다.

 

인간실존의 문제와 현대문명에 스며든 절망감 때문에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라는 단편에는 지구를 떠나 마을이라는 행성에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마을은 지구와 다른 세상이었다. 서로를 미워하지도 않고 간섭하지도 않으며 여성이라고, 사회적 약자라고 해서 차별을 받지 않는다. 모두가 평등한 행복을 누리고 산다. , 성인식을 통과해야만 한다. 바로 시초지(지구)로 순례를 떠나는 것이다. 지구에는 아름다운 신인류와 그렇지 못한 비개조인으로 서로가 고통과 슬픔 속에서 살아간다. 이러한 구별 때문에 지구는 지옥이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순례자들이 지구로 떠나는 이유는 뭘까? 떠나는 것 못지않게 커다란 의문은 순례자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지옥을 좋아할 리 없다는 점에서 불행한 지구. 그런 만큼 순례자들이 돌아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어쩌면 순례라는 과정은 자기의 트라우마를 들여다보는 것인지 모른다. 마을에는 트라우마를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 행복하다. 겉만 보면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행복하다는 것은 지극히 평범하다. 하지만 트라우마의 역설적인 의미에서 보면 살아 있음에도 사실상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유령과도 같은 희미한 존재로 사는 게 과연 우리가 바라는 행복일까?

 

지구가 그토록 모순 덩어리라고 해도 외롭고 쓸쓸한 풍경이라고 해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성보다는 감성이 우세하다는 것이다. 마을에서 아름다움은 절대적이다. 그러다보니 서로에게 고통이 없어야하며 어떠한 아슬아슬한 낭만적 감성도 없어야 한다. 하지만 지구에서 아름다움은 상대적이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며 살며 서로의 보이지 않는 눈물까지 헤아릴 줄 안다. 미래라고 해서 사랑이 유토피아와 같다면 거부감이 생길 것이다. 사랑은 어디에도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에 괴롭다고 하더러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보다 많이 행복할 것이다. 쨍하게 아름다운 순간, 사랑이 그냥 좋아진다.

 

미래에는 분명 우주를 여행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텅 빈 우주를 여행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문득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으면서 어느 과학자가 말했던 인간을 사랑해야만 하는 우주론적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과학자에 따르면 태양은 오렌지 크기이며 지구는 모래 알갱이만 하다는 것. 모래 알갱이에 그 많은 생명체 살고 있으며 인간을 만나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주에서 인간을 만난다는 것은 정말이지 놀라운 기적에 가깝다. 이러한 기적이 가능한 것은 우주가 벌레들이 파먹어놓은 구멍 뚫린 거대한 사과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구멍은 곧 우주의 공간과 공간 사이이며 이것을 연결하는 웜홀 통로의 발견으로 우주 개척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웜홀 통로 이전에도 딥프리징, 워프 버블이라는 기술이 있었으나 어느 것 하나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이유인즉,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는 근본적인 한계 때문에 존재의 나약함이 훨씬 투명해졌다.

 

지구에 있는 안나가 불가능함을 모를 리 없다.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남편과 아들이 있는 슬렌포니아 행성계로 가고 싶다는 이야기에는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눈물이 맴돌았다. 과학적으로 보면 그녀의 도전은 비현실적이게도 망상에 가깝다. 그러나 계속에서 망상을 듣고 있으면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 아닐까, 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가족과 함께 있을 수 있는가 없는가 라는 숙명적인 고통을 차라리 같은 하늘 아래에서 하고 싶다고 고백한다. 같은 우주가 아니라 같은 하늘이라는 것, 사랑은 정확해야 한다. 그녀가 가야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처럼.

 

이밖에도 스펙트럼, 공생가설, 감정의 물성,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단편들도 우리가 계속해서 지구에서 살아갈 이유를 찾아 나선다. 특히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에 나오는 판트로피(Pantropy)’가 아른 거렸다. 터널 프로젝트로 불리는데 우주 환경에 인간의 신체를 맞추는 것이다. 인간이 적응과 선택을 통해 진화해왔으니 우주 환경이라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얼마든지 우주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우주 환경에는 지구에 없는 것이 너무 많을 정도로 있다. 바로 무중력이다.

 

어쩌면 무중력의 삶은 인간이 바라는 환상일 것이다. 그러나 중력이 없다보니 작가의 말대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을 이해보려는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직 살아가기 위해서 살아가는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는 게 무의미할 정도이다. 작가의 단편집을 읽고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 쨍하고 아름다운 순간이 있다는 것에 다시 한 번 고마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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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괜찮은 눈이 온다 - 나의 살던 골목에는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한지혜 지음 / 교유서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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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 '사랑' '', 이 세 단어의 유사성을 토대로 말하고 싶다.

사람이 사랑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 그게 바로, 삶이 아닐까?

이기주, 언어의 온도

 

온도(溫度)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물체의 따뜻함과 차가움의 정도를 말합니다. 기온에 따라 우리 몸의 온도는 본능적으로 싹둑싹둑 오르고 내립니다. 그런데 살아오는 동안 마음에 담겨지는 온도는 어떤가요? 체감온도라고 해서 마음속에서 흩어지거나 부서집니다. 가슴 한 편에서 희노애락의 투명한 감정들이 생겨납니다. 그런가하면 이름 모를 감정도 있습니다. 기쁜 일들을 당연히 기뻐야 하는데 마냥 그렇지 않습니다. 늘 슬픔이 하나 둘 따라다니기 마련이니까요. 때로는 슬픔의 밑바닥에 가라앉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슬픔도 마찬가지입니다. 슬픔 이상으로 그리움으로 뭉클해집니다.

 

한지혜의 산문 참 괜찮은 눈이 온다를 읽으면서 괜찮다라는 온도를 생각해봤습니다. 하지만 온도계로는 체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괜찮다, 라는 혼잣말을 하려면 지구를 몇 바퀴 돌고 돌아야 합니다. 살아온 과거를 애틋하게 기억하면서 내뱉는 그 말에 담긴 온도는 정말이지 괜찮다, 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고맙고 미안한 지난날을 위로하는 것은 삶의 지문(指紋)으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미생(未生)과 완생(完生)의 팽팽한 슬픔을 견디며 다시 살아보겠다는 삶의 가장 긍정적인 순간에 가장 긍정적인 말, 괜찮다는 말은 과거도 현재도 아니며 미래처럼 들렸습니다.

 

작가의 골목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알게 됩니다. 괜찮다는 말은 삶이 간직할 만한 소중한 감정이라는 것을. 어느 순간 삶을 지탱하는 부드러운 리듬이 되기도 합니다. 가령, 삶이 도통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작가는 우리 사회에서 여성 작가로서 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출발을 하기도 전에 한 아이의 엄마가 짊어져야 할 가사노동이라는 현실이 역주행하면서 자신에게 무섭게 달려왔습니다. “아이는 어쩌고?”라는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자신의 무력함을 쉽게 원망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상은 작가 혼자만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사회의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외칠 수밖에 없다는 울분이 너무나 부조리했습니다.

 

그래서 작가는 더 이상 고민하고 싶지 않다고 고백했습니다. 단단한 마음을 가지고 고민하는 순간을 생략해 버립니다. 그리고는 작가로서의 의무와 권리라는 가속 페달을 밟습니다. 고민하는 순간, 작가의 감정이 무너지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남들과 달리 앞으로 달린다고 해서 삶의 어떤 답을 찾은 것 같습니다. 비록 답을 못 찾았다거나 모를 수 있더라도 더 이상 원망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일단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긍정해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괜찮다는 믿음을 가지고 말입니다. 알베르 카뮈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시포스의 불행이 아니라 시시포스의 행복이라는 에너지로 충만해졌습니다.

 

작가의 골목에는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때로는 비가 내리고 단풍잎이 떨어지고 바람이 붑니다. 모르는 사람이 내 앞에서 말을 걸면 낯선 느낌을 감출 수 없습니다. 하지만 눈은 친숙한 사람이 말을 건네는 듯해서 오히려 온기(溫氣)가 그대로 전해집니다. 사람에게서 받지 못한 위로를 아낌없이 받아서일까요? 마음껏 울고, 웃고 싶었습니다. 살아온 날들의 씨줄과 살아갈 날들의 날줄이 아픈 마음에 수를 놓습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괜찮은 마음이 부드럽게 꽃을 피우며 삶을 견디게 합니다.

 

오늘을 사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은 나의 온도는 몇 도인가? 라는 물음과 같은 골목에 서 만나게 됩니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뒤에 따라다닙니다. 적어도 차가운 사람은 아니길 바라는 것보다 절실한 것이 과연 있는지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누군가에게 온기를 조금이라도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온기가 곧 사랑이며 삶이니까요. 작가의 소박하고 담백한 생활언어에서 인간의 문법을 배우게 됩니다. 이러한 문법의 퍼즐을 하나하나 맞추다보면 운명이라는 커다란 그림이 완성됩니다. 이 책을 통해 작가는 인생의 토정비결이 궁금한 사람들에게 참 괜찮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찾고자 하는 운명은 사주에도 타로에도 없습니다. ‘발열(發熱)하는 인간참 괜찮은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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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세상만사,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려버리면 얼마나 통쾌할까요?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걱정을 하다 보니 심리적인 부담감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놀 때 놀아야 하는데 제대로 놀지 못하고 있지요. ‘놀다’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놀이나 재미있는 일을 하며 즐겁게 지내다’라고 합니다. 어쨌든 무슨 일이든지 즐겁게 해야 하는데, 정작 오늘내일이 지루하고 답답할 지경입니다. 잠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 편히 자고 싶어도 그러지 못합니다. 이런저런 고민 때문에 가슴이 숨 막히고 머리가 깨질 정도로 찌근거리고 아픈 나머지 제대로 잘 수도 없습니다. 불면의 고통을 참아내려고 이불을 뒤집어쓰며 최후로 버텨 봐도 속수무책입니다. 끝내는 이불을 발로 확 걷어차고 맙니다. 이것이 우리가 매번 당하고 마는 ‘이불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풀리지 않는 이불킥을 하지 않을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먼저 이불킥의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이불킥을 하게 되는 과정은 아주 단순합니다. 몸에 난 상처는 눈에 보이니까 약으로 치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난 상처는 치료하기가 어렵습니다. 눈에 안 보이는 것도 그렇지만 마음이란 게 워낙 복잡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다보니 마음의 병이 자신도 모르게 쌓이고 쌓입니다. 어떻게 아프냐고 대답을 요구하더라도 왜 아픈지 모르기 때문에 대답을 망설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겁니다. 이불킥의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만을 이야기하다보니 몸을 조심하면 괜찮을 것이라고 합니다. 몸이 추우면 이불을 덮다가도 몸이 뜨거워지면 이불을 걷어차기 마련이니까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 몸이 마음의 온도에 따라 얼마든지 차가워지고 뜨거워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고민을 가지고 이불킥의 심리를 살펴보겠습니다. 이불킥의 대부분이 무언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됩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에 따르면 인간의 욕구는 ‘5단계’로 올라갑니다. 바로 생리 욕구, 안전 욕구, 애정. 소속 욕구, 자기 존중 욕구, 자기실현 욕구입니다. 앞 단계의 낮은 욕구에서 다음 단계의 높은 욕구로 올라가게 되는 모양으로 피라미드와 같습니다. 높은 욕구일수록 성공 가능성이 낮습니다. 이러다 보니 욕구에 대한 불만이나 회의가 생겨나며 부족한 것을 꼭 획득하려고 합니다. 매슬로의『존재의 심리학』따르면 ‘결핍동기’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결핍동기에 집착할수록 두려움과 의심으로 ‘흐릿한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시각각 감정이 바뀔 때마다 이불킥을 날리며 감정을 토해내는 것은 흐릿한 렌즈를 깨뜨리는 것일 뿐 결코 건강한 치료는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마음이 건강해야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매슬로가 주장하고 있는 ‘성장동기’입니다. 성장동기는 결핍동기와 달라서 뭔가를 얻기 위해 투쟁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흐릿한 렌즈가 아닌 선명한 렌즈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흐릿한 렌즈는 우리의 이성을 혼란스럽게 해서 정신을 갉아먹습니다. 하지만 선명한 렌즈 덕분에 우리는 세상을 좀 더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현실을 더욱 효율적으로 지각하고 현실과 더욱 편안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현실과 불편한 관계를 가진다고 하면 우리가 자아실현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현실과 편안한 관계를 맺는 사람들의 표정은 밝고 행복해보입니다. 이렇듯 성장동기는 우리가 가지고 있으나 드러낼 수 없는 잠재력을 최고로 빛나게 하기 때문에 ‘경이로운 가능성’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인생이 허무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게 됩니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금세 표정이 어두워집니다.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누군가 삶은 시행착오의 연속이니 실패하더라도 끝가지 최선을 다하라고 합니다. 어떻게든 살면서 버텨야 하니까요.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실망이 커지고 최선은 줄어든다는 것, 자기연민에서 벗어나지 못해 한낮에도 우울하다는 것입니다. 참을 수 없는 삶의 무거움으로 죽음이 가벼워지는 이 시대. 이왕이면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침’과 ‘죽음’을 서로 나눠보면 그리 좋아할 사이는 아닌 듯합니다. 그런데 ‘생각’이라는 연옥을 통과하다 보면 왜 좋을까? 라는 반문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김영민의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는 앞서 말한 경이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거침없이 ‘죽음킥’을 날리기 때문에 삶이 ‘확’ 달라지는 느낌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답답한 속이 한바탕 시원해지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시절을 돌이켜보면서 죽음이라는 안전벨트를 단단히 매고 있습니다. 삶의 마지막을 죽음으로 선택하는 것이니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요? 그 쓸쓸한 마음 한 구석에는 죽음, 그 자체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무의미하게 사는 고통을 끝내겠다는 것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순간, 죽음에 대한 연민이 극단적인 선택이 아니더라도 고통의 탈출구로 여기는 방법을 한 번쯤 고민하게 됩니다. 과연 죽음이란 이런 것이 전부일까요? 아닙니다. 이유인즉,

 

그리하여 나는 어려운 시절이 오면, 어느 한적한 곳에 가서 문을 닫아걸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삶이 오히려 견고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도 삶의 기반이 되어주는 것은 바로 그 감각이다. 생활에서는 멀어지지만 어쩌면 생에서 가장 견고하고 안정된 시간. 삶으로 부터 상처받을 때 그 시간을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말을 건넨다.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갈 수 있다고(p8).

 

죽음이 오히려 삶의 기반이 되는 감각이라는 문장을 되새겨보았습니다. 인생을 한 순간 사라지게 하는 죽음이 모든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절망했는데, 저자의 버티는 삶을 통해 절망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죽음이 삶의 또 다른 열정을 되찾는 방법이었습니다. 이것이 매일매일 어느 한 순간 내가 죽음을 생각하게 된 절박한 이유입니다.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내가 아닙니다. 거침없이 죽음킥. 죽음도 더 이상 과거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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