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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복의 성자
아룬다티 로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평점 :
고통받는 도시들에서
비는 어떤 언어로 내리는가?
-파블로 네루다
때로는 너무 많은 분노와 절망으로 숨 막힐 때가 있어요. 가슴이 붉게 타오르면서 폭발할 지경이에요. 세상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왜 일어나는지 모르겠어요. 꼭 그렇게 해야만 말이 되는 세상은 모순덩어리 같아요. 너무나 살인적인 모순. 세상이 무너지는 작용으로 인해 우리 자신도 무너지는 암흑이에요. 슬퍼할 일들이 너무 많아요. 이렇듯 가슴 속에 풀리지 않는 의문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소 냉소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인내심을 가지라고 했어요. 인내심.
아룬다티 로이의 『지복의 성자』를 묵묵히 읽으면서 예전과는 다른 인내심을 알게 되었어요. 소설은 인도의 참혹한 현실을 기억하고 있어요. 그러나 기억으로 끝나지 않고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어요. 『작은 것들의 신』 출간 후 20년 만에 내놓은 『지복의 성자』는 ‘큰 것들의 신’으로 연결된 느낌이에요. 20년이라는 물리적인 시간이 흐를 정도로 인도에서 벌어지는 잔인한 현실은 비통했어요. 600페이지에서도 끝나지 않을 정도로 끔찍했어요. 고백하자면 증오와 폭력이 어떻게 끝날까, 라는 두려움보다는 언제 끝날까, 라는 조바심이 앞서다 보니 불안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어요.
어디 그뿐인가요. 까마귀들이 마구 울어대는 소리를 들었어요. 소름끼치는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당신들은 도저히 행복할 수 없는 생명체라는 적개심이 투명했어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이상하게도 마음 속 불을 쉽게 꺼뜨릴 수 없었어요. 인도는 거대한 용광로였어요. 모두를 불안하게 하니까요. 인종, 종교, 성별에 스며든 폭력적이고 차별적인 제도를 바라보면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찾는 게 오히려 부끄러워졌어요. 얼핏 우리가 인도와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도와 멀리 떨어진 것은 아니에요. 우리 모두가 위험한 존재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니었어요.
소설의 전반부는 인도의 카스트제도, 특히 불가촉천민이 어떻게 사는지 보여주고 있어요. 어머니가 이제 막 태어난 아기(안줌)을 보고 두려워하면서 6가지 반응하는 이야기로 시작해요. 그녀가 괴물이 아닌 이상 이것은 불가능해요. 하지만 가능했던 것은 그녀가 히즈라였기 때문이에요. 히즈라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3의 성을 가졌어요. 이제껏 살면서 제3의 성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 불편했던 것은 남자라서 그랬는지 몰라요. 모든 것이 남자 아니면 여자이었으니까요. “여자-남자, 남자-여자”(p25) 라는 말은 삶보다 죽음에 가까웠어요.
이러한 감정의 소용돌이는 작가의 말대로 “언어 바깥”에 있기 때문이에요. 언어에는 생각만 있는 게 아니라 영혼도 있어야 해요. 영혼이 없는 언어는 세상과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없어요. 차별과 편견에 시달리면서 자신의 세계가 무너져 내리고 말아요. 히즈라에 대한 박탈감, 삶을 불투명하게 하는 명쾌하지 못한 감정, 이 모든 것들이 언어 바깥에서 비극적이에요. 삶의 욕망으로 날아올랐으나 끝내 절망으로 추락하고 말아요.
하지만 그녀는 언어 바깥이라는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보통사람처럼 살고 싶어 해요. 여자이고 싶고, 엄마이고 싶다는 그녀의 당당함을 바라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울컥해져요. 단지 남자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모성의 본능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에요. 울컥함의 중심엔 자기 자신을 파멸할 권리가 있다는 거예요. 문제는 그녀가 삼십년을 콰브가(히즈라들이 사는 공동체)에서 살았지만 자신의 아이마저 자신이 키울 수 없다는 상실감을 깨달아요. 콰브가라는 속박의 베일이 벗겨지고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어지자 그녀는 떠나요. 세상 어디에도 갈 곳이 없는 그녀에게 최고의 안식처는 아이러니하게도 공동묘지이었어요. 공동묘지 또한 언어 바깥에 있으니까요.
작가는 우리가 모르는 언어 바깥으로 내몰린 사람들에게 연민을 가지고 있어요. 그들은 분명 사회적 편견의 피해자인데 동시에 행복 사냥꾼이라는 가해자라는 존재론적 역설을 문신처럼 지니고 있어요. 그들이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을 늘 불완전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는 게 잘못이 아니에요. 굳이 잘못을 변명할 까닭은 없어요. 변명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을 한 번쯤 위로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녀가 공동묘지에서 추락 받은 자들을 위로하는 것은 어떠한 대의명분이 있느냐, 없느냐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에요. 사람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영혼이라는 것, 눈으로도 말할 수 없고 입으로도 말하지 못하는 오직 가슴으로만 말할 수 있는 그런 영혼. 사랑은 영혼으로 시작해서 영혼으로 끝나는 것이에요. 만약에 영혼이 없다면 하면 우리는 언어 바깥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어떠한 위로도 받을 수 없어요. 그래서 그녀의 영혼이 묘지를 다른 곳으로 만들어요. 바로 잔나트 게스트하우스라는 “모든 사람과 아무도 아닌 사람, 모든 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p14)의 낙원이에요.
소설의 후반부는 인도의 종교적 갈등이 얼마나 야만적인가를 보여주고 있어요. 야만적인 세계는 마치 “삶은 계란”(p201) 같았어요. 겉으로는 정상적으로 보여도 속으로는 폭력적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노란색이 폭력적인 색깔이 아닐까, 라는 조금은 위험한 상상을 해봤어요. 적어도 노란색은 사랑이라고 믿었으니까요. 이러한 폭력과 사랑의 경계에서 작가의 분신 같은 틸로라는 여성을 중심으로 그녀를 사랑했던 세 남자(무사, 나가, 비플랍)의 이야기가 과거를 기억하게 해요. 비록 과거이지만 현재일 수도 있고 미래일 수도 있어요.
전쟁이나 폭력, 기타 사람에게 나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전염병이 강해요. 집단 감염을 일으켜요. 잿더미 속에서도 꺼지지 않고 계속 타다 적당한 바람이 불기만 하며 활활 타올라요. 그래서 무사가 카슈미르 남자들처럼 이슬람 전사가 된 불행한 운명을 동정하게 되요. 반대로 인도 정보국에서 근무하는 비플랍은 카슈미르가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무사의 허영을 부정해요. 결과적으로 우리는 비플랍을 부정하게 되는데 무사는 슬픈 사람이고 슬픈 사람을 보면서 슬퍼지는 감정은 우리 모두 문제이니까요. 즉,
너희는 우리를 파괴하고 있는 게 아냐. 일으켜 세우고 있는 거지. 너희가 파괴하고 있는 건 너희들 자신이야.(p567)
틸로는 영웅적인 무사를 동정하면서도 끝내 사랑하지는 못해요. 그들은 연인인 듯 남매 같았어요. 그래서 그들은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해요. 오히려 우리는 소설을 읽으면서 그들이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듣게 되요. 무사뿐만 아니라 나가도, 비플랍도 그래요. 운명을 뚝뚝 끊어내겠다는 의지 때문에 그녀는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해요. 운명에 배신을 당하더라도 운명을 사랑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요. 얼마든지 우리도 “불로 만들어진 사랑”(p311)을 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녀는 불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불을 사랑하지 않았어요. 역설적으로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되요. 비록 나가와 결혼했지만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려는 것에 불과했어요. 그녀는 결혼이라는 가짜 삶을 통해 무엇을 간절하게 원하는지 알게 되요. 자신의 마음과 맞지 않는 주소에 사는 피로감에서 벗어나 끝내는 아이(미스 제빈 2세)와 함께 새로운 보금자리 잔나트 게스트하우스에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해요. 산산조각이 난 이야기를 어떻게 위로할 수 있는지?
작가 말대로 『지복의 성자』는 세련되지 못한 이야기가 넘쳐나요. 종교, 계급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자들이 흘린 피가 언제 멈추는지 모르게 비처럼 내렸기 때문이에요. 어느 순간 비는 비가(悲歌)가 되어 죽음을 애도해요. 그러나 천벌을 받은 죽음의 땅에서도 사랑의 시가 노래되고 때로는 겨자 꽃이 피어요. 성자(聖者)의 아이러니는 슬픔이나 탄식이 아니라 희망이라는 것을.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것”이라는 작가의 말을 믿고 싶었어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이 세상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어서 우리의 일상이 평범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우리 시대에는 세련된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