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평점 :
절판


네가 나에게 그 도시를 알려주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래서 네가 말한 그 도시가 무척이나 궁금한 나머지 나 또한 그 도시를 상상하며 한걸음씩 들어가게 되고 말았다. 누구나 한 번쯤 답답하고 반복적인 이 도시를 탈출하고 싶은 간절함이 있으며, 이 도시에서 특별한 능력이 없이 톱니바퀴처럼 살고 있다는 무력감이 없지 않다. 무엇보다도 네가 그 도시에 있으니 더욱 욕망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도시는 불확실한 벽으로 둘러싸여 기묘하고 낯설었다. 어쩐지 수수께끼를 풀어야만 비로소 믿을 수 있는 도시였다. 시계탑에는 시곗바늘이 없고 도서관에는 책 대신 오래된 꿈들이 있다. 그 도시에서는 누구나 그림자가 없다. 더군다나 너는 분명 열여섯 살 소녀 모습 그대로 그 도시에 있었는데 정작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던 순간의 당혹감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소설을 읽다 보면 결코 간단치 않은 질문을 만나게 된다. 그림자를 포기하고 진짜 나를 만날 것인지, 진짜 나를 포기하고 그림자로 살아갈 것인지를 되묻게 된다. 우리는 살아서는 그림자를 데리고 있다가 죽어서는 영혼으로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그림자가 존재 자체를 고민하며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이별을 두려워하는 광경을 보고 있으면 다른 무엇이 훨씬 더 중요하고 절실하게 느껴진다. 정말로 우리는 흘러가는 그림자에 불과한 것일까?


우리는 여전히 현실에 대한 아쉬움을 생각하면서도 왜 그런지 모르겠음을 고독하고 공포스럽게 깨닫게 된다. 그 이유 없음이 다름 아닌 우리 존재의 한계 때문인지 모른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네가 말한 도시에 가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시작된 놀라운 네가 말한 도시에서 우리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산다. 기어이 그림자를 벗어던지고 들어왔으니 우리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삶을 살아가기 마련이다. 불확실한 벽을 통과하고 마주하게 된 도시는 우리에게 진짜 나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림자를 데리고 사는 현실이 얼마나 허무할까, 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허무는 마치 뿌리 없는 식물 같은 그림자였다. 허무로 가득 찬 현실에서는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들이 점점 많아진다. 그럴수록 우리는 그림자를 벗어던져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다. 허무는 불확실한 사랑에 가깝다. 결과적으로 네가 있는 그 도시에서 우리는 그림자가 없었다. 대신에 진짜 사랑이 환상적으로 그려졌다.


그럼에도 작가는 그림자를 구원하고자 한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외면했던 그림자는 우리의 분신이었던 셈이다. 그림자의 생각을 따라가는 순간, 뒤집어 말하면 그림자의 말이 더 진실처럼 들렸다. 도시에 있는 게 가짜고 도시 밖이 진짜라는 것이다. 네가 말한 불확실한 벽에 둘러싸인 도시는 말 그대로 불확실해졌다. 오직 확실한 것은 네가 말한 그 도시가 사실은 ‘놀이공원’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지 갑자기 네가 말한 도시에 대한 감정은 모호해졌다. 그림자를 믿어야 할지, 아니면 네가 말한 도시를 믿어야 할지를 두고 고민해야 했다. 작가의 말대로 과연 이쪽이 아닌 저쪽 세계에서 사는 게 옳은 일인지 의뭉스러웠다. 솔직한 심정으로 나 또한 네가 말한 도시에서 ‘꿈 읽는 이’기를 그치고 그림자를 가진 인간이 되고 싶었다. 결국 그림자가 없다는 것은 죽은 것으로 여겨져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현실과는 정반대여서 네가 말한 도시가 아무 의미도 없게 된다.


소설은 이렇게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들었다. 하지만 작가에게는 현실과 비현실의 의미는 중요하지 않았다. 때로는 현실의 아픔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환상도 필요한 법이다. 따라서 작가가 보여주는 비현실은 결코 비현실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우리 내부 속에 있는 현실이라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래서 현실과 비현실이 흐르는 강물처럼 뒤섞이며 평범한 일상이 되는 것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름 없는 나와 너, 그리고 고야스와 옐로 서브마린 소년은 끊임없이 자기 존재감을 찾았다. 알고 보면 납득할 수 있는 평범한 일상에서 나는 그림자일 수도 있고 동시에 꿈 읽는 이라는 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작가의 혜안을 빌리자면 ‘백 퍼센트 마음’이다. 소설의 제목처럼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현실과 맞닿아 있는 마음의 경계였다. 어쩌면 네가 말한 도시는 우리가 열망하는 순수가 아니었을까? 소설을 읽으면서 순수가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로 인해 나에게도 불확실한 벽을 통과할 수 있는 특별한 희망이 생겼다. 백 퍼센트 마음으로 살아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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