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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 사유와 삶의 지평
김기현 지음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매형(妹兄)과 매형(梅兄)의 차이는 무엇일까? 시집간 손위 누이의 남편을 매형(妹兄)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긋남이 없다. 하지만 매형(梅兄)은 사뭇 다르다. 사람이 아닌 매화(梅) 앞에서 매형(梅兄)을 부르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보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희극적인 소리라고 여길 만하다. 하지만 예술적인 측면에서 보면 더 많이 감동을 받고 사유하게 한다. 사람마다 그 표현법이 다르겠지만 퇴계 이황(李滉)은 매화를 보면서 몰아일체(沒我一體)했다. 그래서 매형(梅兄)이라고 불렀으며 그런 매형과 함께 시를 주고받았다.
퇴계 이황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조선 성리학의 거장이다. 좀 더 가깝게 이야기하자면 선비다. 선비는 조선시대 관료이며 지식인이다. 조선시대의 문화가 유학(儒學)을 실천하는 데 있었다. 그래서 선비는 유학의 인문학적 소양을 습득해야 했다. 선비에게 사서오경과 제자백가를 빼 놓을 수 없는 이유다. 하지만 이 정도에서 선비의 세계를 탐색하는 것은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말한 사체(四體)와 거리가 멀다. 즉 온몸으로 인식하고(體認), 온몸으로 성찰하고(體察), 온몸으로 시험하고(體驗), 온몸으로 실천(體行)하는 것이다.
김기현은『선비』에서 앞서 말한 온몸의 지식인이 다름 아닌 선비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있다. 그리고 선비의 학문은 입신양명(立身揚名)임을 다시금 각인시켜 주고 있다. 이는『효경』에 나와 있듯 자아를 확립하여 진리와 도의를 행함으로써 이름을 후세에 날린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한 진리와 도의는 선비의 표상이며 자존심이었다. 이로 인해 관직명에 집착하여 입신출세(立身出世)라는 수단으로 보는 것은 선비에 대한 편견에 지나지 않다.
이 책의 내용은「자연」,「인간」,「사회」,「죽음과 삶」이라는 네 부분을 주제로 하여 선비의 사상을 온몸으로 조명하고 있다. 첫째,「자연」에서는 자연의 섭리를 원형이정(元亨利貞)으로 보고 있다. 이것과 다른 개념은 생장쇠멸(生長衰滅)이다. 전자가 유기체적 존재론적이라면 후자는 기계적 개체주의적 사고다. 이것은 자연의 본성과 연결되는데 퇴계의 비유를 빌려보면 “마치 한 조각의 달이 강과 바다, 그리고 술잔 속에도 둘 비치는 것”이다. 이는 개개의 사물들은 그 안에 자연의 섭리를 갖는 다는 점에서 원형이정은 보편자, 생장쇠멸은 개별자가 되는 까닭이다.
둘째,「인간」에서는『맹자』가 말한 대장부(大丈夫)를 다루고 있다. 대장부에게 대의명분(大義名分)은 위대한 힘이다. 이는 죽음의 위협에 맞서 삶을 완성시켜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방법에 있어 순교나 은둔이라는 소극적인 행적을 두고 의로움을 잃어버렸다고 비난하는 것을 보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소극적인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맹자』의 “삶도 내가 원하는 바요 외로움 또한 내가 원하는 바지만, 두 가지를 다 취할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로움을 취하겠다.”에서 찾을 수 있다.
셋째,「사회」에 있어 조선의 신분 사회에서 화해와 조화의 이념이 허위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음양학에 있어 양존음비(陽尊陰卑), 양선음후(陽先陰後)처럼 인간관계도 상하(上下), 귀천(貴賤), 장유(長幼)라는 불평등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음양학이 대립이 아니라 상생이라고 했을 때 인간관계 또한 그렇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사회에서 인간관계가 계산적인 이성(理性)이 아니라 서로 교감하고 생동하는 정(情)이라는 것이다.『주역전의』에 따르면 “모든 일이 다 그러하다. 그러므로 교감 속에 형통의 이치가 있는 것”이다.
넷째,「죽음과 삶」에서는 소크라테스와 조광조를 비교하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육체의 감옥으로 해방되는 것이며 저승으로 가는 행복한 여행이었다. 반면에 조광조의 죽음은 위대한 재생이었다. 이 책에 따르면 ‘그는 “죽어서도 썩지 않는” 도덕생명의 씨앗’이었다. 그리하여 ‘후세의 사람들은 저 씨앗을 각자 자기의 것으로 받아 키워 역시 자타의 삶을 완성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생(新生), 곧 시(始)의 뿌리가 될 종(終)’이었다.
오늘날 유교는 저자 말대로 ‘사람 잡아먹는 전통’으로 전락하고 있다. 서구적인 문명이 화려해서 좋은 것이라면 유교적인 전통은 초라해서 나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유교의 형식주의와 번문욕례가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겉치레보다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비의 정신까지 추방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이 책에서 보듯 선비는 단순한 자아가 아니라 역사적 자아를 궁극적으로 실천했다. 선비는 매형(梅兄)이라고 부르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