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마르셀 에메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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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단편『사람에게 얼마만큼 땅이 필요한가』에는 땅값이 ‘하루치 1천 루블로’라는 솔깃한 얘기가 나옵니다. 하루치란 사람이 하루 종일 걸은 만큼 땅을 드리는 것입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따릅니다. 당일 해 떨어지기 전에 출발점까지 돌아와야 합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농부 바홈은 많은 땅을 차기하기 위해 쉬지 않고 걷고 걸었습니다. 그리고 가까스로 출발점까지 되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바홈은 죽고 맙니다. 1분도 제대로 쉬지 않고 걸었는데 1분도 땅의 주인이 되지 못한 쓸쓸한 운명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그에게 정작 필요한 땅은 3아르신(1아르신은 약 70cm)에 불과했습니다. 자신의 무덤을 만들만큼만 땅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다보면 바홈을 가여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홈은 죽어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천국으로 갔을까요, 지옥으로 갔을까요? 이 세상에 욕망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들이 삶의 이력서를 차분히 헤아려보면 그 이면에는 욕망이 숨가쁘게 한 고비를 넘기고 있습니다. 바홈이 이루지 못했던 욕망은 우리 앞에 던져진 삶의 한계를 짐작하게 했습니다. 바홈에게 땅은 아주 현실적이었습니다. 무엇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 생존의 문제에서 그는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천국과 지옥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만약 바홈이 죽어서 지옥으로 간다면 세상은 정말로 공평할까요?

한 순간 바홈을 변명해보고 싶었던 까닭은 마르셀 에메의『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을 우연히 만난 덕분이었습니다. 이 소설집에는 5개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천국에 간 집달리」는 그중 하나였습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말리코른은 집달리라는 직업상 남의 눈물을 흘리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법(法)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도덕적으로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자신이 죽으면 당연히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죽고 나자 천상(天上)의 재판관은 그에게 지옥으로 가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말리코른처럼 가슴에 나침반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가고자하는 방향이 있습니다. 방향에 따라 산과 강을 지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충분히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공평함 앞에서는 나침반은 방향을 잡기가 곤란합니다. 지난날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하며 길 아닌 곳으로 가면 안 된다고 점잖게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마르셀 에메는 삶이 뒤죽박죽 엉켜 있는 오늘을 보면서 “악법은 악법이다.”라고 직격탄을 날립니다. 꼭 길이 아닌 곳으로도 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남에게 눈물을 흘리게 한다고 해서 모두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지적하며 재판관의 무지를 산산조각 내고 말았습니다.

마르셀 에메의『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에 나오는 단편들을 읽으면서 자꾸만 딴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비록 분량은 짧았지만 놀라운 삶을 다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삶을 마음대로 드나드는 작가의 비범한 생각은 거짓말 같은 결과라는 절묘한 반전이 흥미로웠습니다. 작가는 삶의 상실감과 고통을 아주 희극적으로 그러니까 익살스럽게 드러내면서 삶이 얼마나 비극적인지를 더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발한 상상력을 통해 삶의 본질을 파고들면서 종횡무진 달려가는 작가의 글 솜씨로 인해 책 읽는 즐거움이 대단했습니다. 정말이지 ‘에메의 작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습니다. 삶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꼭 읽어봐야 할 소설이었습니다. 삶이 가벼워지고 통쾌해졌습니다.

사실 이 소설집을 흥미롭게 읽었던 까닭은 표제작인「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에 있었습니다. 얼핏 제목만으로도 이 남자가 사뭇 궁금했습니다. 이 소설은 ‘뒤티유월이라 불리던 그 남자에게는 특이한 능력이 하나 있었다. 마치 열린 문으로 드나들 듯이 아무런 장애를 느끼지 않고 벽을 뚫고 나가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었다.’로 시작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을까, 그 남자의 삶을 엿보고 싶었습니다. 벽(壁)은 단단한 고체(固體)입니다. 이런 벽을 사람이 통과하기란 난감한 일입니다. 알고 보면 사람이란 물렁물렁 하지만 비나 물같은 액체(液體)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는 액체화된 몸입니다. 동시에 일상의 권태를 한 순간 녹여버리는 즐거운 몸입니다.

뒤티유월의 기발한 자유스러운 모험을 보면서 호모 오피스쿠스, 즉 직장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봤습니다. 사람들은 직장에서 자신의 책상을 온전하게 차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하루를 보내기 일쑤입니다. 그리고 마음 한 구석에는 지금 보다 더 나은 행복을 위해서 직장에 다닌다고 위로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을 보면 전혀 행복이 묻어나지 않습니다. 하루에도 몇 백번 허망함이 밀려왔다 쏠려갔습니다. 지긋지긋한 외로움으로 가득 찬 사무실의 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사람들 마음도 벽이 되고 맙니다. 직장 상사로부터 자존심을 건드리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벽과 벽이 충돌하는 위험한 상황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는 ‘어떤 보람을 요구하는 행동’은 ‘자기 안에서 확대의 욕구, 자기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고 자기 한계를 뛰어넘고 싶은 열망’이었습니다. 이런 열망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던 그는 스스로를 ‘가루가루(늑대인간)’이라고 불렀습니다. 야생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그의 본능은 길들여진 삶으로부터의 벗어나려는 진정한 기쁨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온통 벽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너와 나의 경계가 분명하며 금지(禁止)가 곧 삶이라는 것을 을씨년스럽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서로 이름만 다를 뿐 금지의 벽이 가지고 있는 양면이지 않을까요?

또 하나 「생존 시간 카드」도 귀를 활짝 열리게 했습니다. 외면하기에는 아까운 이 단편에서는 섬뜩하게도 ‘쓸모없는 사람’은 알맞게 희생양이 되어도 좋다고 말합니다. 즉 생존 시간 카드는 쓸모없는 사람들을 죽이자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들의 ‘생존 시간을 줄이자.’는 것뿐입니다. 한마디로 생산적인 사람들을 위해 비생산적인 소비자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에 있어 어떤 사람의 무용성 정도에 따라 일수(日數)를 정해놓고 그 일수만큼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들이 분수(分數)에 맞게 살려고 노력하지 않을까, 라는 절박함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곤혹스러웠습니다.

자기만의 분수에 맞는 방식으로 살면서 우리는 행복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죽겠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내뱉습니다. 사는 게 힘들고 지겹고 무기력해서 그렇습니다. 생각해보니 분수라는 것이 얼마든지 지옥의 늪일 수도 있겠다는 불편함이 오래도록 가슴에 맴돌았습니다. 즉 불행한 사람들에게 행복은 ‘내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이라는 아픔을 던져 주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시간에 쫓기며 허겁지겁 살면서도 남의 인생을 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일찍이 오스카 와일드는 “분수에 맞는 생활을 하는 사람은 상상력 부재로 괴로워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마르셀 에메의『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를 읽으면서 그 심정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작가는 분수에 맞는 재미없는 삶을 마구 흔들어 놓고 있습니다. 마치 조각난 삶의 퍼즐을 테두리 없이 맞추는 행복한 고통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퍼즐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맞출 때마다 우리들 마음만큼이나 딱딱하고 비통한 삶이 미끄러져 내렸습니다. 유리창의 빗방울들이 한데 모이면서 물줄기를 만들며 가슴을 할퀴고 지나갔습니다. 꽉 막혀 있던 현실의 벽들이 한없이 잘게 부서졌습니다.

늘 세계 여행을 꿈꾸는 나에게 가고 싶은 곳은 프랑스였습니다. 파리에 세워져 있는 에펠탑의 화려한 야경을 오랫동안 사랑해왔습니다. 그런데 프랑스 문학의 희귀한 보석으로 불리는 마르셀 에메를 알게 된 후 비로소 알찬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여행이라고 하면 낯선 곳에 가는 것이라고 버릇처럼 말했지만 따지고 보면 익숙한 것을 보려고 했던 것은 아닌지 되새겨 보았습니다.

그래서 작가의 고향인 몽마르트에 가보고 싶었습니다. 어느 틈엔가 작가의 생활을 엿보는 것도 나름대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여행이라는 것을 습득했습니다. 그곳에는 마르셀 에메를 그리워하는「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라는 동상이 있습니다. 그 남자에게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람은 얼마만큼의 분수(分數)가 필요한가요?”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그 남자는 벽으로 드나들었던 것처럼 분수를 얼마든지 분수(粉水)로 액체화하면서 보다 쉽게 “불쌍한 욕망 기계에게 얼마만큼의 물이 필요한가요?”라고 특유의 위트로 반문할 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몰랐던 ‘몽마르트적인 삶’이었습니다. 이제 세상에는 벽을 만드는 사람보다도 벽을 드나드는 남자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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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데이 2012-11-23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오우아 님. 저는 문학동네 편집부의 김선희라고 합니다. 올려주시는 리뷰 늘 유익하게 보고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의 띠지를 새로 제작하면서 오우아 님의 이 리뷰 중 한 구절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 블로그에 등록된 이메일로 보냈으니 확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괴짜사회학
수디르 벤카테시 지음, 김영선 옮김 / 김영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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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 경제학』을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다. 기존의 경제학은 말 그대로 경제라는 수치내지 성장이라는 양적인 측면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경제의 문외한으로써는 어렵고 지루했다. 반면에 ‘괴짜 경제학’은 달랐다. 경제학자인 노르베르트 해링(Norbert Haring)의 ‘이코노미 2.0’이라는 개념처럼 일상의 경제학을 알기 쉽게 파헤쳤다. 그래서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제 3자의 입장’에서 상상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학교 교사와 스모 선수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라는 것이다.

사회학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바로『괴짜 사회학』이다. 이 책의 저자는 미국 도시의 빈민을 연구하던 대학생일 때 시카고의 흑인빈민 거주 지역인 레이크 파크 주택단지에서 설문조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생명의 위협을 뼈저리게 느끼는 것과 동시에 그는 한 가지 고민에 빠졌다. 그곳에서 만난 마약 판매 갱단인 블랙 킹스의 보스였던 제이티를 흑인으로 불러야 할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정답은 놀랍게도 ‘깜둥이’였다.

이처럼 흑인 빈민을 연구했던 그는 민족지학(民族誌學)이라는 방법을 사용했다. 흔히 사회학 분야에는 두 가지 입장이 있다. 한 가지는 양적, 통계학적 기법을 이용하는 입장이다. 나머지 한 가지는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직접적인 관찰을 통해 삶을 연구하는 입장이다. 앞서 말한 민족지학은 후자에 속했다. 다시 말하면 흑인들의 복잡한 삶을 이해하고 싶다면 그들과 어울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흑인 빈민 주택 단지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새로운 사실들을 눈으로 보게 된다. 마약, 섹스 그리고 싸움질이 난무하는 그곳에서 지역사회의 문제 해결 능력이 효과적인 시스템으로 작동되는 것을 보게 된다. 갱단과 지역 주민들에게는 도덕주의보다 실용주의가 우세했다. 뿐만 아니라 그곳이 주택단지라고 말하는 것은 사회적 편견과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곳은 서로가 공동체라고 느끼면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돕고’ 살았다. 이른바 자경(自警)주의적 정의로운 사회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안타까운 현실은 위기 그 자체였다. 온갖 사회정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곳은 가난했다. 더구나 공공기관의 부패는 역설적이었다. 그곳에서 경찰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도움을 요청해도 오지 않았다. 대신에 ‘경찰도 하나의 갱단이야.’라고 직설적으로 말하면서 그들에게 시달리는 중압감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게 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흑인 빈민들의 진짜 얼굴을 마주대할 수 있게 되었다. 저자 말대로 ‘깜둥이면서 가난한 것은 어떤 느낌인가?’라는 질문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일자리를 얻을 수조차 없다는 절망감이 그들의 희생을 강요하게 했다. 이런 고통 속에서 ‘왜 가난한가, 왜 이렇게 범죄가 많을까.’ 반문하는 흑인 여성에게서 그들의 깊은 상처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럼, 이제는 백인을 연구하겠나?’라는 날선 충고는 우리에게 살아있는 사회학이라는 희망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일깨워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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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기없는 나무는 나무인가요?  

 

인간은 미지의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이며, 길도 질서도 없는 원시림이다. 원시림의 나무를 베고 깨끗이 치우고, 강압적으로 제어해야 하듯이 학교 또한 자연인으로써 인간을 깨부수고, 굴복시키고, 강압적으로 제어해야 한다. (…) 줄기를 잘라낸 나무는 뿌리 근처에서 다시 새로운 싹이 움터 나온다. 이처럼 왕성한 시기에 병들어 상처입은 영혼 또한 꿈으로 가득 찬 봄날 같은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기도 한다. 마치 거기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내어 끊어진 생명의 끈을 다시금 이을 수 있기라도 한 듯이. 뿌리에서 움튼 새싹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나지만, 그것은 단지 겉으로 보여지는 생명에 불과할 뿐, 결코 다시 나무가 되지는 않는다. -헤르만 헤세의『수레바퀴 아래서』 중에서

 

 





『법구경』에 다음과 같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근본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나쁜 마음을 가지고 말을 하거나 행동하면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 수레바퀴가 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인생이 꼭 바퀴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만 바퀴없는 인생이란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도 겉만 다를 뿐 수레바퀴와 같습니다. 수레를 굴레가게 하듯이 우리의 몸을 움직이게 합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퀴 혼자서는 굴러갈 수 없습니다. 남의 손길이 필요한데 소가 될 수도 있고 마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수레바퀴에게 소나 마음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소가 이끄는 데로 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약 수레바퀴 같은 삶을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행복할까요, 불행할까요. 괴테는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고 말했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네발 달린 동물이든 두발 달린 사림이든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헤르만 헤세는 “수레바퀴 아래 깔리게” 되거나 “마음의 상처를 입고 당황한 나머지 수레바퀴에 치인 달팽이처럼 촉수(觸手)를 움츠리고 껍질 속으로 기어들어가 버린다고” 불안스럽게 말했습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한스 기벤라트는 영리한 두되를 가진 특별한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장래는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주(州) 시험에 합격하여 신학교에 입학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신앙심이 잇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시험 결과에 달려 있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여정에 있어 그의 두 번째 삶이며 동시에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는 기대에 어긋남 없이 2등으로 합격했습니다.

 

하지만 남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지만 그는 신학교에서 출세를 위한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와 같이 공부하는 하일너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친구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하일너는 반항아였고 한스는 모범생이었습니다. 또한 하일너가 호모를 좋아한 나머지 시(詩)를 낭독하며 생활했다면 한스는 학생이라는 의무감으로 공부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은 우정의 꽃을 활짝 피우며 신학교의 답답함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공부와 담을 쌓을 수밖에 없었고 성적 또한 ‘수’에서 ‘가’로 형편없이 내려앉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도 한스는 행복했습니다. 하일너와 어설픈 낭만적인 우정은 불과 1~2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어느 때보다 그는 황홀했습니다. 그는 신학교라는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숨가쁘게 살아왔습니다. 그가 걸어온 길은 국도(國道)였습니다. 언제나 앞으로 나아갔으며 어제까지도 이해하지 못했던 내용을 하루가 다르게 터득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수학의 세계였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주제 영역에서 벗어나거나 주변 영역을 서성거릴 가능성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호머의 시(詩)를 배우면서 그의 인생은 내리막길로 치달았습니다. 신학교에서 방황은 삶의 오솔길을 발견하게 했습니다. 오솔길에서 시의 문법을 말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공부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호머의 역사를 이해하면서 호머의 시 세계에 빠졌습니다. 그에게 호머는 진정한 영웅이었습니다. 즉 영웅이란 “단순히 이름이나 숫자로 남기를 거부하며 타오르는 눈빛”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영웅의 시를 읽으면서 자신의 사랑과 꿈을 앗아가는 신학교 공부를 멀리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오솔길을 마음껏 걸어 다녔습니다. 공부를 하면서도 왜 해야만 하는지 고민했던 그에게 오솔길을 세상사는 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국도와 달리 넓은 세계를 조망해볼 수 있게 했습니다.

 

쇼펜하우어는『세상보는 방법』「나를 만드는 방법」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먼저 알아라. 자신을 먼저 알지 않고는 자기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얼굴을 비춰볼 거울은 있으나 마음을 비춰볼 거울은 없다. 자신의 신중한 성찰을 거울로 삼아라. 바깥의 모습이 잊혀졌을 때 마음의 심상을 생각하고 그에 의지하라.”

 

한스는 자기의 주인다운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아버지가 바라던대로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해서 목사가 되는 훌륭한 삶을 거부했습니다. 그 보다는 시를 통해 잃어버린 자신의 마음을 되찾으면서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유넌기 때의 훌륭한 낚싯꾼을 갈망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혼자만의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신학교의 울타리에서 자신 만의 맑고 아름다운 정원을 거닐고자 했던 한스의 꿈은 쓸쓸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른 한스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한 사람만의 문제로 봤습니다. 그래서 열병을 앓고 있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올 줄 알았습니다. 혹은 기분전환이라는 처방전도 하나의 방법이었습니다. 우등생이었던 한스가 어느 날 대장장이가 되었습니다. 이 무렵 사랑도 예외는 아니었으나 겉만 번지르르한 사랑에 위로는커녕 상처를 받았습니다.

 

수레바퀴처럼 돌아가는 세상입니다. 수레바퀴 위에 올라탄다는 것은 걱정이 없습니다.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대로 몸을 의지하며 됩니다. 어제와 오늘이 똑같고 오늘이 내일이 똑같습니다. 하지만 수레바퀴 아래서는 달팽이처럼 움츠러들겠지만 삶의 주인이 바로 자기일 때 사자처럼 포효하는 용기도 있습니다. 어제는 오늘의 보물이고 오늘은 내일의 보물입니다. 그러니 제발 함부로 줄기를 자르면 안 됩니다. 앞서 말했듯 줄기 없는 나무는 결코 나무가 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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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물고기 - 물고기에서 인간까지, 35억 년 진화의 비밀
닐 슈빈 지음, 김명남 옮김 / 김영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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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다윈은『종의 기원』에서 “나는 곰과의 동물들이 자연선택에 의해 물속에서 살기에 더 적합한 신체 구조와 습성을 가지게 되고 입이 점점 터 커지며 마침내 고래 같은 동물이 되어가는 것이 전혀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원숭이가 인간의 조상”이라며 그를 비판했다.

우리가 ‘진화’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알기 쉬운 것이 바로 자연선택, 적자생존이다. 하지만 이것 못지않게 중요한 생물학적 법칙이 있다.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닐 슈빈의『내 안의 물고기』를 주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생물학적 모든 것의 법칙이라고 할 만한 개념으로 ‘지구의 모든 생명체에는 부모가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인간은 ‘업그레이된 물고기’라는 과학적 발견을 일깨워주고 있다. 

저자는 인간의 몸은 다른 동물들의 몸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으로 인간의 부모를 찾아내고자 한다. 즉 이 책에는 물고기에서 인간까지의 35억 년 진화의 비밀이 담겨져 있다. 가령, 그는 우리가 박쥐의 날개를 만들고자 한다면 손가락을 아주 길게 늘이면 된다고 했다. 해부학자 리처드 오언이 발견했던 다양한 생명들의 중요한 패턴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리처드 오언은 생물들의 팔다리는 모두 공통의 설계를 따른다고 했다. 즉 팔의 상완골이나 허벅지의 대퇴골처럼 먼저 한 개의 뼈가 있고, 거기에 두 개의 뼈가 관절로 연결되며, 거기에 또 작고 뼈들이 여러 개 붙어 있고, 마지막으로 손가락이나 발가락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즉, 뼈 한 개- 뼈 두 개- 둥근 뼈 여러 개- 손. 발가락, 이라는 패턴을 알게 된다.

그런데 저자가 무엇보다도 역점을 두었던 것은 팔다리의 패턴을 다름 아닌 물고기의 지느러미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겉으로 봐서는 곰이 ‘거의 고래 같은’ 만큼이나 인간이 ‘거의 지느러미 같은’ 것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우리의 일상적인 통념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 그는 우리에게 생명의 역사는 다시 한 번 화석 물고기를 탐구하게 한다.

생명의 역사에 있어 확실히 어류로 보이는 유스테놉테론(3억 80000만 년 전)과 확실히 양서류로 보이는 아칸토스테가(3억 6500만 년 전) 사이에는 ‘잃어버린 고리’가 있었다. 그러나 육기어류라 불리는 ‘틱타알릭’(3억 7500만 년 전)이 발견되면서 비로소 생명의 수수께끼가 풀렸다. 육기어류라는 것은 물고기와 사지동물의 중간단계에 속하는 것으로 발이 있는 물고기라는 것이다.

인간의 몸이 왜 이렇게 생겼을까? 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첫째 생물의 팔다리는 지느러미에서 생겨났다. 그리고 최초의 팔다리는 걷는 도구가 아니라 헤엄치는 도구였다. 둘째 틱타알릭이라는 물고기는 ‘팔굽혀펴기’를 할 수 있었다. 셋째 생명의 위대한 전환은 새로운 DNA의 탄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지느러미 발생에 관여했던 오래된 유전자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닐 슈빈의『내 안의 물고기』는 ‘틱타알릭’을 흥미롭게 소개하고 있다. 동시에 그동안 진화의 ‘잃어버린 고리’라고 당연시 여겨왔던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한다. 오히려 그는 ‘찾아낸 고리’라고 하면서 생명의 진화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시야를 열어놓았다. 그만큼 생명의 역사는 앞으로 발견해야 할 고리가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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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미같은 사랑은 어떤가요?

 

 어릴 때부터 나를 너무 귀여워해서 내가 지금 이렇게 되었다고 말이야. 또 내가 엄마 치마폭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되었다고. 하지만 사람은 항상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 수 있는데, 난 남자보다 여자가 되고 싶어. 왜냐하면 여자야말로 이 세상에서 최고의 존재거든. (…) 그러니까.. 말해 봐. 네가 남성다움이란 무엇이지? 음…그 누구에게 허풍 떨지 않는 것…심지어 권력을 쥐고 있더라도 말이야…아니야, 그것 이상이야. 허풍 떨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문제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남자가 된다는 것은 그 이상의 무엇이야. 그건 명령이나 팁 따위로 그 누구도 깎아 내리지 않는 것이지.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네 옆에 있는 누구에게나 자신이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또 마음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지  

                                                      - 마누엘 푸익의『거미여인의 키스』 중에서

 

듣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표범여인이 있습니다. 보통 때는 여느 여자들처럼 얌전하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나 남자가 그녀에게 키스를 하면 잔인한 짐승으로 변합니다. 표범여인이 되어 키스하는 남자의 얼굴을 할퀴며 끝내는 죽이고 맙니다.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돌변하게 만들었을까요? 표범여인의 비극은 섹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녀에게 섹스는 더러운 것이며 죄를 짓는 것이었습니다.

마누엘 푸익은『거미여인의 키스』에서 표범여인이 사랑 때문에 죽음이라는 벼랑 끝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해야 하는데 정작 사랑할 수 없어 생기는 병일수도 있습니다. 혹은 사랑하는 마음과 달리 사랑이 그토록 깨지기 쉽다는 안타까움을 견디지 못해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표범여인은 다릅니다. 동물원에 갇힌 표범처럼 만들어진 야성(野性)때문입니다. 사람 같은 동물이 된다는 것은 거짓을 몇 겹으로 두르며 살아야 합니다.

만약에 사랑하는 사람이 표범여인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당신은 그녀에게 키스를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그녀가 거미여인이기를 바랄 것입니다. 거미여인은 아무 일 하지 않고 사랑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끈기있게 거미줄을 만들어 놓고 어느 순간 사랑이 오면 붙잡습니다. 거미여인에게 사랑은 곧 삶이었습니다.

이 소설에서는 거미여인으로 불리는 몰리나가 있습니다. 그는 미성년자 보호법 위반으로 구속된 동성애자입니다. 그와 함께 비좁은 감방에 수감된 발렌틴은 게릴라 활동을 하다가 검거된 정치범입니다. 성격이 다른 두 남자가 평행선을 달리면서 삶에 대한 고통과 희열을 쏟아냅니다. 발렌틴이 책을 읽으며 자신의 스타일을 지키려고 한다면 몰리나는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사랑의 환상에 빠집니다. 그중에 하나를 보면 조국의 침략자를 여자가 사랑할 수 있는가를 두고 몰리나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합니다. 반면에 발렌틴은 여자 게릴라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생물학적으로 본다면 그들은 남자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문화적으로 본다면 즉 젠더로 봤을 때 그들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발렌틴이 말 그대로 남성이라고 한다면 몰리나는 여성같은 남성입니다. 남성과 여성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감성에 있습니다. 감성이 예민하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은 여성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남성과 여성의 이성애(異性愛) 보다 남성과 남성의 동성애(同性愛)가 훨씬 더 예민한 감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사랑은 단순히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가령, 존 스튜어트 밀은 나보다 더 뛰어난 사상가, 내 생애의 영광이며 으뜸가는 축복이라고 말했던 여인은 해리엇 테일러였습니다. 그녀는 보통 사람이 한 가지도 가지기 힘든 여러 장점을 한꺼번에 타고난 미인이요, 재치있고 자연스러운 기품이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밀은 그녀를 기억하는 것은 나에게 하나의 종교였다. 그녀가 옳다고 생각한 것은 나에게 모든 가치의 근본이요 내 생활을 이끌어나가는 표준이었다. 라고 고백할 정도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시몬드 보부아르는 그 어떤 남자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르트르를 만나면서 자기를 능가하는 단 한 사람의 남자라고 말했습니다.

이렇듯 사랑의 가치는 작가 말대로 ‘사랑은 또 하나의 기적’입니다. 그리고 이 기적은 서로의 육체를 쳐다보게 만든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그들은 서로에게 아름다운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몰리나의 사랑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요? 흔히 거짓 섹스라고 불리는 동성애에 대해 달갑지 않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런 엇갈린 사랑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몬드 보부아르는『제2의 성』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즉 사실 동성애는 의식적인 배덕도 아니며 숙명적인 저주도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상황에서 선택하는 하나의 태도를 갖는 것과 동시에 자유로이 선택하는 하나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사랑을 선택하는 기준은 다를 것입니다. 어는 누구는 표범여인이 될 것이고 어느 누구는 거미여인이 될 것입니다. 표범여인에게 사랑은 유리그릇에 담겨져 있는 물과 같습니다. 반면에 거미여인에게 사랑은 흐르는 물입니다. 고요있는 물은 소리도 없으며 흐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흐르는 물은 소리가 납니다.

모름지기 사랑은 작가 말대로 사랑하는 사람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수많은 어려움이 도사리라고 있는 어두운 오솔길 위에서 사랑을 얻을 때까지 싸워서 이기는 사람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안에서 싹튼 자신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 몸속에는 거미줄이 수북하게 쌓여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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