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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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는 우리에게 두 개의 눈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얼굴에 있는 육체의 눈입니다. 다른 하나는 가슴에 들어 있는 마음의 눈입니다. 많은 알라디너들이 신경숙의『외딴방』을 ‘내 인생의 책’이라고 말했습니다. 왜 그랬을까? 여러 번 곱씹은 후 ‘내게 글쓰기란 무엇인가?’라는 문장을 마주하면서 마음 한 구석이 물컹거렸습니다.

1990년 이후 각종 문학상을 차지했던 신경숙이『외딴방』에서 글쓰기 때문에 힘들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녀가 소설가여서 당연한 문제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눈으로 보면 글쓰기에 대한 추억이 사뭇 달라졌습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그녀에게 글쓰기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까닭으로 기억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전 소설인『외딴방』에서 글쓰기를 은밀하게 좋아했던 초년고생을 떠올렸습니다. 그녀가 말하는 초년은 서른 살을 경계로 하고 있습니다. 좀 더 세세하게 보자면 열여섯에서 열아홉 그리고 먼 훗날 서른 살이었습니다. 열여섯에서 열아홉 나이에 얽힌 갖가지 아픔이 서른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뭔가를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래도록 막연했던 두려움을 지나쳐오면서 그녀는 고적한 목소리로 생의 버팀목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아 이것 없이는 외로웠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말했던 ‘이것’은 무엇이었는지 그 속내가 궁금했습니다. 그녀의 삶 한 자락을 펼쳐보면 그녀의 삶이 시작된 1979년 열여섯 이후 열아홉에 이르는 사년의 과거와 1995년 서른둘의 현재가 서로 만나고 있습니다. 열여섯이었던 그녀는 외사촌과 함께 고향을 떠나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서울 구로 3공단으로 들어갔습니다. 일자리를 얻기 위해 상경한 그녀들은 을씨년스러운 공단의 굴뚝이 보이는 삼층 벽돌집에서 방 하나에 세를 놓아 큰 오빠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놀랍게도 삼층 벽돌집에는 서른일곱 개의 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습니다.

서른일곱 개의 방…… 하지만 도시에서는 굳이 서른일곱개의 외딴방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곳에서 그녀가 바라본 세상은 모순이었으며 남들과 다르게 살아야 하는 열등감이 어느 순간 평범한 일상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낮에 일했던 동남전기회사의 열악한 작업 현장은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이 단지 가난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철야작업에 지쳐도 생리휴가여도 무급으로 계산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다도 읽는 내내 안쓰러웠던 것은 밤에 산업체 특별학교에서 공부했으나 말이 좋아 주경야독(晝耕夜讀)이지 현실은 야멸찼습니다. 그녀와 함께 다녔던 사진작가가 되고 싶다던 외사촌, 전화교환원이 되고 싶다던 희재 언니의 꿈은 공순이라는 날선 비수에 그만 산산이 부서지고 맙니다. 사랑의 물거품도 다반사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 시절이 그립다고 말했습니다. 비록 열여섯의 나이에 가족들의 짐을 덜기 위해 교복대신 푸른 작업복을 입었지만 그녀에게는 작가에 대한 열망으로 버텨냈습니다. 공장에서 숨 가쁘게 일하면서도 그녀는 뜻도 모른 체 좋아하는 시(詩)를 노트에 옮겨 적었습니다. 가난과 외로움이라는 현실을 바꿀 수는 없을지라도 문학만이 위안이었습니다. 문학이 곧 자신이었으며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던 슬픔과 낭만이 가장 행복했던 때였습니다. 더구나 공장에서 학교로 가기 위해 교복으로 갈아입었던 그 때의 오후 다섯 시를 기적의 시간이라고 불러보고 싶었습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외딴방’이라는 단어를 놓고 이런저런 고민을 해봤습니다. 말 그대로 외딴방은 삶의 한쪽으로 쫓겨난 방이라는 탓에 마음이 산란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외딴방은 하나의 통과의례를 상징했습니다. 흔한 말로 진주조개가 진주를 만들듯 사랑의 아픔없이는 지금의 나는 여전히 불안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층민의 굴레라는 부끄러움을 잔뜩 묻히며 마음이 아팠다는 어설픈 감정이었다면 오히려 상처가 더욱 깊었을 것입니다. 삶을 방으로 비유해보면 ‘자기만의 방’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외딴방은 방과 방 사이의 중간단계에 놓여 있습니다. 즉 타인의 방과 자기만의 방의 사이입니다.

겹겹이 쌓인 고민 하나를 더 생각하면 나의 외딴방은 어떠했는지 자문해봤습니다. 나에게 행복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과거를 더듬어봤습니다. 일찍이 괴테는 “살아있는 한 방황한다.”고 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더라도 아쉬움이 맴도는 것 또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지금의 하고 있는 일이 꼭 하고 싶어서 것이라고 한다면 다행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꼭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외딴방의 기적은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신경숙은 외딴방에서 가질 수 없는 것을 치열하게 가지려고 했습니다. 온 몸의 뼈가 뚝뚝 끊어질 정도였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위대한 일은 탄탄해졌습니다. 뭔가를 좋아하게 되고, 그래서 더욱 사랑하게 된다는 게 이런 거구나,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외딴방에서 느슨함도 못자라 오만하여 불행과 행복이 안개에 쌓여 흐릿했습니다. 그녀와 나는 치열함과 게으름이었으며 이것이 오늘의 그녀와 내가 살아가는 방식을 기억하게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삶을 오로지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깨달음의 순간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녀는 외딴방에서 글쓰기 때문에 살았습니다. 또 글쓰기 때문에 삶을 더욱 사랑했습니다. 또 글쓰기 때문에 고독한 절망을 견뎌냈습니다. 그녀 말대로 글쓰기는 ‘이것으로만이, 나, 라는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소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튼튼히 뒷받침해주었습니다. 그녀는 글쓰기 덕분에 행복했습니다. 그녀는 글쓰기로 인해 자신의 존재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소설을 읽고 나서 나의 글쓰기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봤습니다. 신경숙이 말하는 글쓰기를 더 듣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책 관련 잡지를 보다가 ‘신경숙의 서재 탐방’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문제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잡지(출판저널)에서 “쓰기 먼저 하려고 애쓰지는 않았으면 해요. 우선은 읽고, 느끼고, 경험하는 게 우선이거든요. 자기가 놓여 있는 그 순간을 최대한 보고 느끼고 경험해야 해요. 그래야 글도 치열해지니까.”라고 의미심장한 그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소설가의 삶은 굴곡이 많습니다. 그녀처럼 치열하게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게 그녀처럼 고맙다는 말을 아끼지 않아야 했습니다. 그녀의 꿈이 스며든 외딴방은 누구에게나 있었을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의 첫 출발지이라는 것, 삶의 밑그림을 시작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그곳에서 밀물과 썰물 같은 고통을 어떻게 견뎌내야 우리의 꿈이 꿈다워질까요? 그녀는 [외딴방]에서 손(手)에 달렸다고 다소 차분하게 말했습니다. 즉 ‘네가 만났던 사람들의 슬픔과 기쁨들을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퍼뜨리렴. 그 사람들의 진실이 너를 변화시킬 거야.’라고 손(手)으로 다가서게 했습니다. 글쓰기에는 아무 걱정도 없어 보였던 손이 그녀로 인해 희망을 넘나들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 그리고 먼 훗날, 외딴방에서 살았던 것처럼, 잠 못 이루며 책장을 넘기거나 볼펜을 움켜지며 써내려가며 행복했던 것처럼, 그녀 말대로 문학이 그냥 좋았던 것처럼 다른 사람이 되어 보고 싶게 했습니다. 그녀의 외딴방은 단순히 과거의 어느 날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이 팍팍할 때 조금이라도 외딴 거릴 수 있는 자유, 홀로서기의 자유를 닮아보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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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스 - 외모 상상 이상의 힘
고든 팻쩌 지음, 한창호 옮김, 황상민 감수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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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 발언(hate speech)이라는 것이 있다. 인종, 성별, 종교, 성적(性的)취향 따위에 근거해 상대방을 모욕하는 발언이다. 가령, 어떤 잘못을 한 사람에게 잘못에 대한 것을 비판하는 것은 상관없다. 그러나 그 사람이 못생겨서 그렇다고 하는 것은 문제시된다. 이러한 증오 발언에 대하여 법학자 로드니 스몰라는 ‘정신에 대한 강간’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상대방의 가시적 효과에 집착하고 있다. 흔히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알고자 한다면 눈(目)을 보라고 권한다. 하지만 눈보다 얼굴을 먼저 보는 게 다반사다. 보여 지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외모는 “예쁘면 모든 것이 용서된다.”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고든 팻쩌는 외모, 상상의 힘이라는 부제가 달린『룩스(LOOKS)』에서 ‘외모지상주의 (lookism)’이라는 육체적 매력을 명쾌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다채로운 재능을 과시하는 매력적인 외모를 보고 왜 우리가 끌리는가? 에 대해서 흥미롭게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육체적 매력이라는 단순한 본능을 밝혀내는 것은 아니다. 그 보다는 육체적 매력이 어떻게 우리의 행동과 사고를 지배하는지 이해를 돕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키, 몸무게, 크기, 얼굴 형태의 대칭성 등으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이 책의 내용은 크게 외모가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과 화려한 외모의 이면 모습들 그리고 외모지상주의 극복하기로 나누어져 있다. 가령, 외모가 연애와 결혼에 미치는 영향을 보면 에리히 구드의 ‘자격부여’에서 찾고 있다. 자격부여는 주관적 자격부여와 객관적 자격부여가 있다. 전자는 자격이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스스로 기대하는 경우다. 예를 들면 부유하지만 매력 없는 여성과 미남이지만 무일푼의 남성과의 관계가 성립된다. 반면에 후자는 사회나 해당 공동체가 특정인이 자격을 누릴 만하다고 인정하는 경우다. 예를 들면 매력적인 여성이 덜 매력적인 남성과 데이트하는 경우다.

또 하나 외모가 정치에 미치는 영향은 ‘이미지’에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이미지는 진실이면서 거짓이고, 정확한 지각이면서 동시에 실제와 지각 사이의 간격이라는 것이다. 매력과는 거리가 먼 링컨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연설가였지만 그만큼 그의 육체적 외양이 덜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미지의 연금술사로 불리는 TV같은 미디어의 발달로 인하여 '우세한 얼굴(facial dominance)'를 지닌 후보자가 능력과 지도력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화려한 외모의 모습들에는 외모에 목숨을 거는 부작용을 보여주고 있다. 무식욕증과 대식증이 여성의 질병이라면 아도니스 콤플렉스(Adonis Complex)는 남성의 신체적인 강박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나쁜 건강은 아름다움을 사라지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외모를 개선하기 위한 가격은 곧 성형중독자를 불러일으켰다. 성형중독자들은 어떤 수술을 받아도 행복하지 않은 성격의 소유자들이다.

그러면 외모지상주의를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을까? 저자는 자기 외모에 대한 견해, 태도, 행동을 살펴보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단지 더 나은 외모를 보여주기 위해 다이어트할 마음을 먹기보다는 더 나은 건강을 위한 음식에 초점을 맞추는 식단을 짤 필요가 있다.”는 현실적인 방법으로 현실에 도전하라고 한다. 또한 “나는 거울 속에서 내 모습을 보거나 가게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볼 때 언짢아하지 않도록 정서를 조율할 필요가 있다.”는 긍정적인 사고와 태도를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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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는 혼자다 1
파울로 코엘료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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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말(言)이 어떻게 생겼을까, 라고 조금은 붕 뜬 질문을 파울로 코엘료에게 하면 뭐라고 대답할까? 영혼의 연금술사로 자리매김하며 수많은 독자층을 지닌 그의 글은 햇살 같다. 후덥지근하거나 끈적끈적하지 않고 따뜻해서 좋았다. 거센 비바람으로 우리 삶이 위협받고 있을 때 그는 먹구름을 밀쳐내며 ‘신(God)을 믿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 같은 작은 존재가 신(God)에게 다가서는 것이다.

순례의 길에서 그의『승자는 혼자다』를 만났다. 이 소설에서 그는 놀랍게도 “짧다.”라고 말했다. ‘사랑’ ‘신’이라는 짧은 단어가 그렇다는 것이다. 단어가 짧은 만큼 말하기도 쉽다. 그러나 이것 못지않게 ‘세상의 빈 공간을 채워준다고’ 는 삶의 지혜가 듬뿍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 이 세상은 공간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의 일상은 공간의 일상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만지거나 혹은 만질 수 없는 공간을 지배하는 것을 짧게 말한다면 바로 ‘승자’가 아닐까?

이 소설에서 빈 공간은 칸영화제다. 세계 3대 영화제중 하나라는 명성에 걸맞게 사람들은 흥분의 도가니에 휩싸인다. 그러나 단순히 영화의 매력 때문에 잠 못이루는 것은 아니다. 걸작이라고 불리는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추억에 불과했다. 이제는 레드카페 위를 걸어가는 스타에 열광한다. 모차르트의 삶을「아마데우스」로 만든 필로스 포먼이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천재를 발견한다.’고 했던 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화려하게 패션쇼로 몰락한 칸영화제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고 있다. 칸영화제를 찾아온 사람들의 다양한 욕망과 아픔을 파고들고 있다. 영화는 단지 그들에게 선택사항에 지나지 않았다. 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존재에 대한 과시를 목숨과 맞바꿨다. 이렇게 칸영화제를 빈 공간으로 만드는 것은 허영에 가득 찬 세 가지 욕망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아름다움에 가려진 거대한 삼각형이 소용돌이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삼각형의 세 꼭지점에서 온 사람들을 작가는 아직 성취하게 있는 사람들, 이미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세상을 지배하는 슈퍼클래스라고 했다.

이들의 삶을 따라가면서 작가는 어떻게 해서 승자가 혼자가 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고독한 상태에서 작가는 유명인 신드롬이라는 악마를 찾아냈다. 작가에 따르면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을 믿기 시작할 때 그것은 찾아온다. 저들이 꿈꾸는 것은 무엇인가? 슈퍼클래스다. 모든 사람들의 꿈, 그늘도 어둠도 없는 세계, 그 무엇을 요구하든 오직 ‘예’라는 대답만을 듣는 세계….’ 결과적으로 항상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지만 그런 순간에도 세상에서 완전히 혼자일 수밖에 없는 세계였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슈퍼클래스야말로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저 허황된 꿈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은 슈퍼클래스 즉 승자다. 승자는 우연을 기대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필요에 의한 철저한 연구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다. 때로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지만 승자는 자기의 방향이 옳다는 것을 안다. 승자의 방향은 곧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방향이다. 승자는 항상 다른 사람들과 거꾸로 가는 것이다. 가령, 이 소설에서 하미드 후세인은 중동인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가 되었다.

승자의 방향이 삶의 절박함을 넘어서는 자신감이라면 이 책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희망일 것이다. 그러나 승자의 방향이 비즈니스라고 한다면 자신의 생각을 따라갈 수 없게 된다. 이 소설에서 러시아의 갑부 이고르는 남을 이용하거나 배반했다. 또한 배우 지망생 가브리엘라는 자신의 전 재산을 다 바쳐야 했다. 그리고 슈퍼모델 재스민은 샴페인 잔을 들고 있으면서도 정작 알코올 대신 미네랄워터를 마셔야 했다.

작가는 이 모든 것들을 그럴듯하게 당연시 되는 꿈의 대가이자 덫이라고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의 제목처럼 승자가 혼자가 된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 소설을 끝가지 읽어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승자는 혼자가 아니다.’를 깨닫게 되었다. 승자가 혼자가 아닌 이유는 이고르와 에바의 비극적인 사랑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고르의 멈출 수 욕망으로 인하여 에바의 삶은 무척이나 공허했다. 그럴수록 에바는 사랑을 되찾고자 했지만 이고르는 아내의 요구를 외면한 체 바쁜 나날을 보냈다. 에바가 “당신은 결국 스스로를 파괴하게 될 거야. 우리의 결혼 생활도, 우리의 사랑도 파고할거라고.” 말했지만 그는 안전한 결혼 생활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말로 그녀가 떠나버리자 이고르는 사랑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에바에 집착했다. 더구나 에바를 찾기 위해 세계를 파괴하며 살인마가 되었다. 그는 ‘더 큰 사랑을 위해서라고’ 변명했다.

어느 누구보다 이고르는 더 큰 사랑을 위해 승자의 덫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이고르에게 사랑과 성공은 한 몸이었다. 성공한 만큼 사랑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험난한 세상과 싸워 이긴 이고르에게 위대한 존재를 위해서 어느 누군가의 희생은 슬픔이 아니라 기쁨이었다.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승자가 혼자이듯 그의 사랑은 단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었다. 이것이 곧 작가에게는 ‘좁은 사랑’으로 보였다. 반면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넓은 사랑이란 누구의 가슴에든 피어나야 하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읽고 작가의 믿음이 강해서였는지 사랑의 능력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우리의 가슴을 넓은 사랑으로 채워야 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꼭 좋은 환경에서만 이뤄지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삶의 고난이 앞을 가로막고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작가는 누군가 구원의 손길을 보낼 때 말하기가 어렵더라도 “아니오.”라고 말해야 한다고 했다. “예.”라는 예의바른 대답은 소심하고 무기력하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고 만다. 반면에 “아니오.”라는 대답은 모든 것의 끝에서 뭔가 새로운 것이 있다는 단단한 생각이다.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이고 결코 원하지 않는 게 무엇인지 깨닫는 데 ’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삶을 마감하고 영(靈) 최후의 심판대에 올랐을 때 신이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고 “살아 있을 때 너는 사랑했느냐?”고 묻는 까닭을 이 소설은 말해주고 있다. 우리의 삶이 온갖 돈에 의해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세상을 바꿀 힘이 승자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승자에 대한 완벽한 은유는 승자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작가 말대로 사랑이 삶의 본질이기 때문이었다. 돈, 권력 그리고 빼어난 미모가 아니라 사랑하며 사는 것이 진정한 승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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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생각한다 - 기후변화, 에너지, 식량, 질병, 물 : 5가지 키워드로 읽는 지구
김수병 외 지음 / 해나무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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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인간 없는 세상이 된다면 지구는 어떻게 될까?「뉴스위크」는 21세기 인류에게 계시록으로 남을 책으로 앨런 와이즈먼의『인간 없는 세상』을 추천했다. 이 책을 들여다보면 ‘인간 없는 세상 연대기’가 흥미롭게 소개되고 있다. 그중에서 10만 년 후 된다면 ‘이산화탄소가 인류 이전의 수준으로 떨어진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 때문에 지는 부담을 덜어버린 세상. 사방에 야생 동식물이 멋지게 자라는 세상을 생각하면 우선 마음이 솔깃해진다, 고 솔직한 심정을 드러냈다.

인간이 인간만을 위한 개발에 치중하면서 지구는 ‘코드 레드(Code Red)’상태에서 심한 몸살을 앓은 지 오래다. 토머스 프리드먼에 따르면 우리가 사는 지구는 ‘뜨겁고 평평하고 붐비는 세계’다. 그래서 그는 ‘코드 그린(Code Green)’을 주장하면서 지구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이른바 그린 혁명이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되었다.

그런 면에서 한국과학창의재단이 기획하고 국내의 과학저술가들이 지은『지구를 생각한다』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은 5가지 키워드로 지구를 둘러싼 문제들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기후변화, 에너지, 식량, 질병, 물 등등 굵직한 키워드를 자신의 영역에서 문제점에 대한 대답과 비전을 제시해주고 있다. 결국 우리가 살고 싶은 지구가 되기 위해서는 이 책의 서문에 나와 있듯 ‘녹색 미래’가 되어야 한다.

기후변화에 있어 1938년 가이 스튜어트 캘린더가 “인간의 산업 활동으로 지구온난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던 것이 지나친 기우만은 아니었다. 지구 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는 석유 같은 화석 연료를 무분별하게 사용한 결과였다. 이로 인해 지구의 온도가 지난 반세기 0.6도 올랐으며 급격한 기후변화를 일으켰다. 역사적으로 기후변화는 몇 차례에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기후변화는 인간이 주범이라는 데 심각성이 있다. 그래서 앞으로 우리는 탄소 중립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에너지에 있어 석유 중독이라는 고탄소 경제를 시급히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석유 중독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1차 에너지 즉 신재생에너지를 개발하는 것이 중요했다. 경제적 효율성에 있어 원자력 발전이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치유는 태양, 풍력이라는 저탄소 경제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세계 경제의 미래는 ‘수소에너지 체제’가 현실화될 것으로 전망하면서 수소시대를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식량에 있어 유전적 다양성을 잃은 먹을거리가 위기에 놓여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와 기계화된 농토 그리고 유전자조작 농산물로 인하여 우리의 밥상은 안전하지 못하다. 더구나 식량의 비윤리적 태도가 거대한 산업 시스템에서 비롯되는 만큼 마이클 폴란이 걱정한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정크푸드(junk food)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밥상의 개성을 살리는 느리고 맛있는 슬로푸드(slow food)를 실천해야 한다고 했다.

질병에 있어 점차 더워지는 지구로 인해 말라리아 같은 곤충의 공포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또한 여름철 식중독이 주로 세균성이라고 한다면 겨울철 식중독은 노로바이러스가 일으킨다. 그리고 대기오염으로 인한 호흡기 질환으로 인하여 ‘창백한 악마’가 창궐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환경파괴로 인한 부메랑이 인간을 공격하는 데 있어 최근 뜨거운 이슈는 무엇보다도 환경 호르몬에 있다. 환경호르몬은 내분비계 장애물질로 인체 호르몬 시스템을 혼란시켜 이상을 일으키게 한다.

마지막 물에 있어 20세기가 석유 분쟁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물 분쟁의 시대라는 것이다. 더구나 석유는 바이오 연료나 신에너지로 대체 할 수 있지만 물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 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물 부족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빗물, 바닷물을 식수로 만드는 해수 담수화 그리고 마법의 물이라고 불리는 해양심층수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일상적으로 하수를 처리하면서 ‘맛있는 물’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지구온난화, 석유 고갈, 생태계 파괴, 환경호르몬, 물 부족이라는 전반적 위기를 맞고 있는 지구의 미래를 냉철히 내다볼 수 있었다. 이 책에 나와 있듯 이러한 불편한 진실을 넘어 엄연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지구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있어 이제 더 이상 나중은 없다. 바로 문제를 인식하는 지금은 아마도 비관론과 낙관론의 중간에 위치할 것이다.

이럴 때 우리가 실천해야 할 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일 것이다. 일찍이 평생을 침팬지와 함께한 제인 구달이 “우리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위해 이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려고 조금씩, 매일, 함께, 노력한다면 지구의 미래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라고 일깨워주었다. 이 책 또한 지구의 위기를 극복할 대안이 무엇인지를 모색하는데 매우 시의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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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기행 - 선인들, 스스로 묘비명을 쓰다
심경호 지음 / 이가서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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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람이 한 평생을 살면서 하루기 십년(十年)같다고 한다면 좋은 일만은 아니다. 겉으로 봐서는 70년의 나이를 열배인 700살을 사는 것이지만 그만큼 하루하루가 조용한 날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일까? 북송 때의 소식(蘇軾)은 아우 소철(蘇轍)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무 일없이 조용히 앉아 있으면, 곧 하루가 이틀인 것같이 느껴진다. 만약 이런 식으로 조처할 수 있다면 우리 삶은 늘 매일이 오늘인 듯 느끼게 될 것이니, 일흔 살까지 살 수 있다면 곧 140살을 사는 것이 된다.”고 말했다. 소식에 따르면 70년의 나이를 곱절인 140살로 사는 것이야말로 넉넉하고 편안한 삶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삶과 죽음은 다를 게 없다. 삶이 곧 죽음이요, 죽음이 곧 삶이다. 사마천은『사기』에서 “죽음에 대처하기 어렵다.(處死者難)”를 말했던 것은 다름 아닌 ‘의미 있는 삶을 살아나가야 한다.’는 것을 반추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춘추좌씨전』을 보면 사람이 불후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는 덕(德),공(功),언(言)을 말했다. 즉 덕을 세우거나 공을 세우거나 말을 세워야 했다.

심경호의『내면기행』을 읽으면서 옛 사람들의 묘비명과 묘지명을 마주하게 되었다. 옛 사람들은 묘도(墓道: 혼령이 다닌다고 여기는 무덤 앞의 길)에 세우는 묘비(墓碑)와 광중(壙中: 무덤의 속)에 묘지(墓誌)를 묻었다. 이러한 묘도문자(墓道文字)는 삶과 죽음에 대한 사색이며 성찰이었다. 그래서 어떤 한 사람의 죽음이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고 역사적으로 살아 숨 쉬었다. 삶과 죽음을 반성하면서 해서는 안 될 일과 해야만 할 일에 대한 뜨거운 가르침을 전해주었다.

이 책을 보면 뼈 속 깊이 새겨지는 문장들을 만날 수 있다. 김광수(金光遂)는「상고자김광수생광지(尙古子金光遂生壙誌)」에서 “늙은 이 몸은 죽음과 종이 한 장 사이이니 뼈야 썩어도 좋다만 궁극에 이르기 어렵기에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그리고 김종수(金鍾秀)는「자표(字表)」에서 “행적이 우뚝하고 마음이 허허로워 탕탕(蕩蕩)한 사람이 아닌가?”라고 하면서 내가 죽을 때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런가 하면 이황(李滉)은「자명(自銘)」에서 “시름 가운데 즐거움 있고, 즐거움 속에 시름 있도다.”라고 말했다. 노수신(盧守愼)은「암실선생자명(暗室先生自銘)」에서 “대의가 분명하기에 스스로 믿어 부끄럼이 없도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비석에 암실(살아있을 때 만든 자기 무덤)이라고 적었다. 끝으로 박세당(朴世堂)은「서계초수묘표(西溪樵叟墓表)」에서 “이 세상에 태어났으므로 이 세상 사람답게 살면서 남들로부터 좋은 사람이라고 여겨지면 그걸로 옳다고 하는 자에게는 끝내 머리 숙이지 않겠으며 마음으로 항복하지 않겠다고 여겼다.”고 했다.

저자는 이 책을 불퇴전(不退轉)을 결심한 사람과 같은 심경으로 엮었다고 했다. 옛 선인들의 묘도문자에는 시대를 넘나드는 삶의 지혜와 세심한 당부를 표현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날 성공이라는 물질만을 바쁘게 쫓아가는 우리들에게 『내면기행』은 뜻 깊은 인생수업으로 자기 성찰의 기회를 갖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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