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콘서트 2 철학 콘서트 2
황광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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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 좋다고 생각했다. 예컨대 부석사의 무량수전(無量壽殿)이 아무리 좋다고 귀가 따갑게 들어본들 다리품을 팔면서 안양루(安養樓)를 올라 본 것보다 못하다. 눈의 즐거움은 마음까지 상쾌하게 한다.

하지만 백견(百見)보다 더 좋은 게 있다는 것을『철학콘서트 2』를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인 황광우는 “백견이 불여일독(百見不如一讀)이라고 말한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취향은 제각각이다. 여행일수도 있고 음악일수도 있고 미술일수도 있다. 책과 함께 살아온 저자에게 일독은 너무나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굳이 강조하는 것은 일독이 최고의 좋음(最高善)이기 때문이다.

최고선하면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최고선을 행복이라고 했다. 좀더 자세하게 말해보면 의술이 목적이 건강, 병법의 목적이 승리라고 한다면 최고선의 목적은 행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살고 싶냐, 는 질문을 받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입버릇처럼 말한다. 행복이 뭐라고 설명하기는 어려워도 말하기는 쉽다. 기쁨 혹은 즐거움보다 그 위에 있는 것이다. 이 정도면 행복에 대한 밑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지금 어느 때보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경제 성장률이 -4%로 곤두박질하고 있다. 잊을 만하면 굵직굵직한 사건이 터지면서 우리의 가슴을 소스라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사이버 폭력 및 사이코패스 같은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만 가고 있다. 예전만큼 안전하지 못한 상황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래저래 불행하다고 하소연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위로를 받기는커녕 아이러니하게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이런 부조화가 생긴 것일까?

저자 말대로 아리스토텔레스의『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일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행복을 찾는 인간의 삶을 세 가지 유형을 구분하고 있다. 먼저 쾌락적인 삶이다. 이는 노예와 짐승의 목적이다. 반면에 정치적인 삶이 있다. 교양 있는 사람들이 명예를 얻기 위한 것이지만 불완전하다.

마지막으로 관조적인 삶이다. 이것이 그가 말하고자 하는 행복한 삶이다. 그러면서 그는 행복한 삶은 탁월성에 따른 삶이라고 한다. 즉 인간의 탁월성은 지성이며 지성의 활동이 곧 관조라는 것이다. 따라서 지성을 따르는 삶이 가장 좋은 것이다.

황광우의『철학콘서트 2』에는 탁월한 사상가 10명이 나온다. 저자는 그들의 책을 중심으로 하여 위대한 지혜를 재밌게 설명해주고 있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면 뜻밖의 사실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전히 철학의 중심인물로 나오는 것 못지않게 시인 호메로스가 나오며 과학자인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뉴턴 등이 나온다. 또한 무함마드가 나오며 볼테르가 말했던 동양의 철인 왕 세종이 나온다.

흔히 철학자라고 하면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물론 틀리지 않다. 그러나 저자는 10명의 철학자를 통해 모든 철학자는 혁명가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저자말대로 “ 그 어떤 권위도 거부한 채 끊임없이 진리만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 그 모든 사유의 집이 주는 안정을 포기하고 새로운 항해에 나서는 사람, 그가 바로 철학자다.”라는 것이다.

일찍이 조선의 18세기 실학자였던 최한기는 가산을 탕진할 정도로 책을 샀다고 전해진다. 이유인즉 책장 문을 열면 공자와 맹자, 서역의 학자 등을 만날 수 있는데 책을 사지 않고 이들을 직접 만나러 다니려면 얼마나 돈이 많이 들겠냐. 고 했다.

이 책의 저자는 이것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 일독이다. 일독하지 않으면 우리는 지혜를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단지 사는 데 있어 편리한 것이 행복이라는 헛된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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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 問 라이브러리 2
도정일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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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일까? 2+2=4일까? 조지 오웰의『1984』에 나오는 윈스턴 스미스가 고민하는 문제이다. 그의 나이가 39세라고 한다면 초등수학을 걱정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 이 소설에서 이상한 일의 정체는 빅 브라더에 있다. 그가 감시와 통제하는 전체주의에서 2+2=5는 현재이며 2+2=4는 과거이다. 역설적으로 과거는 진리이면 현재는 만들어진 진리이다. 그래서 그는 과거를 기억하고자 일기를 쓰면서 정치전체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이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냉전 시대의 치열한 이데올로기의 싸움이 베를린 장벽과 함께 무너졌다. 그리고는 세계화 시대에 걸맞게 자유주의가 넘쳐났다. 그중에서도 시장(市場)이 빠르게 변화했다. 가령, 전 세계인들이 맥도날드 햄버거를 같은 시각에 먹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빠르게 먹는다는 것(패스트푸드)이다. 이른바 시장이 템포바이러스에 감염되면서 문명화된 사회가 곳곳에 위협받고 있다. 광우병, 정크 푸드, 문명의 야만 등 우리의 생명과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다.

이런 안타까운 일들이 발생할 때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화의 장밋빛이 무서울 정도다. 그런데도 세상은 여전히 장밋빛의 멍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것이다. 혹은 ‘아Q주의’의 오류이다. 루쉰의『아Q정전』에서 나온 이 용어는 밖에서 실컷 얻어맞고 패했으면서도 집에 돌아와서는 “나는 패하지 않았다. 나는 정신적으로 승리했다.”라고 믿는 정신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도정일의『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을 읽었다. 생각의 나무에서 ‘답이 아닌 질문의 절실함을 위하여’라는 ‘問라이브러리’ 시리즈는 우리 시대 최고의 지성인들이 해당 사안에 대하여 말 그대로 절실하게 사회와 문화를 비평하고 있다. 도정일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공적 지식인이다. 이 책에서 그는 시장전체주의가 어떻게 야만을 야기하는지 문제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동시에 건강한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

그동안 많은 지식인들이 혹은 문학이 '현재의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 낙원(paradise) 혹은 유토피아(utopia)를 그려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듣기 좋고 말하기 쉽다고 해서 은근슬쩍 넘어가서는 안 된다. 경계해야 할 것은 경계해야 한다. 낙원이 과거지향이라면 유토피아는 미래지향이다. 결국 상상력이 상호 배타적이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통합적 상상력은 과거가 미래에, 미래가 과거에 상호 침투하고 작용하게 한다. 이것이 과거-미래의 동시화이다.

그는 세계화에 따른 단일세계의 현재적인 문제점을 자본-기술이 지배하는 비합리성을 사려깊게 들려주고 있다. 즉 고도 생산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무한파괴가 불가피하고 효율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환경의 무한오염이 불가피하다. 그러므로 고도 생산성과 효율성은 생산의 사회적, 인간적 효용의 증대와는 반드시 일치하고 오히려 그 효용성을 감소시킨다. 이것이 곧 효율과 효용 사이의 모순이다. 자연과 인간의 고통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 효용의 감소이고 이 감소 위에서만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야만성이라고 그는 밝히고 있다.

그는 아직 답하지 못한 야만성에 관련된 다양한 질문을 풀어 놓는다. 우리는 질문을 통해 우리 사회가 인간의 얼굴을 가진 문명의 전환해야 함을 비로소 알 수 있다. 앞으로는 어떻게(how)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왜(why)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전자가 기술주의적 사고이며 도구 이성이라면 후자는 인문주의적 사고이며 비판적 이성이다. 오늘날 문사철(文史哲) 즉 인문학적 가치들이 문제해결을 위해 되살아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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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희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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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구문(推口文)에 안중근 의사가 주장했던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이 지금에 와서는 “하루라도 인터넷을 하지 않으면 손에 가시가 돋는다.” 로 바꿔 말해도 무방하다. 자신의 홈페이지나 블로그에 사진이나 글을 올리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면서 스크랩을 하거나 댓글을 남긴다.

이러한 지적 재산의 변화를 경제학으로 탐구한 흥미로운 책이 있다. 바로 제레미 프로미의 『소유의 종말』이다. 그는 책 전반에 걸쳐 경제의 패러다임이 소유(Possed)에서 접속(Access)으로 되는 과정을 이끌어 내고 있다.

지난 날 즉 산업경제는 재산(유형자산)을 소유하는 것만이 물질적인 가치를 가졌다. 하지만 네트워크 경제는 문화적 재산(무형자산)을 접속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다시 말하면 전자는 인간이 물질을 축적하고 가공하는 규모의 경제였다. 반면에 후자는 인간이 정신을 관리하는 개념의 경제다.

저자는 이를 바탕으로 하여 기업이 어떻게 부(富)를 창출하고 있는지 제시하고 있다. 가령, 맥도널드만 하더라도 햄버거를 파는 것보다 햄버거 매장을 파는 것이 훨씬 돈벌이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는 상품의 대량 생산이 아니라 개념의 대량 생산이 놀라운 성공 비결임을 시사하고 있다. 이제 부는 물적 자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상상력과 창조력에서 나온다.

소유에서 접속의 시대를 따라가다 보면 가장 큰 특징은 자신의 체험이 상품화된다는 것이다. 체험이 중요해진 것은 체험의 공유가 문화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자본주의는 문화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자본주의에서 우리는 변화 무쌍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즉 창조적 공연자다. 지난 시대 생산 중심일 때는 우리는 침착한 인간이, 소비 중심일 때는 매력있는 인간이었다.

일찍이 엘빈 토플러는『부의 미래』에서 미래 경제의 석유는 지식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지식은 어떤 상품보다도 이동이 편리하다고 했다. 또한 지식은 밀봉하기 어렵고 퍼져 나간다고 했다. 접속의 시대에서 지식을 상품화하기 위해 우리는 문화 생산을 하는데 놀이 정신이 중요해졌다.

하지만 문화의 상품화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지난 날 소유의 시대에 가장 큰 특징이 타인을 배제하는 권리였다. 그래서 접속의 시대에는 배제당하지 않는 권리였다. 그러나 접속의 권리가 상업적인 관계로 탈바꿈되면서 진정한 문화적 관계가 점점 미미해졌다. 오로지 효용성만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 책을 통해 새로운 자본주의 문화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는 접속을 살펴볼 수 있었다. 소유의 반대인 접속은 물질이 비물질에 밀려나고 공간대신 시간을 상품화한다. 이렇게 될 때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마저 상품화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불안한 미래에 대한 저자의 탁월한 식견이 새로운 세계를 거듭거듭 생각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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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고수 - 삶의 열병을 앓는 이들을 위한 특별한 카운슬링
안광복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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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문예 비평가 발터 벤야민은 책과 골동품 수집광이었다. 하루는 그의 서재를 방문한 사람이 “이 많은 책을 다 읽으셨습니까?”라고 말하자 그는 “당신은 집에 둔 그릇과 찻잔을 모두 쓰시나요?”라고 말했다.

나에게도 책 버릇이 있다. 일고 싶은 책을 마구 사들인다. 그것도 모자라 도서관에서 두 세권정도 대출을 한다. 하지만 책을 다 읽지 못하고 그냥 쌓아두는 게 다반사다. 그러면 책에게 미안해진다. 책에게 한 수 배우려고 했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시간이 없어서도 그렇고 책을 읽는 도중에 이해하기 어려워 그만 포기해서 그렇다.

<인생 고수>의 저자인 안광복은 열정적인 지식인이다. 동시에 책의 고수이다. 그는 일반인들이 어렵다고 느껴지거나 숨은 책들을 열정적으로 깊게 탐독한다. 단순히 지식을 배우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삶의 다양한 문제에 대해 인생 고수들의 지혜가 무엇인지를 찾아내고자 한다.

그가 무엇보다도 인생 고수를 중요시하는 것은 에디슨의 명언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되었다. 에디슨은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결정된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 말을 무슨 일이든지 노력 하면 안 될 게 없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는 일이 있음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결국 1%의 영감이 없으면 우리는 천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1%의 영감은 인생 고수의 말 한마디에서 나온다고 한다. 이것을 음악을 하는 사람에 있어 ‘마스터 클래스(master class)’이다. 연주 대가(大家)들에게 한 수 배우는 기회다. 그리고 골프에 있어서는 ‘원 포인트 레슨(one point lessen)'이다. 프로 선수의 짧은 한 수 가르침이다.

가령, 나는 왜 이렇게 못났을까? 라는 콤플렉스 때문에 고민할 때 소크라테스의 충고는 값지다. 즉 “나의 눈은 톡 튀어나와서 사방을 더 잘 볼 수 있네. 또 나의 코는 길고 똑바르지 않고 뭉툭해서 냄새를 더 잘 맡네.” 또 어떻게 해야 당당하게 혼자 서는 인생을 설계 할 수 있을까? 고민할 때 칸트는 이렇게 말했다. “미성년의 원인은 이성이 부족한 데 있는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 스스로 생각하려는 결단과 용기가 부족한 데 있다.” 이밖에도 니체, 장자, 간디 같은 인생 고수들이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질문에 적절하게 답을 하고 있다.

<인생 고수>는 삶의 이런저런 고민 때문에 머리가 아픈 사람들이 긴요하게 읽을 만한 책이다. 꼭 고민 때문이 아니더라도 삶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치유의 힘이 된다. 우리가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조목조목 명쾌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몸에 맞지 않으면 오히려 건강에 해롭다. 인생 고수들의 말을 무작정 따르는 낙타형 인간과 아무런 대안 없이 아니다, 라고 하는 사자형 인간을 경계해야 참다운 진리에 이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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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훔친 위험한 冊들 - 조선시대 책에 목숨을 건 13가지 이야기
이민희 지음 / 글항아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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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오랜 속담에 ‘책이 없는 궁전에 사는 것보다 책이 있는 마구간에 사는 것이 낫다.’라는 말이 있다. 책은 말이 없지만 책을 읽은 우리가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것은 그만큼 책의 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책은 우리의 욕망을 쓸모 있게 한다.

하지만 지금과는 달리 조선 시대에는 그렇지 못했다. 책을 아무나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책은 교서관(校書館)이 간행해 국왕이 신하에게 내린 아주 특별한 선물이었다. 그리고 개인이 책을 펴내기도 했는데 이 또한 그들만의 특별한 선물이었다. 즉 지배층이 자신들의 권력을 견고히 다지는데 책이 아주 유용하게 한 몫을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책의 불평등을 통해 조선의 구조적인 문제점을 발견하는 책이『조선을 훔친 위험한 책(冊)들』이다. 여기서 위험함의 척도는 성리학적 판단에 있다. 성리학은 성즉리설(性卽理說) 즉 모든 사물의 이치를 끝가지 파고 들어가면 앎에 이른다고 하는 것이다. 이를 지식을 강조했다고 해서 이학(理學)이라 불렀다. 저자 말대로 단순화하자면 성리학은 공부를 하는 게 우선이었다.

이 책을 보면 조선의 성리학은 세 가지 방향에서 사상을 통제했다. 첫째로 사문난적(斯文亂賊)에 있다. 풀이하자면 성리학의 질서를 파괴하는 사람들에 대한 처벌이다. 가령, 채수는 『설공찬전』에서 “반역으로 왕위에 오른 자는 결국 지옥에 와서 고생한다.”고 말했다. 당시 유교사회에서 불교사상으로 현실 정치를 비판하고 왕을 능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이 책은 압수되고 불살라졌다.

박세당의『색경』도 참혹한 화를 당했다. 박세당은 이 책에서 양반도 생산활동에 참여해야 하며 조세 제도를 개혁해 신분간 불평등을 없애야 한다는 개혁론을 펼쳤다. 그는 소비자에 머물러 있는 양반을 생산자 계급으로 바꿔야 사회가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둘째로 지식의 불평등에 있다. 조선이 성리학의 시대였으며 그 중심에는 사대부들이 권력의 생산자였으며 결국에는 지식을 독점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것을 허균의『동의보감』에서 찾을 수 있다.『동의보감』은 기존의 의학서들과 달리 당시 기준으로 최신 한의학 이론과 조선의 약물학 지식이 총동원되었다. 그런데도 17-18세기에 창궐했던 홍역과 두창을 다스리는 데 실패했다. 이유인즉 이 책의 주된 목적이 개인의(사대부)의 양생술을 실천하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로 문체반정(文體反正)에 있다. 쉽게 말하자면 사학(邪學)을 물리치는 것이다. 사학은 곧 소설(小說)이며 소품(小品)같은 잡서(雜書)이었다. 그래서 조선시대 가장 똑똑했던 정조가 가장 싫어했던 책이『원중랑집』이다. 왜냐하면 김창협이『농암집』에서 “백정과 술장수가 경전을 암송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라고 비판하는 것을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성리학의 사고의 틀에서 삶을 윤리적으로 제도화하려고 했던 조선의 사대부들은 일종의 짝패들이었다. 짝패란 프랑스 철학자 르네 지라르의 용어로 서로 다른 욕망을 지닌 것들이 비슷한 대상을 추구할 때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따라서 시대와 소통하지 못한 금서(禁書)의 운명은 짝패의 반작용으로 볼 수 있다.

앞서 보았듯이 조선시대 금서의 대부분은 지배계층에 도전하는 위험한 사상을 통제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소설을 읽는 것에 반작용도 적지 않았다. 사대부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었지만 일반 대중들이 책을 읽고자 했던 시대적 요청을 외면한 결과였다.

금서의 사회적인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이쯤에서 우리가 고민해야 할 문제는 책의 묘한 운명이다. 조선시대를 보더라도 책은 지배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데 있어 일등공신이었다. 그러나 현실정치를 비판하는 방법 역시 책이 일등공신이었다. 책을 읽고 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금서를 통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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