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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후애사전
이나미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내 인생 여정의 중간에 서니'라는 이 리뷰의 제목은 이 책의 권두시로도 인용된 단테의 <신곡> 지옥편 서문 중에 나오는 문구이다. 이런 제목을 쓸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최승자 시인의 싯구처럼.
참 우습다
내가 57세라니
나는 아직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고
소녀처럼 포르르포르르 할 수 있는데
진짜 할머니 맹키로 흐르르흐르르 해야 한다니
사실 이 책을 신간 코너에서 보자마자 바로 주문을 한 이유는 제목보다는 '이 나 미'라는 저자의 이름을 보고서였다. 오래 전에 그녀의 '때론 나도 미치고 싶다'라는 제목의 책을 읽고서, 정신과 의사이면서, 한가지 시각이 아닌 이렇게 다방면의 지식을 가지고 폭넓은 얘기를 할 수 있구나 놀라서 이후로 새 책이 나올 때마다 거의 다 따라 읽었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새 책이 나오지 않고 있다 싶었는데 오랜만에 나온 책의 제목에 '오십'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그녀의 나이가 벌써 그렇게 되었구나. 내 나이도 거기서 멀지 않은데.
그녀의 글 스타일은 어떻게 보면 딱딱하고 건조하게 느껴질 정도로, 필요없는 과장이 없고 미사여구가 많지 않다. 하지만 그 박학다식이란 평소에 독서와 공부에 얼마나 시간을 쏟았을지 짐작이 되게 한다. 읽으면서 밑줄 긋고 싶었던 곳을 옮겨 적는 것으로 리뷰를 대신해야겠다. 오십대를 겨냥하면서 쓴 글이기 때문에 이십대, 삼십대를 대상으로 한 책들에 비해 내용이 무거운 부분도 많다.
의학의 목적을 꼭 장수에만 둘 것이 아니라 마지막 사는 날까지 삶의 질을 보장하고 자신이 원할 때 깨끗하게 죽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데 두어야 하지 않나 생각해본다.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말기 암에 걸리거나 식물인간 상태에 놓이면 무의미한 연장술을 하지 말라고 유언하기 좋을때가 오십 대이다. 나도 죽음이 확실하게 임박한 중병에 걸리면, 무의미하게 호스와 링거 줄을 달고 침대에 누워 지내기보다 쓰러지는 그날까지 사는 것처럼 살다 화끈하게 죽고 싶다. (101쪽)
만약 지금 당신이 고립감 때문에 괴로워한다면, 그만큼 당신이 그 누구를 위해서도 스스로를 희생하거나 헌신하지 않는다는 뜻일 수도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을 때 찾아오는 것이 외로움이다. 친구는 하나도 없지만, 노숙자를 위해 밥상을 차리고, 고아들과 외로운 치매 노인들을 돌보는 사람들, 그래서 남을 돕는 데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고립감은 없다. (132쪽)
이제 사랑이 인생의 목표는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게 되었으니, 연애를 하든 결혼을 하든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인생에 대한 열정을 찾으면 그것으로 충분할 수도 있다. 사랑이 물론 별건 아니지만, 별것으로 만들어 즐기는 것도 나의 책임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 정말 내게 깊은 즐거움을 주고 있는 것인지 냉철하게 점검하고 관찰해보는 것, 또한 상대방 역시 나를 만나서 행복하게 성장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내 의무다. (141쪽)
많이 아는 척을 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묻는 게 유익합니다. 하지만 더 유익한 것은 자기 발로 다니며 묻는 것입니다. 뭔가 깨달음을 얻은 척해봐야 대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145쪽)
할 말도 많고, 추억도 많고, 억울한 일이나 자랑할 일도 많겠지만, 과거에 대한 이야기는 특히 남 앞에서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내가 겪은 그 사람들은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듣는 입장에서는 재미도 없다. 무엇보다 과거만 자랑하거나 집착하고 현재에 충실하지 않으면 결국 내 현재만 처량하고 빈곤해질 뿐이다. (153쪽)
거절을 할 때는 우선, "나를 배려해서 해준 참 좋은 제안이긴 한데 나름대로 검토해볼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고, "그러나 가능성은 별로 크지 않을 것 같으니 아쉽지만 많이 기대하지는 말라" 고 덧붙여도 좋다. 다른 사람이 그런 제안을 받아들여 시행한다면 무척 근사하겠지만 나한테는 어울리지 않거나 내 능력이 닿지 않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방법이다. 나이 오십이면 그 정도의 사회적 기술은 갖추고 있어야 한다. (182쪽)
(부부문제)
제일 중요한 원칙은 일단 모든 문제를 배우자에게 투사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자신은 희생자, 상대방은 가해자라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불변의 공식에 매달리는 한,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마법의 해법은 없다. 아무도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내 맘대로 바꿀 수는 없다.
자신의 문제는 냉철하게 보지 못하고, 격한 감정에 휘말려 "모든 게 다 너 때문이야"를 외치며 남 탓을 하는 한 자신에게 긍정적인 변화가 올 수는 없다. 스스로 '희생자'란 딱지를 붙이고 거기에 집착하는 사람은 영원히 '희생자 되기'의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황이 어찌 되었건, 자신의 감정이 얼마나 완고하건, 자신의 선택과 감정에 책임을 지는 사람은 그 상황을 바꾸기 위해 먼저 적극적으로 자신부터 바꿀 줄 안다. 그러면 상대방은 느린 속도지만 당신을 따라 변할 것이다. (195쪽)
인간을 포함해 세상 모든 만물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처럼 작은 존재는 그저 자연이 허락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왔고, 또 우주의 섭리가 허락할 때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꼭 행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일종의 아집이다.
어쩌면 이 세상의 반은 지옥일지도 모른다. (265쪽)
나, 이 생각을 종종 하면서도 세상을 너무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닐까 주저했었다. '긍정의 배신'이라는 책도 있듯이 뭐든 긍정적이고 희망적으로 얘기해야 호응을 받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보기엔 여전히 그렇지 않아보이고, 오히려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것이 마음을 편하게 하고 앞날을 생각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는데 저자의 이 구절을 보고 참 반가왔다고 고백해야겠다.
장자는 "땅은 내게 몸과 삶을 주어 나를 고단하게 했지만, 늙어 내가 편안해졌으며 죽음으로 내가 쉴 수가 있다. 삶이 좋은 것이라면 죽음 또한 좋은 것이다." 라고 말했다. 어떡하든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려고 하는 현대인이 책상 앞에라도 붙여놓고 들여다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을 떠나는 것은 우리를 조종하는 운명의 노끈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즉 현해(懸解)라 표현한다. 세상 근심 걱정을 다 놓고 떠나는 것을 기뻐하면서 죽어가는 경지, 얼마나 멋진가. (273쪽)
오십 무렵에 배워야 할 제일 큰 덕목은 이처럼 늙음과 죽음에 대한 소박하지만 성숙한 태도이다. 또한 그 태도를 우리에게 가르쳐줄 숨은 스승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 스승들은 지식이 많거나 지위가 높거나 재산이 많은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인생에서 실패했거나 큰 고통을 겪었거나 큰 좌절을 경험한 아주 평범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 중에 큰 스승이 있다. 자녀를 앞세운 농어촌 촌로들, 도시에 대한 집착을 벗어던지고 귀농한 용감한 분들 중에 그런 이들이 숨어 있다. 자신들이 갖고 있는 소박하지만 위대한 지혜를 좀처럼 남들에게 떠벌리거나 자랑하는 법이 없다. (277쪽)
인생의 수레바퀴를 완성하기 위해서
기를 불어 넣고 힘을 들여야만 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깨달음은 세상을 초월하는 비밀스러운 무엇이다.
궁극적인 것이 무언지 의문이 드는 순간
인생의 수레바퀴가 너를 성장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야지 하고 마음먹는다고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언가를 하겠다는 의도를 버릴 때
진정한 성숙이 찾아온다.
<태을금화종지>, 여동빈 저, 고성훈, 이윤희 역, 여강출판사, 1992 (286쪽)
책의 후기에서 그녀는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해 말하면서, 어느 날 부터인가 어느 자리를 가도 자기가 가장 연장자가 되어 있더라고 했다. 내가 요즘 어딜가든지 '언니'라고 불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심정과 비슷하리라.
새삼 자신의 나이를 깨닫게 되면서 앞으로 그동안과는 달리 새롭게 살고 싶다는 상상을 해본다며 예로 든 것들을 보니 나의 상상력보다 훨씬 근사하다. 어디에 적어두고 싶었다.
동서양 고전을 넘나들며 거침없이 예시를 보이고 있으면서도 어느 한구석 자만심을 보이지 않는 그녀가, 나보다 조금 앞서 가면서 이렇게 계속 좋은 글을 내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