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데기 프로젝트 - 2010 제4회 블루픽션상 수상작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47
이제미 지음 / 비룡소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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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인보다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할 때 더 신선하고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다고 남몰래 상상해 왔다. (작가후기 중)

나 역시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들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서 작가의 이 말이 반갑다. 하지만 이어지는 다음 말엔 동의하지 않는다.
별일 아닌 일에 울고 웃고, 타인의 시선에 민감하고, 자아 정체성에 골머리를 앓는 시기가 청소년기이기 때문이다.


아니 아니, 이들이 울고 웃는 일이 정말 '별일' 아니란 말인가? 또한, 타인의 시선에 민감하고 자아 정체성에 골머리를 앓는 것은 이때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지 이 시기에만 발생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룡소에서 주최하는 2010년 제4회 블루픽션상 수상작이다. 이제미 작가는 책 속의 주인공처럼 고등학생 때부터 소설 쓰기를 좋아하여 각종 문학 공모전에서 수상, 문학 특기자로 대학에 들어갔다고 한다. 긴 머리, 큰 키, 정말 이야기를 재미있게 잘 만들어낼 것 같은 유쾌한 인상의 그녀. 이 소설은 작가의 그러한 인상처럼 읽힌다. 코믹하고 발랄하고 꿋꿋하고 뜻대로 안되어도 금방 포기할 것 같지 않고, 그렇다고 이 악물고 피눈물 뚝뚝 흘리며 두 주먹 불끈쥐는 독기를 품는 타입은 아니고,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하면 되지 뭐' 할 타입, 주인공의 캐릭터이다. 제목이 '번데기 프로젝트'인 것은 주인공이 참가한 백일장 주제가 '번데기'였던 것과도 관련이 있고, 나비 한살이에서 번데기 시기가 나타내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도 보여진다.

좋았던 점:
1. 위에 말했듯이 주인공 정 수선의 캐릭터는 이 시대 보통 고등학생의 모습에서 아주 벗어나 있지도 않으면서 (대학은 가고 봐야해, 이왕이면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이면 좋겠어) 그 어느 누구와도 구별되는 점 또한 가지고 있다 (소설이 내 인생의 제1 목표, 부모의 대우에 어느 정도 초연함, 앞으로 나아질 것이라는 낙천성). 이 소설을 살리는 점 중 하나는 주인공 외의 다른 인물들도 개성이 뚜렷하다는 점. 누구도 그저그런, 행인 1, 행인 2가 없다. 제자를 밀어주려는 허무식 선생, 이상한 병을 가지고 있으면서 모르고 살아온 추지행, 주인공의 롤모델이자 흠모해마지 않는 작가 이 보험. 이들은 모두 실제 인물들이며 약간의 변형만 했을 뿐이라고 작가후기에서 밝히고있다. 장편이면서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를 끌고 가는 데에 이런 인물들이 한 몫 하고 있다.  

2. 참신한 플롯이다. 많은 부분에 자신의 경험이 섞여 들어가 있을 것 같은, 공모전을 준비하는 여고생의 이야기이다. 수업 끝나고 식당 알바까지 해가면서 앞치마 주머니에 노트와 연필을 넣고서 시간 날때마다 벽에 대고도 쓰고 화장실에 들어가서도 쓰고,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도 쓰는 주인공의 모습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작가의 모습에서 톡 튀어나보인다. 

3. 의미를 듬뿍 담아 심각한 소설을 쓰자는 대신, 재미있는 소설을 쓰자는 마음으로 썼지 않을까 싶게 유쾌하다. 주인공 정수선이 내 바로 옆에서 움직이고 말하고 있는 것 처럼 대사도 행동도 생생하다. 그래서 읽는 내내 이런 내공을 미처 느끼지 못하고 끝까지 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자연스럽게 작품을 끌고 가는 것이 쉬웠을까? 

아쉬웠던 점:
1. 군더더기 인물, 군더더기 묘사
이야기 첫장을 장식하는 진수 오빠 이야기는 그 이후의 다른 사건들과 특별한 연관도 없고 그 이후로 다시 거론되지 않아, 없어도 이상할 것 없는 대목이었으며, 43쪽의 '신종 플루에 감염된 사람처럼 헤벌쭉하고 있었다'라는 표현은 본문중에 작가가 '헤벌쭉'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는 것은 둘째 치고 정확한 비유인지 의문스럽다. 

2. 소설의 전반부와 후반부의 분위기가 사못 다르다. 전반부는 그야말로 명랑, 유쾌한 분투기 느낌이었다가 후반부에 가서 주인공의 작품이 저작권 문제에 걸리는 부분에서 결말까지는 예상못하던 긴장감 모드로 돌변한다. 반전은 좋지만 어딘지 반전이라는 느낌보다는 돌변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진정한 왕따가 되는 법과 진정한 작가가 되는 법은 어쩌면 이리도 비슷한지.
그래도, 아무리 세상이 내게 등을 돌리고 때론 내가 등을 돌려도, 난 계속 글을 쓰 거였다.

 이런 문장으로 마무리 지음으로써 주인공의 원래의 분위기로 돌아온 것은 다행이었다.

하루에 100매 쓰기를 몇 달간 강행하고, 작가 지망생이기 보다는 연구와 실험을 거듭하는 열혈 과학도에 가까왔으며, 소설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감동적인 발명품이라고 생각한다는 작가 후기처럼, 앞으로도 재미있고 발랄한 작품을 많이 많이 써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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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1-08-03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이 책 재밌겠는걸요.
하루 원고지 100매란 말이죠.
전 100매는 고사하고 매일 일기쓰는 것도 쉽지 않은데~ㅠ.ㅠ

hnine 2011-08-04 05:27   좋아요 0 | URL
하루 원고지 100매씩 쓰다가 시력도 떨어지고 몸에 무리가 많이 왔었다는군요.
하고 싶은 것을 이루기 위해 매일 규칙적으로 일정 시간 투자한다는 것. 그건 예외가 없나봐요.
양철나무꾼님은 매일은 아니라도 여기 서재에 며칠에 한번씩 주옥같은 글들을 올리시잖아요 ^^

하늘바람 2011-08-04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책 첨 나왔을 때 재미나겠다 했었던 책이었어요. 리뷰보니 더 그럴거같아요.
님의 리뷰보며 제가 왜 안되나 했어요 전 그냥 재미나게 읽고 말거든요. 풀롯같은거 생각도 안하고요.

hnine 2011-08-04 20:06   좋아요 0 | URL
저도 예전에 찜 해놓고 이제서 읽었어요.
재미있긴 한데 좀 산만해요. 하늘바람님이 작정하고 읽으시면 더 쪽집게 같이 집어내실 곳이 많을거예요.
 

기차가 서울을 떠났을 때서야 비로소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혼자서 떠나는 취재여행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정말 다시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의혹 때문이었다. 사실 지난 몇 개월 동안 나는 늘 불안해 보인다는 염려를 받았다. 발작적인 신경질과 괴상스런 침묵, 그리고 무모한 발랄함. 글을 쓰기 위해 그 모든 것을 각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을이 다 가도록 나는 글 한 줄 쓸 수 없었고 책 한 권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계약금을 끌어다 쓴 출판사 담당자의 협박어린 충고도 나를 움직이지는 못했다.
대전에서 십오분간 쉬었다가 기차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역 구내에서 뜨거운 우동을 먹던 사람들이 기차에 올라타서 자기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니 자리를 찾아야지.”
농촌여성을 취재하는 르뽀를 써달라는 부탁을 하러 전화를 한 선배가 용건 끝에 따지는 듯한 음성으로 덧붙였던 것이 지난달이었다.
“찾아야지."
“말은 잘한다.”
“미안해, 언니. 나 아주 잘 있어. 단지, 글을 쓸 수가 없어. 써봤자 모두 인간에 대한 절망만으로 가득 차게 될 것 같아. 그게 무슨 소용이겠어?”
“………”
“………”
“그래, 절망하는 김에 밑바닥까지 가봐라. 그것도 괜찮지…… 밑바닥까지 갔을 때 그때 전화해.”
선배는 툭 뱉듯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뭇사람들이 그러했듯 어줍잖은 말로 나를 위로할 때를 대비해서 준비해놓은 많은 반박들이 마음속에서 갑자기 꼬리를 감추어버렸다. 이상으런 오기까지 생기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서울을 떠나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었다면 다시 전화를 걸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서 보고 느끼면 너한테도 도움이 될 거야. 모두들 얼마나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개찰구에서 가방을 넘겨주며 선배는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나는 선배가 건네준 쪽지를 펴보았다.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창덕리 순안마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란 내가 농촌을 읽어낼 수 있을까. 그것도 단 며칠 만에. 하지만 기차는 어쨌든 달리고 있었고 나는 이제 돌아갈 수 없음을 알았다.
“이젠 다시 돌아갈 수 없어요.
돌아간다 해도 또다시 같은 일이 반복될 거야.”
나를 울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둘뿐이었다. 나의 어머니와 그리고 나의 딸.
나는 핏줄로 이어진 두 사람의 여성 중 한 사람 앞에서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래, 니가 알아서 해라. 이젠 나도 지쳤다…… 그래, 엄마 세대와는 다르지. 나도 너보고 이 에미가 그랬듯 꾹 참고 살라고는 말 안해.”
어머니는 울지 않았다. 내가 천진스런 딸아이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어머니도 윗입술을 지그시 누르고 계셨다.
“이혼할 용기가 있는 년이 울긴 왜 울어! 다시 시작해. 기죽지 말고.”
추수가 끝난 논에는 젓빛 갈대와 마른바람 그리고 황량함이 가득 차있었다. 이젠 부딪혀보는 수밖에 없었다.
기차에서 내려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순안까지 가는 버스를 타러 순창터미널로 갔을 때는 이미 어두운 저녁이었다. 그러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어느새 나는 주눅이 들어 있었다. 서둘러 와버린 어둠 때문이었고 낯선 거리의 낯선 말투들 때문이었다.
터미널로 갔지만 순안마을까지 가는 버스를 타려면 두 시간은 더 기다려야 했다. 차가 다니는 간격이 두 시간 반, 더구나 다음 버스가 막차였다.
나는 가방을 메고 거리를 걸었다. 배도 몹시 고팠고 추웠다.
정육점에 들어가 고기를 사고 시간을 때우기 위해 제과점으로 들어가 아이들에게 줄 과자도 조금 사고 나서 우유로 빈속을 때웠다. 제과점 한구석에 있는 어항 속에서 물고기들이 이리저리 헤엄치고 있었다.
“난 당신한테 사육당하는 게 아냐!
당신이 당신 일을 소중히 하는 만큼 나한테도 일이 소중해.”
“여민이가 있잖아. 난 저 아이가 당신이 밤늦게 들어오도록 파출부 아주머니 눈치만 보고 있는 걸 참을 수 없어.”
“제말 이러지 마. 아이는 다 제게 주어진 방식에 적응하면서 사는거야. 내가 놀러다니는 거야, 춤바람 나서 카바레 다니는 거냐구! 날 용서할 수 없는 건 여민이가 아니라 바로 당신의 그 알량한 봉건의식 아냐?”
“내가 당신이 늦으면 얼마나 애를 태우는지 알아?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당신을 못 믿어서 그러는 게 아니잖아.”
“당신이 날 믿는다면 설사 내가 밤에 떼강도에게 윤간을 당한다 해도 문제가 안돼! 왜 솔직하지 못하지? 여편네가 일한답시고 다른 남자들이랑 어울리는 게 싫은 거 아냐! 집에 오면 남들처럼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도 없고 썰렁한 방에 들어오기 싫다는 게 이유 아니야? 당신 우리 배고픈 시절에는 내가 일하는 것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잖아.”
“여민이 때문이잖아, 여민이!”
“아니야, 여민이가 태어나기 전에도 떼강도는 있었고 그때도 난 밤늦게까지 취재를 다니곤 했어. 내가 싫은 건 당신이 좀더 당신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하다는 거야!”
싸우던 것은 오히려 애정이 있을 때였다. 점차로 집안에서는 말소리가 줄어갔고 아이를 매개로 한 대화 이외엔 우리는 그저 서걱거리는 얼굴로 마주쳤을 뿐, 서로의 문을 굳게 걸어잠갔다.
버스 시간이 대략 이십분 남은 걸 보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어 살 된 아이가 엄마에게 안겨 제과점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이의 손에 커다란 팥빵을 쥐어주면서 흐뭇한 얼굴을 했다.
나는 돈을 치르고 제과점 문을 열었다. 내가 무심히 지나쳐온 낯선 많은 간이역들처럼 나도 여민이를 잊게 될까. 나는 대합실로 들어섰다.
이상하게도 대합실이 텅 비어 있었다.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귀퉁이 의자에 앉았다. 자꾸 시계를 들여다보았지만 시간은 몹시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때 군인 하나와 젊은 남자 둘이 들어섰다. 군인이 내 오른쪽에, 갈색 잠바의 청년이 내 왼쪽에, 그리고 나머지 이마에 흉터가 있는 젊은이가 내 앞자리에 와서 나를 돌아보았다. 영락없이 포위당한 꼴이었다.
“이곳 분은 아니신 거 같은디…… 여자 혼자서 뭔 일이시오? 학생이오?”
그들의 입에서는 독한 술내가 풍겨왔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자리를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었지만 비로소 실감이 왔다. 그렇다. 이곳은 대한민국. 여자 혼자 다니기에는 지나치게 위험한 나의 조국.
“좀 비켜주세요.”
나는 그들을 빠져나와 무작정 승강장 쪽으로 도망치듯 나왔다. 그들은 더 따라오지 않았다. 뜻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승강장에서 우글거리고 있었다. 몇 달째 사람들을 기피하고 지내던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나는 순안이라는 팻말이 씌어진 줄 뒤에 섰다. 하교하는 고등학생들과 장을 보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며 떠들어대고 있었다.
“기집애 대학 보내서 뭘 혀. 고등학교까지만도 감지덕지제.”
앞니가 뻐드러지고 키가 훌쩍 큰 여자가 여고생들과 말을 나누고 있었다.
“그래도 순임인 공부를 잘하잖아요.”
그 여자의 입에서 긴 한숨이 나왔다.
“에미가 미꾸라지 팔아서 겨우 밥먹는디 대학은 무슨 대학.”
버스가 왔고 나는 그들과 함께 버스에 올랐다. 앞니가 뻐드러진 순임이 엄마가 내 옆에 앉았다. 버스는 읍내를 빠져나가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어둠속을 덜컹이고 기우뚱거리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저어, 순안마을에 가려면 어디서 내려야 하나요?”
“아이고, 내가 그 마을에 사는디, 누구 집에 가는가?”
“저, 현이네 집에……”
“현이네는 왜?”
“취재왔어요.”
여자는 반색을 했다.
“농촌 취재 나왔다니께 우리 집에도 다녀가요. 전에도 뭣이냐, 글을 쓴다는 사램이 우리 집에서 이틀이나 자믄서 나랑 이야기허고 갔어. 헌데 소설은 안 나오등만.”
여자는 왠지 신이 나 있는 것 같았다 순안마을에서 내려 마중 나온 현이 어머니의 안내를 받아 가는 내 등뒤에 대고 그 여자는 또 소리쳤다.
“꼭 와야 혀. 모레는 일 안 나가니께.”
하늘엔 별빛 하나 보이지 않았고 기온이 몹시 찼다. 어둠에 낯선 눈으로 나는 더듬듯이 현이네 집으로 들어섰다. 으레 그랬듯이 이방인을 향해 개들이 미친 듯이 짖었다.
나는 방안으로 들어가 가족들에게 인사를 드렸다. 서울 잡지사에서 연락을 받고 모두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두 평 반이나 될까, 텔레비전 한대와 경대가 놓인 간소한 방이었다. 중학교 이학년인 현이는 방바닥에 도화지를 펴놓고 미술숙제를 하고 있었고, 그 동생들은 이 낯선 서울여자 앞에서 부끄럼을 타는지 윗언니가 숙제하는 데만 눈길을 주고 있었다.
나는 현이 아버지인 김만석씨에게 인사를 드리면서 직감적으로 이댁 식구들이 나를 반기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며칠이나 머물 거냐는 물음에 계획과는 달리 사흘 정도라고 우물우물 대답해버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우린 사실 아홉시 전에 자요. 그리고 새벽에 일어나지요. 그럴 수 있겠소?”
김만석씨가 물었다. 나는 사실 밤에 글을 쓰고 아침엔 잠이 좀 많은 편이었다.
“그래야지요.”
“그럼 내일 뵙시다.”
김만석씨가 사무적으로 말했다. 아주 뚝뚝한 말씨였다. 나는 큰딸 현이와 함꼐 작은방으로 들어섰다. 한 평 반쯤 되는 정갈한 방이었다. 이미 불을 때두었는지 방바닥이 따뜻했다. 의외로 잠이 쏟아졌다. 아침에 집을 나선 것이 아홉시 반이었으므로 천리도 못 되는 길을 근 열 두 시간이나 헤매어 찾아온 꼴이었다.

비가 퍼붓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열두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해 봄과 여름 사이 지긋지긋하게 비가 내리고 또 내렸다. 나는 우산을 펴들고 발을 동동 구르며 차도 가장자리에서 열심히 손을 흔들어댔지만 택시들은 흙탕물만 튀기고는 나를 지나쳐버렸다. 그래서 겨우 택시가 잡혔을 때 나는 무조건 올라타고 애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서울 근교의 한 읍에 살고 있었는데 그곳까지 택시를 타고 가는 데는 만원이 넘는 돈을 지불해야 했다. 운전사는 머리가 희끗희끗 오십이 넘어 보였는데 눈살을 좀 찌푸리더니 차를 출발시켰다. 비는 폭우에 가까울 정도로 퍼붓고 있었고 불광동을 지났을 때는 거의 다릴는 차가 보이지 않았다. 운전사는 차를 몰다가 자주 나를 돌아보았다.
“허어, 이거 이런 날에는 여자를 태우지 말랬는데. 흰옷 입은 여자는……”
운전사가 안절부절하는 모습으로 여러 번 말을 되풀이할 때까지 나는 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구파발을 지나 차가 논길에 들어섰을 때 그는 또 말을 꺼냈다.
“요즘 세상이 아무리 개명했다고 하지만 이런 날은 왠지 집에 일찍 들어가고 싶어요. ……내 친구 중에 하나는 글쎄 비오는 날 머리가 길고 하얀 옷을 입을 여자를 태웠는데……”
운전사는 말을 계속했다. 여자가 가자는 대로 험한 산골 앞에 차를 세우고 돈을 가져올 때까지 기다렸지만 여자는 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들어가보니 그곳에 그런 여자는 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운전사가 분명히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자 문을 열어준 여인이 한숨 쉬며 말하기를 오늘이 바로 내 딸의 제삿날이유, 했다는 흔한 이야기였다.
“아가씨, 좀 잘 앉아보슈. 백미러로 잘 안 보이는 것 같은데……”
나는 그제서야 내 몰골을 돌아보았다. 흰 남방셔츠에 흰 모시재킷, 그리고 긴 생머리. 물론 밑에야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었지만 나는 그가 정말로 나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사람이 그런 걸 믿고 있다는데 웃을 수도 없었고 저는 귀신이 아니에요라고 이야기하기에는 더 이상했다. 나는 백미러에 내 얼굴이 잘 비치도록 앉아 그에게 자꾸 말을 걸었다. 하지만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이건 삶이 아니야. 어쩌면 여기 앉아 있는 건 내가 아니라 정말 유령인지도 몰라. 아침 여섯시부터 밤 열두시까지 지치도록 일을 하고 나면 남는 것은 남편과의 부딪침.
차는 느릿느릿 달렸고 나는 귀신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파란 만원짜리 지폐를 그에게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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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따라 쓰다 (2/2)
    from 내 인생은 진행중 2011-08-08 15:21 
    비가 퍼붓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열두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해 봄과 여름 사이 지긋지긋하게 비가 내리고 또 내렸다. 나는 우산을 펴들고 발을 동동 구르며 차도 가장자리에서 열심히 손을 흔들어댔지만 택시들은 흙탕물만 튀기고는 나를 지나쳐버렸다. 그래서 겨우 택시가 잡혔을 때 나는 무조건 올라타고 애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서울 근교의 한 읍에 살고 있었는데 그곳까지 택시를 타고 가는 데는 만원이 넘는 돈을 지불해야 했다. 운전사는 머리가 희끗희
 
 
2011-08-03 0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1-08-03 08:24   좋아요 0 | URL
우울하고 절망하는 것도 여유가 있는 사람의 사치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 작품이었어요. 그런 내용의 글이 처음은 아니었을텐데 이 글을 읽으면서 왜 그리 강렬하게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다시 한번 읽어보리라 해놓고 이제서 다시 읽네요. 십 오년 만에...

2011-08-03 1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1-08-03 14:48   좋아요 0 | URL
어제 늦게 주무셨군요 ^^ 오늘도 무더운 날씨입니다.

저 책을 가지고 계신가봐요. 오래 전에 학교 다닐 때 도서관에서 빌려읽고 이번에 겨우 중고책 구입을 했답니다.이건 계속 소장하고 있을 것 같아요.

비로그인 2011-08-06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도 혹시 손으로 베껴 쓰셨을까요? 얼마 전에 비가 많이 올 때 창문 너머 비가 많이 와 방에 두었던 편지들이 잔뜩 젖어 말린 기억이 납니다. 참 많이도 쓰고, 많이도 받고 했었더라고요. 그렇게 손으로 쓴 글, 그리고 그것을 컴퓨터로 옮겨 적은 글. 사뭇 다른 느낌인 것 같습니다.

그냥 hnine님 서재에 들르니 막 그런 생각이 드네요 ^^

hnine 2011-08-07 05:36   좋아요 0 | URL
이번엔 손이 아니라 컴퓨터로 바로 옮겨 써 보았어요. 기계적으로 따라쓸 것 같았는데 막상 해보니 꼭 그렇지 않더라고요. 자판에 이미 많이 익숙해져있나봐요. 손으로 베껴쓰는 것보다 속도감이 붙어 더 오래 지속할 수 있더군요.
편지를 많이 쓰고 많이 받으셨군요. 저도 그랬는데 ^^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받은 편지들. 한때는 그것들이 나의 재산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오래 끌어안고 있는 것이 스스로 맘에 안들때도 있어요. 저는 변덕쟁이예요 ^^
 

내 자식도 나같은 아이로 키우고 싶다고 생각하는 부모도 있을까?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 생각이 모두 나와 같지는 않으니까. 

결혼 계획이 아직 없을 때 생각에도 나는 만약 자식을 낳는다면 나와 반대의 성격을 가진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 예나 지금이나, 아니, 지금보다 예전에 더 나는 자존감이 그리 높지 않은 인간이었나보다. 

얼마 전, 남편 직장에서 직원 자녀들을 대상으로 성격, 적성 검사를 해준다고 해서 아이가 검사를 받은 적이 있다. MBTI검사에 몇가지 검사를 더 한 것 같은데 MBTI검사는 부모도 함께 받아서 제출해야한다고 해서 나와 남편도 따로 작성해서 검사자에게 제출했다. 

결과가 나왔으니 상담을 받으러 오라고 해서 갔다. 

MBTI검사 결과, 나는 INTJ형, 아이는 ENFP형.
두번째 항목만 같고 다 다르다.
상담자가 그런다. 엄마가 많이 힘드실 수도 있겠다고.
그렇다. 모두 엄마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면 지금보다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애초에 그러지 않겠다고 작정하길 잘한것 같다. 

그나저나, 나와 아주 다른 아이로 키우고 싶다는 나의 생각대로 되어가고 있는 것인가? 

정작 검사를 받고 나와서 아이가 제일 궁금해한 것은,
"엄마, 나 커서 축구 선수 하면 잘 할 것 같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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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1-07-31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의 성격을 인정하고 마음대로 하려고 안 하신 거 참 현명하세요.
다린인 축구선수가 꿈이군요.^^
성격검사 저런 거 받아보면 서로 도움이 되겠네요.
좀더 알고 인정하고 대할 수 있을 테니까요.

hnine 2011-08-01 06:34   좋아요 0 | URL
그런데 마음 먹은 대로 안하고 있을 때도 많아요. 아이를 막 다그치다보면 이건 아이를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내 맘대로 안 된다고 화내고 있구나 생각이 들거든요.
성격검사, 적성검사 같은 검사는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목적이 아니라면 좋은 것 같아요. 나 혼자 짐작하고 있던 것이 객관적인 검사 결과로도 확인되면 그건 믿을만 하니까요. 아이 검사 하면서 남편과 제 검사 결과를 비교해보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라서 재미있었고요.

하늘바람 2011-07-31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다린이 남자아이라서 축구 선수 하고 싶어하는군요.^^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정말 제가 님께 배울게 많아요

hnine 2011-08-01 06:36   좋아요 0 | URL
남자 아이들은 자라면서 한때 다 한번씩 가져보는 꿈이 아닐까해요. 제가 보기엔 축구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지요.
자기가 정말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꼭 찾아내었으면 좋겠어요. 저도 함께 지켜봐줘야지요.

마노아 2011-07-31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린이의 축구에 대한 애정은 한결같군요. 형제 자매들에게 검사를 해도 다 다르게 나올 것 같아요.^^

hnine 2011-08-01 06:37   좋아요 0 | URL
마노아님은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그러고 보니 서재 지인들의 성격이 문득 궁금 ^^
아마 한 사람이 한 가지 성향으로 분류되지 않는 경우도 있을테니 (다중인격!!) 사람의 성격은 정말 많은 종류가 있겠지요.

울보 2011-07-31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아이도 나랑 너무 다른 성격에 요즘. 참 힘든데. 저고리에. 나랑 다른 딸을 인정하고. 가능한 딸이 좋아하는거,, 딸의 생각을 많이존중하려고요...저도 남에게. 많이 배웁니다...

hnine 2011-08-01 06:40   좋아요 0 | URL
엄마가 힘들어할땐 분명히 아이도 힘들어하고 있을거라 생각해요. 그래서 저도 제 생각을 많이 내려놓는다고 하는데도 아이에게 물어보면 엄마 맘대로 한다고 하는걸요.
완벽하게 지혜로운 엄마 다음으로 제일 좋은 엄마는 완전 방임형 엄마라고, 우스개 소리인지 들은 적이 있던데 그만큼 간섭과 통제가 아이들에게 스트레스가 된다는 말이겠지요. 그런데 그게 쉬워야 말이지요 휴~
우리 같이 노력해요 ^^

마녀고양이 2011-07-31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BTI는 현재 상태를 보여주는 느낌이 강해서 시기 별로 변화하더라구요.
그런데 언니나 다린이나 중간에 'N'이 나온게 부러워요.
직감이 강하고, 나무보다 숲을 보는 스탈이신거잖아요, 저는 저번에 S가 나왔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TCI 검사라고, 기질과 성격 검사를 했는데 요즘은 직감이나 영성초월 쪽이 더 강해졌나보더라구요. 아마 마음이 편안해져서 그런가봐요. 다린이는 EJFP라니
이것저것 따지기 보다는, 마음이 가는대로 열정적으로 행하는 스탈인가 보네요. ^^

hnine 2011-08-01 06:43   좋아요 0 | URL
TCI검사라는 것도 있군요.
제가 직감에 많이 의존하는 것 맞는데 그래서 가끔 선무당이 될때가 있어요. 자제하고 있지요 ^^
다린이는 집에 가만히 있으면 병나는 아이래요. 좋고 싫은 것, 자기가 하고 싶은 것과 하고 싶지 않은 것에 대한 구분, 몰입 정도가 '너무나' 분명하고요. 모범생 스타일은 절대 아니라는거죠 ㅋㅋ

세실 2011-07-31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보다 더 나은 아이로 키우고 싶죠. 성격도, 직업도.....모두요.
다린이 잘 크고 있잖아요. 예의바르고, 배려심 많고, 님도 다린이 입장에서 많이 생각해주고. 잘하고 계세요.

hnine 2011-08-01 06:46   좋아요 0 | URL
세실님, 저는 저의 이 속으로 끙끙 앓는 성격, 한번 마음 상하면 오래 가는 성격, 완벽하게 못할 거면 시도하기도 두려워하는 성격, 이런 것들이 싫었어요. 그래서 아이는 좀 털털하고, 표현도 잘하고, 못해도 한번 해보려고 하고, 이런 성격의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싶었거든요.
잘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지만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격려해주신다 생각하고 오늘도 또 노력하렵니다. 좋은 휴가 되시게 오늘 비가 좀 그쳤으면 좋겠네요.

꿈꾸는섬 2011-07-31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저랑은 다른 아이로 키우고 싶어요.^^

hnine 2011-08-01 06:48   좋아요 0 | URL
꿈꾸는 섬님도 그러시군요?
나의 결점은 닮지 말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엄마들 마음엔 있는 모양이어요.
생각보다 행동하기를 더 즐기는 아이였으면 좋겠다 했더니, 그 원은 풀었네요. 행동으로 에너지를 발산하지 않으면 못견뎌할 성격이래요 ㅋㅋ

진주 2011-08-01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 보다가 알았어요.
나인님 아이 이름이 다린이란 걸.^^

hnine 2011-08-01 19:18   좋아요 0 | URL
이름을 말하면 듣는 사람들은 '달인'인줄 알아요 ㅋㅋ
그래서 끊어서 또박또박 '다', '린' 이라고 말해주어야 하지요 ^^
고심하면서 이름 짓던 때가 엊그제 같네요.
외자로 쓰시던 진주님 아들 이름, 저도 기억나네요.

순오기 2011-08-01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와 다른 아이로 키우고 싶지만, 어떤 땐 붕어빵이구나~~~느껴질 때가 많아요.^^
다린이는 엄마와 다른 아이로 자라고 있는거군요.^^

hnine 2011-08-01 19:20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 DNA가 어디로 갔겠어요 ㅋㅋ
성격이 저랑 달라서 원하던대로 되었구나 싶은 반면, 그래서 앞으로도 더 신경을 쓰고 주의해야겠구나 긴장도 되네요. 특히 사춘기때...

하양물감 2011-08-01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한솔이키우면서 별로 안힘든거보면 많이 비슷한거 같아요 잘하는것도 내가 잘하는것과 비슷하거든요 한번쯤 검사받아보고싶네요.

hnine 2011-08-01 19:21   좋아요 0 | URL
한솔이와 성격이 비슷하시기도 하고, 또 포용을 잘 해주시기 때문 아닐까요?
한솔이도 매우 활동적이고 적극적이고 호기심도 많아서 엄마가 부지런해야 할 것 같은데, 하양물감님 잘 하고 계신거예요. 저는 늘 허덕허덕 거리는데 ㅠㅠ

2011-08-01 18: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01 1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01 19: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01 1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1-08-06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밀렸던 댓글 막 달고 있는데. 저도 INTJ입니다 ~ ㅎ
오늘 hnine님 서재 테러 수준인데 이거 보니 막 더 반가워서 이 댓글을 안남길 수가 없네요~

hnine 2011-08-07 05:38   좋아요 0 | URL
비슷하지 않을까 했지만 똑같을 줄이야! ㅋㅋ
반갑습니다. 우리의 이 심각진지모드 성격을 위하여 건배라도~ ^^

휴... 2011-09-22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부모-자식간의 성격차이 그거 참 무서운 것 같아요.
저는 23살인 대학생입니다만,
어머니와의 성격차이로 하루하루 너무 스트레스를 받고 있답니다.
저는 흘러흘러 들어와서 자제분 나이라던가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암튼 아이의 성격을 파악하고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심지어 유아교육전공자라 더욱 그런 생각이 드네요 ㅜㅜ
에고 몇시간 전부터도 어머니랑 성격차이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ㅠㅠ

hnine 2011-09-22 16:30   좋아요 0 | URL
저 역시 저의 어머니와 그리 성격이 비슷한 편이 아니라서 결혼 전에 갈등이 참 많았답니다. 결국 서로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수용해야하는데 자식이 부모를 먼저 인정하기 보다, 더 어른인 부모가 자식을 받아들이고 내 뜻대로 끌고 가려는 집착을 놓아야할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보다 가족간의 갈등, 특히 부모와의 갈등은 잘 풀어나가지 않으면 참 오래 가고 상처로 남기도 하는 것 같아요.
 
Jumping the Scratch (Paperback)
사라 윅스 지음 / Harpercollins Childrens Books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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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성장한다는 것은 자기 내면 깊숙이 감춰져 있는 돌덩이를 꺼내어 놓기 까지의 여정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어딘가에 글을 끄적거리는 것도 그런 이유가 숨어 있지 않을까? 해소되지 않은 자기 내면의 응어리를 어루만져주고 싶은 심리 말이다.
이 책에는 기억을 지우고 싶어하는 열 한 살 남자 아이 Jamie 와, 갑작스런 사고로 인해 사고가 일어난 후의 일은 하루 밖에 기억을 못하는 이모 Sapphy, 두 인물이 축을 이루어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매일 아침으로 먹는 시리얼처럼 변화 없이 되풀이 되는, 지루하지만 평범한 일상 (normal-as- cornflakes life). 그 정도 유지하는 것도 다행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마저도 못되는 날들이 닥친다. Jamie에게는 가족과 다름 없는 고양이가 죽고, 아버지가 엄마 아닌 그 누군가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가고, 체리 가공 공장에서 일하던 이모가 사고로 머리를 다쳐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내 인생에 이제 나쁜 일은 여기까지라고,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것이라며 엄마, 이모와 함께 새로운 터전으로 이사를 오지만 그곳에서는 더한 일이 벌어지고 Jamie는 그 충격으로 인해 남들과 소통을 하지 못하고,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지내게 된다.
하지만 어린이나 청소년이 등장하는 이런 성장 소설이라면 당연히 결말은 희망적인 쪽으로 맺어지는 법. 이 책 역시 예외가 아닌데 Jamie를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와 소통하게 해주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Jamie가 다니는 학교에 초청 작가로 방문한 Arthur, 그리고 Jamie가 다른 아이들과 좀 다르다는 것을 알고 관심을 가지고 접근한 같은 반 친구 Audrey이다.
어린이 책 작가인 Arthur는 담임인 Miller선생님과 여러 가지로 달랐다.

   
 

밀러 선생님은 나를 보고 계셨고 그때 나는 옷장 앞에 있었다. 선생님은 Arthur 에게 몸을 돌려 속삭이듯 말했지만 여전히 반대편에 있는 내게까지 다 들릴 정도였다.
“결손 가정이지요. 아버지가 없답니다. 무슨 얘기인지 아시겠지요.”
“예, 전에 들은 적이 있습니다.” Arthur가 대답했다.
“말 다 한 거지요, 안 그래요?” 
 
나는 옷걸이의 옷을 가지고 그곳을 나왔다. (99쪽)

 
   
Jamie의 내면을 읽을 줄 모르고 그의 행동을 야단치는 것이 전부였던 Miller선생님과 달리 Arthur는 말이 없는 아이를 대답하지 않는다고 야단치는 대신 그 아이의 마음을 읽으려고 했다. 그 아이도 분명히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단 한 줄도 쓰지 않고 낸 백지 노트에 대해서도 게으르다거나 하라는 대로 하지 않았다고 야단치는 대신, 그리고 또 Jamie의 행동을 그의 과거, 그의 가족 환경과 연관시켜 단정 짓는 대신, 아직은 드러나지 않지만 그 아이가 가지고 있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뜻한다고 반 아이들 있는데서 칭찬을 해주었다.
우연히 Jamie와 버스를 같이 타게 된 날 그는 Jamie에게 말해준다.
“내가 글쓰기에 대해 한가지 말해줄까? 글을 쓰면 말이야, 어떤 사물에 대해 느끼는 방식이 바뀌게 된단다.”
늘 작은 노트를 들고 다니면서 길가 상점의 간판 제목까지 적어 놓는 모습, 어떤 것을 묘사할 때에는 눈에 보이는 것만 쓰지 말고,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맛, 촉감, 냄새, 이 다섯 가지 감각을 모두 동원하여 써보라고 가르쳐주는  등, Jamie는 Arthur와의 짧은 만남을 통해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한편 Jamie에게 무슨 걱정이나 고민이 있는 것 같아 보여 도와주고 싶어 접근하는Audrey 역시 하고 다니는 복장부터 관심사, 가족 상황 등 평범한 아이가 아니었다. 여자들에게 관심 없어하며 따돌리기만 하던 Jamie는 최면술을 이용해서 마음 속으로 바라는 것을 이루어지게 할 수 있다는 Audrey의 끈질긴 제안에 응하게 되고, 결국 그때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있던 나쁜 기억을 다 털어놓게 된다. 그 날밤 그 나쁜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Sapphy 이모에게 역시 다 털어 놓으면서 은폐되었던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고, 그 날 이후로 이모는 기억을 되찾게 된다.
제목의 Jumping the scratch는 마치 어느 한군데 흠집 (scratch)이 가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던 레코드 판이 그것을 뛰어 넘어 다시 진행이 되는 것을 말한다.
우리 마음의 scratch를 우리는 어떻게 jumping할 수 있을까? Arthur선생님이 말한 글쓰기가 힌트가 될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 한번 흠집은 영원한 흠집이 아니라 뛰어 넘을 수 있다는 희망?
책의 뒤에는 저자인 Sarah Weeks의 작가 노트가 실려 있다. 이 책을 어떻게 쓰게 되었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완성시켰는지, 등장 인물 설정에는 어떤 배경과 경험이 담겨 있는지.
So B. It 에 이서 두 권째 읽은 저자의 책이다. 또 없나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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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1-07-30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이렇게 좋은 책을 찾아 읽으셔요?
사물에 대해 느끼는 방식이 바뀌게 되는 것, 와 그런 듯해요 정말요

hnine 2011-07-30 15:12   좋아요 0 | URL
이 저자의 So B. It을 재미있게 읽었거든요. 다락방님께서 이 책도 있다고 알려주셨고요. 이세상을 관찰하는 깊이와 방법이 달라지는 것, 근사하지요? ^^

노이에자이트 2011-07-30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쏟아지는 서러움 사랑이 스쳐간 가슴 아픈 이 상처~' 이렇게 끝나는 노래가 있었어요.노래 제목이 '사랑이 스쳐간 상처'였지요.

제목을 통해서 영어 이디엄 하나 배우네요.

hnine 2011-07-30 17:55   좋아요 0 | URL
'사랑이 스쳐간 상처' 어떤 노래인가 검색해보러 갑니다~ 저도 노래에 관심 많아요 ^^

hnine 2011-07-30 17:57   좋아요 0 | URL
ㅋㅋ 남진 노래군요 ^^

노이에자이트 2011-07-30 20:50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남진 씨가 제대한 직후 부른 노래인데...40년이 넘었죠 흐흐흐...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더 시원하게 뽑아제끼고 하나는 좀 느릿하게 편곡을 했더군요.
그런데 이런 장르의 노래도 좋아하시려나 모르겠어요.

다락방 2011-08-08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읽다가 작가와 선생님의 너무도 다른 반응에-둘다 어른이었잖아요- 꽤 속상해했던 기억이 나요. 그리고 마지막에, 이모가 아이의 말을 듣게 되면서 네 잘못이 아니야, 라고 말해줄때, 그때 울었던 기억도요.

hnine 2011-08-08 15:16   좋아요 0 | URL
예전에 다락방님이 So B. It에 그렇게 댓글 다셨던 것 기억해요.
그래서 이 책을 꼭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었어요.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감사드려요.
(그 대목을 읽으시며 우셨군요. 책 읽으며 눈물 짓는 사람, 좋아요 ^^)
 
오십후애사전
이나미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내 인생 여정의 중간에 서니'라는 이 리뷰의 제목은 이 책의 권두시로도 인용된 단테의 <신곡> 지옥편 서문 중에 나오는 문구이다. 이런 제목을 쓸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최승자 시인의 싯구처럼.

참 우습다
내가 57세라니
나는 아직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고
소녀처럼 포르르포르르 할 수 있는데
진짜 할머니 맹키로 흐르르흐르르 해야 한다니

사실 이 책을 신간 코너에서 보자마자 바로 주문을 한 이유는 제목보다는 '이 나 미'라는 저자의 이름을 보고서였다. 오래 전에 그녀의 '때론 나도 미치고 싶다'라는 제목의 책을 읽고서, 정신과 의사이면서, 한가지 시각이 아닌 이렇게 다방면의 지식을 가지고 폭넓은 얘기를 할 수 있구나 놀라서 이후로 새 책이 나올 때마다 거의 다 따라 읽었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새 책이 나오지 않고 있다 싶었는데 오랜만에 나온 책의 제목에 '오십'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그녀의 나이가 벌써 그렇게 되었구나. 내 나이도 거기서 멀지 않은데.
그녀의 글 스타일은 어떻게 보면 딱딱하고 건조하게 느껴질 정도로, 필요없는 과장이 없고 미사여구가 많지 않다. 하지만 그 박학다식이란 평소에 독서와 공부에 얼마나 시간을 쏟았을지 짐작이 되게 한다. 읽으면서 밑줄 긋고 싶었던 곳을 옮겨 적는 것으로 리뷰를 대신해야겠다. 오십대를 겨냥하면서 쓴 글이기 때문에 이십대, 삼십대를 대상으로 한 책들에 비해 내용이 무거운 부분도 많다.

의학의 목적을 꼭 장수에만 둘 것이 아니라 마지막 사는 날까지 삶의 질을 보장하고 자신이 원할 때 깨끗하게 죽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데 두어야 하지 않나 생각해본다.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말기 암에 걸리거나 식물인간 상태에 놓이면 무의미한 연장술을 하지 말라고 유언하기 좋을때가 오십 대이다. 나도 죽음이 확실하게 임박한 중병에 걸리면, 무의미하게 호스와 링거 줄을 달고 침대에 누워 지내기보다 쓰러지는 그날까지 사는 것처럼 살다 화끈하게 죽고 싶다. (101쪽) 
 
만약 지금 당신이 고립감 때문에 괴로워한다면, 그만큼 당신이 그 누구를 위해서도 스스로를 희생하거나 헌신하지 않는다는 뜻일 수도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을 때 찾아오는 것이 외로움이다. 친구는 하나도 없지만, 노숙자를 위해 밥상을 차리고, 고아들과 외로운 치매 노인들을 돌보는 사람들, 그래서 남을 돕는 데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고립감은 없다. (132쪽)
 
이제 사랑이 인생의 목표는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게 되었으니, 연애를 하든 결혼을 하든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인생에 대한 열정을 찾으면 그것으로 충분할 수도 있다. 사랑이 물론 별건 아니지만, 별것으로 만들어 즐기는 것도 나의 책임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 정말 내게 깊은 즐거움을 주고 있는 것인지 냉철하게 점검하고 관찰해보는 것, 또한 상대방 역시 나를 만나서 행복하게 성장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내 의무다. (141쪽)


많이 아는 척을 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묻는 게 유익합니다. 하지만 더 유익한 것은 자기 발로 다니며 묻는 것입니다. 뭔가 깨달음을 얻은 척해봐야 대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145쪽)

할 말도 많고, 추억도 많고, 억울한 일이나 자랑할 일도 많겠지만, 과거에 대한 이야기는 특히 남 앞에서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내가 겪은 그 사람들은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듣는 입장에서는 재미도 없다. 무엇보다 과거만 자랑하거나 집착하고 현재에 충실하지 않으면 결국 내 현재만 처량하고 빈곤해질 뿐이다. (153쪽)

거절을 할 때는 우선, "나를 배려해서 해준 참 좋은 제안이긴 한데 나름대로 검토해볼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고, "그러나 가능성은 별로 크지 않을 것 같으니 아쉽지만 많이 기대하지는 말라" 고 덧붙여도 좋다. 다른 사람이 그런 제안을 받아들여 시행한다면 무척 근사하겠지만 나한테는 어울리지 않거나 내 능력이 닿지 않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방법이다. 나이 오십이면 그 정도의 사회적 기술은 갖추고 있어야 한다. (182쪽)

 

(부부문제)
제일 중요한 원칙은 일단 모든 문제를 배우자에게 투사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자신은 희생자, 상대방은 가해자라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불변의 공식에 매달리는 한,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마법의 해법은 없다. 아무도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내 맘대로 바꿀 수는 없다.
자신의 문제는 냉철하게 보지 못하고, 격한 감정에 휘말려 "모든 게 다 너 때문이야"를 외치며 남 탓을 하는 한 자신에게 긍정적인 변화가 올 수는 없다. 스스로 '희생자'란 딱지를 붙이고 거기에 집착하는 사람은 영원히 '희생자 되기'의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황이 어찌 되었건, 자신의 감정이 얼마나 완고하건, 자신의 선택과 감정에 책임을 지는 사람은 그 상황을 바꾸기 위해 먼저 적극적으로 자신부터 바꿀 줄 안다. 그러면 상대방은 느린 속도지만 당신을 따라 변할 것이다. (195쪽)

 

인간을 포함해 세상 모든 만물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처럼 작은 존재는 그저 자연이 허락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왔고, 또 우주의 섭리가 허락할 때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꼭 행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일종의 아집이다.
어쩌면 이 세상의 반은 지옥일지도 모른다. (265쪽)
 나, 이 생각을 종종 하면서도 세상을 너무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닐까 주저했었다. '긍정의 배신'이라는 책도 있듯이 뭐든 긍정적이고 희망적으로 얘기해야 호응을 받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보기엔 여전히 그렇지 않아보이고, 오히려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것이 마음을 편하게 하고 앞날을 생각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는데 저자의 이 구절을 보고 참 반가왔다고 고백해야겠다.
   
장자는 "땅은 내게 몸과 삶을 주어 나를 고단하게 했지만, 늙어 내가 편안해졌으며 죽음으로 내가 쉴 수가 있다. 삶이 좋은 것이라면 죽음 또한 좋은 것이다." 라고 말했다. 어떡하든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려고 하는 현대인이 책상 앞에라도 붙여놓고 들여다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을 떠나는 것은 우리를 조종하는 운명의 노끈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즉 현해(懸解)라 표현한다. 세상 근심 걱정을 다 놓고 떠나는 것을 기뻐하면서 죽어가는 경지, 얼마나 멋진가. (273쪽)

 

오십 무렵에 배워야 할 제일 큰 덕목은 이처럼 늙음과 죽음에 대한 소박하지만 성숙한 태도이다. 또한 그 태도를 우리에게 가르쳐줄 숨은 스승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 스승들은 지식이 많거나 지위가 높거나 재산이 많은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인생에서 실패했거나 큰 고통을 겪었거나 큰 좌절을 경험한 아주 평범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 중에 큰 스승이 있다. 자녀를 앞세운 농어촌 촌로들, 도시에 대한 집착을 벗어던지고 귀농한 용감한 분들 중에 그런 이들이 숨어 있다. 자신들이 갖고 있는 소박하지만 위대한 지혜를 좀처럼 남들에게 떠벌리거나 자랑하는 법이 없다. (277쪽)

 

인생의 수레바퀴를 완성하기 위해서
기를 불어 넣고 힘을 들여야만 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깨달음은 세상을 초월하는 비밀스러운 무엇이다.
궁극적인 것이 무언지 의문이 드는 순간
인생의 수레바퀴가 너를 성장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야지 하고 마음먹는다고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언가를 하겠다는 의도를 버릴 때
진정한 성숙이 찾아온다.

<태을금화종지>, 여동빈 저, 고성훈, 이윤희 역, 여강출판사, 1992 (286쪽)


책의 후기에서 그녀는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해 말하면서, 어느 날 부터인가 어느 자리를 가도 자기가 가장 연장자가 되어 있더라고 했다. 내가 요즘 어딜가든지  '언니'라고 불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심정과 비슷하리라.
새삼 자신의 나이를 깨닫게 되면서 앞으로 그동안과는 달리 새롭게 살고 싶다는 상상을 해본다며 예로 든 것들을 보니 나의 상상력보다 훨씬 근사하다. 어디에 적어두고 싶었다.
동서양 고전을 넘나들며 거침없이 예시를 보이고 있으면서도 어느 한구석 자만심을 보이지 않는 그녀가, 나보다 조금 앞서 가면서 이렇게 계속 좋은 글을 내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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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7-28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 깨달음을 얻은 척해봐야 대답은 나오지 않습니다'를 읽고
그만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피식 웃어버렸습니다. ㅎㅎ.

바로 며칠전 옛날에 해주던 <바람돌이> 만화를 EBS에서 해주는거예요.
그런데 하필이면 할머니가 하루동안 바람돌이의 마법으로 처녀 시절로 돌아가는거였답니다.
정말 순식간에 팔랑팔랑 나비처럼 날아다니더군요.

hnine 2011-07-28 05:38   좋아요 0 | URL
팔랑팔랑 나비처럼~ ^^ 문득 제게도 그렇게 팔랑이던 때가 있었나 싶어서요. 그렇게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대신 어떡하면 잘 날 수 있을까 고민하며 날지도 않고 바위 구석에 앉아 보낸 시간들이 많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이 책의 저자도 공부가 의무가 아니라 취미인 것 처럼 보이는 사람이지요. 동양, 서양, 이 종교 저 종교, 철학, 문학 할 것 없이 해박해요.

stella.K 2011-07-28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가 벌써 50을 생각해야 하는군요.
그렇지 않아도 눈 뜨고 일어나면, 내 나이가 믿기지 않을 때가 종종했어요.
난 어제 40이었던 것 같은데 뭐지? 어디갔지? 그런 거...
저도 이제 다시 어디 봉사할 곳을 찾아 볼까 생각 중입니다.
예전엔 의무감이 컸는데 지금은 필요가 아닐까 싶어요.
그런데 50 어떻게 보면 그 나이도 젊지 않나요?ㅋㅋ

hnine 2011-07-28 13:55   좋아요 0 | URL
제 경우엔 20대에서 30대, 30대에서 40대 넘어오는 동안엔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보냈기 때문에 나이를 먹는지도 미처 느끼지 모르고 살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젠 그때만큼 치열하게 살지 않아서 나이 먹는게 피부로 느껴지고 50대는 40대와 어감부터가 너무나 다른 느낌이 들어서요.

'그런데 50 어떻게 보면 그 나이도 젊지 않나요?' --> stella님은 이래서 좋다니까요 ^^

하양물감 2011-07-28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요즘 고민이 많아요. 40이 딱 되어서 그런가? ㅎㅎㅎ 10단위로 생각하는 거 이것도 습관이겠지만, 올해는 유독 고민이 많답니다. (몸도 예전같지 않아요 ㅋㅋㅋ)

hnine 2011-07-29 07:23   좋아요 0 | URL
고민, 될 수 있으면 잘, 생산적으로 하셔서 방법이 나왔으면 좋겠네요.
40에 들어갈 때라든지, 50에 들어갈 때, 또는 아이가 학교에 들어갈 때 등, 한번씩 나의 시간들을 되짚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는데 그것도 잘 이용하면 나쁘지 않겠지요. 아이에게 올인하며 살면 언젠가는 꼭 후회할 것 같은, 저도 다 겪어보지 않아 모르지만 그런 예감이 설풋 들어요.

노이에자이트 2011-07-28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부 간의 문제뿐만 아니라 자기는 피해자고 남은 가해자라는 식으로 단정을 해놓고 들어가는 사람들은 참 곤란한 존재더군요.이런 사람은 남의 고생을 인정해주질 않으니까요.나이값을 한다는 것은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로 알 수 있는데 말입니다.

hnine 2011-07-29 07:25   좋아요 0 | URL
그렇게 한번 생각을 고정하고 나면 거기서 벗어나는데 참 오랜 세월과 노력이 소모되더군요.
나이값을 한다는 것은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 능력 여부로 알수 있다는 말씀이 와닿습니다. 그래서 책도 읽고 다른 사람 얘기도 듣고, 그러는 것 아닌가 싶고요.

상미 2011-07-29 0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도 최승자 시인님 시 읽고 블로그에 올리려고 담아뒀었는데....

hnine 2011-07-29 08:06   좋아요 0 | URL
나는 '너무' 공감될까봐 이분 시집 고의적으로 안 읽고 있는 중.
가끔씩 이렇게 눈에 띄는 부분들에도 너무나 공감이 되거든.

순오기 2011-07-29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 쉰이 넘었으나 여전히 소녀처럼 혹은 새내기 주부처럼 갈팡질팡 답이 없는 인생을 살고 있어요. 책에서 얻는 지혜가 삶에도 적용돼야 하는데 그건 또 별개일때가 많더라고요.ㅜㅜ
마음에 담고 새김질하며 살면 좀 나아지겠지요.^^

hnine 2011-07-29 09:17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을 보면서 많이 배우고 느끼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한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사는건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정이 중요한 것이라고 저 책에도 나오더군요. 다 할 줄 아는 말이지만 잊고 살때가 더 많은 말이지요. 책에서 얻는 지혜를 삶에도 적용하도록, 계속 노력하며 살 뿐 입니다.
여기는 아침부터 바람이 서늘하네요. 하지만 요즘 날씨는 워낙 변화 무쌍해서 오늘 낮은 또 어떻지 모르겠어요. 날씨가 어떻든, 꿋꿋한 하루가 되도록 노력하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