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 쓰다 (1/2)

 

운전사는 겸연쩍은 듯 씩 웃었으나 나는 이미 억지웃음을 지을 만큼의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파트 문 손잡이에 열쇠를 밀어넣었다. 예상대로 집은 어두웠고 방안에는 남편이 딸아이를 데리고 자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공부방으로 와서 책상 앞에 앉았다.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있던 나는 막바지 일주일 동안 여관에 출근하고 있었다. 남자작가들이야 감독과 함께 숙식하면서 글을 쓰지만 내가 여자라는 점을 참작해 우리는 주로 다방 같은 곳에서 일을 했다. 그러나 진도는 생각만큼 잘 나가지 않았다. 촬영개시일은 다가오고 있었고 감독은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도 않았다. 여관작업은 내가 제의한 것이었다. 여자작가를 택했기 때문에 불이익을 당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던 나의 오기도 작용했다. 연출부 세 명과 함께 여관에 들었지만 나는 거기서 잘 수는 없었으므로, 아침에 그들이 잠이 깰 때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하는 편법을 썼던 것이다. 그날도 그랬다. 작가인 내가 차마 빠져나올 수가 없어서 머뭇거리다가 열두시를 십오분 남겨놓고 일어섰을 때, 닫히는 여관방 문 뒤에서 누군가 중얼거렸다.
“저 여자 남편도 참 대단하다. 나 같으면 저렇게 늦게 다니는 마누라 안 데리고 살지.”
그리고 높은 웃음소리들.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책상서랍을 열고 의미없이 지저분한 책상속을 뒤적거렸다. 툭 하고 편지가 떨어졌다. 미국에 유학중인 내 친구가 삼년 전에 보내온 편지였다.
“민희야, 제발 우리 부모님을 좀 설득해줘. 설사 그가 이혼한 경력이 있다고 해서 내가 그를 선택 못할 이유는 없어. 만일 부모님 말대로라면 우리는 시장에 가서 제일 좋은 조건의 신랑감을 골라야 해. 하지만 너도 알잖아. 우린 그저 다른 여자들처럼 그러려니 체념하면서 우리의 인생을 남편한테 얹혀살진 말자고……”
나는 편지를 읽다 말고 그 자리에 엎드렸다. 그날 아침 나는 거의 일년 만에 그 친구의 국제전화를 받았었다.
“민희야, 나 이혼해……”
그 친구의 남편은 자신이 먼저 박사학위를 받자마자 이 친구에게 학위를 포기하고 같이 모국으로 돌아가기를 종용했던 것이었다. 그 고민에 대한 편지를 받은 지 거의 이년이 지나 있었다. 가슴이 뻐근해지면서 통증 같은 것이 느껴졌지만 내 눈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나는 빠져나오지 못한 슬픔이 그저 내 어깨를 자꾸 삐그덕거리게 하는 것을 느꼈을 뿐이었다.
“저, 저……”
누군가 나의 팔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거의 발작적으로 팔을 뿌리치고 일어나 앉았다, 잠깐 여기가 어디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 앞에 옷을 단정히 입은 현이가 앉아 있었다. 현이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꿈을 꾸시는 것 같아서.”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시계를 보니 다섯시 사십분, 아직 동도 트지 않았다. 방문 밖에서 분주히 오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현이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집 대문이 열려 있었고 김만석씨와 그의 부인이 서울로 가는 트럭에 부지런히 꿀통을 싣고 있었다. 한 박스에 일리터짜리 꿀통이 열두 개씩 들어 있는데 그것을 트럭에 나르고 있는 것이었다. 안녕히 주무셨냐는 인사도 드릴 겨를 없이 나도 그들이 하는 대로 꿀통을 날랐다. 현이 어머니는 꿀통 개수를 체크하랴, 부엌에 드나들며 국을 끓이랴, 첫차를 타고 순창 읍내로 통학하는 현이의 상을 따로 차리랴 정신이 없었다.
꿀통 나르기가 대충 끝났을 때 나는 부엌으로 들어섰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아궁이와 가마솥이 놓인 부엌이었다. 민속촌에서밖에는 나는 그런 부엌을 본 기억이 없었다. 민속촌과 다른 것이 있다면 부엌 상단에 생뚱맞게 놓여 있는 가스레인지 정도일까.
아침식사를 마치고 아이들 셋이 제각기 학교로 갔다. 김만석씨도 작은 트럭을 타고 읍내로 떠났다. 부엌에 수도가 없었으므로 나는 그릇들을 모아 마당으로 나왔고 거기서 쭈그리고 앉아 설거지를 했다.
시린 손을 말리면서 툇마루에 앉아 있자니 비로소 마을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 삼십여 호 되는 마을이었다. 그러나 그중 다섯 집 정도는 빈집이었고 그나마 나머지 다섯 호 정도도 노인들이 혼자서 살고 있다고 했다. 김만석씨 댁과 이웃하고 있는 네 채의 집도 원래는 모두 빈집이었는데 그중 두 채에 노인들이 며느리와 떨어져 들어와 있다는 것이었다.
까치밥 몇 개를 남겨놓은 감나무 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푸르고 맑았지만 인기척이 들리지 않는 한옥의 그늘에는 괴기스러운 침묵만 가득 차 있었다. 노인네들 돌아가시고 나면 이제 몇집 안 남게 되겠지. 이곳에 오기 전에 자료를 읽은 바에 의하면 정부는 우루과이라운드에 대비하기 위해서 농촌인구를 오 퍼센트 이하로 줄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일인당 경작면적을 확대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내가 그 마을을 돌아보았을 때 우리의 선대들이 한톨의 낟알이라도 더 얻기 위해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자갈을 골라내고 개간해놓은 밭은 잡초 무성하게 버려져 있었다.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어서였다. 농촌인구의 고령화, 농업의 집단기계화를 고려하지 않은 채 단지 숫자상의 인구를 줄이는 일이 경지면적을 확대하는 일인 양 알고 있는 그들이 좋은 대학을 나온 유수한 농업문제 각료들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곳에 온 지 열두 시간도 안 hel는 나도 깨닫는 일을 그들이 모르고 있다니. 그것은 내가 이땅의 관료들에게 기대를 가질 만큼 순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안이하게 제시한 정책들이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삶을 훼손할 것인지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잠시 휴식을 마치고 현이 어머니와 나는 갈퀴를 하나씩 들고 뒷산으로 향했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것은 거개가 늙은 사람들이었다. 현이 어머니는 이 마을에서 삼십대 주부가 자신과 이장 부인 둘뿐이라고 했다. 역설적으로 이 마을에는 장가를 못 가 속을 태우는 농촌 총각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처녀는 물론 남아 있는 젊은이라곤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왜냐고 나는 묻지 않았다. 이 대한민국에서 그걸 물어볼 바보가 어디 있겠는가.
내가 일을 하겠다고 대갈퀴를 손에 잡을 때부터 현이 어머니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뒤숭숭한 살림에 군식객 하나 더 늘었다는 생각이 어느정도 가신 모양이었다. 우리는 대나무갈퀴로 숲에 떨어진 솔잎들을 긁어 나뭇단을 만들었다. 그 나뭇단의 구조는 도회에서 자란 내게는 참으로 신기한 것이었다. 우선 활엽수의 가지들을 낫으로 잘라 석 삼자 모양이 되게 놓은 다음 그 위에 활엽수의 잔가지들을 얼기설기 놓고 다시 솔잎 긁은 것을 올려놓았다. 소나무 이파리들은 갈퀴로 몇번 긁어주면 마치 잘 빗질된 짐승의 털처럼 일렬로 잘 누워서 빠져나가지 않았다.
이 솔잎 긁은 것을 보통사람의 키만한 길이와 허리쯤 되는 높이로 쌓고 그 위에 다시 활엽수의 잔가지를 놓고 밑에 깔아놓은 새끼줄을 들어 묶으면 되는 것이었다. 성냥불 하나만 켜 대면 곧 타 없어질 것 들이지만 하나하나 좀더 예쁜 모양으로 배치하고 좀더 단단히 묶으려는 현이 어머니의 굵은 손마디가 참으로 아름다워 보였다.
“옛날에 나무꾼들이 이걸 장에 내다 팔 때는 더 예쁘게 묶으려고 했었지요.”
어느새 볼일을 마치고 산으로 올라온 김만석씨가 말을 거들었다. 김만석씨는 우리가 묶어놓은 것들을 산 아래로 날랐다. 나는 거의 힘든 일은 하지 않고 갈퀴질만 했지만 허리가 몹시 아팠고 배도 고팠다. 나는 아침밥상에서 지레 겁을 먹고 밥을 덜어놓았던 것을 생각하며 혼자 미소를 지었다. 대학 사학년 때였던가, 여행중에 거제도에 있던 선배네 집을 들렀을 때 커다란 스텐주발에 고봉으로 밥을 퍼주시던 선배의 노모. 성의를 무시한다 생각할까봐 그 밥을 다 먹고 배탈이 나서 여행의 마지막을 죽을상을 하고 다녔던 기억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밥의 양에 대해 공포를 가졌던 것은 그만큼 내가 육체노동을 기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몰랐다.
잠시 후, 김만석씨가 무를 두 개 뽑아가지고 오셨다. 우리는 잠시 쉬기로 하고 산비탈에 앉았다. 올라올 때는 몹시 추웠는데 이제는 산위로 불어오는 찬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김만석씨는 낫으로 무껍질을 벗겨 내게 먹을 수 있겠는가를 물었다. 왜 먹을 수가 없겠는가, 나는 어른 팔뚝보다 크고 굵은 그 무를 다 먹어치웠다.
마치 우리의 옛 농부를 연상시킬 만큼 자존심이 세어 보이는 김만석씨는 내가 일하는 것을 보고 어느정도 나에 대한 딱딱한 태도와 경계심 ---- 사실 이것은 내상상에 비해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시골에 가본 경험이 거의 없던 나로서는 여섯살 무렵, 먼 친척 할머니 댁에서 내게 보여주었던 환대를 기억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월은 이미 이십오년이 넘게 흘렀고 그 세월은 이 시골사람들로 하여금 도화사람들에 대한 불신과 경계를 품게 하기에 충분한 세월이었으리라 --- 이 누그러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산 아래로 버스가 지나갔다. 이 마을에 버스가 들어온 지 겨우 오륙년. 그러니까 우리가 팔육, 팔팔 어쩌구 하며 선진조국의 꿈을 끊임없이 강요당하던 그 무렵에도 이 마을 사람들은 순창읍에서 이십여 리 길을 걸어다닌 것이었다.
“처음 시집올 때 광주 친정에서 담양으로 해서 택시를 타고 오는디 눈앞이 깜깜하두마.”
현이 어머니는 그때 일을 생각하는지 희미하게 웃으셨다.
“두 분 늘 이렇게 같이 일하시면 좀 지루하지 않으세요?”
현이 어머니와 김만석씨는 잠시 서로 마주보더니 쑥스럽게 웃으셨다.
“왜요, 없으면 오히려 힘들고 허전하제.”
김만석씨와 현이 어머니가 여자가 일을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싸우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땅바닥에 자꾸 의미없는 금만 그었다.
“아가씨는 농촌에 시집와서 살 마음이 있소?”
김만석씨가 물었다.
“아뇨.”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김만석씨도 현이 어머니도 놀라지 않았다. 우리의 고향이었던 그 푸른 농촌이 이제 그들이 낳은 젊은이들로부터 버림받는 것이 결코 땅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은 그들도 알고 있으리라.
내려오는 길에 김만석씨의 포도밭에 들렀다. 재작년에 심었다는 포도는 어려서 아직 가지들끼리 손잡지 못하고 있었다. 논농사 밭농사, 소 기르기까지 실패하고 심었다는 이국의 포도나무 밭에서 김만석씨와 부인은 심각한 얼굴로 이것저것 상의를 하고 있었다.
나는 좀 떨어진 곳에서 포도나무밭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포도는 재벌의 포도주공장에 싼값으로 팔려갈 것이고 부자들의 만찬에 애피타이저로 오를 것이다. 김만석씨와 그 부인은 저 포도주를 맛볼 수 있을까. 아마도 그들은 그 시간에 미국에서 수입된 콩으로 만든 두부를 먹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포도밭마저 실패로 돌아간다 해도 이들은 이렇게 나란히 서서 다른 작물에 대해 상의할 수 있을까.
남편의 글은 과격하거나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자꾸 되돌려져 왔다. 대신 나의 글은 그런대로 무난하다는 평을 받으며 게재되곤 했었다. 한때 우리도 저렇게 나란히 앉아 문학과 정의와 예술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를 격려했지만 그는 자꾸 슬럼프로 빠져들고 있었다.
우리가 반대의 입장에 놓여 있었다면 파국이 왔을까. 하지만 그것이 모두 그의 잘못을 아니었다.
“왜 억울하다고 하셨어요?”
잠자리에 들었을 때 현이가 겸연쩍어하면서 내게 물었다. 내가 아침에 억울하다고 잠꼬대를 했다는 것이었다.
“글쎄 난 안 죽었는데 날 보고 누가 자꾸 귀신이라고 하잖아.”
“구신요? 왜요?”
“비오는 날 흰옷을 입었거든.”
현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느끼며 돌아노웠다.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을 떠도는 귀신들은 모두 머리를 길게 풀어헤치고 소복을 한 여인네들이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이야기는 할머니에게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것이었다.
“여자들이 독하지. 니도 기가 세서 걱정이다. 여자는 그저 남편 하늘같이 받들고 자식새끼들 보믄서 살아야 하는데.”
할머니는 베갯머리에서 설핏 잠이 든 나를 바라보며 중얼거리곤 했었다. 나는 할머니에게 반박하지도 않고 그대로 콧방귀를 뀌곤 했었다. 첫날밤, 남편에게 소박을 맞고 거의 이십년을 혼자 살다가 우리 할아버지의 재취로 들어온 할머니에게 아니라고 강변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어린 나이에도 나는 그저 할머니 앞에서는 그렇다고 맞장구를 쳐주는 것이 조용해지는 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결국 할어버지의 첫번째 부인과 같은 병, 울화병으로 돌아가셨다.

그 집으로 들어섰을 때 나는 망연히 뒤를 돌아보았다. 나를 그 집에 데려다주고 현이 어머니는 벌써 길 아래로 사라지고 계셨다. 집을 잘 못 찾은 것 같았다. 내가 들어선 집은 폐가 중의 폐가였기 때문이었다. 부서진 부엌의 문, 마당 가득 쌓인 가구 부스러기들, 장독대가 있었으나 그것은 다른 빈집에도 있었던 것이었다. 서둘러 현이네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그 집의 부서진 문을 열고 키가 훌쩍 큰 여자가 나왔다.
“꼴이 심란허제? 사는 게 심란하당께.”
심란하다는 말은 아마도 집안이 어수선한 것을 말하는 모양이었는데 그 말의 뉘앙스가 이 집의 분위기와 참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부엌 앞에 놓인 바구니에서 감을 하나 골라 내게 내밀었다.
내가 툇마루에 걸터앉아 삐죽삐죽 감을 먹고 있는 동안 그녀는 고무다라이 속에 풀주머니 같은 것을 넣어놓고 맨발로 그것을 밟았다.
“내가 뭐하고 있는지 왜 물어보지 않는겨?”
나는 사실 그 집의 모양새에 대해 거의 넋이 빠져 있었고, 이런 집에서 미꾸라지를 팔아 어렵게 사는 그녀가 왜 저렇게 방실방실 웃어대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다. 김만석씨 댁이 민속촌 같은 느낌이었다면 이 집은 아예 신석기시대 같은 느낌이었다.
“뭐하시는 건데요?”
나는 마치 국민학생처럼 그녀가 하라는 대로 물었다.
“알아맞혀봐. 시큼한 건데. 남자들이 좋아하는 거/”
술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 기괴한 분위기 속에서 그녀와 스무고개를 할 생각은 없었다.
“몰러? 누룩 뜰 밀이여. 술 담그려고. 누가 부탁을 혀서.”
그때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방안에서 기척이 났다. 사람의 소리라고 하기에는 아주 낮고 쉰 목소리였다. 이 집에 왹 전에 현이 어머니에게서 이 집의 남편이 알코올중독자라는 말을 들었는데 저 목소리가 사람의 것이라면 그 남편이리라.
“손님 왔응께 조용히 있어요. 나 밭에 갔다 올 테니께.”
그녀는 내게 한 눈을 찡긋하더니 나를 잡아끌었다. 커다란 고무대야와 마부대를 들고 우리는 밭으로 향했다.
“처녀가 이런 데 혼자 오면 집에서 걱정들 안혀?”
“저 처녀 아니에요. 아이도 하나 있어요.”
내가 철부지 아가씨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는 편이 이야기하기가 쉽겠기에 그렇게 말했다.
“그럼 남편은?”
“서울에요.”
“왜 같이 안 오구?”
“잡지사 부탁으로 취재하러 왔는데요.”
“아아, 난 또 혼자 방황하러 왔는 줄 알았제.”
시골 아낙의 입에서 나오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던 말이었다. 나는 픽 웃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왠지 그녀가 묘하다는 생각을 했고 가슴 한구석을 찔리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순임이가 대학에 가고 싶어한다면서요?”
“아이들 셋이 모두 공부를 잘하니 걱정이제. 하지만 딸년 대학 보낼 돈이 어딨어? 지는 장학금 받을 수 있는 데로 간다고 하지만……”
말투는 어두웠지만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자랑스러웠다.
나는 그녀를 따라 시커먼 결명자를 털었다. 좁쌀보다 조금 큰 알들이 우르르 흩어졌다.
“우리 밭 꼴도 심란허제? 남들은 발써 다 거둬들였는데 어디 내가 시간이 있었어야제…… 아까 순임이 야그가 나왔으니 말인데, 지난봄에 순임이랑 같이 핵교 댕기던 기집애 둘이 부산 신발공장으로 떠났어. 속으로 저것이 쟈들이랑 같이 간다 그라믄 얼매나 좋을까 생각이 들더만…… 내 한번은 핵교 그만두라고 했더니 글쎄 이것이 사흘 동안 밥을 안 먹더라구. 내가 졌제. 헌데 신랑은 뭐해?”
“……글써요.”
“그랴. 같이 글쓰고 좋겠네. 근데 연애했나봐?”
“그랬죠.”
내는 내가 결혼했다는 말을 한 것을 후회했다. 그녀는 끊임없이 내게 물었다. 아이는 몇살이냐, 지금 누가 보느냐, 남편이랑 사이는 좋으냐.
“고추가 시들었네요.”
나는 결명자를 털다 말고 고추밭으로 갔다. 다 붉어지지 못한 고추가 그저 약만 바짝 오른 채 시들고 있었다.
“놔둬, 따봤자 똥금이여. 우리 식구 먹을 것만 대강 땄어.”
하지만 나는 고추를 땄다. 오랜 시간, 인간의 지혜와 노동이 뿌린 씨앗에 대해 대지는 평등한 선물을 주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것조차 다 거두어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거의 날이 어둑해졌을 때 나는 마대 가득 고추를 딸 수 있었다. 고추 딴 것을 어깨에 지고 우리는 함께 그녀의 집으로 갔다. 국민학교 삼학년짜리 막내가 돌아와 있다 그녀를 보자 달려와 짐을 받아들었다.
그녀는 가려는 나를 억지로 잡아앉히며 꼭 저녁을 먹고 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 알코올중독자 남편이 마음에 걸렸다. 술에 젖어 있는 사람이라면 낯선 여자 앞에서 발작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나의 마음을 읽었는지 그녀가 말했다.
“행패는 안 부려. 원래 저런 사람이 아니었어.”
나는 묻고 싶었다. 아저씨와 이혼하고 싶은 생각은 안해보셨어요?”
“밉제. 밉당께.”
그녀는 또 웃었다. 밉긴 왜 미워 하는 얼굴이었따.
“들어가, 찬데. 얼렁.”
나는 하는 수 없이 장지로 안방과 통하는 아이들의 방으로 들어섰다. 열린 장지문 사이로 순임 아버지의 가래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평 좀 넘을까, 서까래에서 금방이라도 흙이 와르르 쏟아져내릴 것 같은데 알전구가 휑뎅그레 매달려 있고 흙이 드러나도록 좀 작은 비닐장판이 깔려 있었다. 커다란 쌀독과 아이들의 앉은뱅이책상이 하나 있을 뿐, 을씨년스러운 방이었다.
그녀는 낡고 때묻은 이불을 내 무릎 위로 덮어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 고상한 거는 말로 다 못혀. 우리 둘째녀석은 나가 길바닥서 났는디……”
그녀는 마치 옛친구를 만난 듯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아, 순창 시장서 시금치를 파는디 아가 나오려고 하는겨. 이십리 길을 걸어 집으로 올 수도 없고, 그렇다고 길바닥서 낳을 수는 없고 혀서, 나도 모르겠다, 읍내 산부인과로 달려갔지. 헌데 병원 문을 여는디 그만 그 녀석이 나와버린겨. 난생 처음 병원 침대에 누워 호사스레 지냈제…… 이 야그가 여러 책에 나왔어.”
그녀는 방구석에서 소책자 몇권을 꺼내서 내게 보여주었다. 전북 여성농민회 같은 단체들에서 낸 소책자였다. 알코올중독인 그녀의 남편을 부양하며 사는 그녀의 이야기가 고난받는 여성의 표본으로 고통스레 그려져 있었다. 그런 이야기라면 여러 번 읽은 일이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 주인공인 그녀가 자랑스레 웃으며 그런 말을 꺼낼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었다. 더더구나 나보다 더 행복한 얼굴로 살아갈 것이라고는. 나는 갑자기 할말이 없었다.
“저, 아저씨는 하루 종일 뭐하세요/’
“그냥 있제.”
여러 번 물었지만 똑 같은 대답이었다. 그냥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나는 다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 짓도 안한당께. 그냥 하루 종일 누워 있다가 일어나고 또 눕고 그랴.”
“술은?”
“못 마시게 혀도 소용없어. 딱 끊어버리믄 되는디, 그라믄 될 텐디.”
“병원에라두…… 아니면 여러 어른들이 지키고서 한 일주일간이라도 술을 못 드시게 하면……”
“안돼. 그라면 저 냥반은 죽어.”
나느 ㄴ상식적으로 말해본 것이었으나 그녀는 뜻밖에 완강했다. 나는 갑자기 그녀가 나를 향해 단단한 자물쇠를 채우는 것을 느꼈다.
“글쎄 우리가 이해 못하는 점이 바로 그거야. 술을 못 먹게 하믄 되는디 사다준단 말이여…… 젊었을 때 순임 아버지가 인물 좋아 바람을 좀 폈지. 순임 어매는 그저 남편이 허튼짓 안허고 집에 있는 것만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 같어.”
현이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저녁이 준비되었고 나는 순임 아버지와 대면하게 되었다. 까맣게 타들어간 얼굴, 초점 없는 눈동자. 한때는 건강했으나 바스러질 것처럼 마른 몸. 막상 밥상을 대하고 마주앚자 오히려 쓰잘데없는 두려움 같은 것은 일지 않았다.
“원래 술을 입에도 못 댔더랬는데, 뭣이냐, 그 노풍벼 땜시 빚지고 소 키우다 망하고 그 담부터 이렇게 되았어.”
안방 벽면 높은 곳으로 흑백사진이 걸려 있었다. 희고 맑은 얼굴, 감수성이 예민해 보이는 눈. 순임 아버지의 사진이었다. 밥을 씹다가 갑자기 목이 메어왔다.
저 영민한 청년은 왜 이 값싼 소주에 제 몸을 버리는 늙은이가 되었는가, 순임 어머니는 왜 치매상태로라도 남편을 붙들어매놓지 않으면 안되는가, 순임이는 왜 공부를 잘하는가, 공부를 잘하는 순임이는 왜 대학에 갈 수 없는가, 순임이의 친구들은 왜 모두 신발공장으로 떠나버렸는가, 왜 이곳에선 소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왜 콩밭은 포도밭이 되었는가, 왜 그는 나를 그토록 자신 속에만 가두고 싶어했을까, 나는 왜 모든 걸 버리고 이곳까지 와 있어야 했던가.
나의 괴로움은 내가 그 모든 것의 대답을 알고 있다는 데 있었고, 그러면서도 그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데 있었고, 또 내가 순간적으로 포착한 절망을 아득하고 여우언한 것으로 믿고 있었다는 데 있었다.


하늘은 아주 맑아 있었다. 버스는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는 마을 어귀에 서 있었다.
“그래, 사흘 묵고 나서 농촌에 대한 기사를 쓸 수 있겠어요?”
김만석씨가 웃으며 물었다.
나는 혼자서 고개를 저었다. 걸코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암바도 쓰기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누가 우리의 이 아름다운 땅과 마음을 황폐하게 했는지, 무엇이 우리 서로를 가두어 물어뜯고 할퀴는지. 나는 적어도 이제는 내 머릿속에서 미리 만들어놓은 관념으로 사람을 재단하지는 말아야 했다. 회피하지 않고 나가고 싶었다.
“내일은 장날이라 마중 못허겄네. 시장으로 들를쳐?”
어제는 생각해보겠다고 말했으나 나는 순임이 어머니에게 들르지 않기로 결심했다.
나는 갑자기 불행 앞에서 그녀가 그토록 행복해할 수도 있는가 하는 따위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를 깨달았던 것이다. 내가 들르든 그렇지 않든 그녀는 그녀의 방식대로 살아갈 것이다. 그녀는 행복했던 것이 아니고 말할 수 없이 꿋꿋했던 것이다. 절망 따위의 말 같은 건 그녀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방황하러 온 게 아니고?”
어떻게 보면 시골 아낙이 뱉기에는 너무도 문학적인 말을 뱉어놓고 결명자를 쓱쓱 베던 그녀였다.
그리고 버스가 왔다.
"참 감사했습니다.”
읍내로 가는 할머니들이 올라타고 내가 맨 마지막에 탔다. 김만석씨 부부가 오래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멀어져가는 순안마을의 모습을 보면서 이제 다시 절망이라든가 하는 말은 결코 쓰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하지만 이제 그 절망을 버리고 어디로 가는지 알 수는 없었다.
나는 서울로 가는 직행버스를 타기 위해 순창읍에서 내렸다.  

(1992, 샘이 깊은 물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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