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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로 고래잡는 글쓰기 - 글 못 쓰는 겁쟁이들을 위한 즐거운 창작 교실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3월
평점 :
절판
'글 못 쓰는 겁쟁이들을 위한 즐거운 창작 교실' 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과연 글을 못 쓰는 것은 겁이 많아서일까?
어제 남편이 다음 달부터 지역에서 발간하는 조그만 잡지에 남편 전공과 관련된 글을 한 꼭지씩 써주기로 했다면서 나보고 쓰란다. 농담으로 하는 말인지는 알지만 이유를 물었더니 무엇을 써야할지 모르겠단다. '아무거나 쓰면 되잖아. 일반인들을 상대로 하는 글이니 쉽게 쉽게.' 그랬더니 그게 더 어렵다고 한다. 아무래도 논문 쓰듯이 쓸 것 같다면서. 논문 쓰듯이 쓰면 어떠냐, 일단 쓰고 나중에 고치면 되지. 이거 가리고 저거 가리니까 쓸게 없는 거 아니겠냐면서 주제 넘는 참견을 했다.
어떤 경우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어딘가 끄적거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때도 있는데 그건 아마 아무런 제약이 없고 누가 읽을 거란 단서가 없는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
사실 이 책에서 말하는 글이란 신변잡기의 글보다는 만들어내는 이야기, 즉 '소설'을 주로 말하고 있다. 글의 성격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흉내내는 글은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다. 물론 어떤 사람의 문체가 마음에 들어 필사를 하는 경우는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필사이고, 나만의 글을 쓸 때는 누구의 글, 그 시대에 유행하는 문체,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주제를 지나치게 의식하기 보다는 우선 내가 제일 잘 쓸 수 있는 글, 내가 정말 쓰고 싶은 글,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만드는 그런 소재를 가지고 써야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에리히 케스트너의 <에밀과 탐정들>을 예로 들면서 당신은 당신의 <에밀과 탐정들>을 쓰라고 한다. 여기서 <에밀과 탐정들>이란 나만이 쓸 수 있는, 내가 아니면 쓸 수 없는 그런 소설을 말한다. 어느 누구라도 쓸 수 있는, 누군가 나 대신에 얼마든지 써줄 수 있는 그런 소설, 만드시 나이어야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그런 소설을 쓰지 말라고 한다. 동감, 동감!
언젠가 동화를 쓰는 임 정진 작가의 홈페이지에서 읽은 글이 생각난다. 글은 성격대로 쓴다는 것이다. 본인이 아무리 나타내지 않으려고 해도 성향이 발랄한 사람은 그런 글을 쓰고 반대로 우울한 성향의 사람은 아무리 발랄하고 통통 튀는 글을 쓰려고 해도 우울한 기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모든 사람이 같은 색깔의 글을 쓰겠는가. 밝고 희망적인 내용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가라앉은 분위기, 우울한 이야기를 읽으며 위안을 받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남들의 개성에 자기를 맞추려 하지 말고 차라리 자기의 색깔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변화를 모색해보는 것이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을 감소시키지 않을까 생각한다.
소설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장난감 상자라고 말하는 저자의 경력을 보니 별로 평탄하다고 할 수 없는 세월을 보낸 듯 하다. 학생 운동으로 구금되었다 나온 후 실어증에 빠지기도 했고 발표한 첫소설의 혹평을 딛고 일어나기 위한 노력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그는 현재 일본 문단의 질투를 한몸에 받고 있는 독특한 문체의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첫 행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면 이런 것은 어떨까 하며 그가 다음의 두 문장을 제시한다.
"생일 축하한다!" 나의 아버지가 말했다.
그는 외투 호주머니에서 한 권의 책을 꺼내 내게 건넸다.
흐흠. 이 문장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그 책은 내가 평소에 가지고 싶어하던 바로 그 책이었다' 이렇게 평범하게 쓰고 싶지 않다면
'선물이라고 하기엔 다 낡아빠진, 거의 너덜너덜해진 공책이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는 어떨까.
'책인줄 알고 받아든 그것은 책 모양의 작은 나무 상자였다.' 는?
'그것은 잃어버린 줄 알고 내가 그토록 찾고 있던 엄마의 일기장이었다.'
첫 행만 누가 시작해주어도 이어가기는 훨씬 덜 어려워지는데 말이다.
저자가 팁으로 제시한 몇가지 사항을 적으며 마치자.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은 상태를 충분히, 마음껏, 실컷 즐긴다.
-전혀 관계없는 것을 생각한다.
-정말로 알고 있는 것, 그것부터 시작한다.
-이야기는 쓰는 것이 아니다. 붙잡는 것이다.
-철저히 생각한다. 그리고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다시 생각한다.
-이야기는 다양한 곳에서 돌연 태어난다.
-자기만의 이야기를 써라. 다만, 아주 조금 즐거운 거짓말을 넣어서.
함께 어린이책 공부를 하고 있는 분의 권유로 읽게 된, 제목도 처음 들어보는 책 치고는 꽤 유쾌하게 읽어내려간 책이었다.
전혀 관계없는 것을 생각하라는 저자의 팁이 여운을 남긴다. 작가들의 머리 속이 평소에 어떤 상태일지 그려져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