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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 김이설 소설집
김이설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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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전작 '나쁜 피'를 읽고서 이 현수 작가의 '토란'을 읽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고 리뷰에 썼던 기억이 있다. 한 대에서 끝나지 않는 여인의 비극적 삶의 퍼레이드 라는 점에서일 것이다. 이번에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을 읽으면서 그 느낌이 계속되는 것을 보니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그냥 '느낌'은 아니었나보다. 그때 리뷰의 제목을 '보지 말았어야 할 인생의 비밀'이라고 붙였었는데 이 책의 제목과 어딘지 일맥상통하는 것도 같고.
 
1. 우리가 아는 삶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삶은 아니다.
구걸하는 엄마와 함께 노숙생활을 하는 소녀, 그녀의 미래 역시 엄마의 삶에서 전혀 나아질 것 같지 않으며 ('열세 살'), 가족의 빚을 떠안고 법대생이면서 대리모인 그녀, 그녀의 의뢰인, 그녀의 엄마, ('엄마들'), 어릴 때 엄마로부터 버려지고 아빠 아닌 아빠로부터의 끈 역시 놓아지려하자 그 상상만으로도 깊은 상처를 견뎌낼 엄두를 못내는 여자 ('순애보'), 결혼 후 자궁경부암 선고를 받은 여자의 병수발을 들어주던 엄마가 자궁암말기 판정을 받게 되고, 남편에게 이혼 요구를 하는 그녀에게 이제 더 이상 보낼 무엇이 남았는가 ('환상통'). 어린 것을 안고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던 해내야 했던 그녀가 마지막으로 해낸 일은 남자를 죽여서 고깃간의 냉동고에 가둬버린 것 ('오늘처럼 고요히'). 온라인을 통한 세계에 의지하며 사는 그에게 문득 모르는 사람의 손에 애착이 생기게 된 것은 무슨 의미일까 ('손'). 무대에 서서 관객을 기쁘게 하고, 무대에서 내려와서는 외로운 남자들을 위로해주는 무명 여배우의 삶은 또 어떻고 ('막'), 아무리 매일 얼굴을 보는 이웃에게도 좀처럼 보여질 수 없는 사람의 깊은 내면과 상처는 또 어쩌란 말인가 ('하루').
그래, 이런 삶이 여전히 이 세상에는 존재하고 있어. 너는 너의 고민에 묻혀 너를 중심으로만 이 세계를 보고 있지만, 네가 모르는 가운데 존재하는 이런 세상도 있단 말이야,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줄곧 내 자신에게 얘기하고 있었다. 

2. 그럼에도 삶에 대한 의지를 잃지 않는다
벙어리 흉내를 낼 것을 지시받은 열세 살의 여자 아이가 지하철 계단에서 엄마가 구걸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낡은 옷차림을 제외하면 길에서 보는 내 또래의 아이들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데 화장실을 사용한 사람들은 거울 앞에 있는 나를 흘깃거리며 지나갔다. 나는 거울 앞에서 표정 바꾸기 놀이를 했다. 착한 어린이 표정, 나쁜 어린이 표정, 불쌍한 어린이, 우는 어린이, 싸가지 없는 어린이, 섹시한 어린이. 씨발, 자꾸 쳐다보지 말라니까! (21,22쪽)  
   

 자기를 쳐다보는 사람들에 대한 이런 거부감은 곧 자신을 따돌리려는 이 세상에 대한 거부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열세 살 소녀도 반짝이 스타킹을 가지고 싶어 했으며 '혹시 신발을 잃어버리면 왕자가 나타날까 (11쪽)'  하는, 막연하지만 엄연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내고 있었다. 대리모 그녀가 시간 있을 때마다 맞추던 퍼즐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없어진 조각 하나는 불구가 된 미완성의 예고임에도, 그 한조각의 틈새가 숨통처럼 보였다는 것은 틈새처럼 여전히 남아 있는 희망을 의미한다고 보여졌다. '순애보'에 등장하는 꿩은 열세 살 소녀의 반짝이 스타킹, 대리모 여대생의 퍼즐 한 조각과 같은 역할로 삽입되지 않았을까? '오늘처럼 고요히'에서 여자가 자신의 삶과 연관지어 생각했던 것은 남편인지, 아니면 혜경 엄마인지는 아직도 모호한 채로 남아있다. 

   
  아가야, 일어나, 밥 먹자, 혜경이가 말간 얼굴로 일어났다. 나는 새 내복으로 갈아입혔다. 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혜경이는 찬물을 한 대접 마신 뒤에 숟가락을 들었다. 혜경이와 나는 이마를 맞대고 미역국을 마셨다 (162쪽).  
   

작가의 이야기 속에 자주 등장하는 따뜻한 밥상으로써 이 이야기 역시 맺음을 하는데, 어떻게 보면 밥상을 차리는 것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서 등장하는 이 밥상. 밥을 하고 국을 끓이고 생선을 구워 밥상을 차리고, 꿋꿋하게 앉아 끝까지 다 먹어내는 모습은 곧 살아내고 말겠다는 의지로 읽혀서 늘 가슴이 메였다.
이 책에 실린 여덟 편의 글 중 단연 돋보였던 것은 '손'이었데, 온라인으로 물건을 구입하고, 온라인으로 여자를 부르고, 온라인으로 나의 시간을 채우며 살아가는 남자가 어느 날 새벽 현관 문 아래 통로로 우유를 집어 넣는 손을 보게 되고, 살아있는, 살아서 실제로 움직이는 사람의 손은 남자로 하여금 어떤 행동을 유발시켰던가. 우리가 사는데 필요한 모든 하드웨어를 온라인을 통해 공급받을 수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살아있는 실체와의 교감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억울한 건,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왜 그래야만 했는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88쪽).  
   

새벽 4시가 좀 넘으면 신문 넣는 소리가 들리고, 이 시각에 나만 홀로 깨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정체 모를 그 소리를 반가와했던 나의 오랜 기억이 이 작품을 읽으며 다시 소집되었고, 이 소재로 이런 글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 역시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이겠구나 끄덕여지게 했다.

우리는 흔히 '소설 같은 이야기'라는 말을 한다. 현실 같지 않은 일을 얘기할 때 하는 말이다.
나는 왜 소설을 읽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소설 같다는 그것 역시 현실에서 일어나는 삶의 한 모습인 것이다. 우리의 가슴과 머리가 아직 미치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는 삶들을 통해, 타인의 눈에는 소용 없어 보이고 처절해 보일지 몰라도 끝까지 그 삶을 부둥켜 안고 피 흘리며 걷고 있는 모습은 종교만큼 숭고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리고 곁들여, 얼마나 많은 경우의, 가지 각색의 삶을 보고난 후에야 나는 삶을 조건없이 끌어 안을 수 있게 될까, 삶을 안다고 말할 수 있게 될까 조용히 자신에게 물어보게 되었다. 소설은 나로 하여금 그런 단계에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해주는 그 무엇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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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0-04-02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맘이랑 참 비슷한 생각 하셨네요.
이런 삶이 주변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겠죠. 삶을 안다고 하기엔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들의 아픔을 어떻게 보듬어 안아야 할까요?

hnine 2010-04-02 22:01   좋아요 0 | URL
아, 세실님도 그러셨군요. 읽는 내내 말씀하신대로 부끄럽기도 하고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그랬어요. 우울한 소식들이 많이 들려오는 요즘, 삶의 의욕도 떨어지는 것 같았는데 오히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래도 꿋꿋해야 한다고 가르침을 받는 것 같았습니다.
금요일 밤이네요. 이번 주는 지난 주보다 기운이 좀 나셨었는지요? 그러셨으면 좋겠어요. 오늘 편히 주무시고요.

... 2010-04-02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서 "손"을 읽어봐야 겠군요.
잘 읽고 추천하고 갑니다.

hnine 2010-04-03 05:34   좋아요 0 | URL
우유를 배달하는 손은 아니었지만 위에 썼듯이 저도 식구들이 아직 모두 잠자는 조용한 새벽 매일 같은 시각에 엘리베이터가 끽 멈추는 소리, 신문이 현관 밖에 툭 떨어지는 소리를 듣던 기억이 되살아나서 그 단편을 더 흥미있게 읽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브론테님은 어떤 느낌으로 읽으실지 궁금해지네요.

2010-04-03 08: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19 14: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03 2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04 05: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05 04: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lazydevil 2010-04-06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의 모든 여인들에 대한 소설이군요. 나인님의 리뷰만 봐도 좋은 이야기들이네요.
읽어봐야 겠네요. 근데 표지그림이 너무 무서워서요...

hnine 2010-04-06 13:09   좋아요 0 | URL
세상의 모든 여인들에 대한 소설. 아, 그래서 더 마음으로 다가왔나봐요.
남자들도 그럴까요? 여자들에게는 소설 속의 여인들의 삶이 그저 남의 얘기로만 보아지지 않는 것 같아요.
표지 그림, 실제로 보면 무섭기보다는 좀 슬퍼보인답니다. 우는 모습을 연상시키거든요.
lazydevil님께서는 이 책을 어떻게 읽으실까 궁금하네요.

같은하늘 2010-04-08 0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구입해 놓고 아직 못보고 있어서 리뷰를 안보려 했는데 결국 보고 말았답니다.^^

hnine 2010-04-08 05:32   좋아요 0 | URL
저도 다른 분들의 리뷰 다 읽어보고서 책 읽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읽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할머니의 레시피 - 레벨 3 익사이팅북스 (Exciting Books)
이미애 지음, 문구선 그림 / 미래엔아이세움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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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가족'이라는 단어보다 더 피부로 와닿는 우리 말은 한 솥밥을 먹는다는 뜻의 '식구'가 아닐지.
여름 방학을 맞아 바쁜 엄마 아빠 품을 잠시 떠나 시골 외할머니 댁에 내려가서 지내게 된 초등학교 5학년 서현이는, 방학 숙제를 안해도 된다는 것과 예쁜 블라우스 인형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 때문에 내려오긴 했지만 막상 내려오고 나니 할머니의 그 투박하고 거친 말투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시골집,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는 심심한 시골 생활로 만족스럽지 못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그러던 중 매일 매일 할머니께서 만들어주시는 음식으로 차려진 밥상에서 할머니와 함께 밥을 먹으며 조금씩 할머니와 친하지게 되고, 사먹는 음식이 아닌 손수 만들어주시는 음식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옆에서 지켜보며 할머니와의 사이에 비로소 따뜻한 유대 관계가 형성되어 간다.
매콤달달 양념 찜닭에서부터, 주물럭주물럭 감자떡, 약고추장, 추어탕, 상추 시루떡, 오미자편, 약과, 정구지 찌짐, 제물칼국수, 증편에 이르기까지, 실제 레시피가 할머니의 말투 그대로 책 내용으로 소개되어 있는데 어떤 재료가 몇 그램, 몇 숟가락 식은 아니지만 그 음식을 만드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머리 속에 그려지게 하는 레시피였다. 내게도 처음 보는 음식의 이름도 있었는데 정구지 찌짐의 정구지는 부추를 뜻하는 것이라고 하며, 감자떡은 먹기는 많이 먹어보았지만 감자를 가지고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는지는 이 책을 읽으며 처음 알았다. 오미자편은 본적도 먹어본 적도 없는데 아마 말랑말랑한 우리식 젤리 같은 것이 아닐까 짐작 되고, 국수 장국을 따로 만들지 않고 국수 삶은 물을 그대로 국물로 이용한다는 제물칼국수도 처음 들었다. 고디국의 고디를 책 속의 우리 서현이도 '고등어'로 알아듣더니 나도 그것이 '다슬기'를 뜻한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상추 시루떡은 그 중에서 제일 해보고 싶은 음식. 떡을 만들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고수레'라는 것도, 어떤 과정으로 한다는 것도 처음 배웠다.
과연 우리 음식을 만들면서 배우는 것은 단순히 그 요리법이 아니라, 기다려서 얻을 수 있다는 것, 그 기다림에 대한 가르침이 아닐까. 지갑에 돈만 있으면 언제든지 그 돈으로 원하는 음식을 '사'먹는 시대에 살면서 우리는 기다린다는 것에서 자꾸 멀어져 간다.  
할머니와 정이 잔뜩 들었지만 방학이 끝나서 서현이는 외할머니께서 혼자 계신 집을 떠나 엄마 아빠가 계신 집으로 돌아오고, 다음 방학이 될 즈음 할머니가 문풍지에 손으로 직접 쓰신 편지와 음식 만드는 방법에 대해 쓰여진 노트를 전해 받는다.

   
  서현이 니가 내보고 부뚜막 각시라 불러 줘서 참말 고맙대이. 평생 아무 것도 아니었던 촌 할마시가 우리 서현이 덕에 뭔가가 되었는 기라. ... 우리 서현이는 내 마음을 몰랑몰랑하게 요리할 줄 알았으이끼네 진짜로 훌륭한 요리사였는기라....내하고 있어 줘서 고맙대이. 참말 고맙대이. 요리사가 되었으면 좋았을낀데 하면서 내처럼 죽기전에 후회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내가 뭐가 되어서 참 좋았다고 뿌듯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라. 알았재? (203, 204쪽)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말투를 그대로 따라 읽고 있었다.
실제로 어릴 때 외할머니와의 추억을 되살려 쓰게 되었다는 저자의 후기가 참 진솔하다. 가슴에 남아 있는 추억을 이렇게 고운 이야기로 엮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부터 나도 매일 타성에 젖어 밥상을 차리기 보다는 이렇게 새로운 의미를 더 할 수 있을 것인가. 할머니가 편지에 쓰신 다음과 같은 말씀이 떠올려 질 것인가.

   
  특별한 맛내기가 어딨겠노? 내 생각엔 그런 게 있다 카면 그거야말로 '정성'이 아니겠나. 음식 만들 때는 이 음식을 먹은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기라. 그라면 씻고 썰고 볶고 끓이고 버무리는 기 쪼매 귀찮고 성가셔도 대충 건너뛸 수가 없재. 그기 바로 특별한 맛내기다 아이가. (199쪽)  
   

할머니의 레시피 만큼이나 소박하고 담담하게 쓰여진 따뜻한 책 한권과 만나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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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0-04-02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렇게 멋진 리뷰를 ^^

hnine 2010-04-02 16:32   좋아요 0 | URL
이 책 순전히 하늘바람님 리뷰 보고 읽게 된 책이랍니다.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감사드려요.

bookJourney 2010-04-04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장을 한참 비워내야 하는데, hnine님 리뷰를 보니 다시 책 욕심이 스물스물 생겨요. --;

hnine 2010-04-04 17:20   좋아요 0 | URL
지금 '뢰제의 나라' 리뷰 쓰던 중에 책세상님 댓글을 보았네요.
저처럼 되도록 책 안사고 빌려보는 주의에, 그나마 산 책도 잘 안 쌓아두고 비워내는데 선수임에도 책이 어느새 자리를 못찾아 방바닥에 쌓이기 시작하는걸요.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이 책도 도서관에서 빌려다 봤어요.
저야말로 책세상님 서재에 가면 아이가 읽으면 좋을만한 책들이 어찌나 많은지 노트에 적어놓기 바쁘다니까요 ^^
 
두로크 강을 건너서 웅진책마을 14
김서정 글, 한성옥 그림 / 웅진주니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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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김 서정은 아동 문학 서적의 번역, 평론으로 많이 알려진 분. 이 소설은 그녀가 펴낸 첫번 째 장편 소설이라는 점에서, 또한 그것이 환타지 소설로 분류되는 내용이라고 하여 관심을 가지고 읽어 보게 되었다.
제목의 '두로크 강'은 실제로 존재하는 강은 아니고 두만강과 압록강을 합쳐서 만들어낸 이름이라고 한다. 작가의 말에서도 밝혀 놓고 있듯이 이 책에 대한 구상을 하게 된 것은 탈북자가 많이 건넌다는 연변의 두만강 가를 방문하고 나서라고 한다. 꿈꾸는 세상으로의 탈출을 위해 목숨을 걸고 건넌다는 그 강을 제목으로 내세운 데에는 어둡고 힘든 현실 속에 처해 있으면서 그 힘겨운 시기를 헤쳐나오려는 사람들, 특히 아이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마음이었다고 한다.
주인공들의 이름도 특이하다. 애이라와 챌리. 부모님이 늦게 까지 집에 돌아오시지 않던 어느 날 애이라와 챌리 자매는 영문도 모른채 군용 트럭에 태워진 채 비론이라고 불리는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내진다. 온통 회색으로 둘러 싸인 그곳에는 다섯 살에서 열 다섯 살 까지의 다른 많은 아이들이 수용되어 있었고 모두들 무표정한 책 시키는 대로 일하고 주는 대로 먹으며 죽음, 자살, 질병, 그리고 질병에 걸린 사람들에 대한 처치, 굶주림, 견디기 힘든 추위 등 그 곳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상황들을 그저 버텨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들의 적나라한 묘사가 이 책을 읽는 아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 곳에서 유일하게 친하게 지내던 친구 재후의 자살 사건 이후 애이라는 꿈결에서 들은 것 같은 '두로크 강을 건너라'는 지시를 따라 동생 챌리를 데리고 비론을 탈출해 두로크 강까지 가는 모험을 하기로 작정하게 된다. 어린 나이에 굶주림과 추위를 견디며 무작정 나선 길이 순조로울 리가 없다.
그래서 고생 고생 끝에 두로크 강에 이르고 무사히 그 강을 건너는 것으로, 그래서 탈출에 성공하는 것으로 이 소설이 끝나느냐. 작가는 그렇게 뻔한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마지막 장을 덮는데 마치 얼마 전에 사람들 사이에 화제거리가 되며 종영되었던 어떤 드라마의 결말이 생각나기도 했고, 영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마지막 장면이 연상되기도 했다. 구름 위에 하얀 성이 보이고, 그곳을 향해 두 팔 벌리고 나아가는 동생 챌리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마지막 그림. 작가는 무엇을 마음에 품고 있었을까.
그림을 그린 한 성옥 역시 그림 작가로 많이 알려져 있는 분. 표지의 회색 첩첩 산중, 그 앞에 펼져진 두로크 강의 푸른 물결, 중앙에 보일 듯 말 듯한 두 아이의 모습이 보이는가. 저 산속을 헤매고 다녔을 두 소녀의 모습이. 

문득 나는 그 어떤 형태의 두로크 강을 만난 적 있던가 생각해본다. 그 강 앞에서 나는 어떤 태도를 취했었던가. 설사 애이라와 챌리와 같은 용기를 내지는 못했을지라도, 인생은 피해갈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내 자신에게 다시 한번 다짐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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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뛰노는 땅에 엎드려 입맞추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아이들이 뛰노는 땅에 엎드려 입 맞추다
김용택 지음, 김세현 그림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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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용택 시인의 짧고 솔직 담백한 글 스타일은 많은 사람에게 익숙하기 때문에 이 책을 받았을 때 특별한 것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표지 디자인과 글씨체, 그리고 본문에 실린 그림이 글의 성격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림이 어딘지 낯익다 했더니 내가 아는 책 중 '청구회 추억'의 표지 그림을 그린 김 세현 화가의 작품이었다. 동양화의 담묵 속에서도 화사하게 생명력이 느껴지는 그림들 때문에 사진을 찍어놓고 싶어졌다.



 

 

 

 

 

 

 

 

 

 

 

 
누군가 그의 시를 읽으면 나도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고 그의 산문을 읽으면 나도 그 정도는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했지만, 이렇게 담담하게, 멋을 부리지 않고 먹색의 글을 쓰는 것이 그리 쉬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겉옷보다는 속옷이 깨끗한 사람
속옷보다 피부가 깨끗한 사람
피부보다는 그 속의 피가 깨끗한 사람
맑은 피보다도 영혼이 깊고 깨끗한 사람
.......이런 말도 모르고 그냥 사는 사람
(28쪽, '그냥 사는 사람')

 위의 네줄은 혹시 누구나 쓸 수 있을지 몰라도 마지막 줄의 '이런 말도 모르고 그냥 사는 사람'이란 문구는 김 용택, 그이기에 붙일 수 있었지 않았을까. 

간간이 그가 가르치던 아이들의 시도 들어가 있다. 그의 시보다 더 놀라운 것은 바로 이 아이들의 시였다.
벚꽃을 보면 마음이 조용해진다, 나는 그게 아주 좋다는 1학년 아이의 시에서, 겨우 여덟살 되었을 아이가 마음이 조용해진다는 표현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의외였다. 그게 아주 좋다고까지.

 

 

 

 

 

  

 

 

 

 

 

 


이 시인의 생각하는 사랑이란 무엇일까. '늘 보이던 것이 오늘 새로 보이면 그것이 사랑' 이란다. 끄덕끄덕. 늘 보이던 것을 새로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사랑은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겠구나.

사람들은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보다 큰 책은 없다.
사람이 길이다.

 이것은 '내 생의 길  (65쪽)'이라는 글 중의 일부. 책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일침이 될만한 글이다.
60이 넘어서까지 고만고만한 아이들과 보낸 시간들. 꾸밈없고 생각대로 행동하는 아이들이기에 힘도 들고 감동도 끊이지 않았던 시간들이었음을, 저자가 그 시간들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고스란히 들어있다.

오늘 저녁에 학예회를 했다.
연습을 하다 말고 성민이가 보이지 않았다. 성민이가 수돗가에서 혼자 울고 있었다.
왜 우느냐고 해도 대답은 하지 않고 닭똥 같은 눈물만 흘린다.
교실로 데리고 들어가 다시 물었더니, 오늘 아빠도 할머니도 오시지 않는다고 했다며 더 운다. 얼른 끌어안고 등을 쓸어주며 나도 울었다. 아이를 안고 이렇게 울긴 처음이다. 성민이도 나를 꼭 안고 더 운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다.

 209쪽의 '아이와 함께 울다' 라는 제목의 글이다. 정년 퇴직과 함께 이런 아이들 곁을 떠나기가 얼마나 어려웠을지 짐작이 간다.

  

 

 

 

 

 

 

 

 

 

 

 

 

 

 
 


아마도 퇴직하고 2년 후인 지금 이 책을 내면서 더욱 그리움이 더했을 것이다.

 



 

 

 

 

 

 

 

 

 

 

 


그 그리움과 애정이 어디 갈까. 지금도 그는 여전히 이렇게 소박하고 뭉클한 글을 쓰고 있으리라.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우리에게 노래처럼 들려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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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3-31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그림 보니까 신영복 선생의 '청구회 추억' 그림이랑 같아요.
얼른 책꽂이에 꽃힌 책 찾아보니 김세현 그림 맞네요.^^

hnine 2010-03-31 01:39   좋아요 0 | URL
곧 날라갑니다~ ^^

카스피 2010-03-31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그림이 넘 귀엽네요^^

hnine 2010-03-31 18:56   좋아요 0 | URL
보고만 있어도 절로 마음의 긴장이 풀어지는 그림들이어요.

꿈꾸는섬 2010-03-31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 싶게 만드는 페이퍼로군요.^^
김용택 선생님의 수더분하던 모습이 생각나요.ㅋㅋ
글도 그림도 모두 예쁜 책이군요.

hnine 2010-04-01 06:25   좋아요 0 | URL
꿈꾸는 섬님, 직접 만나보셨군요.
저 그림 작가 이름은 꼭 기억해놓고 싶어요.
먹색깔이 나타나 있는 윤곽선도 좋고, 판화처럼 명쾌한 저 큰 꽃 그림도 좋고요.

같은하늘 2010-04-01 0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웅~~ 저 이 책 너무 보고싶었는데...

hnine 2010-04-01 06:26   좋아요 0 | URL
서평단 덕분에 나오자마자 받아서 읽게 된 책이지요.
이 책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은시네요.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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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괜찮다.

   
  '다 괜찮다' 고 쓰신 걸 보니 하나도 괜찮지 않군요! 그렇죠?' (128쪽)  
   
아니요 라이케씨, 정말로 괜찮았어요.

이 책 읽느라고 한밤 중의 고속 버스 컴컴한 속에서 혼자 좌석 위의 작은 자리등 켜고 두시간을 버텼다. 아무나 못 쓰는 이야기를 쓴 이 작가에 대해 궁금해진다. 책 한권이 온통 주고 받은 이메일로 채워져 있을 뿐인데, 이 두 남녀는 끝까지 서로 한번 만나지도 않으면서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지루할 틈 없이 이야기를 끌고 나갈 수 있다니, 거기다가 이렇게 제대로 감동까지 주면서 말이다. 충격이 싫은 요즘, 이런 식으로 나를 감동시켜주는 책이 좋다.
사랑의 모습이 어디 한 두 가지이랴만은, 그럼에도 사람들은 의례 정해진 과정을 상상한다. 그런데 이 소설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 하지만 '이런 게 사랑이야'라는 확신이 들게 한다. 서로 만나지 않고서도 '한눈에 반한다'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글에 반하는 것이다. 글을 통해 느껴지는 대상에 반하게 되는 것이다. 우연히 시작된 메일 주고 받기를 통해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그 관심이 갈수록 커져 간다. 그리고 상대방이 나에게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 알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 과장이나 허위, 포장이 들어가지 않고 서로에게 끝까지 진실하려고 노력한다. 내 마음 밑바닥 까지 보여주기 까지 솔직함을 잃지 않는다. 이런 게 사랑 아닌가?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참으로 신선하다. 마치 김 수현의 TV드라마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고, 그만큼 번역자의 실력도 한 몫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건 대체 원문이 어떻길래 이렇게 해석을 했을까 궁금해질 정도로 우리 말 식의 자연스런 문장들이 꽤 눈에 띄었다.  '술이 떡이 됐군요!' 또는 '그렇게 도매금으로 싸잡아 악의적으로 갖다붙이는 남자 복수형에 나를 내맡길 수는 없어요...당신이 그러면 속상해요. 정말로!' 이런 표현들 말이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연결 또한 어색한 구석이 없었다.
작가에 대해서 잘 모르는지라 이름을 보건대 남자일 것 같지만, 그가 남자라도 놀랍고 여자라도 놀랍다. 다소 감정적이고 즉흥적이며 가끔 간접적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떠보려는 시도를 하는 여자쪽, 그에 비해 논리적이고 끝까지 어떤 한계를 지켜가면서 이성적인 결단을 하려하는 남자쪽, 양쪽의 심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듯 하기 때문이다.
서로 만나지 못하고 끝냈지만 (적어도 이 책에서는) 그들의 사랑은 그것으로 충분했다고 본다. 완전했다고 보고 싶다. 서로 얼굴 보며 만나면서도 이보다 진실성이 떨어지고 갈피를 못잡고 방황하는, 추한 모습을 더 많이 보여주는 관계도 얼마든지 많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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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30 09: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0-03-30 13:35   좋아요 0 | URL
이 책 읽다보니 우리도 만나면 안될 것 같아요. 푸하하~ 농담이고요, 읽을 땐 그 다음 진행이 궁금해서 금방 읽었는데 다 읽고도 자꾸 생각이 나면서 읽을 때 미처 생각하기 않았던 문제들을 자꾸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네요. 묘한 책이어요.

다락방 2010-03-30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hnine님께 별 다섯을 받았다니. 왜 제가 좋을까요 ㅠㅠ

제가 놀란것도 바로 말씀하신 그 부분이었어요. 작가가 남자이든 여자이든(남자입니다) 남녀사이의 감정의 기복, 남자의 마음을 떠보려고 하는 여자의 마음, 흔들리지 않으려고 중심을 잡는 남자의 마음을 대단히 잘 그려냈잖아요.
게다가 에미가 가끔 멍청한 소리를 할때(미아를 소개시켜준다거나!), 그것에 대해 후회를 할때, 그런 섬세한 감정들 까지도 정확하고 예리하게 표현을 하잖아요.

일전에 친구가 이 책을 읽고 작가가 공부를 많이 하고 아주 똑똑한것 같다는 얘기를 했는데, 네, 저도 작가가 이런쪽으로(남녀 심리라든가 언어라든가 하는쪽)공부를 한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똑똑하다고 생각했어요.

이 책을 읽는 두시간이 hnine님께도 '괜찮은' 시간이었군요. 전 아직도 가끔 이 책을 꺼내어 뒤적여보곤 한답니다.



게다가 결말은 완벽하지요?
:)

hnine 2010-03-30 13:38   좋아요 0 | URL
이 다음 후속작을 읽어야 할 것 같아요. 리뷰 올라온 것들을 보니 이 책 만큼 좋지는 않은 것 같지만 그래서 더 읽어야 할 것 같아요. 작가가 과연 어떻게 이야기를 이어나가나 궁금해서요.
이 책의 결말을 완벽하다고 하시는 다락방님은 어쩐지 저와 코드가 비슷하실 것 같기도 하네요 ^^

무스탕 2010-03-30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이 뛰어오실줄 알았어요 ^^

말씀대로 원작도 물론 좋았겠지만 번역자가 참 '감'이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제대로 느낌살려 옮겨주다니..

hnine 2010-03-30 13:40   좋아요 0 | URL
저기요 솔직히 이 책 읽는 동안 다락방님이 자꾸 떠올랐어요 (속닥속닥...^^)
예, 제가 원서를 본 것은 아니지만 번역본만 읽어도 매끄럽게 글과 글이 연결되어지는 그런 책들이 있지요. 이 책이 그랬어요. 어설픈 곳이 별로 눈에 안띄는 외국 소설, 흔치 않은데 말이지요.

구단씨 2010-03-30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제서야 이 책을 읽었습니다. 에미와 레오의 마지막, 다락방님 말씀처럼 완벽했는지.....흠....^^
너무나 공감가는 이야기에 소심녀 너무 낯설지만 덧글을 하나 남기려고....^^
바로 이 다음 이야기(후속편-일곱번째 파도)를 읽지 않고서는 그 시간을 견디기 힘들 것 같은 순간을 보냈답니다....

hnine 2010-03-30 13:42   좋아요 0 | URL
이 책의 결말이 맘에 안드는 독자도 분명히 있을거라고 안그래도 그 생각 했답니다. 그런데 저는, 제 상상력으로는 이보다 더 나았을 결말이 떠오르지 않아서요.
일곱번째 파도, 제목부터 또 궁금해서 아무래도 안 읽을 수 없을 것 같네요.

프레이야 2010-03-30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곱번째 파도,도 권해드리고 싶어요.^^

hnine 2010-03-30 18:32   좋아요 0 | URL
넵! 아무래도 읽게 될 것 같습니다 ^^